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로 직관적 평가에 의존해 판단할 때, 우리는 누군가가 왜 좋은지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어도 우리의 직관적이고 무의식적인 선택에 상당히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중략).
인간관계란 바로 이러한 직관이 작동하는 영역으로, 인간적 상호작용의 과정은 일련의 일반화되고 언어화된 원칙에 비춘 평가와 반응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 맥락, 분위기, 과거 경험, 그 사람의 전인적 면모를 고려하는 종합적 판단과 반응을 요구한다. - P98

우리는 분명 인간관계에서 많은 판단을 내리며,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진다.
(중략).
긍정적 기대가 긍정적 결과를 유발한다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와 반대되는 ‘골렘 효과Golem effect‘는 타인에 대한 부정적 기대가 실제로 부정적 결과를 유발하는 현상을 뜻한다. 어쩌면 우리는 과도한 경계심으로 골렘 효과를 유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P98

손절과 잠수

고역스러운 평가노동은 ‘자격‘과 ‘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다. - P100

오늘날 학자들은 관점의 독창성이나 사회와 학계에 대한 공헌 등이 아니라 상위 몇 퍼센트 학술지에 얼마나 많은 수의 논문을 남겼는지, 얼마나 많은 연구비를 따냈는지로 평가받는다.  - P100

모든 것이 서열화와 경쟁의 대상이 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대학이건 병원이건 기업이건 간에 이런 식의 평가와 감사를 준비하고 수행하느라 핵심 업무보다 불필요한 서류와 행정 작업에 더많은 시간을 소모한다. - P101

이러한 면에서, 실제로 인간관계를 해보는 것보다 이런저런 지식으로 무장한 채 인간관계에 관해 평가하는 것을 강조하고, 이런 평가 결과가 어떤 명확한 기준에 미달하면 가차 없이 투자를 끊으라고 말하는 이 문화는 실로 신자유주의적이다. (중략).
앞서 보았듯이 우리의 선택이 정말로 최선의 선택인지 알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P101

정신과 의사, 유튜버, 인플루언서, 각종 커뮤니티의 익명 조언자들 그리고 이제는 챗 GPT까지, 어떤 정답을 알려주겠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은 시대이다. - P102

그리고 나에게 이처럼 다양한 기준에서 타인을 평가할 자유가있다는 것은 타인에게도 나를 평가할 자유가 있음을 뜻하기에, 우리의 자아는 한층 더 깊은 불안에 빠진다. - P102

(전략).
결과적으로, 인간관계로 인한 갈등과 괴로움을 피하려는 발버둥은 때로 더 큰 갈등과 괴로움을 경험하게 하기도 한다. - P102

그러나 자존감을 보호하고 심적 고통과 갈등을 겪지 않는 것이하나의 지향을 넘어선 도덕적 가치가 된 사회에서 그러한 목표는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 P103

 인간관계를 돌연 끊어버리는 손절외에도, 아무 설명 없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리는 잠수 혹은 ‘고스팅 ghosting‘부터 일본에서 늘어난다는, 인간관계를 끊고 잠적해버리는 ‘인간관계 리셋 중후군‘까지, 인간관계의 돌연한 단절은 오늘날 다양한 문화권에서 널리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 되었다. - P103

이러한 현상과 관련해 일루즈는 "선택하지 않음의 선택"이 오늘날의 주체를 이루는 결정적 특성으로 자리 잡았다고 주장한다.⁵⁷ - P103

57 에바 일루즈, 《사랑은 왜 끝나나》, 김희상 옮김, 돌베개, 2020, p. 42 (Illouz, WarumLiebe endet: Eine Soziologie negativer Beziehungen, Suhrkamp Verlag, 2018). - P361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체화된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대화를 나누는 것과도 같다. 그렇기에 관계를 단절하는 것 또한 하나의 표현이자 극단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P104

인터넷이 치료요법적 자기 계발 정보가 유통되는 유일한 장소는아니며 자기 계발서와 TV, 신문 등의 전통 매체 또한 치료요법 문화의 확산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중략). 우리의 눈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조언을 받는 일이 흔해진 만큼, 상대의 눈을 보지 않고 관계 맺기와맺지 않기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것도 그만큼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타인에게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 즉 깊이 있는 관계로부터도 도피하기를 택한다. - P105

2부

너 자신을 알라
치료요법 문화의 인간 상품화 프로젝트


4장

프로필 대
프로필의 만남


인간관계의 필수 요소가 된 MBTI

최적화를 추구하는 문화는 필연적으로 지름길이나 정답을 알려주겠다고 주장하는 상품과 콘텐츠의 범람을 낳는다. - P109

 최적화를 추구하는 문화에서는 인간 또한 쉽게 요약하고 파악할 수 있는 몇 줄의 정보가 되어버린다. - P110

* 휴리스틱, 혹은 발견법發見法이란 인간이 시간이나 정보가 불충분한 상황에서 빠르고 효율적으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사용하곤 하는 일련의 간편한 추론 방법을 말한다. 가령 대표성 휴리스틱은 어떤 원형이나 대표적인 이미지와 비교해 어떤 사건의 확률을 추론하고 판단을 내리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들어 우리는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을 보면 그가 변호사일 확률보다는 의사일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 P110

MBTI는 심리학이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었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 P111

사실 MBTI의 설득력은 보편적 성격 특성을 자신만의 특별한 성격으로 여기는 심리적 효과를 뜻하는 ‘바넘 효과 Barnum effect‘에 의존하는 부분이 크다. (중략).
그러나 ‘MBTI별 궁합‘은 물론 ‘걸러야 하는 MBTI‘나 ‘성격 더러운 MBTI, 심지어는 ‘MBTI별 연락 속도‘ ‘MBTI별 애정 표현‘ ‘금사빠 MBTI‘ 같은 제목을 내세우는 MBTI 이차 창작 콘텐츠가 (후략).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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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선택하지 않을
선택

고통을 생산하는 (흐랴기.


