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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 1--단장 1


"자크가 같이 와 줘서 다행이야."
마을을 떠나 한참을 걸어왔을 때, 아레스가 불쑥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정말 나로 괜찮아? 제대로 된 어른이 더 낫지 않았을까?"
나는 속으로 계속 생각하던 말을 꺼냈다. 14세 소년 둘이서 왕도로 향하는 것은 조금 무모하지 않을까 계속 생각한 것이다. - P114

타인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쉽게 하지 않는 아레스조차 속으로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느낀 것 같았다.
"뭐, 마물은 강하니까. 우리 부모님도 살해당하셨고, 누가 싸우고 싶겠어."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모험가다. 마물과 싸우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계셨지만, 마왕군과의 큰 싸움 중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 P115

아레스는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밤에 일어나면 가끔씩 어머니가 우시는 모습을 볼 때가 있었어. 사실은 용사 따위는 되지 않기를 바라셨을 거야."
그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나의 양부모님이기도 한 아레스의 부모님은 예언자가 남긴 예언의 신빙성을 의심했다. 되도록이면 아레스가 용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 P115

여정은 순조로웠다. 도중에 들른 마을들에서 아레스는 어른처럼 능숙하게 협상을 하더니 얼마 안 되는 돈과 맞바꿔 물과 식량을 손에 넣었다.
마물과 조우해도 최대한 싸움을 피했고, 어떻게 해도 피할 수없을 때에만 싸웠다.
싸울 때도 나의 안전을 확보한 다음 냉정하게, 그리고 착실하게 싸움을 진행했다. 공격 마법과 회복 마법을 정확하게 사용해 칼로 숨통을 끊는 그 모습은 역시 용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 P116

"대단하다. 아레스 혼자라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중략).
"자크도 날 너무 치켜세운다니까. 뭔가를 혼자 계속하는 건 힘든 일이야. 네가 있어 주니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거지. 검을 배웠을 때도, 마법을 공부했을 때도, 회복 마법을 배웠을 때도 그래. 처음에는 다른 무리들과 함께 시작했지만, 잘 안 된다는 걸알고 나면 한 명 한 명 빠져나가.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건 늘 너와 나뿐이었지." - P117

"아레스가 잘하지 못한다는 건 상상이 안 가. 하지만 나도 뭔가하나쯤은 배우고 싶었는데."
그것은 진심이었다. 적어도 뭔가 하나쯤은 동갑인 사촌을 따라잡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늘 잘 되진 않았다.
"나도 잘하지 못하는 것 정도는......"
거기까지 말하고, 아레스는 멈춰 섰다. 나도 뭔가를 알아차리고 멈춰서서 주위의 상황을 살폈다.
지나치게 조용하다. - P118

마인. 마왕의 권속인 이들은 사람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힘도 마력도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내가 바로 도망친 것은 마인에 대한 공포도 있었지만, 아레스의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였다. - P118

처음에는 여유를 보이던 마인도 공격을 하지 않는 아레스의 모습에 드디어 귀찮아진 것 같았다.
"방어만은 훌륭하구나. 하지만 마법은 어떨까?"
쉽게 공격이 닿지 않는 것에 초조해진 마인이 검으로 하는 공격을 멈추고 왼손을 앞으로 내밀어 마법을 발동시키려 했다.
그 순간을 아레스는 놓치지 않았다. - P119

그리고 날카로운 아리스의 일격에 맞아버린 마인은 마침내 검을 풀어뜨리고 말았다.
제그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마인의 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레스는 마인의 목덜미를 향해 검을 휘둘다 - P120

바람 마법을 마인의 눈을 향해 날렸다.
"칫!"
마법은 회피해 버렸지만, 그 사이 아레스는 뒤로 물러나 간격을 벌릴 수 있었다.
마인은 왼손을 파고들던 검을 뽑아 숲속에 내팽개쳤다. 왼손은축 늘어져 있다. 저 상태로는 만족스럽게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 P121

나는 아레스를 향해 내 검을 던졌다.
마인이 오른손 손톱을 치켜들었다.
(중략).
"・목숨도 내주마・・・・・・ 하지만, 너도 길동무다・・・・・・・"
마인은 검에 꿰뚫린 상태로, 입안에서 엿보이는 커다란 송곳니로 아레스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아레스의 목에서 거세게 피가 뿜어져 나왔다. - P122

-fragment 2--단장 2

자크는 내가 여섯 살 때 우리 집에 왔다. 아버지의 여동생이자크의 어머니였기에 그 녀석은 나의 사촌 형제에 해당했다. 나이도 똑같고 키도 비슷해서 나는 좋은 놀이 상대가 생겼다며 기뻐했다.
자크의 부모님은 모험가를 하고 있어 그런지 체격이 아주 좋았다. - P124

자크의 부모님은 일주일 정도 집에 머무른 뒤 마왕군과 싸우기위해 떠나게 되었다.
들어보니 마리카국이 마왕군의 침략을 받아 큰 싸움이 벌어졌으니, 그곳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잠시 동안은 평화로워진다고 했다.
"잠시? 계속 평화로워지는 게 아니라?" - P125

목표는 자크의 아버지 같은 전사. 그가 보여주었던 그 검술을 모두가 목표로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레스, 질렸으니까 다른 거 하자."
한 달쯤 지나자 친구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맞아, 아레스만 너무 강하니까 재미없어."
다른 친구들도 거기에 찬성했다.
아무래도 연습을 하면서 실력에 차이가 벌어지는 것이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확실히 내가 제일 잘했고, 친구들과 많은 차이가 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 P126

우리 집은 촌장 집안이라 아버지도 어머니도 학문에 뜻을 두셨었고, 덕분에 자크와 함께 읽고 쓰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글씨를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집에 있던 여러 가지 책을 읽게 되었다. 자크가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꽤 나중의 일이었을 것이다.
읽은 책 속에 용사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이야기에 따르면 용사는 검뿐만 아니라 마법사와 같은 공격 마법, 성직자와 같은 회복 마법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 P127

"용사? 그래, 용사라."
신부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정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께 허락을 받고 오거라. 그러면 간단한 기초는 알려주마. 원래라면 성직자가 될 사람만 알려줘야 하는데, 시대가 시대이니 말이야." - P128

곧바로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그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회복 마법? 그건 선택된 인간이 아니면 쓸 수 없을 텐데.
뭐, 신부님이 기초를 알려주신다고 했다면 시험해 보려무나."
아버지는 내가 회복 마법을 쓸 수 있게 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쨌든 허락은 떨어졌다. - P128

"신의 존재를 느끼면서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면."
(중략).
"집에서 하는 밭일은 힘드니까. 신부님처럼 기도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친구의 동기는 불순하다고 생각했지만, 기도하는 방법은 알려주었다. (중략). 이유는 똑같다. 신부라는 일이 ‘폼나고 편하니까‘라는 것이었다. - P129

이 나라의 뮬러 장군이 이끄는 군이 분전하여 마왕군을 격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도착이 늦은 탓에 마리카국은 멸망했다.
의용병으로 전선에서 싸우던 모험가들은 누구 한 명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그 소문을 들은 날 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와 자크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자크는 우리 아이가 될 거란다." - P130

미미하지만 신의 기적을 일으킨 다음 날 아침, 교회에 가서 신부님께 그것을 보여드렸다.
"대단하구나. 솔직히 말하면 난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전 확실히 신의 기적이 맞단다."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신부님은 나를 칭찬해 주셨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강한 힘이 느껴지진 않는구나. 아마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초보 회복 주문 정도일 거다. 그래도 계속할 거니?"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P131

(전략).
다만 신부님 말씀대로 한계는 금세 찾아왔다. 초급 회복 마법밖에 쓸 수 없었고, 그 이상의 신의 기적은 행사할 수 없었다.
솔직히 이대로는 아무 쓸모가 없을 것 같아 나는 공격 마법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공격 마법을 배워야 할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자크가 이 이상 회복 마법을 배워봤자 소용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P132

우리가 공격 마법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마을에 졌다. 그러자 또 친구들이 함께 공부하고 싶다며 찾아왔다.
단순히 ‘마법을 쓸 수 있는 인간은 대단하다‘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 P132

결국 내가 처음으로 마법 영창에 성공한 것은 열두 살 때였다.
5년이 넘게 걸린 것이다. 자크가 함께 공부해 주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자크는 공격 마법도 습득하지 못했다. - P133

