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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전화 너머에서 차분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구급차를 보내주세요. 친구가 숨을 안 쉬어요."
"일단 장소가 어딘지 말씀해주십시오."
아리는 대학교 이름을 알려주었다.
"지금 그쪽으로 구급차가 가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주십시오." - P151

"아니요."
"경찰에는 저희가 연락하겠습니다. 이제 중요한 사항을 확인할테니 잘 들으세요. 찌른 사람은 가까이에 있습니까?" - P151

남자는 아직 피에 젖어 번들번들 빛나는 식칼을 쥐고 있었다.
아리를 보면서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괜찮아. 진정해. 날 죽일 작정이었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어. 이 남자는 날 죽일 생각이 없는 거야.
"식칼줘." 아리는 말했다. - P152

조금만 있으면 경찰과 구급차가 올 거야. 가능한 한 시간을 벌어야 해. 그럼 만에 하나 찔리더라도 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
"여기서 날 찔러봤자 당신한테는 아무 이득도 없어. 그것보다 수사에 협력하는 게 상책이라고 당신 목적이 뭐야? 왜 리오 씨를 찔렀어?" - P153

남자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미소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무슨 생각이야!" - P153

땅에 털썩 쓰러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식칼을 뽑으면 되나? 하지만 뽑으면 출혈이 심해지는 거 아닐까? 그럼 놔둘까? 하지만 기관에 다다랐다면 숨이 막혀서 죽을 거야. 뽑아야 기도에 공기가 들어가지 않을까? - P154

"흰토끼가 죽었어." 미치광이 모자 장수가 앨리스에게 말했다.
앨리스는 트럼프카드병정들이 크로케를 준비하는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카드이다 보니 하나하나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가 모이는 모습은 정말로 게임이나 카드 점을 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 P153

"그럼, 지금 질문은 없던 걸로 할게요. 잊어버려요. 그런데 누가죽였어요?"
"몰라." 모자장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겠지?"
"또, 나라고요?" 앨리스는 외쳤다.
"이번만은 동기가 충분해."
"반대죠. 그녀는 마지막 희망이었다고요. - P156

"사인은 모른다는 거야?"
"정말로 몰라요."
"흰토끼의 집에 새 예초기가 배달됐다."
"흰토끼가 산 거예요?"
"아니. 메리 앤 말에 따르면 흰토끼는 산 기억이 없었다나 봐.
하지만 분명 누가 선물해준 거라고 받아들였다는군." - P156

"그래서, 결국 예초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그런데 그건 예초기가 아니었어."
"하지만 흰토끼는 예초기라고 생각했잖아요."
"물론 그랬지."
"그럼 예초기로 혼동했다는 뜻이군요.‘ - P157

"양쪽 다 아니야. 그 스나크는 부점이었어."
"설마.……."
"흰토끼는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어. 이제 두 번 다시 못 만나겠지."
"어떻게 부점인 줄 알았어요?"
"빌과 메리 앤이 증인이야." - P157

"흰토끼는 누가 새 예초기를 줬다면서 기쁜 얼굴로 상자를 자랑했어. 상자에는 빨간색과 하얀색 리본이 둘둘 감겨 있었고, 겉에는 커다란 글씨로 ‘예초기‘라고 적혀 있었지. 빌이 빨리 ‘예초기‘를 보여달라고 하자 흰토끼는 이건 내게 온 거니까 내가 제일 먼저볼 권리가 있다. 내가 본 다음에 언제든지 보여주겠다면서 상자를 자기 침실로 들고 들어갔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실에서 목소리가 들리더군." - P158

"앨리스도 아까 똑같은 질문을 했지. 우리는 마음이 통하는가봐." 빌이 말했다.
앨리스는 아까 충동적으로 별 쓸모도 없는 질문을 한 것을 몹시 후회했다. - P159

"모르겠어. 흰토끼는 문 앞에 놓여 있었다고 했어."
"누군가가 부점을 상자에 담아서 흰토끼 집 앞에 놓아두었다는 말이군요. 그런데 어떻게 부점을 상자에 담을 수 있었을까요?" - P160

