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나는 지미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던 열세 살부터 알고 지냈다. 그때 프랭크는 틈틈이 지미에게 - P97

오늘 밤 지미와 니나는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다. 나는 두 사람이 함께해서 마음이 놓였다. 레오를 돌봐주기 시작한 뒤로 저녁에 프랭크와 대화할 때마다 긴장이 감돌았기 때문이다. - P98

"오늘 저녁엔 우리가 들러리 노릇을 할 것 같은데." 지미가 프랭크에게 말했다.
"언제는 안 그랬어?" 프랭크가 말했다.
"베스, 새로운 일은 어떤지 얘기해 줘요." 식탁에 앉자 니나가말했다.
나는 언제나 어려운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사람이었다. - P100

니나가 식탁에서 일어나더니 지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니나가 무릎을 굽히는 그 순간, 우리 모두 깨달았다. 지미는 프랭크를 보았다. ‘이게 진짜라고?‘ 하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 지미의 얼굴은 당황스러움에서 경이로움으로 바뀌었다.
"지미 존슨, 내 하나뿐인 사랑, 나와 결혼해 주겠어? 네가 청혼하기를 기다렸다가는 노처녀가 될 것 같은데." - P102

"그럼 결혼식은? 여기서 하자" 내가 말했다.
"이런 결혼식 생각을 못 했어요." 니나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모든 사람을 초대할 거예요. 마을 사람 전부 다. 이제 파티를열 때가 됐다고요." 지미가 말했다.
블레이클리 목장에서 열리는 결혼식이라는 콘셉트에 우리 모두 흥분에 휩싸였다. - P103

과거


나는 메도랜즈에서 열리는 만찬 모임에 갈 준비를 마치고 어머니의 침실에 있었다. 언니 엘리너도 같이 있었는데, 언니는 어머니 침대에 늘어져 패션에 대한 조언과 울프 가족에 대한 비아냥을 쏟아내고 있었다. - P104

내가 도착했을 때쯤 만찬 모임은 한껏 무르익었다.
"왔구나, 우리 베스" 다이닝룸에 들어선 나를 보자 테사가 말했다. 그곳에는 게이브리얼, 그의 부모, 미국에서 온 친구들 몇 명이 모여 있었다. - P105

나는 오늘 저녁을 위해 차려입었다고 생각했지만 루이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루이자는 끈 없는 검정 새틴 드레스를 입고 어여쁜 목에는 딱 달라붙는 진주 목걸이를 둘렀으며 과감하게 가슴골을 드러낸 채 이 가족 파티에 등장했다. - P106

리처드는 새로운 총리 앤서니 이든Anthony Eden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처칠이 떠나서 슬픈지 묻는 등 나를 어른처럼 대했다.
나는 부모님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읊었다. 한때 처칠이 훌륭한 정치인이기는 했으나 이제 은퇴해야 할 때이고 이든은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부모님은 보수당 지지자였으나 그 이야기는 혼자만 간직하기로 했다. - P107

약간의 추궁 끝에 스콧 가족에 대한 정보를 일부 짜맞출 수있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 할리우드 힐스Hollywood Hills에 살았다. - P108

"앨프리드 히치콕과 아는 사이세요?" 유명인 때문에 들뜬 목소리였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음, 남들만큼은 알지. 그 사람은 혼자 틀어박혀 지내는 성격이라." - P108

게이브리얼은 그런 사람이었다. 부모님과 여자 친구를 비롯해아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할리우드 제작자에게 자기 아이디어를 발표하라고 요청받는다면, 나는 떨려서 그대로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게이브리얼은 정반대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며 할말을 정리했고 우리는 기다렸다. - P109

게이브리얼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테사가 끼어들었다. (중략). 테사는 나를 바라보았다. 의도가 뻔했다. "베스, 솔직하게 대답해 보렴. 좋은 조건으로 결혼할 기회가 생겨도 거절할 거니?" - P109

"좋은 조건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뭔데요?" 나는 답을 피하며 되물었다. "그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를 것 같은데요."
‘테사, 예를 들자면 당신의 결혼은 내가 본 그 어떤 결혼보다 문제가 많고 망가져 있는걸요.‘ - P110

나는 화가 나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남자들은 성적 능력이나 침대 기둥에 새긴 ‘정복한 상대‘의 수를 과시해도 끊임없이 칭송받는다. 반면 여자들은 감히 똑같이 했다가는 조롱당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조롱을 퍼붓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여자들이다. - P112

1968년

(전략).
게이브리얼의 말에 따르면, 그가 레오의 양육권을 임시로 갖게 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내 스스로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것에 대해 죄책감을 심하게 느껴서 레오에게 선택권을 주었기때문이었다. - P113

"아줌마는 내 편을 들어줄 줄 알았어요."
레오는 평소답지 않았다. 날 선 목소리에서 불안이 느껴졌다.
목멘 소리를 하는 걸 보니 눈물을 참고 있는 듯했다.
"난 네 편이야. 완전히 그리고 네 엄마도 그럴 거야. 내가 하고싶은 말은 이것뿐이야." - P115

잠시 후, 레오는 게이브리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중략).
"제법인데." 게이브리얼은 레오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그래, 우리 시골 소년이 아빠 모르게 또 뭘 배웠을까?" - P116

하지만 잠시 후 나를 바라본 게이브리얼의 눈동자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왜 이러는 거야? 왜 레오에게 죽은 네 아이 이야기를 하는 거야?‘ - P117

과거

여름이 저물자 헴스턴은 계절의 변화에 맞춰 모습을 바꾸었다. (중략).
처음에 그는 끊임없이 편지를 썼다. 그리움으로 불타고 시처럼 읽히는 편지였다. 그러다가 학기가 진행되고 대학 생활에 점점 몰두하게 되자 편지가 달라졌다. 열정은 사라졌고 다급하게, 더 안 좋게는 의무감에 쓴 느낌이었다. - P117

나는 11월에 있을 세인트 앤스 면접을 준비하느라 파티 초대를 거절했고, 눈이 아파서 책을 덮을 수밖에 없을 때까지 밤낮으로 공부했다.
"너무 무리하는구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며 같이 산책을 나가 맑은 공기를 마시며 기분 전환을 하자고 구슬렸다. - P118

(전략).
우리는 방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옷을 찢을 기세로 벗기 시작했다. 알몸으로 게이브리얼의 침대에 누워 오랜만에 그의 살이내 살에 닿는 느낌을 만끽했다. - P119