그럴 때, 절망적인 일이 벌어졌다.
마을에 예언자가 나타난 것이다.
『이 마을에서 마왕을 물리칠 용사가 나타난다.』
수많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예언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지 마! 제발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 - P134

결국 나는 용사로 추대되었지만, 묵묵히 받아들였다.
부모님과 상의해 일단 왕도로 가 팔룸 학원에 들어가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부모님만은 냉정하게 판단해 주셨고, 그들은내가 당장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는 용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계셨다. - P134

fragment 3-단장 3

결과적으로 아레스는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마인이 바로 죽어버린 데다 목에 난 상처도 생각보다 증상은 아니었고 회복 주문으로 상처는 막을 수 있었다. - P136

"미안해."
창백한 얼굴을 하고 아레스가 사과했다.
"신경 쓰지 마. 난 지금 세상을 구하려는 용사를 구하고 있잖아. 그럼 엄청난 영웅 아니야?"
농담으로 얼버무렸지만,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 P137

아레스의 상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되었다.
배의 상처가 곪은 것인지 고열을 내기 시작했고 결국 걷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나는 대부분의 짐을 버리고 아레스를 업고 걸어갔다.
자신과 같은 체격의 사람을 업는 것은 괴롭다. 금세 체력이 바닥난다.
등에 업고 걷다가 바로 쉬는 것을 반복했다. - P137

근처에 강이나 수도 시설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숲이너무 험해서 안까지 들어갈 수도 없었다. 물의 소중함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지고 있던 물은 어제 아레스의 상처를 씻는 데거의 다 사용해 버린 탓에 더는 없었다.
"물이여!"
옛날 아레스와 함께 연습한 물의 마법 영창을 시도해 보았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기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P138

밤이 찾아오고, 주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중략). 불이 필요했다.
"불이여!"
문구만 아는 불의 마법을 시전했지만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레스의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상처가 부패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무서워서 상처를 덮은 천을 들어 올려 그것을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 P139

"어떻게 해야 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절망감에 그만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말았다.
"죽여줘......."
아레스가 신음하듯 그렇게 말했다.
"난 이미 틀렸어. 이대로라면 자크 너까지 죽을 거야. 게다가 너무 괴로워. 내 몸이 썩어가는 것도 무서워. 부탁이야, 내 검의로 날 찔러줘." - P140

아레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통증을 감내하듯 얼굴만 몇 번씩 찡그릴 뿐이다.
"나 혼자 왕도에 가서 뭘 어쩌라는 거야? 넌 용사잖아? 용사가죽어버리면 세상은 끝인 거잖아!"
"....결국 난 용사가 아니었던 거야. 예언자도 이 마을에서 세계를 구할 용사가 나타난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지. 나라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어. 게다가 난 예언자의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아니라 어쩐지 자크가 떠올랐어." - P142

fragment 4-단장 4


그 후로 8년이 흘렀다.
이 숲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하늘을 뒤덮을 만큼 거대하고 울창한 나무들, 이유 모를 불안감이 느껴지는 이 분위기.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마왕은 처리했지만 아직도 마물의 수는 많았고, 인적은 전무했으며, 숲을 빠져나가는 길은 황폐했다. - P144

"거기서 뭐 하는 거지, 아레스? 이런 곳에서 한눈팔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왕도로 돌아가 마왕 토벌 보고를 해야지. 잔당도많이 남았다고 하고, 아직 우리의 힘은 필요해"
길에서 벗어나 숲으로 들어간 나에게 레온이 말을 걸었다.
그는 귀가를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차기 백작가 당주로서 큰공을 세웠으니 가슴을 펴고 당당히 왕궁에 보고를 하고 싶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 P144

레온은 잠시 말을 끊고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
"혹시 왕이 되는 것이 불안한가? 그래, 아무리 용사라고 해도 평민 출신인 인간이 왕이 되면 반대하는 귀족들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걱정이라면 내가 붙어있으니까 괜찮다! 백작가가 전력을 다해 지원하마. 누구에게도 불평이 나오지 않게 만들겠어." - P145

"미안 나는 아레스가 아니야. 사실은 용사가 아니었어."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을 이제서야 입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네가 아레스가 아니면 누구라는 거야?"
레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크, 내 진짜 이름은 자크라고 해. 지금까지 속여서 미안해‘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P146

"내가 용사를 죽였으니까. 그래서 내가 용사를 이어받아야 했어. 그 책임이 있었어."
용사를 죽인 책임을 지기 위해 나는 여기까지 왔다.
"아레스가 죽은 건 마인 때문이에요. 당신 잘못이 아닌데요?"
마리아가 말했다.
"......아니, 아레스가 죽은 건 나 때문이야. 내 손에는, 아레스를 검으로 찔렀을 때의 감촉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 그리고 난 자크로서 마왕을 토벌한 게 아니야. 아레스로서 마왕을 쓰러뜨렸지. 자크로 있었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거야." - P147

"그러니까, 그 공적을 모두 아레스 것으로 돌리고 넌 떠나겠다고?"
솔론의 말끝마다 분노가 느껴졌다.
"원래 아레스에게 돌아갔어야 할 공적이야.‘ - P147

"용사는 너야! 아레스는 도중에 쓰러졌고! 그게 사실이지! 게다가 예언자의 말은 나도 알고 있어. 이 마을에서 마왕을 물리칠 용사가 나타난다‘라고 했지. 정확히 아레스를 가리킨 게 아니야. 처음부터 용사는 너였던 거라고!"
현자인 솔론의 지적은 옳다. 나도 그것은 알고 있다.
"나는 검도 마법도 제대로 쓰지 못했던 평범한 사람이야. 용사가 될 만한 그릇이 아냐.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용사는 아레스야!" - P148

"정말 떠나는 건가요. 아레스... 아니, 자크."
마리아가 평소와 같은 꾸며낸 성녀의 얼굴이 아닌, 진짜 얼굴로 진심을 담아 날 걱정해 주고 있었다.
"가지 말아요, 자크. 제가 이렇게 말리고 있잖아요. 제 부탁을 거절하는 건 신을 향한 모독이나 다름없는데요?" - P149

"국왕 폐하는 아직 연로하지 않으시다. 서둘러 차기 국왕을 결정할 필요는 없지. 언제든지 돌아와라. 나는 널 기꺼이 맞아 줄거다."
"고마워, 레온, 나는 너라면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당연하지." - P150

솔론이 희미하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솔론. 당신은 어릴 때부터 친구가 한 명도 없었잖아요."
마리아가 놀렸다. 솔론은 그것을 눈으로 잠시 비난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난 네가 어디를 가더라도 반드시 찾아내서 데리고 올 거야. 친구니까." - P151

알렉시아의 장


"왔어?"
뻥 뚫린 방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솔론이 앉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자주색 현자의 로브를 걸치고 있다.
아무래도 내가 올 것을 예상했던 모양이다.
"어째서 아레스가 용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려준거죠?"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일이니까." - P152

"우리가 이 나라로 돌아온 후, 너에게는 수차례 혼담이 들어왔어. 그 필두는 레온이었지. 하지만 너도 레온도 거절했어. ‘죽은 용사야말로 왕녀의 약혼자이며, 아직 오래 지나지도 않았다‘라고하면서."
혼담은 레온뿐만이 아니었다. 솔론 역시 후보로 거론되었지만그 역시 거절했다. 나는 날아드는 혼담을 계속 거절했고, 레온과 솔론은 어째서인지 그것을 지지해 주었다.  - P153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였겠지. 폐하께서 가만히 두고 보시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넌 용사의 공적을 문헌으로 정리하는사업을 시작했다. 그 녀석을 찾기 위해."
맞는 말이었다. 나는 국가 시책으로서 용사의 공적을 문헌에정리할 것을 제안했고, 직접 나서서 그 조사를 시작했다.
그가 살아 있다고 믿고하지만 설마 그가 아레스가 아니었다니. - P153

"하지만 말이지. 그 거짓말을 셰라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어쩔래?"
"어쩔래......라니, 모르고 계시잖아요."
"알아. 반드시 알고 있을걸."
솔론은 단언했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죠?"
"한 번 더 셰라를 만나러 가봐. 그럼 그쪽에서 알려줄 거야." - P155

"지금으로서는 이 방에서 전이해서 이 방으로 돌아오는 것못해."
솔론은 마치 결함인 것처럼 말했지만 충분히 대단한 성과였다. 획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 P156

솔론이 말한 대로 셰라가 사는 촌장의 집까지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다. 도중에 오고 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의아한 눈초리를 받긴 했지만 솔론은 그들의 시선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촌장 집에 도착했고, 그의 재촉에 나는 집 문을 두드렸다.
"네... 어머?"
나온 것은 세라였다.
"또 오셨군요...... 오실 줄 알았습니다." - P157

"우리가 왜 여기에 왔는지도 짐작하고 있겠지."
"네, 자크 말이죠."
그녀는 눈을 감고 대답했다.
"알고 있답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말해야만 한다는 것도, 아니, 사실은 그 아이에게 그 자리에서 말했어야만 했는데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건가요?!"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설마 그렇게 일찍부터 알고 있있을 줄은 몰랐다. - P158

"자크가 이 집에 돌아왔을 때, 전 순간 아레스가 돌아온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 아이의 상냥하고 슬픈 눈빛을 보고 곧바로 자크라는 걸 알았죠. 그러고는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아레스가 마왕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아레스도 마인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라고.
그러고는 저에게 저 검을 건네주었어요."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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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책을 읽어도 읽은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 있다. 에세이를 읽은 것 같은데 기억 나는 부분은 없다. 저자가 뭔갈 역설한 것도 같지만 헛깨비를 본 것 같다.

