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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대만금마장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 관객상을 거머쥔 데 이어 2024 홍콩금상장영화제, 2024 홍콩감독조합상에서 연이어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젊은 창작자가 등장했다. 장편 데뷔작 <연소일기>로 잠재력을 인정받은 탁역겸 감독은 자살과 우울증이라는, 자국 홍콩이 마주한 사회문제를 소년요우제(황재락)의 삶에 투영한다. 요우제의 부모는 또래보다 늦되는 그를 영재 동생 요우쥔(하백염)과 비교하며 매순간 몰아붙인다. 부모의 기대치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요우제에게 돌아오는 건 그를 무시하는 주변인들의 가시 돋친 말뿐이다. 탁역겸 감독은 "육체적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치유될 수 있지만,
말로 인한 상처는 평생 마음에 남는다"며 타인의 말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살과 우울에 대한 깊은 이야기

<연소일기>
탁역겸 감독 - P20

"우리 다음에는 꼭 형도 데리고 여행 가요"라는요우쥔의 대사가 마음에 남았다. 형이 죽었다는걸 알면서도 요우쥔은 부모에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우울증 이론의 5단계 중 첫 단계는 ‘부정‘인데나는 이것이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몇년 전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처음 보인 반응도 요우쥔과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배경들을 요우쥔의 반응에 적용했다.


요우제가 삶을 포기하지 않는 전개를 생각해본적 있는지.

있다. 만약 요우제가 살아남아 성장했다면 부모에게 반항하고 심지어 맞서 싸우기 시작하는청소년이 됐을지도 모른다. - P20

홍콩에서 작품의 반응이 무척 좋았는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안타깝게도 홍콩의 자살 문제가 내가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심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연소일기>를 관람할 한국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영화의 주제가 무겁고 진지해 대중이 쉽게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살과 우울에 관해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은 관객에게는 작품이 꼭 닿길 바란다. 나도 그 주제에 관해 궁금한 것이 정말 많다. - P21

작별하지 않는다

빅토르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사 매혹적인 이유에 관하여


송경원

운명은 죄가 없다. 삶의 무게를 저티기 힘들 때 우하응 이 묵직항 울림의 단어에 너무 많은 책임을 미루곤 한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었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손을 놓을 때 그 무기력한 낙담조차 정해진 운명일까. (중략).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사라진 유명 배우를 추적하난 어느 영화감독의 걸음에 동행하는 영화다. 노년의 영화감독 미겔 가라이(마놀로 솔로)는 한 TV프로그램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후략). - P44

운명과 자유의지

운명이란 단어를 사용할 땐 앞뒤 행간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설사 세상의 일들이 모두 결정되어 있고 바꿀 수 없다는 게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 사실을 어떤 결정의 이유로 삼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중략).
짐작하겠지만 이 영화가 제5ㅣ하는 선 답을 찾는 게임이 아니다. 차라리 열쇠의 형태를 감상하는 시간에 가깝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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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바지. SF 단편 만화집 세트 - 전2권 - 하우스도르프 연결공간 + 슈뢰딩거의 고양희
반-바지. 지음 / 김영사 / 2024년 12월
평점 :
미출간


인터넷에서 자주 봤던, sf에 관한 좋은 단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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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윤리학에 있어서도, 윤리학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어려움과 불일치는 주로 아주 단순한 원인에 기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그 원인은 당신이 대답하고 싶어 하는 물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먼저 정확하게 규명하지 않은 채로 그 물음에 답하고자 시도하기 때문이다. - P5

 어쨌든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시도를 아예 하고 있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작업을 빠뜨린 결과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철학자들은 ‘예‘나 ‘아니요‘, 그 어떤 대답도 정확하지 않은 물음에 대해 이러한 대답이 참임을 입증하려고 여전히 무진장 애를 쓰고 있다. - P6