"부점을 사용한 살인이 자주 일어나나요?"
"아니, 처음 듣는 일인데. 하지만 부점이 아니라면 밀실 살인을 설명할 수가 없어. 메리 앤과 빌 둘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빌이 거짓말을 할 리 없어요. 거짓말을 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니까." - P160

"빌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부점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을까요? 빌은 고의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지만 속임수에는 홀딱 잘 넘어간다고요."
"부점으로 살해한 게 아니면 뭐 어때서? 살해 방법이 그렇게 중요해?" - P161

"모르겠어요. 하지만 범인은 위험한 다리를 건너면서까지 흰토끼를 죽여야만 했죠. 범인에게 흰토끼는 없애야만 하는 방해물이었다는 뜻이에요." - P161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걱정했던 건데." 다니마루 경감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너희들이 협력해주었다면…………."
"우리가 협력했다면 리오 씨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을 거란 말인가요?" 아리는 따졌다.
"음." 다니마루 경감은 머리를 긁적였다. - P163

"어지간히 확실하고 긴급한 이유가 없는 한 일반인을 24시간 경호하라는 지시는 내려지지 않을 겁니다." - P164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설명해주세요."
"현실의 이면에 진실이 숨어 있다는 말이야."
"현실의 이면이라뇨?"
"비현실이지. 환상세계라고 해도 돼."
아리는 웃었다. "경찰이 그런 말을 해도 되나요?"
"지금 한 말은 경찰로서 한 말이 아니야. 동일한 내용의 불가사의한 체험을 공유하는 동지로서 한 말이지." - P164

"환상 속에서 수사하는 거지."
"환상 속에서 수사한다고요?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환상 속에서 수사해봤자 그 결과는 증거로 삼을 수 없잖아요."
"응. 맞아." - P165

"시치미 떼지 말아요. 당신들, 범인의 목을 싹둑 잘라버리고 싶은 거죠?"
"그런 건 불가능해."
"지금 니시나카지마 형사님이 그랬잖아요." - P165

"제가 보고 겪은 바로는 그렇던데요."
"환상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니까 네 경험에서 도출한 법칙은 성립되지 않아."
"그럼 환상세계에서 누군가의 목이 날아가고, 그 일에 호응해서 현실 세계의 누군가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 P166

"그래. 그러니까 우리는 진범을 확정하기 위한 정보가 필요해."
"유감스럽게도 범인 확정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전혀 가지고있지 않은데요." - P166

"그럼 왜 집요하게 앨리스를 추궁하는 건가요?"
"지금, ‘앨리스‘라고 했겠다."니시나카지마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차, 그만 입을 잘못 놀리고 말았어.
"너, 누가 앨리스인지 알지?" 니시나카지마가 눈을 번쩍였다. - P167

"증언을 얻기 힘들다니, 앨리스 본인의 뜻이 그렇다는 건가?"
"뭐, 그렇게 받아들이셔도 될 것 같아요."
다니마루 경감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더이상 붙잡아둘 이유는 없을 듯하군. 이제 돌아가도 돼." - P168

"경찰이 불렀다기보다 다니마루 경감이 개인적으로 부른 거야.
나는 이번 사건과 특별한 접점이 없으니까 수사의 일환으로 날 불러서 조사할 수야 없지."
"다니마루 경감이 뭘 물어보디?"
"별것 아니었어. 이번 사건에 대해 뭔가 짐작 가는 점은 없느냐고 묻던데." - P168

"꼭 설명해줘야 알겠니? 일련의 사건을 저지른 범인이 죽었잖아. 이제 적어도 연쇄살인은 끝났어. 이제 이상한 나라에서 죽은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면 앨리스가 무죄라는 것도 증명할 수 있어."
"잠깐만. 일련의 사건을 일으킨 범인이 죽었다니, 무샤 스나히사를 말하는 거야?" - P169