내용이 들어오지 않는 책을 리뷰하는 건 무의미하니, 예전에 본 영화에 대한 간단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좋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을 본 것은 꽤나 오래 전 일이었다. 그때는 영화에 막 관심을 가졌을 때였고, 4시간 짜리 영화도 잘 봤었는데.

각설하고 영화는 관혼상제 중 혼에서 시작해 상으로 끝난다. 그 사이 일어나는 일들은, 지금도 적당한 표현을 모르겠지만 마음에 남는다.

영화 대사 중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 한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면서 장면은 그에 대한 말을 듣는 장면과 동시에 갓 태어난 아이가 교차된다. 우린 아이를 두려워 할까, 아님 사랑스러워 하는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이 다른 것으로 어떻게 포장되는가. 아님 아이라는 미래는 두려움인가, 소중한 것인가.

다른 장면들도 많았고, 마지막에 주인공이 장례 중 할머니에게 올리는 편지도 좋았지만 나는 이 교차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오랜 시절 본 영화였음에도 요번 달에 읽은 책보다 감명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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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설득해서 종단을 세우는 상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우혁은 그런 미래를 상상으로만 남겨두기로 했다. 애당초 소년을 둘러싼 다툼은 새천년파와 조강현이 맞붙는 구도였다. - P113

이쯤에서 만족하는 게 최선이었다. 드라이브를 통해 20년간의 여정이 매혹적인 피날레를 맞이했음을 받아들이고, 이만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다.
김형의 말대로, 서른넷은 멀끔한 일상에 뿌리내릴 나이다.......
형이 또라이 기질이라 부른 것도 고쳐질까? - P114

소년이 묘한 표정을 지은 채 창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생각을 읽고 거절할 준비를 하는 중인가 싶었지만 완전히 다른 이유에서였다.
"추적이 붙었다. 검은 그랜저야. 아까부터 계속 따라오고있어"
"그냥 경로가 겹친 거 아니야? 양양고속도로 타고 내려가는 차가 한둘도 아니고."
"이건 내가 봐서 아는 거니까 말 들어 갓길에 세워라." - P115

"예언 적중률이 애매한데, 추적이 붙었다는 건 알아도 둘중 누구 편인지는 모른다니."
"나도 답답하다만 지금은 이 정도가 최선이야. 악령한테 몸을 넘겨주면 반나절은 드러눕게 돼."
자동차가 다시 한 차례 강줄기를 건넜다. - P116

"여기서 가평 방면으로 빠져나갈 수 있어. 어쩔까?"
룸미러에 비친 소년은 명상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내비게이션 우측 상단의 시계가 43분에서 44분으로 변하는 순간두 눈이 번쩍 뜨였다.
"악령이 뭔가 다른 걸 생각하는 모양이다. 더는 말해주지않아 마음 단단히 먹어라."
"몸을 갈아치우고 싶어 하는 건가? 네가 도망치는 중이라서?"
"확실치 않아. 지금 상태가 최선이라 보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부활은 가능하지?"
"나도 도의란 걸 안다. 네가 여기서 개죽음당하게 두진 않아." - P117

사람을 죽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시속 180킬로미터의 속도로 충각 돌격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 전투에서 우세를 점할 방법은, 정확한 각도와 속도로 선공하는 것이다.
우혁은 웃음이 침처럼 질질 새는 것을 느꼈다.
경직된 뺨이 불규칙적으로 경련하며 이가 딱딱 부딪혔다. - P118

"안전벨트 매고 가방 꽉 잡아. 충돌하면 바로 산 쪽으로 도망가고."
우혁은 블랙박스에 녹음되지 않을 만큼 작게 중얼거렸고,
잠시 심호흡한 뒤 덧붙였다.
"저것들도 부활시켜줘야 된다. 죽으면 과실비율 계산에 불리해."
K5를 피하고, 룸미러로 후방을 살피고, 시속 180킬로미터로 주행하면서, 어떻게 그런 말들을 또박또박 늘어놓을 수있었을까? 무의식의 영역으로 밀려난 와중에도 이성은 계속 과실 비율을 계산하고 있었단 말인가? - P119

우혁은 헐떡이며 아, 아, 아, 하고 외쳤다.
머릿속 슬롯머신의 세 줄이 기적처럼 맞아떨어지며 7.7·7을 띄웠다.
잭팟!
압도적인 속도가 굉음으로 화했다. 제네시스의 전면부가K5의 운전석을 옆에서 들이박았고, 차벽이 서로의 영토를 침범했으며, 넘쳐흐르는 운동량이 두 자동차의 융합체를 차도 가장자리까지 떠밀어갔다. 철제 가드레일이 바깥으로 휘었다. 우혁은 시간이 느려지며 세계가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 P120

휘도는 동전을 향해 뻗는 손이 있었다. 소년의 손이었다.
갑작스럽게도 다른 손이 뻗어나와 소년을 붙들었다. 굵고 억센 손이었다. 조명이 이동하듯 그늘이 슬쩍 물러나며 손의주인들이 보였다. 건장한 남자가 소년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말하고 있었다. - P121

(전략).
"어르신, 남서윤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딸입니다. 가서 보시죠. 이름도 지어주시고요."
"이름은 없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마지막 날에 현세의것들은 다 소용이 없어지니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여덟 달이라도 인간에게는 긴 시간입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이름은 세희로 하고, 성씨는 어머니 것을 따서 지어라 남서윤은 애를 가진 줄도 모른 채로 여기에 왔으니 아비 성씨를 물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나도 곧 가서볼 테니 먼저 가서 전해라."
"남세희‘군요. 알겠습니다." - P122

그 모두가 소년이 알던 이들, 혹은 아직 모르지만 언젠가알게 될 이들의 피였다.
온 세상 사람 80억의 피…………….
문득 우레 같은 음성이 들려오더니 천사들이 날아와 일곱개의 그릇을 기울였다. 그릇 하나가 쏟아질 때마다 사람들의몸에서 종기가 자라났으며 바다의 모든 생명이 죽었고 강과샘이 피로 변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그 피를 말리더니 구름마저 불태웠고, 왕좌로부터 다시 큰 음성이 났다. - P123

우혁은 눈을 떴다. 우그러진 프레임 너머로 햇빛이 비쳐 들고 있었다. 밤새도록 격렬한 파티를 즐긴 후 열일곱 시간짜리 잠에 빠졌다가 깨어난 듯 노곤했다. - P123

박살 난 디퓨저 병이 주의를 끌더니 쇠비린내와 샌들우드 향의 불균등한 조화가 니치 향수의 새로운 라인업처럼 느껴졌다. 톱 노트는 피비린내, 미들 노트는탄내, 베이스 노트는 샌들우드 향, 요새 유행은 그런 식인가?
응? 품에서 꺼낸 휴대전화는 액정이 깨졌을 뿐만 아니라 온통 피로 뒤덮여 있었다. 차내 역시 피범벅이었다.
현실적인 긴박감이 신비 체험에서 기인한 고양감을 몰아냈다.
이게 도대체 전치 몇 주짜리야?
병원비는?
하지만 몸을 살펴본바 유리 파편에 찢긴 목덜미가 흉터 없이 아물었을 뿐만 아니라 그 흔한 근육통조차 없었다. - P124

