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전화 너머에서 차분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구급차를 보내주세요. 친구가 숨을 안 쉬어요." "일단 장소가 어딘지 말씀해주십시오." 아리는 대학교 이름을 알려주었다. "지금 그쪽으로 구급차가 가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주십시오." - P151
"아니요." "경찰에는 저희가 연락하겠습니다. 이제 중요한 사항을 확인할테니 잘 들으세요. 찌른 사람은 가까이에 있습니까?" - P151
남자는 아직 피에 젖어 번들번들 빛나는 식칼을 쥐고 있었다. 아리를 보면서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괜찮아. 진정해. 날 죽일 작정이었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어. 이 남자는 날 죽일 생각이 없는 거야. "식칼줘." 아리는 말했다. - P152
조금만 있으면 경찰과 구급차가 올 거야. 가능한 한 시간을 벌어야 해. 그럼 만에 하나 찔리더라도 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 "여기서 날 찔러봤자 당신한테는 아무 이득도 없어. 그것보다 수사에 협력하는 게 상책이라고 당신 목적이 뭐야? 왜 리오 씨를 찔렀어?" - P153
남자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미소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무슨 생각이야!" - P153
땅에 털썩 쓰러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식칼을 뽑으면 되나? 하지만 뽑으면 출혈이 심해지는 거 아닐까? 그럼 놔둘까? 하지만 기관에 다다랐다면 숨이 막혀서 죽을 거야. 뽑아야 기도에 공기가 들어가지 않을까? - P154
"흰토끼가 죽었어." 미치광이 모자 장수가 앨리스에게 말했다. 앨리스는 트럼프카드병정들이 크로케를 준비하는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카드이다 보니 하나하나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가 모이는 모습은 정말로 게임이나 카드 점을 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 P153
"그럼, 지금 질문은 없던 걸로 할게요. 잊어버려요. 그런데 누가죽였어요?" "몰라." 모자장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겠지?" "또, 나라고요?" 앨리스는 외쳤다. "이번만은 동기가 충분해." "반대죠. 그녀는 마지막 희망이었다고요. - P156
"사인은 모른다는 거야?" "정말로 몰라요." "흰토끼의 집에 새 예초기가 배달됐다." "흰토끼가 산 거예요?" "아니. 메리 앤 말에 따르면 흰토끼는 산 기억이 없었다나 봐. 하지만 분명 누가 선물해준 거라고 받아들였다는군." - P156
"그래서, 결국 예초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그런데 그건 예초기가 아니었어." "하지만 흰토끼는 예초기라고 생각했잖아요." "물론 그랬지." "그럼 예초기로 혼동했다는 뜻이군요.‘ - P157
"양쪽 다 아니야. 그 스나크는 부점이었어." "설마.……." "흰토끼는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어. 이제 두 번 다시 못 만나겠지." "어떻게 부점인 줄 알았어요?" "빌과 메리 앤이 증인이야." - P157
"흰토끼는 누가 새 예초기를 줬다면서 기쁜 얼굴로 상자를 자랑했어. 상자에는 빨간색과 하얀색 리본이 둘둘 감겨 있었고, 겉에는 커다란 글씨로 ‘예초기‘라고 적혀 있었지. 빌이 빨리 ‘예초기‘를 보여달라고 하자 흰토끼는 이건 내게 온 거니까 내가 제일 먼저볼 권리가 있다. 내가 본 다음에 언제든지 보여주겠다면서 상자를 자기 침실로 들고 들어갔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실에서 목소리가 들리더군." - P158
"앨리스도 아까 똑같은 질문을 했지. 우리는 마음이 통하는가봐." 빌이 말했다. 앨리스는 아까 충동적으로 별 쓸모도 없는 질문을 한 것을 몹시 후회했다. - P159
"모르겠어. 흰토끼는 문 앞에 놓여 있었다고 했어." "누군가가 부점을 상자에 담아서 흰토끼 집 앞에 놓아두었다는 말이군요. 그런데 어떻게 부점을 상자에 담을 수 있었을까요?" - P160
"부점을 사용한 살인이 자주 일어나나요?" "아니, 처음 듣는 일인데. 하지만 부점이 아니라면 밀실 살인을 설명할 수가 없어. 메리 앤과 빌 둘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빌이 거짓말을 할 리 없어요. 거짓말을 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니까." - P160
"빌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부점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을까요? 빌은 고의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지만 속임수에는 홀딱 잘 넘어간다고요." "부점으로 살해한 게 아니면 뭐 어때서? 살해 방법이 그렇게 중요해?" - P161