즉,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 모든 윤리학적 명제가 증명되거나 반박되는, 혹은 확증되거나 의심스럽게 되는 증거의본성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게 된다. 일단 우리가 이 두 물음의 의미를정확히 인정하면, 이러한 물음에 대한 특정의 모든 대답에 대해, 이를 옹호하는 논증이나 반박하는 논증에 정확히 어떠한 종류의 이유들이 관련되어 있는지가 명백하게 밝혀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 P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증명과 반박에 꼭 필요할 뿐만 아니라 관련되어 있는 증거의 종류는 정확하게 규정될 수 있다.
이러한 증거는 두 종류의 명제를, 그리고 오직 두 종류의 명제만을 포함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즉, 이러한 증거는 우선 첫째로 해당 행위의 결과와관련된 진리, 즉 인과적 진리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러한 증거는 또한 제일의 혹은 자명한 종류의 윤리학적 진리도 포함한다. - P7

따라서 이 책의 주 목적 중 하나는 칸트(Kant)의 유명한 책 제목을 약간 변경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즉, 나는 ‘과학적임을 자임할 수 있는 미래 윤리학을 위한 서론(Prolegomena to any future ethics that can possiblypretend to be scientific)‘에 대해 글을 쓰고자 노력해왔다. 달리 말해 윤리학적 추론의 근본 원칙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자 노력해왔다. - P8

나의 첫 번째 부류의 윤리학적 명제들은 증명이나 반박이 불가능하다는사실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 가끔 나는 이를 ‘직관‘이라고 부르는 시지웍(Sidgwick) 교수의 용례를 원용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일상적인 의미의 직관주의자가 아님을 알아주기를 간청하는 바이다. 시지윅 교수 자신은 자기의 직관주의와 일반적으로 직관주의라 불리는 상식적인 입론을 구별시켜주는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 중요성을 결코 명쾌하게 깨닫지 못한것 같다.  - P9

엄밀한 의미의 직관주의자는 두 번째 부류의 명제, 즉 어떤 행위에 대해 그 행위가 옳다고 혹은 의무라고 주장하는 명제는 그러한 행위의결과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증명 내지 반증할 수 없다고 역설하는 것에 의해 차별화되는 자를 말한다. - P9

이 책이 이미 완성되었을 때,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다른 윤리학자의 입장에서보다 나 자신의 입장과 훨씬 더 흡사한 입장을 브렌타노(Brentano)의 「옳고 그름에 관한 지식의 기원」¹이라는 논문에서 나는 발견했다. 브렌타노는 다음 네 가지 점에서 나의 입장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 같다.

1) Franz Brentano, "The Origin of the Knowledge of Right and Wrong. Cecil Hague영역, Constable, 1902. 나는 이 책에 관한 서평을 썼는데, 나는 이 서평이 The InternationalJournal of Ethics(Oct., 1903)에 게재되기를 희망한다. 나의 입장이 브렌타노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는 이유를 좀 더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 나는 이 서평을 언급할지도 모른다. - P10

 즉,
(1) 모든 윤리학적 명제를, 그것들이 단일의 고유한 객관적 개념을 진술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정의된다고 간주하고 있다는 점, (2) 이러한 명제들을 나와 똑같이 두 종류로 날카롭게 구분하고 있다는 점. (3) 첫 번째 종류의 명제는 증명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점, 그리고 (4) 두 번째 종류의명제를 증명하는 데 관련된 꼭 필요한 증거의 종류에 관한 그의 주장 등에있어서 그의 입장은 나의 입장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 P10

지금 내 책을 다시 쓸 수 있다면, 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책을 썼을것이며, 그랬다면 훨씬 더 나은 책이 되었으리라고 나는 믿고 싶다. 그러나 새롭게 쓴다 해도 나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욕심으로 인해 그에 상응하는 정확성과 완결성은 얻지 못한 채, 오히려 내가 전달하고자 그렇게 애쓴 생각들을 내가 지금보다 더 모호하게 만들어버리지 않았을까 의심스럽다.
사정이 어찌 되었든 간에, 현재의 내용대로 이 책을 출간하는 것이 아마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비록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이러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전히 결점으로 가득 차있음을 나는 겸허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

