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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만을 보았다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이선민 옮김 / 문학테라피 / 2015년 3월
평점 :
행복하고 싶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의 삶은 늘 즐겁고 기뻤으면 좋겠다.
하지만 우리는 이 행복이라는 것이, 기쁨이라는 것이, 그리고 즐겁다는 것이 그리 쉽게 내 손안에 들어오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꾸준히 찾아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유로 <행복만을 보았다>에 대한 작은 기대감을 가져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개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갑자기 개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으로 한 사람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한 사람은 치유될 수 없는 아픔을 가지게 된다.
<행복만을 보았다>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가족의 이야기이다.
독자는 이 소설을 통해서 이런 질문을 남겨보게 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과연 사랑스럽고, 포근한 존재로만 기억되고 있는 것일까?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내달리는 행복이라는 종착역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된다.
가족의 이야기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좋은 이야기만 하려고 한다. 어느 누구보다 행복이 가득함을 강조하고 싶어 한다.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나의 행복이, 가족의 행복이 진행 중임을 은연중에 고백하고 싶어 한다.
가족을 이루고 있는 한 남자. 독자는 이 남자의 삶에서 암울함과 우울함, 그리고 너무나도 태연하게 이어지는 무심함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 남자의 어린 시절은 무덤덤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부모님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은 기억 속에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떠나 버린 엄마의 존재, 어느 날 세상과 작별한 동생의 부재, 그리고 남은 여동생의 아픔, 떠난 어머니를 잡지 못하는 아버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바라보는 남자.
성장하는데 있어서의 부모의 존재, 가정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키는가...
쉽게 말하자면 어릴 적의 상처가 사람을 전혀 다른 존재로 성장시킬 수 있음을 보게 된다.
남자는 모든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선택은 중요하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태어났고, 자기가 속한 가정의 모습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 어릴 적의 기억은 그가 어른이 되고 사랑을 하고 부모가 되고, 가정을 이루었을 때 또 다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모든 행복을 잡고 싶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의 손에 잡히지 않았던 그 행복, 늘 부족함을 느꼈던 그 행복을 말이다.
그런 그에게 가족이 생겼다. 아름다운 아내도 생겼고, 예쁜 아이들도 생겼다. 하지만 이 남자는 행복을 이어가는 방법에는 미숙하다. 자신의 곁을 떠나는 아내를 잡지 못 했다. 그리고 분노의 소리를 내뱉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그 자리에만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삶의 매뉴얼을 따라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냥 그 일이 터져 버렸다.
자신의 감정, 추스르지 못한 상처의 흠집이 결국 자신의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개 같은 사건이었고. 개 같은 아빠로 남아버렸다.
광기를 표출한 그런 남자로 남아버렸다.
어느 날 자신의 딸을 총으로 쏘아버린 아버지,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의 아빠가 쏜 총에 맞아 얼굴에 큰 상처가 남게 되어버린 딸.
사건은 일어났고, 아빠는 추방되고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딸 역시 자신의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
<행복만을 보았다>는 모두 3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와 2부의 화자는 한 남자이다. 한 남자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본다. 행복을 느낄 수 없었던 남자의 어린 시절, 그리고 아픔으로 남아있는 부모라는 존재, 남자의 이야기는 과거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아내를 만나고, 결국 아내가 떠나가고, 그리고 남아있는 아이들과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한다.
그리고 그는 광기에 휩싸인다. 사랑하는 딸에게 총을 겨누고, 총을 쏴버린다.
그가 열심히 살아왔던 인생의 기간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딸에게 총을 쏴버린 미친 아버지라는 존재만 남아있다. 그는 추방되고,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
결코 자신의 존재를 보이지 않으려는 마치 투명인간 같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3부의 화자는 딸이다. 아버지에게 총을 맞아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딸의 이야기이다. 오로지 증오와 상처만 남은 딸이다.
뻔한 줄거리임에도 이 책이 강하게 느껴지는 묘한 그 무엇이 있다.
단문의 전개, 과하지도 않게 표현되는 등장인물의 덤덤한 묘사,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똑같은 선 위에 놓고 들여다보는 작가의 견해는 다른 느낌으로 전해지는 인생의 이야기이다.
그렇다. 인생이란 참 어렵다. 결코 쉽게 다가오는 법도 없고, 결코 쉽게 얻어지는 법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다고 내 손으로 버리기에는 그 인생이라는 것이 참 묘한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인생이란 결국 힘겹더라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이라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누가 먼저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그런 소설이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흔히 말하는 대로 시간이 지나서였던, 누가 누구를 먼저 더 많이 사랑해서였던 그런 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꼬이는 것도 당연한 것이고, 풀어지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고 하고 싶다.
삶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닐까?
언젠가는 또 다른 모습의 삶으로 나의 인생에 하나로 남지 않을까?
나의 인생을 어떨 것이라는 단정을 지을 수 없고, 이렇게 나아갈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다.
<행복만을 보았다>를 읽으면서 인생에 대해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지 않는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본다. 지금의 노력이면 행복이 당연히 내 손안에 떨어질 것이라는, 또는 누구보다 내 행복이 우선적으로 나에게 다가올 것이라는 착각을 가지고 있던 것 아닐까라는 답도 내려본다.
어찌 보면 진부한 가족의 이야기, 상처의 이야기이겠지만, 결코 이 소설이 가볍게 여져지지 않는 점은 모든 사람을 인생이라는 선에 나란히 두고 동시다발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소설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사람들이 안고 있는 상처를 들여다본다면, 결코 실패한 인생은 없고, 그들의 삶이 결코 부족하다고 말할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
비록 그것이 작더라도, 비록 그것이 볼품없더라고, 그 시간, 그 장소에서의 인생을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기억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