우혁은 변형된 가드레일 바로 앞에 서고서야 자신이 산등성이가 아니라 교각을 지나오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칫했더라면 30미터 아래의 개천으로 떨어질 뻔했던 것이다. 그는물줄기 양옆의 밭과 컨테이너 주택과 비닐하우스가 있는 한적한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소년이 지금쯤 어디를 지나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 P125

그랜저 운전자의 얼굴을 확인한 우혁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경찰 아니었네."
일전에 소년이 학원으로 도망 왔을 때 내부 수색을 요구하던 경찰 중 하나였다. 그때도 사칭범일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재회하다니 생뚱맞았다. - P125

우혁은 자신의 존재가 세상 앞에 초라해지는 것을 느끼며수줍은 태도로 말을 이었다.
"사실 제네시스가 아버지 차인지라 사정을 말씀드려야 하는데, 휴대폰이 고장 나서 연락이 안 되네요. 보험도 아버지거로 적용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그쪽 담당자 연락처도 모르고요. 이거 보험 처리랑 손해배상이………… 아니, 솔직히 이게제 잘못 아니라는 거 아시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리고 할 말이 없어서 멋쩍은 듯 헤헤 웃었다.
입에서 짠맛이 났다. - P126

#3
이미 그리고 아직
Already but not yet


그랜저 운전자와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갓길로 물러나 있던 중년 무리가 다가왔다. 119에 연락했으니 일단 앉아서 기다리라고,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데 무리할 필요 없다고 했다. 우혁은 자신이 멀쩡하다고 주장했지만 중년들의 입장은 확고했다. 대형 사고를 겪은 직후에는 뇌가 천연마취제를 분비하므로 고통에 둔감해진다는 거였다.  - P129

. 전치 4주라도 얻어내야 했다. 그러나 최종적인 관건은 자동차 보험이 아버지 명의이며 자신은 그 보장 내역을 정확히 모른다는 데에 있었다. 부모님께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하나 싶은 생각에 등줄기가 서늘해졌고, 상가 부동산을 지나며 얼핏 보았던 매물 사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휘돌았다. - P130

우혁은 부모님의 노후 대비 수준을 검토했고, 아버지가 못난 아들놈을 위해 전세 자금을 빼진 않으리라 판단했으며,
K5에게 과실 비율을 떠넘길 방편을 고민해보았다. 목격자들이 K5의 위협 운전을 증언해주더라도 먼저 들이받은 쪽은 자신이었다. - P130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면서, 우혁은 앞으로 자신이 이 대답을 무수히 반복할 것임을 직감했다. 잘 모르겠다는 것 외에 어떤 해명이 가능하단 말인가? 당신네들의 몸이 포도주틀 안에 쑤셔져 들어가 피바다를 이루는 것을 보았다고? 혹은 요세푸스와 바르 코크바의 환생―그것을 환생이라 부를수 있다면-인 누군가가 30미터 아래로 도망쳤다고? 충돌전 10분간의 블랙박스를 제출하며 K5 운전자의 돌발 행동을 규탄하고,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버리는 게 최선일 터였다.
그렇게 구급차가 왔으며 경찰도 왔다. 질문을 몇 가지 듣긴했으나 그 내용은 의식이 남아 있는지, 신상 명세가 어떻게되는지 가족 연락처를 기억하는지 체크하는 선에서 그쳤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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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감수하고 추천하며]

지능의 역사라는 무대에서 펼쳐진
인간 뇌의 경이로운 여정

책을 감수하는 과정은 대개 고역이다. 오역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쓰다보니 종종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흥미로운 책, 수려하게 번역된 글을 만나면 오히려 즐겁다. - P11

다섯 번의 놀라운 혁신


인류가 지닌 지적 능력의 기원과 진화를 이해하는 것은 뇌과학자들에게도 여전히 도전적인 질문이다. 맥스 배넷의 <지능의 기원>은 이러한 궁금증에 답을 제시하고 있으며, 우리의 지능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디로 향하는지를깊이 있게 탐색하는 탁월한 저작이다. 뇌과학과 진화생물학, 철학의 경계를넘나들며 인간 지능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서술하고 있기에, 인류 문명의 근원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강력히 추천할 만한 역작이다. - P12

(전략).
이러한 다섯 번의 혁신적 도약은 인간 지능의 복잡성과 적응력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맥스 배넷은 이 다섯 번의 혁신이 신경 구조와기능에 중요한 도약을 이뤄냈고 오늘날의 인간 지능을 탄생시킬 수 있었음을강조한다. 이러한 발상이 독창적인 이유는 지능의 발달을 뇌의 진화적 혁신과 환경 적응이 상호작용한 결과로 설명한다는 데 있다. - P13

인공지능은 어디로 가는가?

《지능의 기원》은 인간 지능의 진화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 인공지능의 발전 방향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맥스 배넷은 먼저 인간 지능과 인공지능의 비교를 통해 기술 낙관주의에 신중한 질문을 던진다.  - P14

맥스 배넷의 《지능의 기원》은 단순한 뇌과학책이 아니다. 이 책은 신경과학뿐 아니라 진화생물학, 비교심리학, 인공지능 분야의 연구를 종합해 인간 지능의 기원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한다. 이것은 인류 지능의 기원과 진화를 아우르는 사고의 향연이자 우리 자신이라는 지적 존재에 대한 성찰로 이끄는 초대장이다.  - P14

 뇌과학자뿐 아니라 인공지능 연구자, 철학자 그리고 인간의 본질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지적으로 흔들어놓는다. 이 책을 덮을때쯤, 독자는 인간 지능이라는 놀라운 기적에 다시 한 번 경외감을 표하게 될것이다.


정재승(KAIST 뇌인지과학과 교수, 융합인재학부 학부장) - P15

[들어가며]

AI의 눈으로
인류지능의 역사를 재구성하다


우주 진출 경쟁, 쿠바 미사일 위기, 소아마비 백신 도입 등으로 전 세계가 떠들썩했던 1962년 9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다는 사건들만큼이나 중요한 이정표가 하나 세워졌다. 1962년 가을에 나온 미래 예측이었다. - P18

. AI는 이제 체스나 바둑 같은 게임에서 인간 챔피언을 이기고, 영상의학과 전문의처럼 방사선 이미지에서 종양을 찾아낸다. AI가 자동차 자율주행을 선보일 날도 멀지 않았다. 지난 몇 년동안은 대형언어모델 large language model, LLM*에서 이룬 새로운 발전 덕분에 챗GPTChatGPT 같은 제품도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 레이블링되지 않은 방대한 양의 글을 학습하는 인공지능 모델-옮긴이 - P20

AI 발전의 긴 여정에서 사람 수준의 지능을 만들어내는 데 얼마나 가까워졌느냐는 질문에 답하기는 늘 어려웠다. 1960년대에 문제해결 알고리즘을만드는 데 성공한 후에 AI의 선구자 마빈 민스키 Marvin Minsky는 이와 같이 선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앞으로 3년에서 8년 안에 평균적인 사람의 일반지능을갖춘 기계가 등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P20

이 목표에 우리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판단하기란 점점 더 어려워지고있다. 만약 AI 시스템이 한 과제에서 사람보다 더 뛰어난 성과를 낸다면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는 원리를 그 AI 시스템이 이해했다는 의미일까? 사람보다훨씬 빠른 속도로 계산하는 계산기는 실제로 수학을 이해하는 것일까? - P21

현재 사회 곳곳에 빠르게 확산되는 챗GPT가 출시되기 1년 전인 2021년에 나는 그 전신인 GPT-3라는 LLM을 사용하고 있었다.* GPT-3는 인터넷전체에서 수집한 방대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훈련을 했고, 프롬프트prompt가주어지면 이 말뭉치corpus를 이용해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대답을 내놓는 패턴매칭 pattern matching을 시도했다


2024년, 챗GPT는 GPT-3의 오류를 개선한 GPT-40 버전의 기술을 사용한다. 옮긴이 - P21

GPT-3와 상호작용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그 성취와 오류 모두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GPT-3는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똑똑하다가도 어떤 면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멍청했다. GPT-3에게 18세기 감자 농업*과 세계화의 관계를 주제로 논문을 작성해달라고 요청하면 놀라울 정도로 논리적인 논문을 받아볼 수 있다. 그런데 ‘창문 없는 지하실에서 위를 올려다 보면 무엇이보일까?‘라는 상식적인 질문을 하면 완전히 비상식적으로 대답한다.³