(전략).
치료요법 문화 연구의 권위자인 사회학자 프랭크 푸레디는 치료요법 문화가 오늘날 사회에 만연한 불확실성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그러한 불확실성의 반영이라고 지적한다.³¹ - P69

31 프랭크 푸레디, 《치료요법 문화》, 박형신·박형진 옮김, 한울아카데미, 2016, p.273 (Frank Furedi, Therapy Culture: Cultivating Vulnerability in an Uncertain Age, London: Psychology Press, 2004).
teda - P359

그런데 치료요법 문화가 유도하는 사고방식이 오늘날 외로움 위기의 유일한 원인이나 주된 원인은 아닐지라도, 이러한 사고방식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 P70

심리학적 용어가 아무리 보편화되어도 모든 사람이 트라우마 같은 치료요법의 어휘를 적극 차용해 자신의 일상 경험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 P70

실재하는 물리적 환경과 마찬가지로 담론과 문화 또한 이러한 환경적 맥락의 중요한 부분이다. - P72

 사람들은 자신이 분류되고 서술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변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³² - P72

32 이언 해킹, 《영혼 다시 쓰기》, 최보문 옮김, 바다출판사, 2024, p. 48 (Ian Hacking, Rewriting the Soul: Multiple Personality and the Sciences of Memo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8). - P359

마찬가지로 고통 경험을 일상적 언어로 이해하는 대신 심리학적·정신과적 문제로 분류하고 이해하는 문화적 경향이 강해질수록, 우리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그러한 틀에 맞추어 해석하고, 경험하게 된다. - P73

 최근에는 자기 계발 매체들이 인간관계를 적절히 손절하는 것을 넘어 아예 인간관계를 맺기 위한 노력 자체를 멈추라고 조언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 P75

정확한 감정적 교환 대신 관계 자체를 우선시하는 태도는 이제 ‘만만한‘ ‘호구 같은‘ ‘매달리는clingy‘ ‘관심을 갈구하는needy‘ 사람이 보일 법한 행동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 P75

인간관계를 건강을 위한 도구로만 여기는 문화적 환경에서, 외로움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현대인의 불문율이 되었다. - P76

치료요법 문화가 대두되기 이전의 사적 관계를 지배하던 충심이나 헌신 같은 가치는, 기본적으로 타인보다는 주체 자신의 행동을 인과되게 유지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 P76

인류 역사상 최고의 사상적·지적 성과 중 하나를 가능케 한 엥겔스의 마르크스에 대한 충심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갑갑하고 무능해 보일 수 있다. - P76

 엥겔스가 나르시시스트에 알코올의존증 환자이자정신병자인 마르크스와의 유해한 공의존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절친 조슈아 스피드는 링컨의 극심한 우울증과 끊임없는 자살 충동, 노예제를 둘러싼 정치적 견해차이로 인한 갈등을 무릅쓰고 일관되게 링컨에게 헌신했다. - P77

요점은 우리가 우정에 대해 말하고 사고하기 위해 동원하는 가치의 프레임에서 충심이나 헌신처럼 관계 자체에 관한 가치보다는 건강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져왔고, 그 결과 충심이나 헌신의 감정이 오히려 일탈적인 것으로여겨지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 P77

(전략), 이들과의 우정을 심리적 이해득실의 차원에서 판단하게 만들 치료요법적 세계관은 역사가 짧은 문화적 발명품이다.  - P77

현대 사회에서 건강이라는 가치는 가까운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관계를 맺는 방식 또한 바꾸고 있다. - P78

이와 유사하게 안전주의 문화에 관해 연구해 온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우리 문화가 점점 더 건강에 대한 과도한 보호와 안전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변해 왔다고 주장하며, (후략).⁴¹ - P78

41)(Lukianoff and Haidt, The Coddling of the AmericanMind). - P359

건강주의와 자기 관리의 내면화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데 건강의 프레임을 동원하는 것에 더해 감정적 건강을 그 어떤 가치보다도 중요시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 P80

건강주의 문화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당신 자신을 위하라"는 말로 신자유주의가 원하는 독립적이고 이성적인 경영자적 인간상을 체화시킨다. - P80

이와 관련해 현대 사회에서는 수많은 일상적 활동을 건강이라는46차원에서 생각한다.⁴⁶ - P81

46 Robert Crawford, "Healthism and the Medicalization of Everyday life", International Journal of Health Services, 10(3), 1980. pp. 365-388. - P360

(전략). 따라서 건강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문화에서는 개인의 안녕에 대한 사회와 공동체의 책임을 비가시화하면서 개인의 안녕을 사회나 타인과의 관계가 아닌 오로지 개개인에 속한 문제로 의미화하기 쉽다. - P82

건강주의 문화는 질 좋은 삶이 의료, 교통, 교육 등의 사회 인프라, 충분한 여가 시간과 임금, 풍부한 녹지와 문화·체육시설 등의 공공시설, 평등한 사회 같은 요소에 달려 있다고 보지 않는다. - P82

좋은 삶을 사회가 보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책임인 건강과 관련된 문제로 바라본다면 건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스스로 삶을 망치는 무책임한 행위, 심지어는 (당신의 안녕에 아무 책임도 없는)사회에 비용을 전가하는 행위로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 - P83

인간이 독립적이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자기 완결적인 주체라는것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오늘날 문화의 전제이자, 계속해서 증명하고 전시해야만 하는 의무이기도 하다.  - P84

우리가 인간관계에 ‘매달리는‘, 즉 스스로 감정적 건강을 관리할 능력이 없는 것 같은 사람들을 비난하게 된 이유일 것이다. - P84

인간관계는 선택과 집중?