"확실히 무샤 스나히사는 다나카 리오를 죽였어. 하지만 그는 오지 다마오와 시노자키 교수님을 죽이지는 않았어."
"그러니까 현실 세계에서는 살인으로 보이지 않지만 이상한 나라에서는 누군가가 험프티 덤프티와 그리핀을 죽였잖아." - P170

"그는 흉기에 지나지 않아. 시노자키 교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굴과 똑같은 셈이지. 무샤 스나히사는 부점이었던 거야."
"그럼 범인은 아직 살아 있다는 거네?"
"그런 셈이지."
"그럼 수사도 아직 끝나지 않겠구나." - P170

"그럼 히로야마 부교수님한테 물어보는 게 제일 낫겠다. 공작부인은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를 도와주려고 했잖아. 공작부인은 같은 편이야."
"여왕이 미치광이 모자 장수를 수사관으로 임명하려고 했을 때반대했던가? 확실히 악의는 없는 것 같아. 좋아, 당장 시노자키 연구실에 가보자." - P171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만약 그렇다면 집요하게 앨리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할 만도 하지."
"음. 잠깐만 기다려. 생각해볼게." 히로야마 부교수는 관자놀이를 짚고 눈을 감았다. "아니, 그건 아니야. 여왕에게는 알리바이가 있어." - P173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나요? 리오 씨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흰토끼일 때는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요." 아리가 말했다.
"리오가 누구야?" 히로야마 부교수가 물었다.
"현실 세계에 있던 흰토끼의 본체요."
"흰토끼도 양쪽 세계에 살고 있었던 거구나. 그는 좋은 사람이야. 요전에도 빌을 위해서 깜짝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했어." - P174

"아무튼 흰토끼 일을 알려줘서 고마워. 저쪽에 가면 메리 앤을 불러서 대응책을 강구해야겠어. 하지만 그건 저쪽에 가고 나서 생각해도 상관없어. 지금은 현실 세계의 일만으로도 버거우니까………" - P175

 히로야마 부교수는 생각에 잠겼다. "맞다. 걔는 잡일이 많아."
"잡일?"
"잡일이라는 표현이 좀 그렇다면 연구지원 업무라고 하자. 국가에 제출할 신청 서류를 작성하고, 학회 발표용 자료를 만들고, 실험 담당 행정직원과 학생이 읽을 실험 순서도를 만들고, 비상구 안내 표시를 붙이고, 약품과 재료 목록을 만들고, 연구실 멤버의 컴퓨터 설정을 통일하고, 보안 프로그램을 깔고, 메모리를 관리하고, 연속 운전하는 장치를 야간에 확인하러 오고....…. - P176

"그렇다고 해도 왜 그런 업무가 다바타 씨에게 몰리는 거죠?"
"그러고 보니 어째서일까?"
"시노자키 선생님은 히로야마 선생님께는 그런 잡일을 시키시지 않았습니까?" - P177

"즉, 시노자키 연구소에는 원래 잡일이 많은 데다 다바타 씨는 요령이 별로 없기 때문에 부담이 상당히 컸다는 말씀이로군요."
"많다고 해도 말도 안 되게 많은 건 아니지만." - P177

"그건 아닐걸 보고 자료라고 해봤자 파워포인트로 열 장 전후니까."
"매일 보고를 하는데 파워포인트로 자료를 만들었다고요?"
"귀찮을 것 같지만, 업무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양식이 제각각인 서류를 보여주는 것보다 파워포인트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 효율적이야." - P178

"원한? 조교수가 정교수한테 원한을? 그건・・・・・・..
"말도 안된다고요?"
"그럼, 교수의 지시는 일반 기업의 업무명령과 다를 바 없으니까 어떤 경우에도 따르는 게 상식이야. 그런데 원한이라니………
"일반 기업에서도 우월한 지위를 남용한 행위는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고요." - P179

"이상한 나라에서 그리핀을 죽여도 현실 세계에서는 살인이 성립되지 않지. 그렇지만 시노자키 선생님은 죽어. 일종의 완전범죄라고 할 수 있겠네." - P179