트리니티 대학, 케임브리지(Trinity College, Cambridge)
1903년 8월 - P11

제1장

윤리학의 주제와 대상

1.
우리의 일상적인 판단 가운데, 그 진위 여부에 윤리학이 확실하게 관련되어 있는 몇몇 판단을 지적하기란 아주 쉬운 일이다. - P39

이러한 것들이 윤리학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지만, 정작 윤리학의 영역을 규정하려는 논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참으로 윤리학의 영역은 이 모든 판단에 공통적이면서 동시에 이러한 판단에만 고유한 그 무엇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포함하도록 규정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다음과 같이 묻지 않을 수 없다. - P40

2.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예들에 국한하여 논의하는 한, 이러한 예들은 모두 ‘행위(conduct)‘¹의 물음과 관련되어 있다고 우리가 말한다고 해도 큰잘못이 없을 것이다. 즉, 이러한 예들은 우리 인간 행위에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나쁜가. 그리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의 물음과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이 선하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언제나 그 사람이 올바르게 행동한다는 것을 대개 의미하기 때문이다.


:.
1) [역자 주] ‘conduct‘는 명사적 성격이 강한 행위‘로, ‘action‘은 동사적 성격이 강한 ‘행동‘으로구분하여 번역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두 개념이 의미상 차이가 없을 때에는 혼용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 P40

물론 윤리학이, 선한 행위가 무엇인가의 물음과 관련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P41

즉, 모든 행위가 선한 것이 아니며, 일부 행위는 악하고 또 일부 행위는 아예 선과 무관하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행위 외의 다른 것들도 선할 수가 있다. 만약 행위 외의 다른 것도 선하다면, ‘선‘은 행위 및 다른 것들에 공통적인 어떤 속성을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 P42

선 일반에 관해 어떤 확실한 결론을 얻은다음, 선한 행위의 물음을 해결하고자 시도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우리라 나는 기대한다. 왜냐하면 ‘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이미 꽤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제일 물음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악인가?"이다. 그리고 이 물음(혹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논의에 대해 나는윤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왜냐하면 어쨌든 윤리학은 이러한 논의를 포함함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 P42

3.
그러나 이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우리 각자가
"나는 지금 선한(good) 일을 하고 있다."고 혹은 "나는 어제 좋은(good) 저녁 식사를 했다."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진술들은, 비록 아마도 틀린 대답일 수도 있지만, 그 당사자에게는 지금 다루고 있는 우리의 물음에 대한 일종의 대답이 될 것이다.²

2) [역자 주] 영어 ‘good‘은 우리말로 ‘선한‘, ‘좋은‘ 혹은 ‘착한‘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
물론 윤리학 원리에서 무어는 선의 정의 물음을 주로 다루기에 대부분의 경우 ‘good‘을 선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무어는 도덕과 무관한 사물에 대해서도 ‘good‘이라는형용사를 사용한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 역자는 ‘선한‘이나 ‘선‘으로 번역하지 않고, 일상 어법에 맞게 ‘좋은‘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좋은 의자‘라는 표현은 적절하지만, ‘선한 의자‘라는표현은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What is good?"의 문장처럼 정의와 연관될 때 이는 그냥 ‘선‘을 뜻하기도 한다. 또 ‘the good‘의 경우도 사물을 포함하는 경우에는 ‘좋음‘으로,
도덕적 의미로만 사용될 경우에는 ‘선‘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 P43