이렇듯 건강주의 문화는 신자유주의화와 함께 생겨난 공공성의 공백을 개인에게 떠넘기며 자기 자신을 책임지라고 요구한다. - P84

(전략).
앞서 살펴보았듯이, 현대 치료요법 문화는 인간을 "고통의 이유를 적극적으로 성찰하며 이에 관여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지 않는다. - P85

 일상의 모든 문제를 건강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는 문화에서 우리는 취약한 존재로 다루어진다. - P85

인간이 다른 사람 없이도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존재라는 주장은 관계가 낳는 모든 부정성을 더욱 위협적이 두고려운 것으로 만드는 바로 그 주장이기도 하다. - P86

치료요법 문화는 긍정적 기분 혹은 생산적 상태를 유지할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신자유주의에 이바지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 P86

치료요법 문화의 인간관계론은 실제로도 경영과 투자의 메타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쉽게 닳아 없어지는 자원인 감정적 에너지는 당신이 선택한 소수의 사람에게만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 P86

손절이라는 단어가 유행하는 현상의 바탕에는 당신의 의식적 평가를 통과한 사람들만이 이러한 투자를 받을 가치가 있다는 가정이 깔려 있는 셈이다. - P87

관계는 꼭 필요한 무언가가 아닌 단지 선택의 문제라고들 한다. 깊이 있고 풍성한 인간관계를 꾸리고 가꾸려면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미디어는 흥미를 끌지 못하는데, 인간을 전자 기기의 성능처럼 쉽게 평가하도록 일련의 일반화된 기준을 제공하는 미디어들이 인기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 P87

무엇이 건강한 관계일까


(전략).
첫 번째 문제는 어떤 관계가 건강하고 어떤 인간이 건강한지가 모호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진실은, 거의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유해한‘ 또는 ‘무해한‘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는 어떤 회색지대에 있다는 것이다. - P88

그러나 우리의 인간관계 경험에는 아무리 괴로워도 단순한 스트레스나 유해함으로 일축할 수만은 없는 복잡성이 존재한다. - P88

이처럼 어떤 사람에 대해서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것은 너무나 흔하고 일상적인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단순히 유해한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이나 ‘감정 문해력 emotional literacy‘의 부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 P90

감정은 현재의 맥락에 따라 변화할 뿐만 아니라 상당히 복잡하고 양가적이기에 심리적 건강에 좋다 혹은 나쁘다를 기준으로 타인을 평가해 단호한 판단을 내리라는 조언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 P90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감정은 어떤 관계가 건강한지를 알려주는객관적 바로미터보다는 주관적 해석의 결과물에 가깝다.  - P90

성찰과 상호작용으로 인해 타인에 대한 감정이 변화하는 것은 그 타인이 속한 문맥 그리고 때로는 우리 자신이 속한 문맥에 대한 이해의 확장과 이로 인한 해석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 P91

인간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스스로의 힘만으로 알아낼 수 없다. - P92

 아무도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데 관계가 더욱 깊어질 리 만무하다. 이 같은 모순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갈수록 말하는 입은 많으나 듣는 귀는 아무 데도 없는 사회로 변모해가는 주된 이유다. - P93

누가 건강한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떤 관계가 건강한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만큼이나 불분명하다. 
(중략).
그런데 치료요법적 세계관에서는 양자의 행동 모두가 더 큰 병리적 문제에 대한 암시로 둔갑할 수 있다. - P94

(전략). 사람들이 분류를 받아들이고 정당화하며 해석함에 따라 분류 자체의의미도 변화하게 되는데, 이는 고리 효과의 나머지 중요한 절반이다.⁵² (증략).
예를 들어 ADHD나 우울증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단지 어떤 치료를 받을지 알려주는 질병 분류를 넘어서는, 일종의 정체성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이러한 명칭에 부여하기도 한다(이는 2부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 P95

52 Sofia Kvist Lindholm and Anette Wickström, "Looping Effects Related to Young People‘s Mental Health: How Young People Transform the Meaning of Psychiatric Concepts", Global Studies of Childhood, 10(1), 2020, pp. 26~38. - P360

각종 심리학과 정신의학 어휘가 일상 어휘처럼 범람하는 상황에서는 모든 인간적 특징들을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심리학적 개념의 틀에서 해석할 수 있다. - P96

치료요법 문화가 권장하는 당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할까? - P96

노동이 된 인간관계ㅁ어이드 ㅌ

(전략).
치료요법 문화가 권장하는 언어화된 판단 방식은 탈맥락화된 판단이면서도 대단히 의식적인 판단이기도 하다. 특히 서구사상사에서 인간의 이성은 언제나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는 존재였으며, 이성의 실천은 곧 자유와 동일시되곤 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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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전문가들의 조언은 대체로 대동소이한 구조로 이루어진다. (중략). 심지어 때로는 별다른 (심리적·물질적)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유해함을 시사하는 일종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 P43