"너한테 옥스퍼드를 보여줘야겠어." 몇 시간 뒤, 여전히 침대에누운 채 게이브리얼이 말했다.
(중략).
"누구 생일 파티?"
"토머스 니컬스, 톰이라고 있어. 2학년이야."
게이브리얼은 약간 망설였다.  - P120

처음 파티에 갔을 때는 짜릿하고 흥분됐다. 톰과 루이자는 학생 둘이 살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큰 집에서 함께 지냈는데, 사방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 P121

나는 전형적인 부잣집 여자들처럼 니트 카디건과 스웨터 세트를 입고 여러 겹의 진주 목걸이를 한 글로리아, 클라우디아, 이머전을 보며 미소 지었다.  - P122

나는 이 질문이 지긋지긋했고 나 자신도 너무 지긋지긋했다.
사실 면접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 P124

나는 가까스로 미소 지었다. "게이브리얼이 자기 글에 워낙 비밀스러워서 사실 우리 둘 다 그래."
"혹시 내 얘기 중?"
게이브리얼이 와서 우리 사이에 서며 미소 지었다.
그를 보자마자 루이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 P124

"베스에게 네 멋진 소설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이야 루이자는 이렇게 말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루이자를 보고 있지 않았다. 게이브리얼을, 볼이 빨개진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불편해 보였다. - P125

버스 내 눈에 보이는 네 모습이 네게도 보이면 좋을 텐데, 넌 파티장에 있던 수많은 여자애들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이야" - P126

1968년

(전략).
"서른 번째 생일은 평생 한 번이잖아." 프랭크는 이렇게 말하며 호텔 앞에 차를 세웠다.
우리는 호텔의 모든 것에 흥분했다.
(중략).
"돈 걱정은 하지 말랬잖아. 한 번도 안 쓴 오래된 트레일러를 팔아서 여유 자금이 좀 생겼어. 이제 다른 말은 하지 않기로 약속해." - P127

저녁 식사 때는 식탁 위로 손을 맞잡고 근엄한 웨이터가 추천한 비싼 와인을 마셨다. 둘 다 주눅이 들어서 더 싼 와인을 추천해 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아무렴 어때? 당신 생일인데." 프랭크가 와인 잔을 부딪치며말했다. - P129

비싼 와인을 순식간에 마셔버리자 웨이터가 한 병 더 마시겠느냐고 물었고, 프랭크는 좋다고 대답했다.
"언제 이런 걸 해보겠어? 아내와 함께 취하니까 좋은데"
두 번째 병은 실수였던 것 같다. - P130

우리는 바비가 죽던 날에 후회스러운 일이 너무도 많았다. 그 일들을 제대로 했더라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 P131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는 괜찮아질까? 우리 둘 다 잃어버린 아이 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않을 때가 올까? - P131

과거

(전략). "널 두고 가야 하다니 고문이 따로 없네. 확실한 건, 수업 시간 60분 동안 가웨인을 생각할 틈이 없겠는데."
"빠지면 안 돼? 이번 한 번만?"
게이브리얼은 손 글씨가 빼곡한 큰 종이를 몇 장 꺼내 보였다.
"안타깝게도 이번 주에 제출해야 할 과제가 있어. 오래 안 걸릴거야." - P133

그때 초록색 공책이 눈에 들어왔고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뻗었다 펼치려는 찰나 내가 뭘 보게 될지 퍼뜩 떠올랐다. 이건 게이브리얼이 쓴 소설인 것 같았다. - P134

하지만 공책을 펼치자마자 소설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게이브리엘의 일기였다 - P134

나는 얼른 공책을 덮었다. 다른 사람의 일기를 읽는 것은 최악의 기만행위이자 아주 저급하고 추악한 짓이었다. - P135

파티에서 본 루이자가 게이브리얼이 우리 쪽으로 왔을때 기뻐하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중략). 그리고 게이브리얼의 얼굴이 빨개전 것도 똑똑히 보았다. 배신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겠지.
나는 그날 일기를 다시 읽었다. 이제 단어 하나하나가 반박의 여지가 없는 증거로 보였다. - P136

나는 원래 내 옷을 서둘러 입고 기분 나쁜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중략).

게이브리얼, 다 끝났어.
더 이상 널 안 볼 거야.
이유는 네가 잘 알겠지.
베스가 - P137

그리고 잠시 후, 게이브리얼이 정신없이 역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나를 찾아낸 그가 물었다. - P138

"차라리 다행이야. 사실대로 말할 배짱 같은 건 없을 테니까도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우리 둘을 농락할 셈이야? 네 어머니가 너에 대해 경고했지. 넌 사람들을 이용하고 싫증 나면 다음 사람으로 갈아탄다고. 네가 옥스퍼드에 가자마자 날 싫증 낼 거라고 그 말을 귀담아들을 걸 그랬어."
나는 최악의 말을 내뱉고 말았다.
게이브리얼의 분노가 다른 무언가로 바뀌었다. - P138

"가야 하잖아" 게이브리얼은 계속 나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
‘네 말이 맞아. 우린 끝났어" - P139

2.바비


과거

바비는 폭풍우가 한창이던 어느 날, 주방 바닥에서 태어났다. 하루 종일 바람이 집 창문을 어찌나 거세게 흔들던지, 가끔은 창문이 날아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 P142

옥스퍼드 입학 제안을 거절하고서 몹시 속상했다. 특히 그 일로 어머니가 무척 실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게이브리얼과 루이자와 같은 동네에서 2년을 보내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그렇게 할수는 없었다. - P143

사람들은 내가 게이브리얼과 헤어지고 프랭크와의 연애로 자연스럽게 넘어가서 놀랐을 테지만, 그 놀라움을 굳이 표현하지는 않았다. - P144

1968년


니나의 아버지는 컴퍼스 인에서 술을 무료로 대접하며 두 사람의 약혼 파티를 열고 싶다고 고집했다. 나는 금요일 밤에 공짜 술을 주면 잘해봤자 사람이 몰려들어 소란을 피울 테고 최악이면 싸움이 나서 쑥대밭이 될 수 있다고 말할까 했지만, 술집 주인이니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 P150

나는 그의 체격을 견디지 못하고 곧 부서질 것 같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올라가서 쉽게 균형을 잡고 숟가락으로 잔을 두드리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결혼식은 블레이클리 목장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 P151

지미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헬렌과 나는우리끼리만 통하는 눈빛과 절반쯤 잘린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프랭크는?" 헬렌의 말에 우리는 한 발 떨어진 곳에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는 프랭크를 바라보았다.
"좋아. 우리 둘 다." 내가 말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실이었다. - P153