4.
그러나 "무엇이 선인가?"라는 물음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책은 좋은 것이다."라는 대답은, 어떤 책은 참으로 아주 나쁘기 때문에 명백한 거짓이지만,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될 수도 있다. 그 대부분에 대해나는 다룰 생각이 없지만, 이러한 종류의 윤리 판단은 참으로 윤리학에 속한다. "쾌락은 선이다."라는 판단도 마찬가지이다. - P4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윤리학‘과 같이 덕의 목록을 포함하는 윤리학 저술들에서 내려지는 판단들은 바로 이러한 종류에 속한다. 그러나 이는 대개 윤리학과는 전혀 다른 탐구로 간주되고 있는 학문, 즉 훨씬 평이 좋지 않은 결의론(Casuistry)의 실질적 내용을 구성하는 판단과 정확히 동일한 종류의 판단이다. - P44

 아무튼 결론은 보다더 특정의 문제를 다루는 반면에, 윤리학은 보다 더 일반적인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이는 이 두 학문이 정도에 있어서 다르다는 의미이지 결코 그유에 있어서 다르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이는 비록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의 ‘특정의(particular)‘와 ‘일반적인(general)‘
이라는 개념에도 보편적으로 타당하게 적용된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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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인천 제물포항이 개항장이 되면서 서양의 외교관, 선교사, 상인 등 많은 사람들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인천에서 한성까지 가는 방법은 걷거나 우마차를 타는 것뿐이었다. 못해도 열두 시간이 소요되는 길이었기에 사람들은 인천에서 하루 머물고 다음날 이동하곤 했다. 이에 눈치 빠른 무역상 호리 히사타로가 제물포항 근처에 이층짜리 목조건물을 세우고 숙박영업을 시작했다. - P59

"네가 말하는 니꼴라 유치원은 대불호텔과 좀 비슷해.‘
말을 마친 진이 얼음이 가득 든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켰다. 날씨가 꽤 쌀쌀한데 춥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뜨거운 라테를 시켜놓고 입에도 대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서 바로 핸드폰으로대불호텔을 검색했다. 이상했다. 대불호텔은 1978년에 철거되어 터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와 동갑내기인 그가 호텔을 봤을 리없었다. 나는 살짝 짜증을 냈다. - P60

인연이란 참 이상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렇다. 그때 우리는 친구였고, 아마 그런 관계로 계속 남을 수도 있었다. 아니,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애초에 우리는 어떤 인연도 맺지 않을 수있었다. 하지만 우연은 언제나 어떤 계기를 만들고, 계기는 사람들의 관계를 어떤 시작점 혹은 마침표로 훌쩍 데려다놓는다. - P60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터미널로 가는 길에 짧게 대화를 나누었는데 어쩐지 죽이 좀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별 내용은 없었다. 연예인 이야기 하는 일, 취미, 가본 여행지.
이후 우리는 종종 따로 만나기 시작했다. 역시 별다른 의미는없었다. 비슷한 대화가 반복됐다. 연예인, 취미, 여행지. 아, 우리만의 주제가 있긴 했다. 그러니까 엄마들. 다소 유난스럽고 소녀같은 우리 엄마들에 대해서. - P62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해 내 마음을 그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은연중에 표현하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모른 척했다. 그래서우리는 우리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다. 늘 다른 사람들에대해 이야기했다. 엄마, 옹주, 황녀, 박지운・・・・・・ 그리고 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 음험한 비밀을 알게 된 여인. - P63

.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묘사하는 니꼴라 유치원의 풍경과 분위기가 대불호텔의 빈터와 주변풍경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인천우체국, 일본우선주식회사, 일본제1은행, 답동성당 같은 근대 건축물로 이루어진 인천 중구의풍경을 말이다.
그는 덧붙였다. 아마 내가 그 동네에 직접 가보면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더니 물었다.
"어때? 한번 가볼래?"
나는 조금 당황했다. 물론 나는 가보고 싶었다. 굉장히 흥미가 생겼으니까. - P64

걱정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어차피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만 주고받을 텐데. 아무 일도 없을텐데. 나는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중요한 건 나의 원한이다. 이걸 돌려주는 일이다. 그게 가능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 해볼게. 어디 한번 해보자. 나는 진에게 대답했다.
"그래, 가보자. 직접 한번 보지 뭐."