"그러고 보니 앨리스는 용의자였지." 히로야마 부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얘를 구하고 싶은 거구나."
"범인의 목숨을 빼앗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구리스가와의 목숨을 구하고 싶을 뿐이에요.‘ - P180

"바빠 보이는데 미안하지만." 어느 틈엔가 메리 앤이 다가와 있었다. "빌에게 전할 말이 있는데 잠깐 실례해도 될까?"
"아. 그래요." 앨리스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뭐야, 누가 나한테 말을 진해달라고 했는데?" 빌이 불안한 듯이 물었다.
"공작부인이."
"아아, 공작부인이라면 괜찮아 공작 부인은 우리 편이거든." - P195

"으음. 그럼 읽을게." 메리 앤은 종이를 펼쳤다.
"친애하는 빌에게 사건에 관해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으니 지금 당장 공작 저택의 뒤뜰에 있는 광으로 반드시 혼자 오려무나. 공작부인이.." - P196

"즉, 이건 앨리스를 데려오지 말라는 뜻일 거야."
"왜 나는 가면 안 되는데?" 앨리스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네가 알면 안 되는 게 있는 것 아닐까? 예를 들어 범인밖에 모르는 정보라든가." - P197

"히로야마 선생님!" 아리는 역 앞에서 히로야마 부교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녀 앞에는 남자 중학생 두 명이 서있었다. 복장이 상당히 불량한 것으로 보아 히로야마 부교수와 크게 인연이 있을 법한 부류는 아닌 듯했다. 중학생들은 히로야마 부교수의 손에서 지폐를 받아 들었다. - P198

"이모리는 많이 다쳤나요?"
"아아. 많이 다쳤죠."니시나카지마가 대답했다.
"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죠?"
"누구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었죠?"
"아무한테도 안 들었어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 P201

처음에는 그것이 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정체 모를 빨간 뭔가가 인간의 옷을 입고 있었다.
자세히 보자 빨간 뭔가에는 희미하게 굴곡진 부분이 있었다. 구멍이 세 개 있으면 인간의 얼굴로 보인다는 심령사진의 법칙대로어쩐지 인간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 P203

"이 빨간 찰흙이 왜요?"
"그게, 찰흙이 아닙니다."
"그럼 뭔가요? 아까 전부터 계속 뜸만 들이는데 빨리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말씀해주세요."
"얼굴입니다."
"예?"
"이거, 얼굴입니다." - P205

"예. 이미 시체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다행?"
누가 다행인데?
"그렇습니다. 이런 상태로 살아 있는 것보다야 시체가 되는 편이 차라리 다행이겠죠." - P206

빨간 찰흙은 천천히 형태를 이루어 끔찍한 사람의 얼굴로 변모했다.
피부는 벗겨졌고, 근육도 엉망진창으로 찢어졌다. 눈알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었고, 비강이 훤히 드러나 안쪽 코곁굴의 입구까지 확인이 가능했다. 눈구멍과 비강 사이의 뼈에는 있어서는 안 될 구멍이 뚫렸고, 그 구멍으로 연한 내부 조직이 보였다.


*콧구멍이 인접해 있는 뼈 속 공간으로 굴처럼 만들어져 공기로 차 있는 부위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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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류의 책의 인용구가 소설보다 한 쪽 당 차지하는 비중이 낮다.




"이번이 내 마지막 인터뷰가 될 거예요"라는 말이 담긴 이어령 마지막 인터뷰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 기사(297쪽 전문 수록)가 나갔던 2019년 가을 이후로, 세상은 달라졌다. - P18

이어령 선생님의 말처럼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가 이 인터뷰의 핵심이다. 돌아보면 선생이 이 시대에 태어나 대중 앞에 서서 쓰고 말한 모든 것도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 P19

내가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이야기를 담은 더 깊은 라스트 인터뷰를 단행본으로 진행하기로 했다고 하자, 지인들은 다정하게 환호했다. "그 대화는 마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같은 책이 되겠군요. 죽어가는 노교수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들려주는 마지막 수업.……… 흥미로워요. 우리에겐 특별한 선물이 될 거예요." - P19

