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인내의 시간
1635년, 엑상프로방스
편지로 세계를 잇다
새벽 4시, 보름달이 떠 있다. (중략). 그들은 어느 귀족의 저택 지붕에서서 뭔가를 측정하고 기록하는 중이다. 교구 사제와 제본업자도 그틈에 섞여 번갈아 가면서 길쭉한 황동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 P27
정작 이 모든 활동을 지휘한 주인공은 지각이다. - P27
그의 이름은 니콜라클로드 파브리 드 페이레스크 NicolasClaude Fabri de Peiresc. 이 집의 주인이자 자연철학자이며, 무엇보다도 위대한 유럽의 지성들을 잇는 연결자다. - P29
그런데도 그는 이 시간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한다. (중략). 그는 이 야심찬 실험이 성공할지 도무지 확신이 없다. 아마추어 수십 명이 참여해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동시에 하나의 천체 현상을 관측하고 이를 정확히 기록하는 작업이다. 그가 몸소 일일이 협조를 구했다. - P28
그날 오전 늦게 페이레스크는 진홍색 양탄자와 칙칙한 유화들이 겹겹이 쌓인, 터져나갈 듯한 자기 서재에서 암울한 순간에도 자신을 지탱해주는 활동으로 넘어간다. 다름 아닌 편지 쓰기다. - P29
그는 깃펜에 잉크를 찍어 누르스름한 종이 위에 단어들을 휘갈겨 쓴다. "준비한게 모두 허사가 되었습니다."⁴ - P30
1장 인내의 시간 (1635년, 엑상프로방스)
4 Peiresc to Gassendi, Aug. 29, 1635, in Lettres de Peiresc, 4:535. - P458
편지의 시대
오늘날에 와서 보면, 당시 나온 지 200년도 되지 않았던 인쇄기는 페이레스크 생전엔 혁명적인 매체였다. 팸플릿과 책을 복제할수 있게 되면서 마르틴 루터 같은 반체제적인 성직자가 자신의 의견을 퍼뜨리고 금세 추종자를 얻었다. - P30
페이레스크가 살던 시절에 우편이 신속해지고 상대적으로 믿을만해지면서 이런 상황은 달라졌다. 규칙적인 편지 교환이 가능해지면서 공동 작업, 즉 각종 이론을 공유하고 논쟁할 수 있게 됐다. - P30
17세기는 단번에 비약적으로 그런 일을 해낼 만한 시대가 아니었다.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처럼 끝을 맞고 싶다면 모를까. 이탈리아 도미니코회 수사였던 브루노는 당시로부터 불과 30년 전에, 로마의 피오리 광장에서 벌거벗겨진 채 말뚝에 묶여 산 채로 불태워졌다. 우리가 사는행성이 우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내비쳤다는 이유였다. - P31
과학자들로 구성된 관현악단을 꿈꾸다
월식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건 시간의 표지, 즉 어디서나 보이는 하늘에 뜬 거대한 시계일 뿐이었다. 그래도 페이레스크는 이 시계가 숱한 일생의 과제 가운데 하나를 완수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랐다. 그가 평생 추구한 과제들을 일부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P32
그는 지중해를 그리고 그 바다를 둘러싼 사람들과 문화에 관계된 거라면 뭐든 사랑했다. 무엇 하나 흥미롭지 않은 게 없었다. - P33
편지 공화국의 대표 시민
그로부터 25년이 지났다. 여전히 페이레스크는 여러 사람이 한날한시에 밤하늘을 올려다보게 해서 경도를 계산하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다만 이제는 달을 좀 더 가시적인 기준점으로 바꾸어 망원경으로 월식을 관찰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P35
편지 공화국은 과학 학술지(이런 형태의 출판물이 나오기 전일 뿐만아니라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이라는 개념 자체도 존재하기 전이었다)의 편집 위원회와 유사한 협업 프로젝트로서 조각보처럼 이어진편지들로 유지되었다. - P36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페이레스크의 서재를 얼핏 들여다보기만 해도 편지 공화국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깃들었는지, 관심사가 얼마나 다방면에 걸쳐 있었는지가 드러난다. 그의 저택에는 편지가 끊임없이 도착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 P37
모으고 관찰하고 비교하라. 이게 바로 편지 공화국의 행동 윤리였다. - P37
이 시기는 학문이 전문가들만의 전유물로 발전하기 전이었기에 페이레스크 같은 아마추어 박식가는 식물학, 동물학, 수비학, 그리고 천문학 등 호기심이 데려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갔다. - P38
