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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깨우는 한자 - 한자의 부와 획에 담긴 세상을 보는 혜안慧眼
안재윤.김고은 지음 / 어바웃어북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라.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삶을 살면서 늘 배워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하면 너무 틀에 박힌 말일까요?
하지만 살다 보면 어린 사람에게도 배워야 할 것이 있고, 나와는 다른 분야의 일에서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늘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겠죠.
삶에서 배우기도 하지만 대부분 글에서, 인생을 배우게 됩니다.
특히 옛글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익혀야 하는가를 익히게 해줍니다.
하지만 옛글은 한자어라 어렵죠.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학생 때 배웠던 한자만으로도 어른이 되어 간혹 접하는 한자를 충분히 익힐 수 있는 일이지만, 간혹 익히는 한자를 통해 또 깊은 지혜를 얻을 때의 느낌은 묘한 성취감을 주기도 합니다.
한자라는 것이 하나를 알면 그 속에 담긴 뜻을 알고 싶고, 글자를 알면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도 합니다.
<아침을 깨우는 한자>는 바로 그런 글에 대한, 옛글에 대한, 한자와 한문에 대한 독자의 갑갑함을 시원스레 풀어주는 책입니다.
굳이 어려운 옛글을 접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만, 더구나 옛글에 대한 해석은 독자가 책 옆에 옥편을 놓고 해석하면 될텐데라고 생각도 해봅니다만 그 뜻을 앞뒤로 맞춰 잘 해석하고 번역한 글이 독자들에게 더 쉽게 각인되지 않을까요?
머리글의 일부입니다.
松下問童子(송하문동자)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에게 물으니
言師採藥去(언사채약거) 선생님은 약 캐러 가셨다 하네
只在此山中(지재차산중) 이 산속에 계시긴 하나
雲深不知處(운심부지처) 구름이 깊어 계신 곳을 알 수 없다네
화자가 은자를 찾아가지만 만나지 못합니다. 만나지 못한 것이든, 만나주지 않는 것이든 은자는 만나기 어렵고 그것을 알기 때문에 화자는 은자를 기를 쓰고 찾는 것이죠. 은자는 동자를 내세웁니다.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동자는 스승이 깊은 산 속에 있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불퉁한 답만 내놓고 동자는 화자의 관심은 아랑곳없이 자기 할 일만 합니다.
옛글을 탐함은 은자를 찾아가는 것과 같다 합니다.
옛글을 탐함은 구름 깊은 산 속에서 약을 캐는 것과 같다 합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문을 풀어 이해하는 것은 은자를 찾아가는 것과 같다. 한자 몇 자 알았다고 대번에 깨달음이 오는 게 아니다. 한문 표현 몇 개 알았다고 문리가 트는 것도 아니다.'라고 독자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저 아침마다 한두 문장씩 옛글을 한문으로 풀어 익히다 보면 책 끝머리에서 한자에 담긴 삶의 이치를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면서 독자들을 옛글의 깊이로 이끌고 있습니다.
<아침을 깨우는 한자>를 통해 글의 깊이를 알고 싶은 독자나, 인생의 깊이를 알고 싶은 독자, 좀 가볍게 여긴다면 한자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아주 적합하게 익힐 수 있습니다.
옛글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매한 인생에 많은 현답을 주고 있습니다.
탐욕을 이겨야 하고,
잘못을 부끄러워하며 반성하고,
끝없이 배우고 노력하는 마음을 지니고,
믿음으로 세상과 소통을 하고 배려와 용서의 온기를 채워가는 것,
그리고 안목을 밝히는 지혜를 배우려고 하고
기다림의 미덕을 일깨울 수 있는 삶의 혜안을 <아침을 깨우는 한자>가 독자들에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옛 글을 다룬다고 해서 어렵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살면서 늘 접하는 옛글에 대한 이야기를 풀이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전하고 있는 책이 바로 <아침을 깨우는 한자>입니다.
세상에 맞서 당당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자기 자신에게 당당해야 합니다.
堂堂(당당)은 '떳떳하다, 씩씩하다'입니다.