근육이 빠져 더욱 얇아진 스승의 팔뚝을 나는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매일 밤 나는 죽음과 팔씨름을 한다네. 어둠의 손목을 쥐고서 말이야."
어둠의 혈관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포효하는 나의 스승을 상상해보았다. - P22

"글쎄요・・・・・… 내 눈앞에는 없어도, 다른 시공간을 살아도 ‘어딘가에 있다‘라는 인식이 우리를 견디게 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그 존재를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좀 더 드라이하게 이야기해보지. 고려청자가 있어. 사람이 아니고 사물이네. 고려청자는 무덤 속에 있었어. 이걸 5백 년 후에 발굴했다면, 내 눈앞에 없었어도 고려청자는 5백 년을 존재한 거야. 그런데 이게 깨지면? 그 순간 ‘아이고 이걸 어째‘ 한탄을 하지. 그런데그 청자는 무덤 속에 있을 때, 이미 우리 앞에 없었던 것 아닌가?" - P24

이 유리컵을 사람의 몸이라고 가정해보게나. 컵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 그러니 원칙적으로는 비어 있어야겠지. 빈 컵이 아니면 제 구실을 못 할 테니. - P24

여기 유리컵에 보이차가 들어갔지? 이 액체가 들어가서 비운 면을 채웠잖아. 이게 마인드라네. - P25

 컵이 깨지면 차갑고 뜨겁던 물은 다 사라지지. 컵도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나 마인드로 채워지기 이전에 있던 컵 안의 void는 사라지지 않아.  - P25

"빈 공간이 많을수록 영적인 공간이 커지는 거겠지요?"
"만원버스를 생각해보게. 사람이 꽉 차서 빈 데가 하나도 없는 게바로 영혼 없는 육체라네. 유명한 일화가 있어. 스님을 찾아온 사람이 입으로는 ‘한 수 배우고 싶다고 하고는 한참을 제 얘기만 쏟아냈지. 듣고 있던 스님이 찻주전자를 들어 잔에 들이붓는 거야. 화들짝 놀라 ‘스님, 차가 넘칩니다‘ 했더니 스님이 그랬어. ‘맞네. 자네가 비우지 못하니 찻물이 넘치지. 나보고 인생을 가르쳐달라고? 비워야 가르쳐주지. 네가 차 있어서 말이 들어가질 못해.‘ 마음을 비워야 영혼이 들어갈 수 있다네." - P26

"(눈을 빛내며) 과학적으로 설명해주겠네. 태초에 빅뱅이 있었어.
물질과 반물질이 있었지. 이것들이 합치면 빛이야. 엄청난 에너지지. 그런데 반물질보다 물질이 더 많으면? 빛이 되다만 물질의 찌꺼기가 있을 것 아닌가. 그게 바로 우리야. 자네와나지. 이 책상이고 안경이지. 이건 과학이네 상상력이 아니야, 우리는 빛이 되지못한 물질의 찌꺼기, 그 몸을 가지고 사는 거라네. 그런 우리가 반물질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빛이 되는 거야." - P27

『갈매기의 꿈』을 쓴 리처드 바크는 갈매기 조나단의 생애를 쓰고 자기 타자기를 바닷속에 던져 넣었다잖나. 그걸로 다 썼다는 거지. 난 그러지 못했네. 내가 계속 쓰는 건 계속 실패했기 때문이야. - P29

"나는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에고이스트지. 에고이스트가 아니면 글을 못 써 글 쓰는 자는 모두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 쓰는 거야. 자기 생각에 열을 내는 거지. 어쩌면 독재자하고 비슷해. 지독하게 에고를 견지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만인의 글이 되기 때문이라네. 남을 위해 에고이스트로 사는 거지." - P30

"공포는 없으신지요?"
"자신은 없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라는 사람은 최초로 죽음학을 했고 죽음에 대한 강의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정작 자기가 암에 걸리고는 감당을 못 했어. (후략) - P32

