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이 어린이가 석류알처럼 톡톡 떨어져서 입가에 피깨좋은 모습을 봤을 때 요시로는 놀라서 잠시 아무런 의미도 없이 방 안을 빙빙 돌아다녔다. 아이의 이는 다시 새로 나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 P22
진찰실에 들어가서 치과 의사와 눈이 마주친 요시로는 아직 의사가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빠져 버렸어요.(ㅅㅎ)"라고 저절로 내뱉어 버렸다. 목소리가 떨리고 억양이 흔들려서 "쓸 수 있게 돼 버렸어요.⁵ 비슷하게 발음했음을깨닫고 요시로는 서둘러 "빠져서 떨어져 버렸어요."라고 고쳐말했다. 그러고는 "젖니입니다만"이라고 덧붙였다.
5) 書けでしまったんです 앞의 "欠けてしまったんです"와 발음은 같으나 억양이 다르다. - P23
명하는 동안, 요시로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치과 의사는 네모진 얼굴을 들며 "젖니가 약하면 영구치도 약해지죠." 하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요시로는 가슴에 돌을 묻고꿰맨 듯하였으나, 무메이는 "젖니는 뭐 때문에 있는 거예요? 어차피 빠지는데." 하고 명랑한 과학 소년의 얼굴로 물어본다. 치과 의사는 그 물음에 정중히 대답한 뒤, 무메이의 이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 P24
요즘 시대의 어린이 대부분이 그러하지만 무메이는 칼슘 섭취 능력이 부족하다. 요시로는 치과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대로 가다가는 바야흐로 인류는 이가 없는 생물이 되지 않을까, 하고 끙끙 앓으며 생각하는데, 무메이는 그 속을 바로 읽더니 "참새도 이빨 없는데 건강하고 아무렇지 않잖아요." 하고 말했다. 무메이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안다. - P24
"증조할아버지도 이 없는데 밥 잘 드시고 건강하시잖아요." 아직 번민의 밀물에 잠겨 있는 요시로를 무메이가 다시 격려한다. 요시로는 증손자의 상상력이 노인을 위로하는 방향으로만 발달하여 못내 마음이 무겁다. 자기만 생각하고, 무모한행동을 거듭하고,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는데. - P25
‘진단‘이라는 말이 ‘죽었다‘⁶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려서 ‘정기 진단‘이라는 단어를 언제부터인가 쓰지 않게 되었고, 차츰 의사들도 ‘달 감정하기‘⁷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6) 診断(しんだん)의 발음(신당)이 死んだ(しんだ)의 발음(신다)과 유사함을 이용한 언어유희다.
7) 月の見立て. 見立て라는 단어에는 견해나 감정(鑑定)이라는 뜻과 더불어 의사의 진단이라는 의미도 있다. - P26
이 소아과 의사는 사토리 선생인데, 오랜 옛날 요시로의 어머니를 진료했던 암 전문 의사 사토리 선생의 먼 친척쯤 된다고 한다. 그러나 두 선생은 목소리나 표정 어느 것 하나 닮은데가 조금도 없다. 암 전문 의사 사토리 선생은 환자를 아이대하듯이 얘기하는 사람이었다. - P27
어린이의 건강 상태가 담긴 원본 데이터는 전부 손으로 직접 작성하고, 의사 각자가 자기 판단에 따라 어딘가에 숨겨둔다고 한다. - P28
병원에서 의료 연구소로 보내는 데이터는 직접 쓴 것의 복사본이라, 누구든 그 대량의 데이터를 삽시간에 고쳐 쓰거나 없애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우수한 프로그래머가 오래전에 고안해 낸 보안 시스템보다 이 방법이 더 뛰어나다. - P28
(전략), 라고 요시로가 은밀히 생각하는데 치과 의사는 다시 입을 크게 벌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칼슘은 생선이나 동물 뼈에서 섭취하는 것이 좋다는 설도있어요. 하지만 그건 지구가 복원 불가능할 정도로 오염되기이전에 살았던 동물의 뼈이어야만 하지요. 그래서 어이없을 정도로 땅속 깊은 곳에서 공룡의 뼈를 파내면 좋으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미 홋카이도엔 나우만코끼리의 뼈를 발굴해서 가루로 만들어 파는 가게도 있다고 하네요." - P30