* 감자는 관상용 식물로 키우다가 18세기부터 유럽에서 주식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옮긴이 - P22

3. 내가 GPT-3에게 다음의 문장을 마무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창이 없는 지하실에 들어와있다. 하늘을 바라보니..." 그러자 GPT-3는 이렇게 답했다. "빛이 보인다. 나는 그것이 별이라는 것을 안다. 행복하다." 실제로는 지하실 안에서 위를 올려다 봐도 별이 보일 리가 없다. 천장만 보일 것이다. 2023년에 출시된 GPT-4처럼 발전한 LLM은 이런 상식적인 질문에 더 정확하게 대답한다. 이 부분은 22장을 참고하라. - P498

자연의 단서

인류는 비행의 원리를 이해하고자 했을 때 새가 하늘을 나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 게오르크 데 메스트랄George de Mestral은 옷에 귀찮게 달라붙는 우엉열매의 가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찍찍이 벨크로 Velcro를 발명했다. 벤저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 은 번개가 치는 모습을 보고 전기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실마리를 번쩍 얻었다. 인류 혁신의 역사에서 자연은 오랫동안 뛰어난 길잡이 노릇을 했다. - P23

뇌를 연구하다 보면 손에 잡힐 듯 말듯 감질나면서도 짜증이 난다. 눈에서 불과 3센티미터 정도 안쪽에 우주에서 가장 경이로운 대상이 자리 잡고있다. 그 안에 지능의 본질, 사람과 비슷한 AI를 구축하는 방법, 인간이 지금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유에 대한 비밀이 숨어 있다. 그 비밀은 멀리 있지도 않으며 그 비밀 덕분에 매년 새로 태어나는 아기의 머릿속에서 뇌가 수백만 번 재구성된다 - P24

뇌 박물관 이용하기

나는 AI를 작동시킬 방법은 딱 한 가지, 인간의 뇌와 비슷한 방식⁵으로 연산을 수행하는 것이라 늘 확신해왔다.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 2024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AI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인류는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원자를 쪼개며 유전자를 편집한다. 하지만 다른 동물들은 바퀴 하나도 발명하지 못했다.
인류의 발명품이 훨씬 많으니까 다른 동물의 뇌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의 뇌는 다른 동물의 뇌와 달리 너무나 독특하고, 우리를 똑똑하게 만드는 비밀이 특별한 뇌 구조에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반 현실은 그렇지 않다. - P25

5. "토론토대학교 컴퓨터과학자들이 인공지능에서 이룬 혁신적인 연구로 국제적인 상을 받다(U of T computer scientist takes international prize for groundbreaking work in AI)"
된 힌턴의 말에서 인용. U of T News. January 18, 2017, https://www.utoronto.ca/news/u-t-computer-scientist-takes-international prize-groundbreaking-work-ai. - P498

동물계 전반에 보이는 이러한 뇌의 유사성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유사성이 바로 단서다. 지능의 본질에 관한 단서, 우리 자신에 관한 단서, 우리의 과거에 대한 단서인 것이다.
오늘날 인간의 뇌는 복잡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뇌는 의도가없고 혼란스러운 진화라는 과정으로부터 등장했다. 생명체 번식에 도움이 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형질의 작고 무작위적인 변이 variation가 선택되거나 제거됐다. - P26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최초의 뇌를 조사하고 그 작동방식과 그로 인해가능해진 기능들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나아가 인간으로 이어진 계통 안에서 뇌가 점점 복잡해진 과정을 추적해 각각의 물리적 변화와 그로 인해 가능해진 지적 능력을 관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그 결과로 탄생한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생물학자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 Theodosius Dobzhansky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생물학에서는 진화의 관점으로 비춰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 P26

층이라는 미신

인간의 뇌를 이해하기 위한 진화적 틀을 제안한 사람이 내가 처음은 아니다.
이런 틀은 오랜 전통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60년대에 신경과학자폴 매클레인 Paul MacLean이 공식화한 틀이다. 매클레인은 인간의 뇌가 세 개의층(3중뇌 triune brain)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층은 또 다른 층 위에 만들어졌다는 가설을 세웠다. - P28

매클레인은 파충류의 뇌가 공격성, 영토 지키기 같은 기본적인 생존 본능의 중추라고 주장했다. 둘레계통은 공포, 부모 애착, 성욕, 배고픔 같은 감정의 중추다. 새겉질은 인지기능의 중추이며 언어 능력, 추상 능력, 계획 능력, 지각 능력을 부여해준다. - P28

현재 매클레인의 3중뇌 가설은 신뢰를 잃었다. 그 이유는 부정확해서가 아니라(가설이란 것은 모두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 뇌가 진화하고 작동하는 방식⁸에 대해 엉뚱한 결론을 내리기 때문이다. 이 가설에서 암시하는 뇌 해부도는 틀렸다. - P28

8. Cesario 외, 2020 에서는 매클레인의 3중뇌 모델에 대한 현재의 관점을 잘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그의 3중뇌 모델에서 생기는 문제 대부분은 대중적 성공 때문이긴 하다. 매클레인의 연구를 실제로 읽어보면 그는 자신의 들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기꺼이 인정한다. - P498

매클레인의 3중뇌 가설이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밝혀진다 해도 가장 큰 문제가 남는다. 매클레인이 말하는 기능적 구분이 우리 목표에 특별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사람의 뇌를 역설계해서 지능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인데, 매클레인의 3중뇌 가설은 너무 광범위하고 각 시스템의 기능이 너무 모호해서 출발점조차 제시하지 못한다.
뇌가 어떻게 작동하고 진화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 P29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 Richard Feynman은 죽기 직전에 칠판에 다음과 같은글을 남겼다. "창조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도 없다." 뇌는 AI를 구축하는방법을 찾아내기 위한 영감의 원천이며, AI는 우리가 뇌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우리에게는 뇌에 관한 새로운 진화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뇌의 해부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한 현대적이해는 물론이고, 지능 그 자체에 대한 현대적 이해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 P30

모험의 이정표

쥐 수준의 AI부터 시작하자. 그리고 그다음에는 고양이 수준의 AI를 만들고
이런 식으로 쭉쭉 진행해서 사람 수준의 AI까지 가보자.⁹
--얀르쿤 Yann LeCun, 메타의 Al 수석 과학자 - P30

9. 얀르쿤 (@ylecun)이 2019년 12월 9일에 이 글을 엑스에 올렸다. - P499

사실 최초의 뇌에서 시작해 인간의 뇌가 진화한 과정 전체를 요약하자면 딱 다섯 번의 혁신이 누적된 결과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뼈대다.
이 다섯 번의 혁신이 이 책을 구성하는 지도이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험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 각각의 혁신은 뇌가 새롭게 바뀔 때마다 등장해 동물들을 새로운 지적 능력의 포트폴리오로 무장시켰다. 이 책은 각각의혁신이 왜 진화했고 어떻게 작동하며 현재 사람의 뇌에서는 어떻게 발현되는지 설명할 것이다. - P31

무엇보다 이런 혁신은 현재 AI 분야에서 알려진 내용에 입각해 이해해야한다. 생물학적 지능에서 일어났던 혁신 중에는 AI를 통해서 알게 된 내용과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 혁신 중 일부는 AI 분야에서 잘 알려진 지적기능에 해당하는 반면 어떤 기능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 P31

나에 대해서

내가 평생을 뇌의 진화에 대해 고민하고 지능을 갖춘 로봇을 만드는 데 헌신해왔기 때문에 이 책을 썼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략). 나는 내가 읽고 싶어서이 책을 썼다.
나는 AI 시스템을 현실세계의 문제에 적용하려 시도하면서 사람의 지능과 AI 사이에 존재하는 당혹스러운 차이를 마주하게 됐다.  - P32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당신처럼 뇌가 있다. 그래서 인간의 경험을 대부분 정의하는 신체 기관에 매력을 느끼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뇌는 지능의 본질일 뿐 아니라 우리가 지금처럼 행동하는 이유에 대한 답도 제공한다. - P33

《지능의 기원》은 다른 많은 사람의 연구를 종합한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이미 마련된 조각들을 한데 모았을 뿐이다. 나는 책 전체에서 실제 연구를 진행한 과학자들에게 공로를 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지 못한 부분이있다면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니 이해해주기 바란다. - P34