만물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데 이토록 헌신한 페이레스크는 의식적으로 금욕적인 생활을 선택할 정도였다. 부친이 프로방스 회계청장 딸과의 결혼을 권하자 페이레스크는 "아내와 자식들을 챙기다 보면 연구 활동을 마음껏 이어나가지도, 박식한 사람들을 후원하지도 못할 거라고 설명했다.²¹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 P39
21 Pierre Gassendi, The Mirrour of True Nobility and Gentility, trans. William Rand (London, 1657), 162-63 - P459
이 편지들은 단순한 일대일 소통 이상이었다. - P39
페이레스크가 경도 프로젝트에 다시 전념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도움을 청한 사람들은 바로 편지 공화국의 모든 친구와 협력자였다. - P40
인내를 기르는 도구
지도를 다시 그린다는 게 별로 대단한 이유 같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편지들은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페이레스크는 이 잠재적 관찰자들이 자연과 새로운 관계, 익숙함이나 안전함과는 먼 관계를 맺도록 살살 끌어당겨야 했다. - P41
믿음이라는 문제
하지만 그의 앞에 놓인 가장 큰 도전 과제는 이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교양인들이 주로 독실한 종교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선교사거나 은둔하는 수도승이었다. - P43
자연철학에 쓸데없이 끼어드는 것에 대한 종교인들의 불안과 우려만으로도 문제인데, 경고가 되는 갈릴레이의 사례까지 있었다. - P44
갈릴레이의 저서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는 신성모독으로 지탄받고 금서가 됐고, 갈릴레이는 남은 평생 가택연금형을 받았다. 가톨릭교회의 분노는 편지 공화국 전체를 벌벌 떨게했다. - P44
페이레스크는 가톨릭교회가 가장 중시하는 계율에 의문을 제기하는 지식인들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어렵사리 가톨릭 교회의 호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 P45
이처럼 조심스러운 성격은 페이레스크가 교황의 조카인 권세가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Francesco Barberini 추기경에게 갈릴레이의 감형을 호소하는 순간에 여실히 드러났다. - P46
(전략). 하지만 자기 눈엔 갈릴레이가 탄압받는 천재로 보인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었고 감추지도 않았다. 이런 읍소와 가젤 같은 선물이 효과를 발휘한 듯했다. 가택연금장소를 피렌체로 옮겨달라는 갈릴레이의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 P46
알레포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카푸친회 선교사 미슐랑주 드 낭트에겐 실질적인 측면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 성직자는 신학적 우려를 표했다. - P47
과학하는 법을 가르치다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건 첫 번째 단계에 불과했다. 페이레스크는 체계적으로 정확히 관찰하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신뢰할만한 조사 결과를 얻으려면 몇 가지 기준을 마련해야 했다. 그런데이런 생각 역시 당대의 혁신이었다. - P48
1635년 5월, 카이로에서 월식을 보게 될 아가탕주 드 방돔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페이레스크는 관찰 장소와 방법을 상당히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 P48
사실 아가탕주는 배움이 빠른 사람은 아니었다. 두서없는 그의 월식 보고서를 읽자마자 페이레스크는 다음번 월식에 대비해 그를 좀 더 제대로 준비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P49
많은 물품이 지중해를 건너갔다. 다르코 쪽에선 보석으로 장식한 단검과 살아 있는 카멜레온 그리고 고대 카르타고 주화가, 페이레스크 쪽에선 포도주가 담긴 술통과 함께 특정 아랍 서적을 구해달라는 요청 그리고 마침내는 경도 프로젝트와 여기 참여하는 방식을 전하는 3500단어가 건너갔다. - P50