그래서 그 주 목요일 아침, 인천으로 향하는 1호선 전철을 탔다.
그렇게 나는 대불호텔에 가게 되었던 것이다. - P65

그러나 나를 반긴 건 옛 시절의 분위기가 아니라 회색 쇠창살과 그 안의 황량한 빈터였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더 을씨년스러워보였다. 심지어 쇠창살 울타리 입구에는 단단해 보이는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진 채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전시관을 목표로 한 건물 재건 공사에 들어가니 완공시까지 출입을 불허합니다. - P65

"아,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 좀 찾아보고 올 걸 그랬다."
진이 옆에서 눈치를 보며 말했다. 미안해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짜증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근처 생활사 박물관에 한번 가보자며 나를 격려했다. 어쩌면 거기에는 도움이 될 만한 자료가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계속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쇠창살 사이를 노려보았다. 봐, 네가 하는 일은 다 이 모양 이 꼴이야. 결국 이렇게 됐잖아?
뭐가?
대체 뭐가? - P66

"저 사람 저기서 뭐하는 거지?"
내가 중얼거리자 진이 옆에서 대꾸했다.
"뭐라고?"
"저기 봐. 사람이 있어. 어떻게 들어간거지?"
그가 쇠창살 가까이 다가왔다.
"어디에?"
"저기 있잖아."
나는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자리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챘다. 나는 홀린 기분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 P67

나는 그를 쳐다봤다. 보애 이모를 꼭 닮은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웃지 않아도 늘 미소가 걸려 있는 다정한 표정. 그러나 그날그 순간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갑자기 외할머니가 요즘 부쩍 그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
"외할머니?"

아, 박지운. - P68

나는 그를 재촉했다. 그가 난처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불안한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고연주는 녹색 재킷이 잘 어울렸대."
나는 방금 목격한 여자를 떠올렸다. 녹색 재킷을 입은 호리호리한 여자. 그녀가 분명 내 앞에 있었다. 어쩌면 이건 꿈이 아닐지도. 그래. 이건 꿈이 아니다. 결코 꿈이 아니야.
그가 심호흡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1955년에 대불호텔에서 여자 한 명이 죽었대."
아아, 세상에. - P69

물론 그가 내게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다 털어놓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나 역시 내 마음을 그에게 드러내지 않으려 매우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피하며 망설이는 순간, 나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정말로 친구에 불과하구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더 먼 사이일지도 모르겠구나. - P70

"다 거짓말일 수도 있어. 우리 외할머니는 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별난 사람이거든."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상관없어." - P71

그리하여 우선, 1918년으로 거슬러올라가는 것이 좋겠다. 그해호리 가문은 대불호텔을 중국인 라이더위안?徳?에게 매각했다.
오랜 경영난 때문이었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사람들이 인천에서 굳이 하루를 머물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 P71

자, 드디어 고연주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녹색 재킷이 잘 어울리던 여자. - P72

아버지가 죽고 가세가 기울면서 고연주는 식구들과 헤어졌다.
어머니와 막냇동생은 큰오빠 내외가 사는 서울로 떠났다. 고연주는 따라가지 않았다. 큰오빠에게 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결정을 하는 데는 선교사들의 배려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고연주가 그들의 숙소에 기거하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때 그녀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 P73

소문이 돌았다. 선교사들이 귀국할 때 ‘가장 뛰어난 학생을 데리고 갈 거라고, 그녀는 누군가의 호의가 사라지면 그와 함께 내동댕이쳐질지 모르는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러기위해서는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교사들을 통해 알게 된 나라 미국. 하나님의 나라 미국, 평등하고 풍요로운 나라 미국, 미국, 미국, 아, 아메리칸드림. 거기에 도착하면 누구에게도신세지지 않고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아, 아름다운아메리칸드림. 그녀는 오직 이 나라를 떠나기 위해 공부했고, 선교사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 P74

뢰이한.