<토리노의 말> 같은 영화는 우리는 만들기 힘들 거야. 우리는<기생충>으로 아카데미상 받은 봉준호 같은 사람은 나올 수 있지만, 저런 영화 찍을 사람은 나오기 쉽지 않아. 미국도 어려워. - P36

 나는 평생 누굴 보고 겁을 먹은 적이 거의 없어.
헤겔, 칸트도 나는 무섭지 않았어. 나는 내 머리로 생각했으니까.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하나하나 내 머리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인간은 흔치 않거든. - P37

자율자동차나 AI 관련 국제 행사를 해도 글로벌 지식인들 앞에서는 날더러 기조 강연을 하라고들 해. 왜 그럴까? 무슨 말을 해도 내가 하면 인문학적 접근이 되기 때문이지. 과학자 앞에서 당당하게 얘기할수 있는 자는 인문학자와 예술가들이야. - P37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쓴 내가 강연자로 나서면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도 군말이 없다는 거지. 그러나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어. 문화의 다양성을 동서양 비교 문명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세계적으로 많지 않기 때문이라네.  - P37

중국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뭔 줄 아나? ‘선왕께서 말하기를 ・・・・・ 이야. 먼저 말한 모델이 있어야 인정을 해줘. 모델 애착이지. - P38

(전략)
증기기관을 만든 사람은 토머스 뉴커먼이네. 그 사람이 만든 중기기관이 이미 백 대 이상 있어서 탄광에서 물도 퍼내고 있었어. 와트는 그걸 개량해서 효율을 높인 사람이거든. 따져보면 중세 이전에도 수증기로 바퀴 돌리는 도구가 있었단 말일세." - P39

그런데 상상해보게.
열 명이 있으면 열명, 백명이 있으면 백 명, 1억 명이 있으면 1억명의 각각 다른 생각이 있는 거야. 그게 정상이라네. 무엇이든 만장일치라면 그건 한 명과 다름없네. - P39

 투표결과에 만장일치가 많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야. 그러면 왜 민주주의를 하나? 왕이 다스리고 신이 통치하면 되는 거지. 민주주의의 평등은 생각하고 말하는 자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거라네. - P40

평소엔 잘 안 보이고 거저 달려 있는 것 같지만, 귀야말로 얼굴의지문이라고 나는 생각해. 그래서 고흐도 귀를 잘랐지. 귀의 형태는들락날락이 비정형이고 랜덤해. 일종의 카오스지, 소용돌이야. - P40

 시체 해부하는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네만, 검시관들이 시체를 해부할 때는 반드시 배꼽 중심으로 배를 가른다고 해.
똑같은 배꼽이 하나도 없다는 거지. - P41

혹 배꼽이 아무 쓸모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누워서 몸 위에찻잔을 놓아보게. 어디에 놓을 텐가? 이마? 코? 아냐. 배꼽밖에는 없어. 비어 있는 중심이거든. 가장 중요한 것은 비어있다네. 생명의 중심은 비어 있지. - P41

"(미소 지으며) 모든 게 풀어져도 마지막까지 안 풀리는 것을 배꼽의 수수께끼라고 한다네. 프로이트도 『꿈의 해석』에서 해석 안 되는 것을 배꼽이라고 했어."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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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파티에 관해서 이모리에게는 절대 말하지 마. 당일까지는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리오는 그렇게 말하더니 바람처럼 뛰어갔다.
깜짝 파티?
다른 사람에게 한 이야기를 내게 했다고 착각한 거구나. 하지만뭐, 흰토끼라면 그렇게 어벙한 짓을 할 만도 하지. - P134

"왜 그럴 필요가 있지?" 체셔 고양이가 물었다.
"제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해서죠."
"그럼 우리가 아니라 미치광이 모자 장수에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에게 알리바이를 제시하기 전에 완벽하게 정리해두고 싶어요. 논리적으로 한 치의 틈도 없도록." - P135