다들 파티에 열이 올라, 동네 경찰관 앤디 모리스가 한 손으로 지미의 등을 받치고 일으킬 때까지 그가 얼마나 취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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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나는 결심했지. 그토록 내가 숨겨왔던 것을기록하기로 타인이 기대하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구, 나를 결코 가만 놔두지 않고 매춘이라는 극단적인 지경으로까지 내몬 유혹에의 욕구 뒤에 숨겨진 그 무엇을 급기야는털어놓기로 하여 내가 글을 쓸 때마다 누군가의 환심을 살 필요성이 불거져나온다면, 그건 그 이면에 있는 것을 말들로 치장해야만 한다는 걸 의미하며, 굳이 멋진 글이 되고싶어서가 아니라 몇 마디 말만 덧붙이면 남들이 읽기에도충분한 글이 되겠기에 그런 것이지, 결국 내가끝장냈어야할 그것은 글을 쓰면서 오히려 더더욱 힘을 얻어갔고, 매듭이 풀렸어야 할 것들이 갈수록 더 꼬이고 조여져서 마침내 온통 매듭 천지가 되어버려 그 매듭으로부터 내 글쓰기의 고갈되지 않을 광적인 원료가 살아남으려는 나의 투쟁이생겨나게 된 것이지."
이 책의 지독하리만치 내밀한 부피는 바로 그런 데서 연유한다. - P-1

나는 말할 때 남들한테 들어달라는 식으로 말하는 습관이배어 있지 못해, 그래서 내가 말하는 걸 중간에 끊을 방도가없는데, (중략), 그렇게 내가 자라난바로 그 광신적인 가톨릭 마을엔 신부들의 구마술(驅魔術)요법으로 치료받고자 각지에서 몰려든 정신분열증 환자들로 넘쳐났지만, (중략), 이따위 얘기들을 줄줄이 늘어놓는다면 당신인들 어찌 질겁하지 않을 수 있을까? - P10

(전략), 그때까지 나를 규정해온 모든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그리고 공부를 계속하는 것과 작가가 되길 원하는 것, 장래에 희망을 두는 것과 자기 자신을 여기저기 함부로 탕진하는 것, (중략), 나 자신을 창녀로 만들었다는 얘기를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주워섬긴다면? - P10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내겐 너무 많은 수녀들, 즉 알량한 세례명들로 축소되어버린 영적인 어머니들만 득실거렸던게 아닌지, (후략). - P12

기억이 나, 이불 속에 있던 그녀의 몸과 동그랗게 웅크린고양이처럼 베개 위에 반쯤만 내밀고 있던 그녀의 머리, 그나마 그녀의 잔해마저 서서히 평평해지면, 거기 그녀가 있다는 걸 말해주는 건 머리카락 몇 올뿐, 그것만이 그녀의 존재와 그녀를 덮은 이불을 구분해주는 전부였지, (후략). - P13

그리고 또 전혀 잠은 안자고 하느님만 믿는 우리 아버지.
사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하느님을 믿는 일뿐이었어, (중략),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항상 떠벌리길 제3세계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며 죽어가는 이때 이처럼 손쉽게 기름지게 사는 게 부끄럽지도 않냐며 무슨 뉴스라도 되듯 사람들 흉을 봐대는 일뿐이었다구, (후략). - P14

그리고 또 내게는 자매가 한 명 있었지, 내가 태어나기 일년 전에 죽었기 때문에 나로선 전혀 알지 못하는 언니였어, 이름은 신시아였고 너무 어린 나이로 죽는 바람에 이렇다 할 개성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지, (중략), 나로선 그렇게 결론내릴 수밖에없는 게, 그녀의 죽음 때문에 내가 태어난 거거든, 그런데 말이야 자식을 하나밖에 갖지 않겠다던 부모님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우리 두 자매가 모두 살아남았다면, 나는 분명 언니를 빼다 박았을 거야, (후략). - P17

그리고 내 인생이 있었어, 이상 모든 것, 어머니나 아버지혹은 언니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나만의 인생 말이야, (중략), 요즘 사람들은 자동차든 종교든 그저 장식으로만 치부하기에 십자가상도 단지 미적인 용도로 지니고 다닌다는 거지, (중략), 나로 말하자면 죽은 몸뚱어리 하나를 어떻게 신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 그것부터가 아직까지 이해 불가능이지만 말이야. - P19

아버지는 창녀와 동성애자, 부자와 유명인사 등등, 비난받을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곳이라며 틈만 나면 대도시에 대한 자신의 혐오감을 토로하셨지, (중략), 그리고 대학 건물의 별관들 역시 어떻게 섹스숍 같은 곳과 마주 볼 수 있느냐, 세상에 교육과 매춘 사이의 간격이 그토록 가깝다면 다들 어디로 발길을 향하겠느냐며 야단이셨어, (중략), 섹스노동자란 용어 정말 기발하지 않아, 그 말 속에선 세상에 가장 오래 된 직업, 가장 유서 깊은 사회적 기능에 대한 존중의 예(禮)가 느껴져, (중략), 하긴 어느 학문 이론인들 그만한 쾌락 앞에서 배겨나겠어? (중략), 드디어 나로 하여금 내 터전을 박차고 나가게 만든 계기가 나서주었고 나는 황홀한 기분으로 그에 응했어.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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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 재생을 걸어 놓은 플레이리스트처럼, 똑같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거듭됐다. 나는 속으로 화를 내다가, 후회하다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다가, 다른 방향으로 후회하다가. 이것도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다가, 부끄러워하다가,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다가,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하다가, 화를 내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는 낮 열두 시였다. - P123

. 대화는 예상할 만한 이야기들로 시작됐다. 승윤이 어제 나랑 싸우고 들어왔다고, 이정엽 사장님은 "애들끼리 싸우면서 크는 거지." 정도의 입장인 반면 어머니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고, 숨은 사정이 있는 듯해서 연락했다고 했다. - P124

나는 승윤이 내게 결정권을 넘겨주었다는 사실, 최소한의 선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 P124

어른들이 말하기를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자란다고들 한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있다. 어른들이 옳을 거다. (중략). 그 둘을 이 시점에 분간할 방법은 없고, 그렇다면 지금의 내게 필요한 건 시간이다. - P125