그는 라이 가문의 일원이자 중화루의 관리인이었다. 그는 가문사람들이 이민을 갈 때 함께 가지 않았다. 1955년에도 중화루에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박지운은 전남편이었던 뢰이한에게 들은이야기를 자기 방식대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나는 어디까지가 박지운이 직접 목격한 일이고, 어디서부터가 뢰이한에게 들은 이야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 P78

나는 여전히 그들을 모른다. 어쩌면 모르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정리하는 일에 더더욱 매달린 건지도 모르겠다. 조금이라도이해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실체를 느껴보기 위해서 이야기의 또다른 등장인물, 지영현을 화자로 내세우면서까지 말이다.

그것이 나의 최선이었음을 우선 말해두고 싶다. - P79

2부

go away, Eleanor,
we don‘t want you any more,
not in our Hill House,
go away, Eleanor,
you can‘t stay here

- Shirley Jackson, The Haunting of Hill House

1

그들은 목적지가 분명해 보였다. 특히 남자 쪽이 그랬다. 그는툭 불거진 매부리코에 덥수룩한 수염이 눈에 띄는 백인이었는데,
배에서 내릴 때부터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있었다. 아마 약도인모양이었다. 꽤 믿음직스러운 정보인 듯했다. 확신에 찬 눈길로종이와 항구 주변을 몇 번 번갈아 바라보더니, 망설이지 않고 곧장 앞으로 걸어나갔으니까. 나는 조금 놀랐다. - P83

나는 여전히 어디서든 겉돌았다. 시장에서, 거리에서, 항구에서,
그리고 당숙모의 집에서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다. 때문에 나는 저 남자의 위풍당당한 걸음걸이와 여유 있는 표정이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이내 큰길을 사이에 두고 그를따라 천천히 걸었다. - P84

그럴 때 연주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했다. 그러니까, 무언가에 매혹된 것 같았다. 그래. ‘매혹‘. 어릴 적, 옆집 친구에게서 배운단어이다. 그 아이는 말했다. ‘매혹되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행동하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 단어를 기억했다. - P84

그 순간, 남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불쑥 돌렸다. 나는 흠칫 놀라 그 자리에 섰다. 다행히 그가 바라본 건 내가 아니었다. 그는내 뒤쪽의 항구를 가리키며 옆에 선 일행에게 뭐라 뭐라 큰 소리로 떠들었다. 일행 역시 백인이었다. 나는 자연스레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자는 남자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는데,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무표정해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남자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 P85

아주 잠시 나는 그녀와 똑같은 머리를 한 나를 상상해보았다. 뻣뻣한 단발 대신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지닌 나. 머릿결이 반짝반짝 빛나는나. 화려하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돋보이는 나.... 어색하기짝이 없었다. 그러다 불현듯, 그 머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 생각났다.
연주. - P86

"손님이 없으니까 아주 별짓을 다 하는구나.‘
정말로 며칠째 손님을 한 명도 못 찾았다. 그리고 벌써 오후 세시가 넘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텅 빈 거리를 혼자 걸었다. 그러다문득, 자리에 멈춰 섰다.
저 두 사람, 어디로 가는 거지? - P88

"아유 루킹 포호텔? 아이 우드 라이크 투 인트로듀스 유..
여자가 남자에게 뭐라고 말을 건넸다. 남자가 대답했다. 나는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아쉽게도 이게 내 영어 실력의 한계였다. 아니다. 이건 실력도 아니었다. 혹시 모를 순간을 위해 연주가알려준 문장을 대충 외워두었을 뿐이다. 나는 늘 한국인들만 상대했다. 어수룩한 부두 노동자들, 가난한 여행자들. 쉴 곳이 필요한 정체 모를 사람들. - P87

와.
이게 웬일이야?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거리를 가로질러 골목으로 뛰어들어갔다. 두 사람보다 내가 먼저 대불호텔에 도착해야 했다. 내가 그들을 데려왔다고 말해야 했다. 그들의 생각이나 판단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고연주,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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