堂(당)은 尙(상)+土(토)이다.
尙(상)은 위쪽에 창문을 내 집으로 '높다'를 뜻한다. 여기서는 발음 기호 역할도 하고 있다.
土(토)는 '흙, 땅'이다. 집을 짓기 위해 다진 땅, 즉 터이다.
堂(당)은 '높이 지은 집'이다. 높직한 터 위에 우람하게 지은 집은 겉보기에 당당하고 번듯하다.
堂(당)이 들어간 건축물은 위용이 당당하다.
국회의사당, 예술의 전당이 대표격이다.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몸을 던집니다.
바로 知己(지기)라는 말이 이에 속합니다. 知己(지기)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입니다. 知(지)는 '알다' 己(기)는 '나'이므로 知己(지기)는 '나를 알아주다, 나를 인정해 주다'라는 말입니다.
知(지)는 矢(시)+口(구)다.
矢(시)는 화살이다. 예전에는 '화살'이 제일 빠른 것이었다. 口(구)는 입이다.
味(맛 미), 呑(삼킬 탄), 吐(토할 토)에서는 먹는 입이고,
告(알릴 고), 問(물을 문), 鳴(울 명)에서는 말하거나 소리 내는 입이다.
口(구)는 兄(형 형), 命(목숨 명), 君(임금 군)에서처럼 명령과 권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을 알아보고 사물을 헤아리는 일이 남달리 빠르고 깊다. 슬기있는 사람은 입을 한번 열면 물 흐르듯 거침없이 쏟아 낸다.
知(지)는 빠른 화살인 矢(시)와 말하는 입인 口(구)를 합쳐 '지혜, 지식, 앎'을 나타낸 것이다.
知(지)가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됨됨이를 잘 알고 사물의 이치를 잘 파악한다.
<아침을 깨우는 한자>는 어설프게 알았던 삶의 지혜를 확고하게 다져주는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저렇게 앎을 챙겼다 하더라도 그 깊이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독자들에게 제대로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이들 때문에 망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끄러운 행동을 하고도 너무나 당당하게 활개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제 잘못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고치기를 힘쓴다고 합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부끄러움을 인정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無 羞惡之心, 非人也.(무 수오지심 비인야)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맹자>
無(무)는 '없다'다.
羞(수)는 '자신이 한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惡(오)는 '남이 행한 나쁜 짓을 미워하는 것'이다.
心(심)은 '마음'이다.
羞惡之心(수오지심)은 '자기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이다.
非(비)는 '아니다'다.
人(인)은 '사람'이다.
也(야)는 '단정'하는 어감을 준다.
非人也(비인야)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단정하듯 말하는 것이다.
나쁜 짓이나 못된 짓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함은 인지상정이다. 못된 짓을 한 사람을 보고도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다. 자기가 나쁜 짓을 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면 그 또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은 잠시 놓아두고 자기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에 주목해 보자.
길을 걸으면서 담뱃재와 담배 연기를 바람에 날리는 짓을 부끄러워하고, 자동차로 사람 길을 가로막는 짓을 부끄러워하고, 길바닥에 침 뱉는 짓을 부끄러워하고, 출입문 한가운데에 버젓이 서 있는 짓을 부끄러워하고, 지하철에서 다리를 옆으로 쫙 벌리고 앉아 있는 짓을 부끄러워하자.
옛글을 배우는 까닭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현대사회라는 이유로 옛것은 그저 과거의 시간이라는 틀에만 넣어두고 그 속에 담긴 인생의 참된 의미를 잊혀가게 하고 있다면 잠시 접어두고 옛글을 차분하게 읽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정신없이 하루를 시작하기보다는 잠시의 짬을 <아침을 깨우는 한자>의 일독을 권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TV를 통해 뉴스를 보는 시간을 조금 할애하고, 늦잠 자는 시간을 조금 줄여보고, 통근길에 멍한 차장을 바라보기보다는 한 장의 옛글을 읽어보길 권합니다.
혼탁한 아침을 보다는 차분함을 얻게 되는 한자어 한마디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도 새로운 學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