심리학 전문용어까지 동원해 인간관계를 평가하고 관리하려는행동은 이제 전문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블라인드‘에서 ‘여성시대‘, 트위터까지, 오늘날 대부분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이런저런 인간관계 조언 글이나 자신의 인간관계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며 일종의 교훈을 주고자 하는 글을 흔하게 접할 수 있다. - P44

물론 인간관계에서 갈등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고, 마음에 들지않는 친구나 동료와 멀어지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현상들은 심리학의 언어적 도구를 적극적으로 습득하면서까지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적 준비 태세를 갖추는 행위가 갈수록 상당한 문화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P45

글로벌 빌런 찾기

(전략). 오히려 한국은 이런 현상에서 한참 후발주자인지도 모른다. - P45

 구글 임원 프라바카르 라가반에 따르면 구글의 자체 데이터는 청년층 약 40%가 점심 먹을 장소 등을검색하기 위해 구글 대신 틱톡이나 인스타그램을 활용한다는 것을보여준다.⁴ 어도비사가 발표한 2024년의 보고서는 미국인 40%가 틱톡을 검색 엔진으로 활용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⁵ - P46

4 Prabhakar Raghavan, "Brainstorm Tech 2022: Organizing The World‘s Information",
Fortune, 2022. 7. 13,
https://fortune.com/videos/watch/Brainstorm-Tech-2022-Organizing-The-Worlds-Information/934585a6-7fb6-41a5-8ef3-e497f8ca2986.

5 "Using Tik Tok as a Search Engine", Adobe Express, 2024. 3. 1, https://www.adobe.
com/express/learn/blog/using-tiktok-as-a-search-engine. - P357

이처럼 소셜 미디어가 정보 창구가 된 배경하에 틱톡과 인스타그램은 전 세계 젊은이들이 인간관계에 대해 조언을 얻는 매체로 부상했다. 특히 틱톡은 2020년대 들어 그러한 목적을 위한 매체로 널리 활용되고 있어, (중략).
 일례로 2023년 기준 #narcissism (나르시시즘) 해시태그는 무려 3.8억 뷰를 기록했다.⁶ - P46

6 Eleanor Morgan, ""That‘s Triggering!‘ Is Therapy-Speak Changing the Way WeTalk about Ourselves?", The Guardian, 2023. 8, 20, https://www.theguardian.com/society/2023/aug/20/triggered-toxic-narcissist-are-you-fluent-in-therapy-speak. - P357

특히 틱톡과 인스타그램 쇼츠의 짧고 단순한 형식은 손절이라는다소 극단적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극적으로 줄였고, 이제는 아무런 맥락도 없이 관계의 돌연한 단절을 위한 구체적 방법만을 알려주는 콘텐츠도 적지 않게 인기를 끌고 있다. - P47

돌연히 인간관계를 끊어버리는 행동을 위해 대본까지 준비한다는 것이 황당하게 들리지 않는가. - P48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녕! 연락해 줘서 고마워. 나는 사실 지금 여유가 없어 / 다른 사람을 돕고 있어 / 개인적 일 때문에 너를 보듬어줄 hold space 여유가 없어.* 우리 나중에 연락하면 안될까?/ 널 도와줄 만한 다른 사람은 없니?"


*"hold space‘는 발달심리학자 도널드 위니컷이 사용한 용어다. 위니컷은 아이의 건강한 자아가 양육자와의 좋은 관계와 놀이 속에서 성장한다는 대상관계 이론을 주창하기도 했다. - P48

2장


내게
무해한 사람



치료요법 문화

심리학의 무기고를 뒤져가면서까지 관계에 대해 한껏 방어 태세를 갖추려는 이 같은 문화적 감수성의 확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P49

우리는 타인들로 인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 폭격에 시달리며, 우리를 ‘트리거 trigger"하는것들을 피하려고 애써야 한다. ‘바운더리‘를 설정하고, 나를 ‘가스라이팅하는 ‘에너지 뱀파이어들과 ‘나르시시스트들과의 ‘유해한관계로 인해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하며‘ ‘건강한‘ 관계를 맺으려노력해야 한다. 관계를 구축하기 이전에 ‘진정한 나‘를 알고 ‘자아를 실현‘하며 ‘행복‘을 찾기 위해 ‘마음의 근육을 단련해야 한다. - P50

사회학자들은 심리학과 정신의학이 우리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탐구하기 위해 치료요법 문화라는 개념을 사용해 왔다. - P51

무해함이라는 시대정신

치료요법이 하나의 지식체계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하나의 문화적 세계관이기도 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 P51

인간과 인간관계를 다양한 심리학적·정신의학적 용어로 분류하고 관리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문화적 전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관계를 비롯해 다양한 일상적 경험이 낳는 고통은 무엇보다도 정신 건강에 위협적이고 유해하다. 둘째, 건강을 지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다. - P52

 관계에서 나타나는 일상적 사건들을 건강에 유해한 것들로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러한 위험을 예방하는 행위의 중요성도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 P52

이러한 치료요법적 감수성의 확산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화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무해함‘을 추구하는 문화다. - P52

 무해함을 내세우는 소설 제목과 광고 문구들, 무해함을 마케팅 포인트로 내세우는 캐릭터나 아이돌이 보여주듯 무해한 무언가에 대한 갈망은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서 흔하게 관찰할 수 있는 바람이 되었다. - P53