"그리핀은 나랑 빌이 목격한 후에 살해당했어요."
"그렇지." 체셔 고양이가 말했다. "바다코끼리와 가짜 거북도 기억난다더군. 너희가 해안에서 떠난 지 약 30분 후에 그들도 그리핀과 헤어졌다." - P136

"애벌레라, 녀석은 괴짜지만 증언은 믿을 수 있지."
"해안에서 흰토끼의 집까지 한 30분 걸렸을까요. 그리고 흰토끼의 집에 도착한 지 30분도 넘게 지난 후에 모자 장수와 3월 토끼가 와서 그리핀이 살해당했다고 전했어요. 즉, 무슨 뜻인지 알겠죠?"
"모자장수는 고자질을 좋아한다?" 빌이 말했다. - P136

"너희가 흰토끼의 집에 도착했다고 주장하는 시간대에..……"
"난 그런 말 안 했어. 앨리스 혼자 주장하는 거라고." 빌이 정정했다.
앨리스는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앨리스 혼자 흰토끼의 집에 도착했다고 주장하는 시간대에 공간 왜곡이 일어났어. 때마침 흰토끼의 집과 해안이 이어졌지." - P137

"내가 증언할게요."
"네 알리바이를 증명하고자 네 증언을 채택할 수는 없지. 그런 논리는 미치광이 모자 장수에게도 통하지 않을걸." - P137

"모자 장수가 이유를 추측했어."
"도대체 뭔데요?"
"네가 연쇄살인범이라서 그렇다나 봐, 앨리스."
"그거야말로 아무 근거도 없는 소리예요."
험프티 덤프티와 그리핀을 잇달아 죽였으니 연쇄살인범이 분명하다고 했어." - P138

빌과 체셔 고양이는 앨리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왜 화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 빌은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화가 났으니까, 빌." 앨리스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이봐요, 그건 순환논법이라고요." - P138

"순환논법이니까요. 순환논법으로는 아무것도 증명하거나 창조하지 못해요."
"어째서 그런데?"
"아무리 해도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니까요. 진실인지 거짓인지영원히 판가름할 수 없어요."
"미치광이 모자 장수 말로는 영원히 증명을 계속하니까 이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다고 하던데." - P139

"어째서 그렇게 주장하지?"
"거기에는 이유가 있어요. 앨리스는 연쇄살인범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건 순환논법이야!" 느닷없이 미치광이 모자 장수가 끼어들었다. "순환논법으로는 아무것도 증명하거나 창조하지 못해!" - P140

 빌이 말했다. "미치광이 모자 장수는 미치광이야."
"앗! 그거 순환논법이다!" 3월 토끼가 기쁜 듯이 말했다.
"조금 달라. 이건 동의어 반복이라고 봐야지." 체셔 고양이가 냉정하게 정정했다. - P140

"범죄의 증명은 수학의 증명과는 달라. 정의와 공리에서 출발하여 추론을 쌓아 올린 증명만이 옳은 건 아니지. 범죄는 단 하나의 물적 증거나 단 한 마디의 증언으로 증명될 때도 있어."
"그러니까 증거가 뭔데요?"
"흰토끼의 증언이지. 네가 정원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을 목격했어." - P141

"괜찮아요. 또 다른 흰토끼에게 물어볼 테니까."
"말해두겠는데 다른 흰토끼의 증언은 의미가 없어. 다른 인간의 증언이 나나 너의 증언을 대신할 수 없는 것과 똑같아."
"다른 토끼의 증언이 아니에요. 그녀 자신의 증언이라고요."
"그녀가 아니라 그겠지."3월 토끼가 귓속말을 했다. "야, 성별을 틀렸어. 까딱 잘못하면 굉장한 얼간이나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거라고." - P142

"난 여왕 폐하께 네가 범인이라고 보고할 거야.‘
"증거는 흰토끼의 증언뿐인데요."
"몇 번이고 말하지만 그거면 충분해. 내가 여왕 폐하께 보고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
"제 목이 댕강 잘리겠죠." - P142