"모르겠어요. 하지만 범인은 위험한 다리를 건너면서까지 흰토끼를 죽여야만 했죠. 범인에게 흰토끼는 없애야만 하는 방해물이었다는 뜻이에요." - P161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걱정했던 건데." 다니마루 경감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너희들이 협력해주었다면…………." "우리가 협력했다면 리오 씨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을 거란 말인가요?" 아리는 따졌다. "음." 다니마루 경감은 머리를 긁적였다. - P163
"어지간히 확실하고 긴급한 이유가 없는 한 일반인을 24시간 경호하라는 지시는 내려지지 않을 겁니다." - P164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설명해주세요." "현실의 이면에 진실이 숨어 있다는 말이야." "현실의 이면이라뇨?" "비현실이지. 환상세계라고 해도 돼." 아리는 웃었다. "경찰이 그런 말을 해도 되나요?" "지금 한 말은 경찰로서 한 말이 아니야. 동일한 내용의 불가사의한 체험을 공유하는 동지로서 한 말이지." - P164
"환상 속에서 수사하는 거지." "환상 속에서 수사한다고요?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환상 속에서 수사해봤자 그 결과는 증거로 삼을 수 없잖아요." "응. 맞아." - P165
"시치미 떼지 말아요. 당신들, 범인의 목을 싹둑 잘라버리고 싶은 거죠?" "그런 건 불가능해." "지금 니시나카지마 형사님이 그랬잖아요." - P165
"제가 보고 겪은 바로는 그렇던데요." "환상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니까 네 경험에서 도출한 법칙은 성립되지 않아." "그럼 환상세계에서 누군가의 목이 날아가고, 그 일에 호응해서 현실 세계의 누군가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 P166
"그래. 그러니까 우리는 진범을 확정하기 위한 정보가 필요해." "유감스럽게도 범인 확정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전혀 가지고있지 않은데요." - P166
"그럼 왜 집요하게 앨리스를 추궁하는 건가요?" "지금, ‘앨리스‘라고 했겠다."니시나카지마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차, 그만 입을 잘못 놀리고 말았어. "너, 누가 앨리스인지 알지?" 니시나카지마가 눈을 번쩍였다. - P167
"증언을 얻기 힘들다니, 앨리스 본인의 뜻이 그렇다는 건가?" "뭐, 그렇게 받아들이셔도 될 것 같아요." 다니마루 경감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더이상 붙잡아둘 이유는 없을 듯하군. 이제 돌아가도 돼." - P168
"경찰이 불렀다기보다 다니마루 경감이 개인적으로 부른 거야. 나는 이번 사건과 특별한 접점이 없으니까 수사의 일환으로 날 불러서 조사할 수야 없지." "다니마루 경감이 뭘 물어보디?" "별것 아니었어. 이번 사건에 대해 뭔가 짐작 가는 점은 없느냐고 묻던데." - P168
"꼭 설명해줘야 알겠니? 일련의 사건을 저지른 범인이 죽었잖아. 이제 적어도 연쇄살인은 끝났어. 이제 이상한 나라에서 죽은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면 앨리스가 무죄라는 것도 증명할 수 있어." "잠깐만. 일련의 사건을 일으킨 범인이 죽었다니, 무샤 스나히사를 말하는 거야?" - P169
"확실히 무샤 스나히사는 다나카 리오를 죽였어. 하지만 그는 오지 다마오와 시노자키 교수님을 죽이지는 않았어." "그러니까 현실 세계에서는 살인으로 보이지 않지만 이상한 나라에서는 누군가가 험프티 덤프티와 그리핀을 죽였잖아." - P170
"그는 흉기에 지나지 않아. 시노자키 교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굴과 똑같은 셈이지. 무샤 스나히사는 부점이었던 거야." "그럼 범인은 아직 살아 있다는 거네?" "그런 셈이지." "그럼 수사도 아직 끝나지 않겠구나." - P170
"그럼 히로야마 부교수님한테 물어보는 게 제일 낫겠다. 공작부인은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를 도와주려고 했잖아. 공작부인은 같은 편이야." "여왕이 미치광이 모자 장수를 수사관으로 임명하려고 했을 때반대했던가? 확실히 악의는 없는 것 같아. 좋아, 당장 시노자키 연구실에 가보자." - P171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만약 그렇다면 집요하게 앨리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할 만도 하지." "음. 잠깐만 기다려. 생각해볼게." 히로야마 부교수는 관자놀이를 짚고 눈을 감았다. "아니, 그건 아니야. 여왕에게는 알리바이가 있어." - P173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나요? 리오 씨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흰토끼일 때는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요." 아리가 말했다. "리오가 누구야?" 히로야마 부교수가 물었다. "현실 세계에 있던 흰토끼의 본체요." "흰토끼도 양쪽 세계에 살고 있었던 거구나. 그는 좋은 사람이야. 요전에도 빌을 위해서 깜짝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했어." - P174
"아무튼 흰토끼 일을 알려줘서 고마워. 저쪽에 가면 메리 앤을 불러서 대응책을 강구해야겠어. 하지만 그건 저쪽에 가고 나서 생각해도 상관없어. 지금은 현실 세계의 일만으로도 버거우니까………" - P175