무해함의 추구, 즉 감정에 대한 잠재적 위협의 회피라는 현상은 단순히 문화적 코드에 한정되지 않고 실제 삶과 인간관계 양상에서도 발현되는 성향이 되었다. - P53

그런데 무해함을 추구하는 감성이 젊은 여성들이 좋아하는 문화콘텐츠나 인물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서사적 갈등 혹은 갈등을 유발하는 캐릭터를 회피하는 오늘날 문화 콘텐츠들의 감수성 역시 무해함을 추구하는 감수성과 상당히 유사한 측면이 있다. - P53

최근의 심리학과 사회학 연구들은 특히 젊은 세대의 위험 회피 성향이 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P53

199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이른바 2세대 청년들은 부모 세대보다 면허를 따는 비율도 적고,¹² 청소년기에 섹스한 경험도 더 적으며, 술도 더 적게 마신다.¹³ 청년들의 주류 소비가 줄어드는 것이 주류업계의 걱정거리가 될 정도다.¹⁴ - P54

12Sara Chernikoff, "Gen Z is Less Likely to Have a Driver‘s License. Here‘s Why", USAToday, 2024. 5. 17, https://www.usatoday.com/story/graphics/2024/05/17/gen-z-less-likely-get-drivers-license/73678202007/.

13 Charles Fain Lehman, "Fewer American High Schoolers Having Sex Than EverBefore", Imstitute for Family Studies, 2020. 9. 1, https://ifstudies.org/blog/fewer-american-high-schoolers-having-sex-than-ever-before-text =Just 962027.4%25%20of%20teens%20were some%20more%20so%20than 9620others.

14 Vivienne Walt. 김다린, "글로벌 최대 맥주회사 CEO의 고민 ‘술 안 먹는 청년들(0), 2024, 11, 22, https://www.fortunekorea.co.kr/news/article View.html?idxno=44747. - P358

불안 장애는 오늘날청년 세대에서 가장 흔한 장애로, 2023년 미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는 대학생들 37%가 ‘항상‘ 또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불안을 느낀다고 답했음을 보고했다.¹⁵ - P54

15 조너선 하이트, 《불안 세대》, 이충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24, pp. 48~52 (JonathanHaidt, The Anxious Generation: How the Great Rewiring of Childhood Is Causing anEpidemic of Mental Illness, Penguin, 2024). - P358

일례로 2024년 ‘사단법인 오늘은‘에서 발표한 청년의 인간관계에 관한 조사는 적지 않은 청년들이 관계의 위험 요소를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을 알려준다
(중략).
가벼운 대화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들, 취미나 취향 면에서 유사한 사람들만을 만나는 것이 애초에 갈등을 경험하고 서로의 차이를알게 될 만큼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지 않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 P55

한편 아예 가까워지는 것 자체를 회피하는 새로운 관계 형태의등장은 청년들의 인간관계 양상에서 갈등과 고통을 회피하는 경향이 점점 더 두드러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2023년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가 선정한 올해의 단어 후보에는 ‘situationship (시츄에이션십)‘이라는 단어가 올랐다.  - P55

물론 이런 관계를 맺는 가장 큰 이유는 깊이 있는 관계가 주는 부담과 책임감, 헌신을 회피하기 위해서다. - P56

인간관계 스트레스는 발암물질일까

이처럼 특히 청년들을 중심으로 인간관계로 인한 고통을 회피하고 무해한 인간을 찾으려는 성향이 점점 두드러지는 데에는 복잡한 사회적 이유가 있으며, 이는 이 책 전체에서 탐구할 주제이기도 하다. - P57

 고통은 단순히 피하고 제거해야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나름의 기능을 수행하며, 그렇기에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복합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 P57

정신적 고통 또한 이와 상당히 유사한 기능을 수행한다. 외로움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관계의 부재를 상기시키고, 관계 회복을 위한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 그 대표적 예시다. - P58

반대로 관계와 공동체는 혼자 다룰 수 없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최초의 수단이자 최후의 수단이다. - P59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타인은 다른 삶과 관점에 대한 이해와 포용력을 넓힐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잠재적 친구이기도 하다. - P59

현대문화에서는 일상적 스트레스가 맥락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일종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암과 면역 문제를 비롯한 온갖 신체적건강 문제로 이어진다는 내러티브가 널리 퍼져 있다. - P60

(전략). 하지만 실제로는 일상적 스트레스와 암 같은 건강문제의 인과관계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¹⁸ - P60

18 Rob McGee, "Does Stress Cause Cancer?: There‘s No Good Evidence of a Relationbetween Stressful Events and Cancer", British Medical Journal, 319 (7216), 1999, pp.1015-1016. - P358

(전략). 그럼에도 일상적인 정신적 고통을 신체적 해악과 동일시하다시피 하는 서사는 그 과학적 증거의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널리 확산되어, 고통을 낳는 많은 사건을 관여를 요청하는 문제가 아니라 손상을 입히는 사건으로만 이해하게 한다.  - P61

그러나 스트레스 개념이 일상적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단어로 자리 잡음에 따라 우리는 점점 더 자신을 지나치게 긴 현대인의 노동시간, 점점 더 불안정해지는 근로 환경, 하다못해 나를 괴롭히는 상사 같은 외부 환경에 대해 성찰하고 이에 관여할 수 있는 존재로 보기보다는, 끊임없이 축적되는 스트레스라는 개인적 건강 문제를 관리하는존재로 이해하게 된다. - P61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늘 긍정적이고 행복한 인간만을 건강한 인간으로 여기는 문화에서는 부정적 감정이란 그 종류와 맥락을 막론하고 자기 관리를 통해 제거해야 할 감정적 병리로 취급받는다. - P62