페이레스크가 협력자들을 움직이기 위해 몇 단어나 썼는지 세는것은 진 빠지는 일이다. 1635년 봄과 여름 내내 편지들이 그들을 부추기고 구슬리고 추켜세웠다. 페이레스크는 그들에게 과학 실험을 하는 법뿐 아니라 다르게 생각하는 법, 즉 과학자가 되는 법을가르쳤다. - P51
측정의 날
8월 28일 밤, 페이레스크가 애타는 마음으로 자택 옥상을 서성이는 동안 지중해 전역에서 아마추어 관찰자들이 최선을 다해 그의 상세한 지시를 따랐다. - P51
월식이 있고 수개월 동안은 기대가 컸다. 자꾸만솟는 의구심, 이런저런 작은 사고 소식, 망원경을 잃어버렸다는 전갈에도 페이레스크는 다양한 관찰값이 하나로 합쳐져서 뭔가 새로운 발견에 이르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협력자들에게 끝없이 되묻는 질문으로 가득 채운 그의 편지는 온통 불안을 드러냈다. - P53
여러 곳 중에서도 로마, 이집트, 파도바, 나폴리, 레바논, 피렌체, 튀니스, 파리, 네덜란드, 독일 등지에서 쓸 만한 측정값이 모두 들어오자 페이레스크는 기존 지중해 지도에 표시했다. - P54
현실에 맞서는 인식을 시험하는 이 새롭고도 여전히 위험천만한 방식을 실천하기 위해 그는 편지로 제자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선원과 지도 제작자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도 선교사와 상인으로 구성된 분산된 집단이 수행한 실험의 바로 이런 측면이었다. - P55
그 월식이 있고 나서 채 2년이 지나지 않은 1637년 6월 24일, 향년 56세였던 그는 한창 일이 진행되던 와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하던 수많은 과제는 거의 모두 미완으로 남았다. 활기 넘쳤던 편지공화국은 그의 죽음으로 갑작스럽게 진공 상태가 되었다. - P56
무엇보다 방대한 그의 아카이브를 구성한 10만 장의 서류야말로 가장 위대한 그의 기여였다. 그것은 소통, 즉 그가 매일 편지를 쓰는 데 바친 수많은 시간의 유물이었다. - P56
페이레스크가 서재에 남긴 수많은 미완의 과제 중에는 달 표면의 지도를 그리겠다는 계획도 있었다. 그는 20년 넘게 정확한 달의풍경을 구현하려고 애썼다. - P57
2장
응집의 날
1839년, 맨체스터
청원이 불씨를 지피다
오코너는 전국을 돌면서 청원이 노동자를 위해 무엇을 할수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청원서에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았다. "반 페니짜리 종이 한 장, 펜 한 자루, 잉크 몇 방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청원서를 쓸 수있다." - P61
수청원서를 펼치니, 서명으로 가득한 수많은 페이지를 하나로 이어붙인 길이가 약 4800미터에 달했다. 청원인은 땀흘려 먹고사는 사람들이었다. - P61
. 그것은 새로운 유권자층을 형상화한 물리적 실체였다. - P61
탄원서는 아주 급진적인 바람으로 시작했다. "존경하는 하원에서 이 청원을 가장 진지하게 고려해주시고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 정신이 건강하고 범죄에 물들지 않은 모든 성인 남성에게 의회에서 일할 의원에게 투표할 권리를 인정하는 법을 통과시켜주시기 바랍니다."³ - P62
노동자 계급의 절박함이 고스란히 담긴 청원서가 문제없이 의회안으로 들이닥칠 수 있었던 것은 한 사람의 에너지와 자존심 덕 분이었다. - P62
1775년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가 표현한 바에 따르면 "평화적이고 합헌적인 단 하나의 방식"이었다.⁴ - P63
12장 응집의 날 (1839년, 맨체스터)
4 Correspondence of the Right Honourable Edmund Burke, ed. Charles William, EarlFitzwilliam, and Richard Burke (London: Francis & John Rivington, 1844), 2:61. - P460
그 청원서는 새롭게 자각한 노동자 계급에게 목표를 주고 그들을 하나로 묶으며 공장 바닥 위와 좁고 눅눅한 광부들의 생활공간 속에 감돌던 분노의 입자를 그 이상의 뭔가로 바꿨다. - P63
타고난 연설가 오코너는 미친 듯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서명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청원서가 의회에 제출되기 전해에 그는 중요한 연설을 147차례나 했고, 길에서 123일을 보냈다.⁵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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