사다리와 우월주의에 대한 마지막 당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당부할 것이 하나 있다. 이 전체 이야기의 행간에는 위험한 오해가 숨어 있다.
이 책에서는 인간의 능력과 오늘날 살아 있는 다른 동물의 능력을 자주 비교하는데, 특히 우리 조상과 가장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동물을 구체적으로언급한다. 다섯 가지 혁신이라는 이 책의 뼈대 자체는 오로지 인간 계통의 이야기, 우리의 뇌가 어떻게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느냐는 이야기에 관한 것일뿐이다. - P34

진화라는 개념이 발견된 이후에도 자연의 위계는 계속 살아남았다. 하지만 종에 위계가 존재한다는 개념은 완전히 잘못됐다. 오늘날 살아남은 좋은모두 말 그대로 ‘살아남았다‘. 이들의 조상은 지난 35억 년의 진화 과정에서살아남은 존재들이다. 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생존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살아남은 생명체는 모두 1등이다. - P36

비둘기, 다람쥐, 참치, 심지어 이구아나도 시각정보를 인간보다 더 빠르게 처리¹⁰할 수 있다. 어류는 실시간 처리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물고기를 잡으려고 할 때 미로 같은 바위 사이로 물고기가 얼마나 쏜살같이 움직이는지 본 적이 있는가? - P36

10. Healy 1, 2013. - P499

물론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이다 보니 자신을 이해하는 데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것도 당연하고, 인간과 비슷한 AI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도 당연하다. 따라서 나는 인간우월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인간 중심의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다. - P37

1.

뇌가 등장하기 전부터
지능은 있었다


최초의 뇌가 등장하기 전에도 생명은 지구에서 오랫동안 존재했다. 여기서 ‘오랫동안‘이란 30억 년 정도를 의미한다. 뇌가 처음 생겨나 진화할 무렵 생명은 이미 수없이 많은 도전과 변화의 주기를 견뎌온 상태였다. - P43

 초기의 DNA 유사 분자는 수명이 짧았다. 이 분자사슬을 만든 화산의 운동에너지가 필연적으로 그 분자사슬을 끊어놓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른 결과다. 이 불변의 물리법칙은 엔트로피 entropy, 곧 한 시스템 안의 무질서도가 필연적으로 항상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 P44

수없이 많은 뉴클레오티드 사슬이 무작위로 만들어지고 파괴되다가 행운의 서열이 우연히 만들어졌다. 그리고 무자비한 엔트로피의 맹공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적어도 지구에서는 최초의 반란이었다. 새로 등장한 DNA 유사분자는 그 자체로는 생명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나중에 생명 출현의 밑바탕이 될 가장 근본적인 과정을 수행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복제한 것이다.² - P44

1. 뇌가 등장하기 전부터 지능은 있었다


2. RNA 세계RNA World에 대한 논문과 원래 RNA가 단백질 없이도 스스로를 복제할 수 있었다는 중거는 Neveu 외, 2013을 참고하라. - P499

여기서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진 두 번의 진화적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보호성 지질lipid 방울이 DNA 분자를 포획한 사건이다. 이 과정은 비누로 손을 씻을 때 비눗방울이 생기는 것과 동일한 원리로 이뤄진다. - P44

세균처럼 가장 단순한 단세포 생명체라도 세포 에너지를 추진력으로 전환하는 모터³가 달린 엔진, 현대의 선박에 달린 모터‘ 못지않은 복잡한 메커니즘을 사용하는 회전 프로펠러 등 운동할 수 있도록 설계된 단백질이 있다. 세균은 지각perception을 위해 설계된 단백질도 갖고 있다. 수용체 receptor라고 하는이 단백질은 온도, 빛, 접촉 등 외부환경에서 어떤 특성을 감지하면 형태가 바뀐다. - P45

3. 세균의 편모는 양성자를 동력원으로 해서 회전하는 회전 모터rotary motor ‘로 움직인다. Lowe 외,
1987; Silverman과 Simon, 1974. - P499

단백질 합성 과정의 발달은 지능의 씨앗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단순한 물질에 불과한 DNA를 정보저장매체로 바꿔놓았다. DNA는 더 이상 자기복제하는 생명의 물질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생명의 물질을 구성하는 정보의토대가 됐다. DNA는 공식적으로 생명의 청사진이, 리보솜은 그 공장이, 단백질은 그 생산물이 됐다. - P46

지구의 테라포밍

머지않아 이 세포들은 과학자들이 ‘모든 생명체의 공통 조상Last universal commanancestor‘, 줄여서 루카LUCA라 부르는 존재로 진화했다. 루카는 모든 생명체의할아버지다(할아버지라고 했지만 성별은 없다). 우리를 비롯해서 현존하는 모든 균류, 식물, 세균, 동물은 루카의 후손이다. - P46

세포를 살아 있는 상태로 유지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든다. DNA는 끊임없이 수리해야 하고 단백질은 계속해서 새로 보충해야 하며 세포를 복제하려면 내부의 많은 구조물을 재구성해야 한다. 열수공 근처에 풍부했던 수소는 이런 과정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한 최초의 연료였을 가능성이 높다.⁵ - P47

5. J. L. E. Wimmer 1, 2021. - P499

초기 남세균이 갖춘 가장 인상적인 생물학적 시스템은 단백질 공장이나그 산물이 아니라 광합성 발전소다. 이것은 햇빛과 이산화탄소를 당분으로 전환해서 저장했다가 세포 에너지로 사용⁷하는 구조물이었다. 광합성은 에너지를 추출하고 저장하는 세포 시스템보다 더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했다. - P47

7. 광합성을 통해 산소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남세균의 조상에서 처음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KL. French 외, 2015 참고 - P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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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디옙스키가 귀국하고 한 달 뒤 그의 아버지가 여든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화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나이 많은 KGB 요원 몇 명만이 참석했다. - P161

고르디옙스키는 이혼할 때처럼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재혼을 단행했다. 레일라는 1979년 1월에 모스크바로 돌아와 겨우 몇 주 뒤등기소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곧 부모가 사는 아파트에서 가족끼리 식사를 했다. 올가는 아들이 행복한 모습을 보고 기뻐했다. 옐레나는 KGB에서 성공하려고 눈만 반짝이는 것 같아서 처음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 P162

고르디옙스키는 제3부의 역사를 집필하는 일에 투입되었다. 소련의 과거 첩보 활동에 대해서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지만 현재 진행 중인 작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한직이었다. 딱 한번 그는 노르웨이 담당자인 동료의 책상에서 OLT로 끝나는 제목의파일을 본 적이 있었다. 트레홀트의 이름 앞부분이 다른 서류에 가려져 있었다. 아르네 트레홀트가 KGB 첩자로 활동 중임을 암시하는 또 하나의 단서였다. - P163

킴 필비는 이제 고독하게 늙어 가며 자주 술을 마셔 대는 처지였지만, 머리는 옛날처럼 예리했다. 오랫동안 스파이의 이중생활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들키지 않는 법과 첩자를 잡는 법을 필비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KGB 내에서 여전히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 P163

고르디옙스키가 귀국한 직후 필비는 군보르 호비크 사건을 분석해서 잘못된 점을 평가해 달라는 중앙의 요청을 받았다. 그 베테랑노르웨이인 스파이가 왜 체포되었을까? 필비는 몇 주 동안 호비크파일을 열심히 들여다본 끝에, 스파이로 일한 오랜 세월 동안 자주그랬던 것처럼 올바른 결론을 내렸다. <그 첩자의 존재를 알린 정보는 KGB 내부에서 샜음이 틀림없다.>
빅토르 그루시코는 고르디옙스키를 포함한 고위 요원들을 자기방으로 불렀다. KGB에서 정보가 새고 있다는 징후가 있다.>  - P164

스티그 베릴링은 비밀 요원의 삶을 <회색, 검은색, 흰색, 그리고안개와 갈색 석탄 연기로 탁한 색>⁸이라고 묘사한 적이 있다. 스웨덴 경찰관, 정보 요원, 소련 첩자로 살아온 그의 삶 또한 칙칙한 색이었다.
베릴링은 경찰관으로 일하다가 SÄPO라고 불리는 스웨덴 정보기관의 감시 팀 일원이 되었다.
(중략).
베릴링이 스파이가 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가 무척 좋아하던 돈, 다른 하나는 상사들의 거만한 태도, 4년 동안 그는 소련에 1만4천7백 건의 문서를 넘겼다.