6


이정엽 사장님을 만나게 되는 일은 없었다. 승윤에게 내뱉은 말 때문에, 사모님 앞에서 낯을 붉혀야 하는 상황 역시 피했다. - P126

어디에도 가지 않게 된 토요일에, 나는 2학년 1학기 문학 조별과제 자료를 뒤적거리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말리의 일곱 개의 달』을 소개하는 PPT였다. - P126

물론 딴짓을 한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서『말리의 일곱 개의 달』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수능이 네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잘하는 짓이다. 집중이 하나도 안 됐다. - P127

솔직히 말하면 나는 광주나 제주에 연고도 없는 애들이 한강의 작품에 나오는 5·18 민주화 운동이나 4.3 사건을 어떻게 자기 역사로 받아들이는지, 그게 정말인지가 항상 의아했다. 아니, 비단 근현대사뿐만이 아니다. 역사 전체가 그렇다. - P127

그러니까 나한테는 다른 사람들이 과거를 자기 세상의 일부로여기는 감각이 미스터리였던 거다. 보통 애들은 숨 쉬듯이 그 일을 하는데,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 P128

이런 젠장. 모두 헛생각이다.
나는 싹 관두고 스터디 카페에 가서 공부했다. 방학 내내 그랬다. - P128

삼거리 앞 공원에서 요한을 마주친 건 개학식 전날이었다. - P129

"방해하려던 거 아니니까 하던 거 계속 해라."
"응, 아니...... 나 원래 연속으로 네 개까지만 해. 다섯 개부터는 아직 안 돼."
"그래도 많이 늘었네."
승윤이 갑자기 요한을 붙잡고 턱걸이 강습을 시킨게 작년 말이었으니 그로부터 반 년이 지났다 - P129

요한에게는 오늘 날씨나 점심 메뉴를 읊는 것과 똑같은 어조로, 위로가 필요한 종류의 문제를 태연하게 읊으면서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 P130

"그거 나 때문일걸. 롤 하다가 싸웠거든. 서로 손절했어."
대뜸 이런 말을 꺼내는 게 현명한 판단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멍청한 짓을 너무 많이 한 상태였다. - P131

"둘이 언제 한번 싸울 거 같긴 했어서……………."
"승윤이 형이 너랑 게임할 때는 난리 안쳤냐."
"그냥...... 평소랑 비슷해. 그런데 롤 할 때는 살짝 심하긴 해."
"지랄한다는 뜻이네." - P131

"줄타기를 잘해야지. 선을 반드시 넘어야 할 때만 딱 넘고, 아닐 때는 사리고."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나도 잘 모른다. 모르니까 맨날 싸우고 혼자 다니는 거지."
요한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 P133

요한은 영어 성적 이야기를 꺼냈다. 영어는 녀석이 만점을 노릴 수 있는 유일한 과목이었고, 얼마 없는 자부심이기도 했다.  - P134

"나는 내가 필리핀에서만 지냈으면 완전히 달랐을 거라고 생각해. 거기서는 이런 일이 없었거든. 예전엔 나도 공부 잘했어. 반에서 1등 한 적도 있고 친구도 많았어. 거기서는 내가 승윤이 형 포지션이었어. 진짜야. 그래서 더 돌아가고 싶은 건데……. (후략)." - P135

나는 내가 다른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어땠을지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 P135

"예전에 내가 승윤이 형한테 고소 먹을 뻔했잖아."
예전에는 한국이 싫고 잘해 보라며 등만 떠미는 부모님도 싫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했다. 집에 틀어박혀 컴퓨터만 하는 동안 화나는 마음을 인터넷에 풀었다는 거였다.  - P136

속으로 오래도록 다듬어 온 고민 같아서, 듣는 나도 양심이 찔렸다. PC방 엘리베이터 앞에서 승윤의 어머니를 들먹인 일은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비열한 짓이었다. - P137

 이왕 기회가 닿았으니 요한에게 고해성사라도 해볼까?
하지만 승윤에게 사과하지 않는다면 자기 위안에 불과했고, 요한은 승윤의 집안 사정을 모를 거였다. - P137

‘예전에, 나 신경써준 거 알아. 고마워. 이거 진심이야."
요한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우물거렸다. - P138

"존엄이라든지 자존감 같은 거 있잖아. 위클래스 같은 데서는 싫은 건 싫다고 말해야 한다고, 자기 자신이 소중하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쉽게 말하지만 사실은 그게 전혀 아니라는 거 너도 알 거야. (후략)." - P139

"세상 분위기라는 게 바로 바뀌긴 어렵지. (중략).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무슨 일을 하든 자기 밥만 잘 벌어먹고 살면 부끄러울 거 하나 없다더라." - P140

 나는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뭐 준비하는 거야?"
(중략).
"사실 그게 좀 그래서…………."
"응? 혹시 범죄는 아니지?"
요한은 화들짝 놀라서 손사래 쳤다. - P141

따로 공부한다는 게, 기술이나 자격증이 아니라 타갈로그어였던 건가? - P142

"차라리 영어 부업을 찾아봐라. 너 영어는 잘하잖아."
"요새 간단한 번역은 인공 지능이 다 해 줘서, 부업이 하나도 없대. 프로 번역가들도 일감 끊기는 수준이라잖아. 하지만 인공 지능은 상하차를 대신해 줄 수 없죠. 최후의 승리자는 상하차다." - P143

예전에, 요한에게 가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해 주려고 했던적이 있었다. 그때도 녀석은 필리핀으로 돌아가기 위해 돈을 벌고 싶어 했고, 엄마는 오래 일할 주방 보조 한 명을 구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둘을 연결해 주면 딱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한은 길게 고민하지도 않고 거절했다. - P144

가게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진지한 토론에 착수했다. 주제는 이랬다. 공부를 못하고 전문 기술도 없는 사람이 일자리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생각에는 운전면허부터 따야 했다. - P144

집게차란 ‘너클 크레인(Knuckle Crane)‘ 차량의 별명인데, 거대한 인형 뽑기 기계 팔이 추가된 트럭이다. 기계 팔로 산업 폐기물과 대형 쓰레기 들을 그러모아서 트레일러에 담고, 처리장과 고물상을 오가는 게 집게차 기사들의 일이다. - P146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냥 말해 버렸다.
"승윤이 형한테 들었어. 그 형 아버지가 재활용 업체 운영하시잖아. 청죽면 쪽에 있는 거."
"어, 잠깐만, 나이스 타이밍. 저번부터 궁금했는데 김주현 얼굴 보기가 하도 어려워서, 이제 겨우 물어보네 둘이 싸웠지?"
"알고 있었네?" - P146