(전략). ‘취향 존중‘이라는 무비판적 태도가 젊은 세대의 절대적 가치가 되어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 P62

고통을 질병과 동일시하는 현대문화에서는 고통을 경청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드러내지 않고 홀로 참는 것, 알아서 혼자 해결하는 것이 책임감 있는 관계와 헌신의 표지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 P63

고통으로 무력화된 인간

(전략). 최근 몇십 년에 걸쳐 트라우마라는 단어의 용례는 이 단어가 처음 출현할 당시에는 상상도 못 했을 수준으로 확장되었다.  - P64

특히 《DSM-III》의 개정판 《DSM-III-R》은 간접 경험을 트라우마에 포함함으로써 트라우마적 사건의 범위를 한층 더 넓혔고,
<DSM-IV>는 특정한 경험의 객관적 특성보다는 주관적 측면을더욱 강조함으로써 더 많은 일상 사건을 트라우마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학술적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³⁵ - P65

25 Nick Haslam, "Looping Effects and the Expanding Concept of Mental Disorder",
Journal of Psychopathology, 22(1), 2016, pp. 4~9. - P358

트라우마 혹은 더 흔한 용어로는 ‘상처‘가 관계를 회피하는 태도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될 때 그 전제는 괴로움을 최대한 회피하는 것이 나쁜 경험에 대한 적절한 대처 방식이라는 것이다. - P65

 특히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내용(사실상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내용이라면 무엇이든 해당된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리는 ‘트리거 워닝 trigger warning‘을 삽입하는 것은 점점 더 많은 콘텐츠에서 의무 아닌 의무로 변해간다. - P66

끊임없는 침습적 기억과 플래시백의 홍수 속에 무력화된 채로눈물을 흘리는 전쟁 베테랑이나 강간 피해자의 거의 포르노적이라할 만큼 자극적인 이미지들은 오래도록 문화적 상상력을 지배해 왔다. - P66

그러나 실제로는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조차 대개는 아무런 개입이나 치료를 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양상을 보인다.²⁷ - P67

27 Richard J. McNally, Richard A. Bryant and Anke Ehlers. "Does Early PsychologicalIntervention Promote Recovery from Posttraumatic Stress?", Psychological Science inthe Public Interest, 4(2), 2003, pp. 45~79.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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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저도 지금 유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나도, 히무라도, 쓰지도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예상도 못한 일이다.
이토는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고 간절한 눈빛으로 히무라를바라보았다. - P181

사람을 돕는 일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다.  - P181

이토는 쩔쩔매며 자리에 앉더니 마스터에게 술이 아니라 자몽주스를 주문하고 음료가 나오기도 전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매일 밤 여자 유령이 머리맡에 나타납니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라고 한다.  - P182

"아니요. 다른 사람과 함께 자도 저 혼자만 문득 잠에서 깨서 유령을 봅니다. 친구에게 밤새 지켜봐 달라고 해도 아마 제 눈에만 보이지 않을까 싶어요."
난처하네.
이건 쓰지가 말한 네 가지 경험담과는 종류가 다르다. 일단 유령의 출현을 증명하는 근거가 이토의 증언밖에 없다.  - P183

"그렇다면 유령 스토커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으음, 저는 이 정도밖에 떠오르는 게 없네요."
쓰지는 도움을 청하듯 히무라를 보았지만 히무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 P185

"이토 씨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니더라도, 생판 남인데도 꽃을 바치는 다정한 사람이라 멋대로 도움을 기대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쓰지가 거들었다.
그럴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라면 도와줄 것 같다고 타깃으로 삼은 것이다 - P187

"유령이라고 생각하니까 한 발 물러나게 되는 거야. 살아 있는여성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소극적인 히무라에게 한 말이었지만, 막상 말하고 보니 이거다 싶었다. 내가 봐도 핵심을 찌르는 발언 아닌가? - P188

원망하는 이유를 알아냈다고 해도 상대는 유령이다. 과연 말이 통할지 의문이다. (중략).
"다음에 유령이 나타나면 사과해 본다거나...... 아, 이토 씨가 버린 꽃을 바친 사람을 찾아내서 한 번 더 꽃을 바쳐 달라고 하는 건요?" - P190

히무라는 심령 현상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과하면 유령이 용서해 줄 거라고 생각할 리가 없다. - P191

(전략), 나는 추리소설가다. 진짜 명탐정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희귀한 케이스다. 장르와 상관없는 영능력자와의 연줄을 기대해도 곤란하다. - P191

마스터가 접시를 포개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손님들 말씀이 귀에 들어와서요. 난처하신 것 같아 한 말씀드리고 싶어서."
우리는 나란히 마스터를 쳐다보았다. - P192

"전에 저희 가게에 오신 다른 손님이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탐정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듣자 하니 심령탐정이라나요………….."
히무라가 한쪽 눈썹을 실룩였다. - P192

"전화번호가 특이해서 외우기 쉽거든요. 그래서 기억합니다. 분명 ......."
이토는 서둘러 메모했다. 어째선지 쓰지까지 받아 적고 있다.
언젠가 진짜 심령 현상을 만났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리라. - P193