히로야마 부교수는 생각에 잠겼다. "맞다. 걔는 잡일이 많아." "잡일?" "잡일이라는 표현이 좀 그렇다면 연구지원 업무라고 하자. 국가에 제출할 신청 서류를 작성하고, 학회 발표용 자료를 만들고, 실험 담당 행정직원과 학생이 읽을 실험 순서도를 만들고, 비상구 안내 표시를 붙이고, 약품과 재료 목록을 만들고, 연구실 멤버의 컴퓨터 설정을 통일하고, 보안 프로그램을 깔고, 메모리를 관리하고, 연속 운전하는 장치를 야간에 확인하러 오고....…. - P176
"그렇다고 해도 왜 그런 업무가 다바타 씨에게 몰리는 거죠?" "그러고 보니 어째서일까?" "시노자키 선생님은 히로야마 선생님께는 그런 잡일을 시키시지 않았습니까?" - P177
"즉, 시노자키 연구소에는 원래 잡일이 많은 데다 다바타 씨는 요령이 별로 없기 때문에 부담이 상당히 컸다는 말씀이로군요." "많다고 해도 말도 안 되게 많은 건 아니지만." - P177
"그건 아닐걸 보고 자료라고 해봤자 파워포인트로 열 장 전후니까." "매일 보고를 하는데 파워포인트로 자료를 만들었다고요?" "귀찮을 것 같지만, 업무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양식이 제각각인 서류를 보여주는 것보다 파워포인트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 효율적이야." - P178
"원한? 조교수가 정교수한테 원한을? 그건・・・・・・.. "말도 안된다고요?" "그럼, 교수의 지시는 일반 기업의 업무명령과 다를 바 없으니까 어떤 경우에도 따르는 게 상식이야. 그런데 원한이라니……… "일반 기업에서도 우월한 지위를 남용한 행위는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고요." - P179
"이상한 나라에서 그리핀을 죽여도 현실 세계에서는 살인이 성립되지 않지. 그렇지만 시노자키 선생님은 죽어. 일종의 완전범죄라고 할 수 있겠네." - P179
"그러고 보니 앨리스는 용의자였지." 히로야마 부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얘를 구하고 싶은 거구나." "범인의 목숨을 빼앗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구리스가와의 목숨을 구하고 싶을 뿐이에요.‘ - P180
"바빠 보이는데 미안하지만." 어느 틈엔가 메리 앤이 다가와 있었다. "빌에게 전할 말이 있는데 잠깐 실례해도 될까?" "아. 그래요." 앨리스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뭐야, 누가 나한테 말을 진해달라고 했는데?" 빌이 불안한 듯이 물었다. "공작부인이." "아아, 공작부인이라면 괜찮아 공작 부인은 우리 편이거든." - P195
"으음. 그럼 읽을게." 메리 앤은 종이를 펼쳤다. "친애하는 빌에게 사건에 관해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으니 지금 당장 공작 저택의 뒤뜰에 있는 광으로 반드시 혼자 오려무나. 공작부인이.." - P196
"즉, 이건 앨리스를 데려오지 말라는 뜻일 거야." "왜 나는 가면 안 되는데?" 앨리스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네가 알면 안 되는 게 있는 것 아닐까? 예를 들어 범인밖에 모르는 정보라든가." - P197
"히로야마 선생님!" 아리는 역 앞에서 히로야마 부교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녀 앞에는 남자 중학생 두 명이 서있었다. 복장이 상당히 불량한 것으로 보아 히로야마 부교수와 크게 인연이 있을 법한 부류는 아닌 듯했다. 중학생들은 히로야마 부교수의 손에서 지폐를 받아 들었다. - P198
"이모리는 많이 다쳤나요?" "아아. 많이 다쳤죠."니시나카지마가 대답했다. "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죠?" "누구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었죠?" "아무한테도 안 들었어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 P201
처음에는 그것이 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정체 모를 빨간 뭔가가 인간의 옷을 입고 있었다. 자세히 보자 빨간 뭔가에는 희미하게 굴곡진 부분이 있었다. 구멍이 세 개 있으면 인간의 얼굴로 보인다는 심령사진의 법칙대로어쩐지 인간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 P203
"이 빨간 찰흙이 왜요?" "그게, 찰흙이 아닙니다." "그럼 뭔가요? 아까 전부터 계속 뜸만 들이는데 빨리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말씀해주세요." "얼굴입니다." "예?" "이거, 얼굴입니다." - P205
"예. 이미 시체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다행?" 누가 다행인데? "그렇습니다. 이런 상태로 살아 있는 것보다야 시체가 되는 편이 차라리 다행이겠죠." - P206
빨간 찰흙은 천천히 형태를 이루어 끔찍한 사람의 얼굴로 변모했다. 피부는 벗겨졌고, 근육도 엉망진창으로 찢어졌다. 눈알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었고, 비강이 훤히 드러나 안쪽 코곁굴의 입구까지 확인이 가능했다. 눈구멍과 비강 사이의 뼈에는 있어서는 안 될 구멍이 뚫렸고, 그 구멍으로 연한 내부 조직이 보였다.
*콧구멍이 인접해 있는 뼈 속 공간으로 굴처럼 만들어져 공기로 차 있는 부위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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