"생각해 보니 지금 타이밍이 되게 절묘하네. 안 그래도 거기 배달 가는 중이었는데."
"거기? 거기가 어딘데?"
"청죽면에 있는 그거. 사람들이 여기서 많이 주문하는데, 몰랐어? 배달 가면 가끔 사장님 계시는데, 내 얼굴도 아셔. 저번엔 승윤이 친구 왔냐고 하시더라."
놀라우면서도 놀랍지 않은 소식이었다. - P147

애들인데 사장님도 좋게 봐 주시겠지.
고등학생의 비열한 점은, 자기 좋을 때는 어른이고 찔리는 구석이 있을 때는 애 행세를 할 수 있는 나이라는 거다. - P148

(전략).
그런 식으로 끝마치고 보니 기도라기보다는 다짐 같은 게 됐다.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제게 이정엽 사장님을 만나 뵐 용기와 승윤이 형에게 사과할 용기를 주십시오. 딱 제가 잘못한 부분까지만요. - P151

기도가 무색하게도 나는 고물상에 들어가지 못했다. 승윤 어머니께 전해 듣기로는 이정엽 사장님께서는 초지일관 "싸우면서 자라는 거지 뭐." 하는 태도를 고수하셨다는데, 그 호쾌함이 뜻밖의 불안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 P151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입장을 솔직히 밝혔을 때 승윤의 반응이 어떨지는 전혀 계산이 안 됐다.
"안 들어갈 거야?"
"어. 사장님 만나도 나왔다고는 하지 마." - P152

저 안에서는 아직도 누군가가 일하고 있는가 보다. 그 사람의 발밑에는 예전에 승윤이 자랑했던 그 먼지들이 내려앉아 있을까? 먼지처럼 곱게 갈린 금과 은과 구리가…………. 나는 마대자루 더미를 힐끔 봤고, 거기 담긴 고철들이 금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  - P153

"주현이, 오랜만이다!"
"아,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중략).
"그래, 그 부분은 잘 생각했다. 나한테 죄송할 게 아니라 싸운 녀석들끼리 화해를 해야지. 타라!" - P154

사장님은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말이다, 꿈이 돈보다 중요하다는 말은 안 해. 나부터가 돈만지고 사는 사람이고, 인간은 돈이 없으면 비루해지고 비겁해지기가 너무 쉽거든. (중략). 무슨 말인지 아나?" - P155

"그런데 꿈을 아예 버리고 돈만 쫓으면 말이야, 인간이 영 볼품이 없어져. 그래서 그거는 네가 균형을 잘 잡아야 하는 거야. (후략)." - P155

"셋이서 승윤이 얘기를 했구먼?"
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형이랑 싸운 건 제 잘못도 있긴 한데요......." - P156

나는 사장님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동남아 사람들의 성실성을 칭찬할 때 내심 언짢아졌던 순간을 기억했다. 추측건대 사장님은 여전히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테고, 연장 근무와 초과 근무가 요즘 사람들한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를터였다.  - P156

나는 그 사실에 감사했고, 사장님이 지금껏 베푼 호의에 다시금 고마워했지만, (중략).
승윤 생각이 났다. 나는 승윤과 진짜 결판을 내러 가고 있었다. - P157

"저번 일 관련해서 사과하러 왔어."
"사과하긴 뭘 사과해, 그때 이미 할 말 다 해 놓은 새끼가 지금도 별로 안 미안하지?"
"미안한 부분은 미안하고, 안 미안한 부분은 안 미안하고 그렇지."
"어, 바로 이런 태도, 미안한 부분은 뭔데?" - P157

"싸우다가 형 엄마 들먹인 거랑, 게임할 때 일부러 욕먹이게 플레이한 거. 그거 두 개. 그중에서도 특히 앞에 거.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
승윤은 나를 빤히 노려보기만 했다. 이런 식의 사과는 받고 싶지 않아서, 자신도 사과하지 않으려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미안하지 않은 걸 미안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 P158

"됐다, 인마. 나도 6월 모의고사 얘기는 화가 나서, 감정이 격해져서 툭 튀어나온 소리지 니가 진짜로 그걸 계산해서 들이받은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 넌 어차피 계산을 해도 실행할 능력이 안되는 놈 아니냐. (후략)." - P159

"여기서 딱 끝내고, 다 묻고, 쌤쌤인 셈 치자. 완전 리셋하는거야."
"어."
"그러면 수능 잘 쳐라."
"형도 수능 잘 쳐라." - P159

승윤은 내게 아직도 그 일을 기억하느냐고 물었지만, 사실은 승윤이야말로 더 오래 기억했을 것이다. 기억은 정말로 이상한 작업이다. 현재의 시선으로 과거를 곧장 바라보고, 거기에서 본 것들로 다시 미래를 만들어 나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 P160

아니, 나는 사장님처럼 나이 들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이 될까…………….
먼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아직 나라서, 그냥 집까지 쭉 달렸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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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레오는 트리 하우스에서 자동차 진입로를 올라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보자 손을 흔들고는 밧줄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레오를 다시 보자 전율이 흘렀다. - P59

언젠가 헬렌이 미용실에서 몰래 가져온 《보그》 잡지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사진 속 게이브리얼은 타자기 앞에 앉아 있었고 옆에는 위스키 잔이 놓여 있었다. (중략). 그는 독설가이자 애주가인 여성 등장인물들과 야하고 도발적인 성적 묘사로 용감한 작가라는 명성을얻었고, 때로는 내 눈물을 쏟아냈다. - P60

집안에 들어서자 추억이 밀려왔다. 현관에서 나는 냄새도 똑같았다. 사방에서 풍기던 왁스 광택제와 오래된 나무 냄새. 참나무 판자를 붙인 벽, 쪽마루를 깐 바닥, 내가 좋아한, 양말 신은 발로 밟으면 미끄러웠던 낡은 원형 계단 게이브리얼과 함께 아버지의 담배를 훔치러 가던 주방. 그곳에서 약간 떨어진 방에 게이브리얼이 있었다. - P60

"여보 우리 강아지 어디 있어? 오늘 오후에 데려온다고 하지 않았어?" 저녁을 먹으러 목장에서 돌아온 프랭크가 물었다.
"게이브리얼 아들에게 줬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프랭크는 말이 없었다.
"레오가 강아지 훈련하는 걸 도와주려고 그런 일이 다시 생기는 건 싫으니까." - P62