끈, 밧줄, 로프


아오사키 유고


1991년, 가나가와현 출생. 2012년 <체육관의 살인>으로 아유카와 데쓰야상을 수상하며 데뷔. 2024년 《지뢰 글리코》로 본격 미스터리 대상(소설 부문),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장편 및 연작 단편집 부문), 야마모토슈고로상을 수상. 그 밖의 저서로 ‘노킹 온 록트 도어 시리즈‘, ‘언데드걸 머더 파르스 시리즈‘, 《새벽녘 첫차의 살풍경》, 《11글자 감옥 아오사키 유고 단편 집성》, 《가스등 들개 탐정단》(원작) 등. - P10

1

느지막이 일어나 짧은 에세이 원고를 마무리하고 출판사에서보내 준 증정본을 읽는다. 활동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하루가될 예정이었다. 친구의 연락을 받기 전까지는. - P11

아니. 그런 사람은 세상에 한 명이면 족하려나.
그 희귀한 직함을 가진 남자가 고물 벤츠 옆에 서 있었다. (중략).
히무라. 그를 불렀다.
"대학은 얼씨구나 내팽개치고 나와도 되는 거야? 입시다 졸업논문 채점이다 바쁜 시기잖아." - P12

"얼굴을 안 봐도 알아. 올해부터 종합소득세 신고가 복잡해졌으니까."
분하게도 그 추리는 적중했다. 오늘 저녁부터 영수증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 P12

"그래서 이번엔 어떤 사건인데?"
"강도 살인, 시체 유기. 자세한 설명은 이제 들어 볼 건데, 용의자는 어느 정도 좁힌 모양이야."
"부교수가 나설 자리는 없어 보이는데?" - P13

아파트 쪽에서 한 남자가 나타나 훤한 머리를 꾸벅 숙였다. 오사카 부경의 후나비키 경부다. (중략).
잘 아는 얼굴이라 요란한 인사는 필요 없다. - P13

"신고는 오늘 오전 11시경. 맞은편 해안 창고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산책로 아래 피복석*에 걸린 여성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 바닷가 등에서 물과 접촉하는 둑의 경사면이 무너지지 않도록 포개어 쌓은 돌 - P14

(전략).
"보다시피 이 모양이라. 문은 자동으로 잠겼지만 새시는 열려있었고 금품도 사라졌습니다. 지갑 속 현금과 <몬스터 나이츠>라는 카드 게임의 레어 카드가 스무 장 정도." - P15

"몬나이‘ 카드라고 못 들어 보셨습니까? (중략) 야스미 씨는 어렸을 때 뽑은 레어 카드를 소중히 파일에 넣어 이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는 게 여러 지인들의 증언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현재 시세라면 가격은 장당 5만 엔 정도고요. - P16

"이마에 있는 치명상이 전부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반신에는 찰과상이 여럿 있었지만 생활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산책로에서 유기될 때 생긴 상처 같습니다."
"머리 상처는 한 군데뿐이었다는 말씀이지요?" - P17

"그것 말인데 언뜻 야스미 씨가 새시 잠그는 걸 깜빡해서 그리로 범인이 들어온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신발장 위에 이 집 여벌 열쇠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 열쇠에서도 울 섬유가 검출되었습니다."
"범인이 만졌다는 말씀입니까?" - P18

"오사카 주민 880만 명 중에서 찾는 것에 비하면 비약적인 진전이군요. 하지만 아직 조금 많은걸."
히무라의 혼잣말에 경부가 반응했다.
"안심하세요. 더 좁힐 수 있습니다. 저희는 구속에 사용된 로프 도구에 착안했습니다. 시체가 입고 있던 의복이 바닷물에 잠겨 있어서 섬유는 검출하지 못했고, 굵기도 알아내기 힘들죠. (후략)." - P19

"그걸 찾아내면 범인 확정인가."
내 혼잣말에 경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에게 유리했어요. 범인은 시체가 바다에 떠내려가 발견이 늦어질 거라고 단단히 믿고 있었을 겁니다. (중략). 그렇게 생각하고 아파트 쓰레기 배출상황을 조사했습니다." - P20

"이 아파트 쓰레기 수거장입니다. 부지 안에서 여기만 방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중략). 부피가 크거나 분류하기 어려운쓰레기는 쓰레기봉투가 아니라 옆에 있는 상자에 넣어 두면 야마구치 씨가 나중에 혼자서 분류한다고 합니다." - P21

"있었나요? 저 상자에 로프 같은 걸 버린 주민이?"
"있었습니다.......세명."
기대를 저버리는 어중간한 숫자였다. 히무라가 조용히 물었다.
"실물은?"
"사건 발견이 11시라, 확보에는 실패했습니다. 이미 수거해가서 소각장으로." - P22

2

히무라와 나는 머리도 식힐 겸 가이즈카 앞까지 걸어가 ‘풍차‘라는 카페에 들어갔다. 그곳을 선택한 이유는 고풍스러운 간판이 취향이라...... 그런 건 아니고 흡연이 가능하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 P22

"안심해, 일본어의 표현은 다양하니까. 순서대로 끈, 밧줄,  로프로 하면 어때?" - P23

"첫 번째는 이 남자입니다."
(중략).
뒷문에서 한 청년이 나타나 휴지와 음식물 쓰레기가 든 반투명 비닐봉지를 수거함에 던졌다. (중략).
"나가타 도모키, 24세, 106호에 혼자 사는 은행원입니다." - P27