8 AFP, 1995년 6월 28일자 보도에서 재인용. - P165

스웨덴 조사관들이 수사망을 조여 왔다. 1979년 3월 12일, 그는텔아비브 공항에서 스웨덴의 부탁을 받은 이스라엘 정보기관 신베트 요원들에게 체포되어 SÄPO의 예전 동료들 손에 넘겨졌다. 그리고 9개월 뒤 간첩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베릴링은 소련의 주인들에게서 상당한 돈을 받았다. 그가 스웨덴의 국방에 끼친 피해를 복구하는 데에는 2천9백만 파운드가 들 것으로 추정되었다. - P166

고르디옙스키가 지목한 소련 첩자들이 한 명씩 차례로 제거되었다. 그 결과 서방은 십중팔구 더 안전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고르디옙스키는 아니었다. - P166

KGB 동료들이 면밀히 주의를 기울였다면 고르디옙스키가 경제적 이득도 없는데 왜 그리 서둘러 새로운 외국어를 익히려고 하는지, 왜 갑자기 영국에 커다란 흥미를 보이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고르디옙스키는 두 권짜리 러시아어-영어 사전을 샀다. 영국 문화에도 흠뻑 빠졌다. 어쨌든 소련 국민에게 허용된 한도 내에서 최대한 그렇게 했다. - P167

코펜하겐에서 돌아와 제1주요부의 싱크 탱크 수장이라는 대단한 자리에 앉은 미하일 류비모프는 그가 <자주 들러 가벼운 잡담을 나누다가 영국에 대한 현명한 조언을 구했다>고 회상했다.  (중략).
류비모프의 제안으로 고르디옙스키는 서머싯 몸의 소설들을 읽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영국의 정보 요원이었던 몸은 첩보 활동 중에 겪게 되는 도덕적 모호함을 작품에서 훌륭하게 묘사한다. - P164

제3부에서 영국-스칸디나비아과는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고르디옙스키는 자신이 영국 쪽으로 발령받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면 누구든 친분을 쌓아 두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 P168

(전략).
빅토르 그루시코는 제1주요부의 차장으로 승진했고, 제3부의 부장자리는 겐나디 티토프가 이어받았다. 전(前) 오슬로 레지덴트로 아르네 트레홀트 담당관이던 그의 별명은 <악어>였다. 영국-스칸디나비아과의 새로운 팀장은 니콜라이 그리빈이었다. 매력적인 인물인 그는 1976년 코펜하겐에서 고르디옙스키의 부하 직원으로 근무했으나, 그 뒤로 그를 앞질러 승진했다. - P169

한편 센추리 하우스의 선빔 팀도 정확히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있었다. 고르디옙스키에게서 귓속말조차 날아오지 않은 세월이 벌써 3년이었다. 쿠투좁스키 대로의 신호 장소 점검은 계속 조심스럽게 이어졌고, 탈출 계획인 핌리코 작전은 상시 대기 상태를 유지했다. 실전 같은 연습이 실시되어, 지부장 부부가 탈출 경로를 따라 헬싱키까지 차를 몰고 간 적도 있었다. - P170

(전략). 그런데 그 덴마크 외교관이 모스크바에서 파티에 참석했다가자신감 있고 건강해 보이는 고르디옙스키를 보았다. 외교관은 고르디옙스키가 재혼해서 두 딸의 아버지가 되었다고 PET에 보고했다.
M16에도 이 내용이 신속히 전달되었다.
그러나 PET 보고서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요소이자 선빔 팀을 들뜨게 한 요소는 고르디옙스키가 칵테일과 카나페를 먹으며 던진 한마디에 들어 있었다.
그는 미리 연습한 무심한 표정으로 덴마크 외교관을 향해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영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 P171

6

첩자 붓

겐나디 티토프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제1주요부 제3부의 부장인그는 런던 주재 소련 대사관에 KGB 요원을 한 명 파견해야 했지만 보낼 사람이 없었다. 적어도 겐나디 티토프에게 반드시 납작 엎드릴 거라고 믿고 보낼 사람이 없었다. 그것이 그 자리에 필요한 첫 번째 자격 요건인데. - P173

 티토프는 야비하고 교활했으며, 상사에게는 간이라도 빼줄것처럼 굴고 아랫사람에게는 이죽거렸다. 고르디옙스키가 <KGB전체를 통틀어 가장 불쾌하고 가장 인기 없는 요원 중 한 명>이라고 평가한 그는 그러나 가장 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 P173

중앙은 풋 사건으로 100명이 넘는 KGB 요원들이 추방된 1971년이후 줄곧 런던 지부를 재건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영어가 가능하고 유능한 요원들이 빈자리를 다 채울 수 있을 만큼 많지않았다. - P174

1981년 가을, KGB의 영국 PR 라인 부팀장이 런던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위장해 활동하다가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의 후임으로 가장 먼저 고려된 후보는 은밀한 활동을 한다는 MI5의 의심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외무부에서 거부당했다. - P174

고르디옙스키는 오로지 자신만이 그 기준을 충족할 수 있다는 암시를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 P174

(전략).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쪽에서 바로 거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일단 시도는 해봅시다.」고르디옙스키는 고마움을 넘치도록 표현했다. 하지만 속으로는곧 악어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했다. 승진을 앞둔 KGB요원의 아내로서 레일라도 기뻐 어쩔 줄 몰랐다. - P175

두 사람 모두에게 런던 발령은 꿈의 실현이었으나, 서로 같은 꿈을 꾸지는 않았다.
고르디옙스키에게 외교관 여권이 새로 발급되었다. 모스크바 주재 영국 대사관에 비자 신청서도 발송되었다. 대사관은 그 신청서를 런던으로 보냈다. - P176

이틀 뒤 MI6의 소련 팀장인 제임스 스푸너가 센추리 하우스의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데, 하급 요원 한 명이 숨을 몰아쉬며 들어와 선언했다. 엄청난 소식이 있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서류 한 장을건넸다. 방금 모스크바에서 들어온 비자 신청서입니다. 그 문서에 동봉된 편지에는 올레크 안토니예비치 고르디옙스키 동무가 소련대사관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영국 정부에 신속한 외교관 비자 발급을 요청했다고 적혀 있었다. - P177

완전히 양극단에 있었다. 티토프와 달리 스푸너는 사내 정치에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아부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혹독할 정도로 일에만 집중했다.
그가 팀을 맡은 뒤 가장 먼저 책상에 올라온 서류 중에 선빔 파일이 있었다.
모스크바에 있는 고르디옙스키가 조용하고 그와 연락할 길도 없는 탓에 고르디옙스키 작전은 어중간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어떻게 봐도 연락하지 않는 편이 옳았다. >스푸너는 이렇게 말했다. - P178

고르디옙스키에게 비자를 발급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KGB요원으로 의심받는 인물은 누구든 자동으로 영국 입국이 금지되는것이 원칙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외무부가 먼저 예비 조사를 실시하다가 올레크가 코펜하겐에서 두 번 근무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P179

 하지만 지금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MI6 입장에서는 고르디옙스키의 영국입국이 지체 없이 무조건 허락되어야 했다. 이민국에 그냥 비자를발급해 주라고 지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의심을 살 우려가 있었다.  - P179

 소식을 들은 PET는 기꺼이 돕겠다고 나섰다. 외무부가 곧 고르디옙스키에 관해 문의할 것이라고 MI6가 알려 주자, 덴마크 측은<기록을 마사지>해서 그가 의심받은 적은 있지만 KGB 요원이라는증거는 없다는 답변을 보냈다. <우리가 적당히 의심스러운 구석을 남겨 둔 덕분에 비자가 정상적인 과정으로 발급되었다. 우리는 《그래요, 덴마크 측이 그를 점찍은 적은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 P179

모스크바의 한 관리는 비자가 너무 빨리 나온 것에 의심을 품었다. 「당신에게 비자가 이렇게 빨리 나오다니 몹시 이상합니다.」고르디옙스키가 여권을 찾으러 갔을 때 소련 외무부의 한 관리가 음침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 P180

KGB의 관료적 업무 처리 속도는 영국보다 훨씬 느렸다. 3개월뒤에도 고르디옙스키는 소련을 떠나도 좋다는 공식 허가를 여전히기다리는 중이었다. KGB에서 내부 감찰을 담당하는 K부의 제5부가 고르디옙스키의 과거를 느긋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혹시 문제가 생긴건가 하는 생각이 차츰 들 정도였다. - P180