프랭크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베스, 그 애와 엮이지 마. 그 애는 우리 아들이 아니야. 그런다고 우리 아들이 돌아오지 않아.‘ 이런 말을 하고 싶겠지.
그 대신 프랭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울프와 그 아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걱정할 일일까?" - P63

재판


내가 일반 방청석에 자리 잡자 다들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중략).
이 이야기가 처음 알려졌을 때, 사진기자들이 우리 집을 찍으려고 목장에 몰래 들어왔다. (중략).
나는 우리가 구상해서 다듬고 매일 연습하며 완벽하게 만들려고 애쓴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하기를 바라면서.
진실을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쉬울까? - P64

과거


게이브리얼의 텐트 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른 우주에 들어간듯한 분위기였다. 더블 사이즈 매트리스에는 시트가 깔려 있고 담요가 놓여 있었다. - P65

그는 침대 옆에 펼쳐서 엎어놓은 소설책을 집어 들어 내게 보여주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편 『스완네 집쪽으로』였다.
"다음 학기 토론 수업에서 잘난 척하려고 고른 책인데 생각보다 괜찮더라. 꽤 재미있는 대목도 있고" - P66

그는 내 손을 잡았다.
"우리가 밤을 같이 보낸다고 해서 이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마."
"내가 원한다면?"
"그러면 이야기를 해봐야겠지."
"원해" - P67

우리는 천천히 서로를 향해 움직였고 곧 본능에 굴복하고 말았다. 계획된 게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좋았다. - P68

잠시 후, 나는 게이브리얼 쪽으로 몸을 살짝 움직였다.
"괜찮아? 아파? 그만할까?"
"게이브리얼? 부탁인데 입 좀 다물어."
"노력할게"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 P69

이건 러브 스토리였고 과거에 내가 꿈꿨던 그 어떤 이야기다 훨씬 좋았다. 내게 단 하나의 소원이 허락된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의 이야기가 해피엔드이기를 - P69

1968년


레오를 만나러 가는 첫날, 나는 프랭크와 지미와 함께 양들이 풀을 뜯는 들판에 나와 있었다. 우리는 암컷 양에게 먹이와 물을주고 새끼 양을 살펴보았고, 다음 주 경매에서 어떤 양이 먼저 팔릴지 이야기하며 목록을 수정했다. - P70

그는 내 옷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오늘 나는 평소에 입던 프랭*크의 낡은 비옐라 셔츠와 코듀로이 바지를 입지 않았고 무릎까지 오는 장화도 신지 않았다. 


* 양모와 면을 섞은 옷감 - P71

나는 문을 두드렸다. 한때 지금과 매우 다른 이유로 가슴 두근대며 이 자리에서 있었던 기억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 P72

"베스, 들어와 널 보면 아주 좋아할 사람이 있어."
때마침 레오가 강아지를 안고 현관으로 뛰어왔다.
"아직 이름 안 붙여줬어?" 내가 물었다.
"히어로예요." 레오가 대답했다. - P72

"벌써 가는 거 아니죠? 가야 해요?" 레오가 물었다.
레오가 별 뜻 없이 한 말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그 순간 아이의 외로움이 보였다. "그 전에, 트리 하우스 보여줄래?"
레오는 무척 기쁜 표정이었다.
트리 하우스 내부는 전혀 뜻밖의 모습이었다. - P74

"아빠가 여름에는 잘 거랬어요. 아빠는 야영을 좋아하거든요.
어릴 때 호숫가에서 야영했대요."
나는 가슴이 두근댔지만 애써 외면했다.
"언젠가 주말에 호수를 그린 적도 있어요. 그런 다음에 여기 올라와서 저녁을 먹고 촛불을 켜놓고 카드 게임을 했어요. 정말 최고였는데." - P74

"학교 가는 게 정말 싫어요." 레오는 갑자기 화난 표정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항상 혼나요. 선생님이 매일 교장 선생님한테 보내고요. 아니면 교실 밖에서 벌을 세워요." - P75

"아줌마 가기 전에 보드게임 한 판 할까?"
"좋아요." 레오는 밝은 표정으로 상자에 손을 뻗었다. - P75

과거


해가 쨍쨍 내리쬐는 8월의 어느 한 주 동안 게이브리얼의 부모님이 스코틀랜드 하일랜드로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들꿩 사냥하러 가시는 거야. 그래, 잔인하지. 하지만 그 덕에 우리가 뭘 누리게 되었는지 봐. 일주일 내내 이 집에서 마음대로 지낼 수 있다고" 게이브리얼이 말했다. - P76

이 집의 아름다움에 주눅 들지 않기란 힘들었다. - P76

응접실 피아노 위에 걸린 가족사진을 유심히 보았다. 1930년대에 결혼한 신부 테사 울프는 그 어떤 할리우드 스타보다 아름다웠다. (중략).
가장 마음에 든 사진은 게이브리얼의 사진이었다. 아홉 살쯤되어 보였는데, 반바지에 흰색 셔츠를 입고 다리를 꼬고 앉아서통통한 검은 래브라도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 P77

메도랜즈에 가는 날, 어머니가 의사에게 부탁한 페서리*를 내밀어서 깜짝 놀랐다. 게이브리얼과의 관계를 어머니와 이야기해본 적은 없었지만, 내가 호숫가에서 자고 오는 날이 많았기 때문에 눈치채신 게 분명했다.
"엄마는 괜찮아요?" 내가 물었다.
"둘이 진지해 보이는데. 게다가 남자들은 결혼하기 전에 여러연인을 만나잖니. 여자라고 안 될 게 있겠어?"