100엔 숍 스티커가 붙은 열수축 필름에 나가타가 버린 것과 같은 끈이 들어 있었다. 제품명은 ‘다용도 마 끈 길이는 ‘20m‘. 굵기는 연필 정도일까. 평범한 갈색에 군데군데 보풀이 일어난, 농사일에 쓸 법한 흔히 볼 수 있는 끈이었다. - P24

"하라 겐이치, 44세. 집은 202호, 영상 제작 회사 직원입니다. 아내와 함께 사는데 아내는 지금 여행 중이라고 합니다."
(중략).
"고공 작업을 할 때 몸에 감는 추락 방지용 로프, 소위 말하는 생명줄이야. 발판 위를 옆으로 이동할 때 쓰는 건 수평 구명줄, 창문 청소처럼 승강 작업을 할 때 쓰는 건 수직 구명줄이라고 하지."
히무라가 설명해 주었다. 어디서 저런 지식을 얻어 오는 건지. - P25

"가토 료타, 30세. 집은 305호. 근처 중화요리점에서 일합니다. 독신이지만 어젯밤은 207호에 사는 시나다 유라는 남자를집으로 불러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알리바이가 있단 말씀입니까?"
"아니요. 새벽 0시 이후에는 둘 다 잠들었다고 해서...………."
(중략).
유명한 아웃도어 브랜드의 ‘반사 소재 텐트 로프‘였다. 길이는 ‘10m‘, 굵기는 끈과 밧줄의 중간 정도. - P27

"한 가지 더, 꼭 말씀드릴 점이. 가토 료타는 전과가 있습니다. 그래 봤자 고등학생 때 불량배들끼리 요란하게 싸움질을 한 게 다입니다만, 상해죄로 기소되어 집행유예를 받았습니다."
경부의 이야기를 들어도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 P27

"오늘 아침 주민들이 버린 로프 형태의 쓰레기는 세 개. 저게전부입니다. 주민들이 버린 쓰레기봉투 속 내용물도 야마구치씨가 일단 전부 확인했습니다." - P27

히무라는 천천히 팔짱을 꼈다.
"꼭 이 세 개중에 흉기가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텐데요."  - P28

"......세 사람 다 소지품을 버렸다고 증언하던가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누가 현관 앞에 가져다 놓은 걸 기분 나빠서 버린 게아니라?"
"전부 자기 물건이라고 증언했습니다." - P28

"그렇다면 역시 이 세 사람 중에 ………… 앗!"
나는 작게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재생되고 있던 영상 한구석에서 쓰레기 수거용 덤프트럭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중략).
귀중한 증거품들은 이리하여 세상에서 사라졌다. - P29

"가능성으로는 로프가 유력하지만 결정적인 판단 근거가 없어. 다른 측면에서 따져 볼까?"
"그럼 단독범인지 아닌지부터."
"단독범이야."
히무라는 확신하며 말을 이었다. - P30

"흉기는 피해자의 집에 있던 장식품이었어. 그것도 교묘한 위장이라고 말하려고?" - P30

"범인이 아파트 주민이라고 단정한 이유는 여벌 열쇠에서 장갑 섬유가 나왔기 때문이야. 우연히 운 좋게 검출되어서 범인이 만졌다는 걸 알아냈지만 검출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 피해자가 직접 가져온 것으로 보고 정밀 조사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어. 노리고 만든 상황으로 보기에는 불확정 요소가 너무 많아." - P31

"히무라 선생님 의견은?"
"범인이 침입한 시점에 피해자가 깨어 있었는지가 궁금해."
"...……아아, 새벽 1시였으니 피해자가 자고 있을 때 묶었을지도모르겠네." - P33

"끈, 밧줄, 로프, 유의어를 모아 보니 생각나는 단편이 있어. 쓰즈키 미치오가 쓴 <재킷 정장 수트>, 안락의자 탐정 스타일의 퇴직 형사가 나오는 단편이야.‘ - P33

"그 밖에 끈이라고 하면………… 란포의 《D 언덕 살인 사건》이 있지." - P33

나는 작은 고민을 털어놓기로 했다.
"기존 소설 캐릭터를 작가가 아닌 다른 사람이 글로 쓸 수 있을까?"
"있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히무라가 대답했다. - P34

"동일성이라는 표현 자체가 모호하다고 생각하는데. 네 소설에도 시리즈 캐릭터가 몇 명 있지만 처음 등장했을 때와 지금의 그 인물은 같은 사람이야? 일 년 전과 오늘은? 성격이나 언행은변하는 거야, 작가의 마음속에서조차." - P35

그렇다면・・・・・・ 추리소설에서 독창성이란 무엇일까?
추리소설가들의 필사적인 창작은 전부 대체 가능한 영역인 건아닐까?
"내가 하는 일을 AI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불안해진 거로군." - P36

"재현 가능하다는 점이 그렇게 부정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는않는데, 아리스 네가 종종 말하잖아, 본격 미스터리는 논리의 힘을 그리는 이야기라면서? 논리란 결국 과학이야. 과학의 본질은 재현성에 있어. 어떤 사람이 발견한 법칙이나 현상을 다른 사람이 실험으로 재현할 수 있는가. 재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불변의 사실로 인정받지. 불가능하다면 유사 과학이야. 미스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어?" - P37

화제를 부교수의 전문 분야로 되돌렸다.
"끈, 밧줄, 로프...... 선택지는 세 개. 추리만으로 증거품 R을맞힐 수 있어?"
"아직 모르겠어. 내일은 문제의 세 사람과 이야기해 보자고."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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