"가능하다면 조사 기간을 무제한으로 해줬으면 좋겠네요."
"안 돼. 그랬다가 여왕 폐하께 들키면 내 목이 날아가 여왕 폐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는 게 대략 일주일이거든. 그러니까더 이상은 무리야." - P143

"그러니까, 험프티 덤프티가 살해당한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생각해보라고요." 아리는 리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었다.
"험프티 덤프티? 아아. 이상한 나라에서 오지 씨가 그거였지."
"엄밀하게 말하자면 본인이 아니라 아바타라지만요." - P144

리오는 아리의 뒤쪽에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아리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허름한 차림새의 남자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다가왔다. 옷은 지저분했고, 길게 기른 머리는 떡이 졌으며, 수염도 텁수룩했다.
아리는 리오의 팔을 잡고 뒷걸음질 쳤다. - P146

남자는 손에 식칼을 쥐고 있었다. 손에서 놓치지 않도록 테이프로 둘둘 감기까지 했다. 장난이 아니라면 살의가 충분한 셈이다.
아무라도 상관없는 걸까, 아니면 나와 리오 씨를 노린 걸까?
후자라면 이상한 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을지도 몰라. - P146

그런데 뭐 때문에?
만약 이 남자가 이상한 나라의 누군가라면, 우리를 죽여서 뭔가이득이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누굴까?
진범? - P147

아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바로 옆으로 풀쩍 뛰었다.
남자는 당황하여 아리를 향해 달려왔다.
"리오 씨, 도망쳐요! 그리고 도움을 요청해요!" 아리는 남자에게 등을 돌리고 달음박질했다. - P147

아리는 달리면서 뒤돌아보면 불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혹에 넘어가 그만 등 뒤를 보고 말았다.
놀랍게도 범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빨랐나? - P148

리오의 모습이 남자에게 가려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남자가 리오에게서 물러났다.
리오는 창백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명치를 양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피가 하얀 옷을 붉게 물들이며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 P148

아리가 도착하기 직전에 리오는 땅에 푹 고꾸라졌다.
"리오씨!"
리오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미안해요!" 아리는 리오의 어깨를 잡았다. "설마 리오 씨를 노리고 있었을 줄은.....…" - P149

"너한테 경고해둬야 할 일이 있어. 더 이상 깊이 파고들면 절대로 안돼"
"리오 씨, 뭔가 알고 있는 거예요?"
"절대로 못 이겨."
"뭘요? 뭐를 못 이기는데요?"
"아무도 붉은 왕에게는 절대로 못 이겨" 리오는 눈을 더 크게 부릅떴다. - P149

아리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내려고 기를 썼다.
그래, 심폐 소생술을 실시해야 해. 심장 마사지와 인공호흡이야.
양손을 리오의 가슴에 얹고 힘껏 체중을 실었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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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광수 작가님 마니아가 되었을까. 실제 책을 읽어본 것이, 다 읽지도 않은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밖에 없는데.
‘즐거운 사라‘를 보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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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빌려서 읽는다. 농체가 어쩌고, 문체가 어쩌고. 딱 그 느낌이다. 바로 반납해야겠다.

연작 중 ‘장님 이야기‘를 읽는 중이다.


소리도 없이 땅바닥을 기어 흐른다. 물 흘러 개울생기네. 이런 소설이 있다면,
천년만년 지나도 살아 있지. 인공의 극치라고 나는 부른다. - P324

 더구나 이 주인공은 고매한 이상을 품고, 바로 이 이상에 온갖 극심한 고난을 죄다 겪는데, 부끄러울 것 없는 그 아수라 같은 모슺이 수많은 독자의 마음에 다가간다. - P325

중학교 시절의 한 친구가 최근 양장 차림의 아내를 얻었는데, 그 여자는 여우다. 둔갑한거다. 나는 그걸 잘 알고 있지만, 어쩐지 가엾어서 대놓고 말할 수가 없다. 여우는 그 친구를 좋아하거든 짐승의 눈에 든친구는 내 기분 탓인지, 하루하루 야위어 가는 듯하다.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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