* 질 경부에 씌워 정자가 자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여성용 피임 도구. - P78

일주일 동안 우리는 한 사람처럼 지냈다. (중략).
우리는 신선한 식재료가 떨어져서 저장 식료품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점점 희한한 요리를 해서 먹었다. 통조림 햄을넣은 콩소메 수프, 너무 오래 익혀서 접착제처럼 끈적해진 쌀, 큰 통조림 완두콩을 곁들인 구운 감자 같은 것들이었다.  - P79

"우리가 뇌를 공유한 기분이야. 현실로 다시 돌아가면 어떻게 적응하지?" 게이브리얼이 말했다. - P79

우리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것도 와인에 취해 혀가 풀린 이런 밤이었다. 나는 게이브리얼을 만나기전에 나를 사랑한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아서 걱정된다고 털어놓았다. - P80

나는 적당한 말을 생각하느라 잠시 멈추었다. 그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어머니의 불륜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가 그 관계를 정리하고 게이브리얼과 아버지에게 분노와 원망을 표출했기 때문이었다. 이기적이고 모진 사람 같았다. - P81

"날 떠나지 않을 거지?" 함께 보낸 마지막 밤에 게이브리얼이 물었다. - P81

1968년

(전략). 바비가 죽고 나서 사람들은 명상을 권했고 도서관에서 불교나 고대 요가 수련에 관한 책을 빌려다 주기도 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정말이지, 몇 분 동안 심호흡한다고 내 고통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는건가?‘ 어디에서나 바비가 보여 고통에 몸부림치던 초반 몇 달동안에는 글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 P83

시골 사람들은 대부분 그랬다. 우리는 도시 사람들보다 예의를 중시하며 산다. 적어도 나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중략).
하지만 현관문을 열었을 때 게이브리얼이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 P84

게이브리얼은 그 사진을 유심히 보았다.
(중략).
"마감일이 다가오는데 일이 많이 밀려서, 매일 레오를 몇 시간정도 봐줄 사람이 필요해. 당연히 유급이고, 학교 끝나는 시간에 레오를 데려와서 내가 글 쓰는 동안 같이 뭔가를 해주면 돼. 혹시 해줄 수 있어?" - P85

게이브리얼의 말이 옳았다. 지난 몇 주 동안 나는 메도랜즈에서 점점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었다. 잘 웃고 재잘대고 호기심많은 레오와의 편안한 우정은 그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 P85

"네가 와준 덕분에 레오가 많이 달라졌어. 나도 그렇고. 네가 날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야. 어색하다는거 알아.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말은,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거야"
"친구잖아." - P86

"프랭크와 이야기해 볼게. 우린 모든 걸 의논해서 결정하거든."
"물론 그래야지. 고마워." - P87

저녁을 먹으며 프랭크와 나는 목장 일과 늘어나는 빚에 관해 이야기했다. 프랭크는 곧 은행에 가야 하는데 걱정된다고 했다. 소규모 목장은 수익이 나지 않았다.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고생스럽지만 목장을 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 P87

"게이브리얼이 방과 후에 레오를 봐달라고 부탁했어. 매일 두시간씩 가끔은 내가 메도랜즈로 가겠지만 난 레오를 우리 집으로 데려오고 싶어. 레오는 목장을 좋아해. 동물을 정말 좋아할거라고"
"안 돼, 베스."
프랭크의 표정이 달라졌다. 내가 싫어하는 표정이었다. - P88

"그 사람의 동정 따위는 필요 없어.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으면서도 그런 걸 고민하다니 놀라운데."
"동정이 아니라 일자리야, 내가 안 하면 다른 누군가가 하겠지.
하지만 난 할 거야. 그래, 돈 때문이야. 하지만 그 애를 위해서가더 큰 이유야 프랭크, 내게도 도움이 된다고."
"그건 위험한 일이야." 프랭크가 나지막이 말했다. - P89

과거

가까이에서 본 테사 울프는 정말 놀라웠다. - P89

게이브리얼의 말에 따르면 테사는 점점 술에 취하고 있었다.
"그냥 어머니 말이 전부 다 맞다고 하면 괜찮을 거야." 저녁 식사 자리에 도착한 내게 게이브리얼은 이렇게 말했다. - P90

음식을 내온 세라는 나보다 두 살이 더 많았고, 우리 둘 다 헴스턴 초등학교에 다녔다. 내가 소고기 조각을 먹는 동안 기다리는 세라를 보자 나 자신이 가짜처럼 느껴졌다. - P90

하지만 세라는 고개만 까딱하며 겨우 아는 체하고는 시선을 피했다.
"옥스퍼드에 지원했다면서? 잘됐구나 어느 칼리지에 지원했지?" 에드워드가 물었다.
(중략).
"사실 세인트 앤스는 평판이 아주 훌륭해. 물론 내가 다니던시절에는 옥스퍼드에 여학생이 하나도 없었지만, 게이브리얼이 정말 부러운데." 에드워드가 말했다. - P91

"부모님은 두 분 다 일하신다고? 어머니가 자식들이 어릴 때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걸 아쉬워하실 것 같구나."
(중략).
일종의 시험 같은 기분이 들었고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 P92

테사는 내 침묵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술잔을 채우고 다른 질문을 쏟아냈다. "게이브와 네 얘기를 해주렴. 그 애를 정말 사랑하니? 대답 안 해도 되겠네. 네 눈에 답이 다 있으니. 그리고 게이브도 널 아주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단다." - P92

나는 게이브리얼이 해준 어머니 이야기를 떠올리며 자신을 위로했다. 테사는 심술궂은 주정뱅이고 자기 인생이 마음에 들지않아서 게이브리얼의 인생에 집착한다고.
그리고 테사가 게이브리얼을 나만큼도 모른다는 사실도 알 수있었다. - P93

"그럼, 이제 저희는 호숫가로 가도 될까요?" 게이브리얼이 적당한 시점에 대화를 끊었다.
(중략).
"그 전에 설거지를 돕고 싶어요." 나는 주방에서 일하는 세라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호화로운 음식을 먹는 동안 시중세라 때문에 죄책감이 들고 당혹스러웠다. - P94

멀리 주방 한구석 싱크대 앞에 세라가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접시가 쌓여 있었다. 내가 들어갔는데도 세라는 돌아보지 않았다. - P94

테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속삭임보다 살짝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기 전에 한마디 할게. 분별 있게 피임은 잘하고 있겠지?"
나는 너무 소름 끼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테사를 보기만 했다. 주방 반대편에 있는 세라에게 이 말이 들릴 리 없었지만, 그럼에도 모멸감을 느꼈다. - P95

(전략).
게이브리얼은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저녁 식사잖아.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내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분노를 통제할 길이 없었다. "넌 이해 못 해. 하긴, 이해할 필요가 없겠지. 넌 그런 사람이니까."
"그게 무슨 뜻이야?" - P96

게이브리얼은 나를 꼭 안았다. (중략).
곧 눈물이 흐를 듯 눈이 반짝였다.
"사실 난 가끔 어머니가 무서워. 어머니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거든 그래도 내가 널 지켜야 했는데 날 용서해 줄래?"
우리는 키스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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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미


01
"히로미, 신경과에 한번 가 보는 게 어떻겠니?"
퇴근길에 들른 카페에서, 같은 기획사 도우미 아츠코가 한참 망설이던 끝에 그렇게 말했다. - P9