고르디옙스키의 자리는 영국 팀에서 정치를 담당하는 635호실에 있었다. 그 방의 커다란 금속 선반 세 개에는 영국 내의 인물 중KGB가 첩자, 잠재적인 첩자, 비밀 접촉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파일이 있었다. 635호실에 있는 서류들은 모두 현재 진행 중인 작전과 관련된 것이었다. 중복된 자료들은 중앙 문서고로 옮겨졌다. - P181

고르디옙스키는 이 파일들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KGB가 현재 영국에서 어떤 정치적 작전을 펼치고 있는지 차츰 감을 잡았다. 부팀장인 드미트리 스베탄코는 벼락치기 공부를 하는 거냐며 그를 놀렸다. 「문서를 읽는 데 너무 시간을 낭비하지 마. 영국에 도착하면 거기가 어떤 곳인지 알게 될 테니.」 그래도 고르디옙스키는 성실한 사람이라는 평판이 의심을 상쇄해 주기를 바라며 조사를 계속했다. - P181

매일 부서장의 서명을 받아 파일 하나를 꺼내 봉인을 깨고 KGB가현재 낚으려 하거나 이미 낡은 영국인의 신원을 새로이 알아냈다.
그 사람들은 엄밀한 의미의 스파이는 아니었다. PR 라인이 주로추구하는 것은 정치적 영향력과 비밀 정보였으므로, 여론을 선도하는 사람, 정치가, 기자 등 힘이 있는 사람들을 겨냥했다. - P182

잭 존스는 가장 존경받는 노조 운동가 중 한 명이며, 고든 브라운영국 총리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노조 지도자 중 한 명>¹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그도 KGB 첩자였다.


1 『가디언』, 2009년 4월 24일자에 실린 잭 존스의 부고에서 재인용 - P182

그가 살펴본 두 번째 파일의 주인공은 노동당의 좌파 의원인밥 에드워즈였다. 전직 부두 노동자, 스페인 내전 참전, 노조 지도자, 장기적인 KGB 첩자라는 점이 모두 존스와 똑같은 에드워즈는1926년 청년 대표단을 이끌고 소련을 방문했을 때 스탈린과 트로츠키를 만났다. 그리고 오랫동안 정치가로 활동하면서 고급 기밀에 접근할 수 있고, 기꺼이 정보를 넘겨주는 정보원임을 증명했다. - P184

이런 거물들 외에 여러 조무래기의 기록도 파일에 들어 있었다. 예를 들어 베테랑 평화 운동가이자 전직 의원이며 노동당 사무총장인 페너 브록웨이 경이 그런 경우였다. 이 <비밀 접촉자>는 KGB와 오랫동안 거래하면서 소련 정보기관으로부터 많은 호의를 받았으나 그 보답으로 그다지 가치 있는 결과를 생산하지 못한 듯했다. - P184

모든 정보기관이 그렇듯이 KGB도 현실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희망 사항만 좋으며 없는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파일에 수록된 인물 중에는 첩자가 아니라 잠재적인 친(親)소련성향으로 보이는 좌파 인사에 불과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 - P185

하지만 모든 자료 중에 단연코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문제의 마분지 상자에는 300쪽 분량의 폴더와 절반쯤 되는 분량의 폴더가 들어 있었다. - P185

첩자 붓은 저명한 작가 겸 웅변가, 베테랑 좌파 의원, 노동당 지도자이며 만약 다음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한다면 영국의 총리가 될 마이클 풋이었다. 이 나라 영국에서 여왕 폐하의 충성스러운 야당을 이끄는 지도자가 KGB에 매수된 첩자였다는 뜻이다. - P186

 대처는 인기가 없었다. 여론 조사에서 노동당의 지지도는 보수당을 10퍼센트 포인트 이상 앞섰다. 1984년 5월로 예정된 차기 총선에서 마이클 풋이 승리해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붓 파일이 공개된다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끝날터였다.
페트로프 소령은 확실히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는지, 암호명을 고를 때 뜻과 붓으로 말장난하고 싶다는 유혹에 저항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만 제외하면 서류의 내용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 P187

그 뒤로 계속 마이클 풋에게 지불된 돈이 목록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날짜, 금액, 돈을 건넨 요원의 이름이 적힌 표준 양식의 서류였다. 고르디옙스키는 이 목록을 죽 훑으면서 대략 계산을 해보았다. 1960년대에 10~14회 돈이 지불되었고, 한 번에 지불된 액수는 100~150파운드였다. 따라서 총액을 어림잡으면 1천5백 파운드, 현재 가치로 3만 7천 파운드(4만 9천 달러)가 넘는 돈이었다. 그 돈이어디에 쓰였는지는 불분명하다. - P188

풋과 KGB 담당관의 만남은 대략 한 달에 한 번씩 있었다. 소호의게이 후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만날 때가 많았다. 모든 만남은 사전에 세심하게 계획되었다. 만남에서 나눌 이야기의 윤곽을 사흘전 모스크바에서 보내 주었다. 만남의 결과를 기록한 보고서는 먼저런던의 PR 라인 책임자와 레지덴트가 차례로 읽은 다음 모스크바 중앙으로 보내졌다. - P188

풋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노동당 내부의 투쟁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물론, 베트남 전쟁, 케네디 암살이 낳은 군사적 결과와 정치적 결과, 디에고 가르시아섬을 미군 기지로 개발하는 문제, 한국 전쟁의 미해결 이슈들을 협의한 1954년의 제네바회의 등 뜨거운 주제들에 관한 노동당의 태도에 대해서도 정보를제공했다. 풋은 소련에 정치적 통찰력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독특한위치에 있었으며, 소련의 주장을 잘 받아들였다. - P190

붓은 독특한 종류의 첩자였다. KGB가 생각하는 첩자의 정의에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소련 관리들과의 만남을 숨기지 않았다(그렇다고 널리 광고하지도 않았다). 대중에게알려진 공인인 만큼 어차피 은밀한 만남이 불가능하기도 했다. 그는 <여론의 창조자>였으므로, 단순한 첩자라기보다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에 더 가까웠다. - P190

(전략). 자신에게 정보를 주는 한편 다신이 제공한 정보를모스크바로 전달하는 일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 이 짐작이 옳다면 그는 말문이 막힐 만큼 순진한 사람이었다.
1968년에 붓 작전의 기조가 바뀌었다. 프라하의 봄 이후 풋은 소련을 강렬히 비판했다.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항의 시위에서 그는이렇게 선언했다. 「소련의 행동은 사회주의에 대한 최악의 위협이 바로 크렘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⁹ - P191

풋은 법을 어기지 않았다. 소련 스파이도 아니었다. 그러니 조국을 배신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KGB의 지시를 받았고, 그들의 돈도 비밀리에 받았다. 그리고 적국이자 전체주의 독재 국가인 소련에 정보를 제공했다 - P191

마이클 풋은 KGB에 쓸모가 있었고, 완전히 바보스러웠다.
고르디옙스키가 붓 파일을 읽은 때는 1981년 12월이었다. 그다음 달에 그는 그 파일을 다시 읽으면서 그 내용을 최대한 암기했다. - P192

영국이 전쟁 중일 때, 고르디옙스키는 KGB 내에서 혼자 영국 편을 들었다. 자신이 비밀리에 충성을 맹세한 그 나라에 과연 발을 디딜 날이 오기는 할지 걱정스러웠다. - P193

KGB의 제5부가 마침내 고르디옙스키에게 영국에 가도 좋다는허가를 내주었다. 1982년 6월 28일, 그는 런던행 아에로플로트 항공기에 올랐다. 아내 레일라와 이제 각각 두 살과 9개월이 된 두 딸도 함께였다. - P193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고르디옙스키의 마음속에는 지난 4개월동안 KGB 문서고에서 긴장 속에 비밀스레 읽은 문서들의 내용이 무겁게 쌓여 있었다. (중략) 그래서 영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PR 라인 요원의 이름, 런던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모든 KGB 요원의 이름이 그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었다. <제5의 사나이>¹⁰의 신원을 알려 주는 증거, 소련으로 망명한 킴 필비의 활동, 노르웨이의아르네 트레홀트가 소련의 스파이라는 추가 증거도 머릿속에 있었다.

10 킴 필비를 포함해서 소련 간첩으로 활동했던 케임브리지 5인방 중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한 사람 옮긴이주 - P193

참조

붓 파일의 상세한 내용은 1995년 2월 고르디옙스키와의 회고록 인터뷰에 들어 있다.
『선데이 타임스』 문서 보관실 소장. - P194

2부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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