지난달부터 몸이 불편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밤에는 잠을 못 잤다. 숨쉬기도 힘들었다. 가슴이 찌릿찌릿 아플 때도 있었다.
원인은 잘 알고 있다. 누군가가 뒤를 밟기 때문이다. - P10

그 색골 놈 때문이야. 지가 뭔데 내 허리에 손을 둘러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데, 대각선 방향에서 께름칙한 시선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그러나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 P10

스토커를 담당하는 여경이 상대의 인상을 물었다.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원래 스토커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선을 느낍니다."
"어디서든 늘 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30분을 설명하자, 여경과 아츠코는 당혹스런 표정을지었다. 여경은, 상대를 목격한 다음에 오세요, 하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아츠코는 생각에 잠겼다. - P11

그 후에도 아츠코에게 몇 번에 걸쳐 현 상황을 설명했다. 아츠코는 응응, 하고 대화에 응해 주긴 했지만,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히로미의 건강에 대해 걱정했다.
아무래도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 P12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이라부 종합병원‘ 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 P12

이라부 종합병원의 신경과는 지하에 있었다.
아침에 거울 앞에 서서 피부가 거칠어진 것을 보고서야 결심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에 지장을 주고 말 것이다. 겉모습은 히로미의 생명줄이다. - P13

"스물네 살에 직업은 탤런트 겸 모델, 정확히 무슨 일을 해?"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어시스턴트도 하고, 잡지 모델도 해요."
사실 일의 태반은 이벤트 도우미지만, 예전에는 그런 일도 했었다. - P14

"주사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놈으로, 한 방 놔줄게."
•증상 같은 거, 안 들어도 돼요?"
"그런 건 나중에 어~이, 마유미짱." - P14

주사를 맞고, 다시 이라부와 마주하고 앉았다. 아까보다 거리가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중략).
"나도 독신이지, 우후후후."
(중략).
"이 병원의 후계자야. 자가용은 포르셰, B형에 천칭자리."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야. 당신이 왜 자기소개를 하고 그래? - P15

"히로미짱은 왜 불면증에 걸렸을까?"
갑자기 왜 ‘짱‘ 이야. 히로미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 P16

다시 한 번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요컨대 그 스토커는 하이힐을 신고, 완벽하게 화장을 한 스크린 속의 여배우에 대해 망상을 품었던 거야. 그러니까 실물을 보고 낙담한 거고. 히로미짱도 맨얼굴로 나가 보지 그래."
이라부를 다시 보았다. 그렇게 멍청이는 아닌 것 같았다. - P17

"자, 그럼 한동안 통원 치료를 받도록 해. 컨디션을 조절해주는 주사를 놓아 줄 테니까."
이라부는 다시 잇몸을 드러내 보였다. 이런 데서 통원 치료를 받아? 그러나 예, 하고 대답했다.
음침한 의사 같지만,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 P18

2

다음날은 국제전시장에서 열리는 게임 쇼에 도우미로 나갔다. 계약한 메이커의 부스에서 팸플릿을 나누어 주고 상품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다. - P19

 히로미는 상품 옆에 서서 고객들에게 웃음을 던진다. (중략).
"히로미."
아츠코가 낮은 목소리로 다가왔다.
"주오 텔레비전의 <투모로>가 와 있어."
"거짓말"
히로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오 텔레비전의 <투모로〉는시청률이 가장 높은 심야 정보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보물섬>도."
<보물섬>은 젊은 남자들에게 인기를 끄는 사진 잡지다. - P20

그러나 싫은 것만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사진을 좋아했다.
파스너의 효과 때문인지, 카메라 렌즈가 히로미 쪽으로 집중되었다.
플래시가 연속으로 터졌다. 셔터 누르는 소리, 소리남에게 주목받을 때의 쾌감이 히로미의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 P21

잠시 후, 카메라 렌즈가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본다. 같은 사무실에 소속된 19세의 에미린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다.
뭐야, 데뷔도 안 한 주제에 예명부터 지었어! 너, 가슴에 껌붙였니? - P21

당연히 내가 이기지, 전문대생의 아르바이트와는 격이 달라.
5년의 커리어를 자랑한다. - P22

수염 난 카메라맨이 도우미들을 둘러보았다. (중략).
아츠코는 지명받지 못했다.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츠코는 아마도 평범한 주부가 될 것이다. 성격은 좋지만 화려하지는 못하다.
"자, 웃어!" - P22

카메라맨의 손가락이 한층 더 바쁘게 셔터를 눌러댄다.
촬영이 끝나자 기자가 다가왔다.
"이름과 나이, 쓰리 사이즈를 좀 가르쳐 줘."
가벼운 어투로 물어 온다.
히로미는 나이를 두 살 속이고, 쓰리 사이즈는 상하를 살짝늘리는 대신 가운데를 조금 줄여서 말했다. - P23

<투모로> 팀이 나타났을 때, 히로미는 가슴의 파스너를 2센티미터나 더 내렸다.
이벤트는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격렬한비트의 BGM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히로미는 가슴을 흔들며 춤을 추어 보였다. - P24

어느새 서로 밀치고 당기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결국 히로미는 중심에서 밀려났다. 이 여자들, 왜 이렇게 천박해!
나도 질 수야 없지. 히로미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슴의 파스너를 1센티미터 더 내리고, 여자들 틈으로 뛰어들었다.
문득 스테이지 아래를 내려다보니, 중년 사원 하나가 입을 헤벌쭉 벌리고 있었다. - P25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온 것은 11시가 넘어서였다. 히로미는샤워를 하고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오늘 쇼가 방영되는지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중략).
배달을 시키려면 호텔 레스토랑 정도는 돼야지. 도우미들은 모두 불만스러워 했다. - P25

"약을 먹어도 잠이 안 온단 말이지."
이날 이라부는 머리에 기름을 발랐다. 이발을 한 듯, 지난번 같은 그런 불결한 느낌은 안 들었다. 가운도 풀을 먹여 다려 입었다.
"아, 좀 약한 놈이었으니까. 오늘은 좀 더 센 놈으로 줄게." - P27

오늘도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스커트는 미니로 골랐다.
오후부터 큰 대리점에서 다음 일과 관련된 미팅이 열린다. 다른 도우미들은 화려하게 꾸미고 나타날 것이다. 자기 혼자 화장도 안 하고 후줄근한 차림으로 갈 수야 없지 않은가.
"여전히 누군가가 미행하고 있어?"
"그래요. 아침에 집을 나설 때부터 시작되는걸요."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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