나우만코끼리만이 아니다. 왜가리든 바다거북이든 무메이는 생물의 이름을 보거나 들으면 그 이름 속에서 생물이 튀어나오리라고 여기는지 눈을 떼지 않았다. 동물 이름뿐 아니라 살아 있는 동물이 그대로 눈앞에 나타난다면 무메이는 마음에 불이 붙은 듯 좋아할 텐데, 이 나라에서는 벌써 꽤 오래전부터 야생 동물을 볼 수 없게 됐다. - P31
요시로는 작은 여행 가방에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를 챙긴 다음,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나리타 공항으로 향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 P32
요시로는 신주쿠에서 나리타 공항까지, 무인 익스프레스지하철을 타고 가는 자기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제 공항으로가는 전철은 사라졌고, 익스프레스라는 독특한 가타카나 발음으로 비싼 속도를 팔았던 지하철을 타는 승객도 없어졌으며,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사람 또한 보이지 않는다. 공항 터미널역 개찰구를 나와서 공항으로 들어간다. 공항 관문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여권을 보여 줄 필요도 없다. - P34
"무메이, 너는 동물학자가 될 거냐" 무메이가 동물도감을 보며 열심히 얼룩말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요시로는 이렇게 말한다. 무메이가 동물학 교수뿐 아니라, 여행을 하며 야생 동물을 관찰하는 에세이 작가로서 이름을 날리는 일까지 꿈꾸어 본다. 그러나 눈가를 풀리게 했던미소도 잠시 뒤에 굳어진다. - P35
어린이 건강에 대한 기사를 신문에서 발견할 때마다 오려보관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만뒀다. 한번 읽은기사를 다시 읽는 일은 사실상 없었고, 철해 둔 파일이 점점책장을 차지하기 시작하자 벽에 중압이 갔다. 요시로는 오랫동안 ‘버릴 이유가 없는 것은 버리지 않는다.‘라는 규칙에 따라 살았다. - P36
오래된 신문 기사에 대한 미련을 버린 이유는 또 하나 있다. 어린이 건강 정보는 가을 날씨보다, 남자의 마음보다 더 변덕스럽게 바뀐다. ‘일찍 일어나는 건강 습관‘이라는 기사가 실리면, 며칠 뒤에 또 ‘낮잠 자는 어린이일수록 키가 큰다‘라는 커다란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온다. ‘간식을 먹는 어린이는 식욕이 없다‘라는 기사의 뒤를 쫓듯이 ‘과자를 원하는 어린이에게 단것을 주지 않으면 성격이 어두워진다.‘라는 내용의 칼럼이 나온다. - P36
부엌에서는 냄비가 오만하게 번쩍거린다. 고급 냄비도 아닌 주제에 왜 이렇게 번쩍거릴까. 요시로는 틈틈이 곁눈으로 냄비를 노려보면서 큰 채소 칼로 오렌지를 싹둑 두 동강 냈다.칼도 번쩍거리긴 했으나 그 번쩍거림에는 오만한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 P37
칼을 사길 잘했다. 이 칼을 집으면 요시로 손안에서 두 번째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과일은 그렇게까지 힘주어 자르지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 요시로에게는 고기나 생선보다 이 오렌지야말로 칼이 얼마나 잘 드는지 시험해볼 수 있는 진검 승부 상대였다. 촘촘한 식이 섬유에 감싸인 안쪽 깊은 곳에서 귀한 과즙 한 방울을 찾아내 무메이에게 준다는 사명감에 취해, 요시로는 흥분감에 전율한다. - P39
과일만이 아니다. 양배추도, 우엉도 그렇게 쉽게 먹히겠느냐며 섬세한 섬유로 바리케이드를 친다. 식물은 아주 조용한 듯보이지만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완고함을 지녔다. 그것이밉다. 칼은 목적지를 향해서 망설이지 않고 멈추지 않고 싹싹자르며 나아간다. 강인해서가 아니다. - P39
"무메이, 괜찮으냐, 괴로우냐. 숨 쉴 수 있느냐." 하고 요시로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무메이의 등을 가볍게 다독이고, 머리를 팔로 감싸 가슴에 끌어안는다. 무메이는 괴로운 듯 보이면서도 어딘가 평온하다. 마치 바다가 태풍을 맞이하듯이 아무런 저항 없이 기침 발작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 P41
요즘 어린이의 90퍼센트는 미열을 반려 삼아 산다. 무메이도 늘 미열이 있다. 매일 체온을 재면 도리어 예민해지므로 학교에서는 열을 재지 말라고 지시한다. "오늘은 열이 있네." 하고 말하면 아이는 몸이 나른하다고 느낀다. 열이 날 때마다학교를 쉬면 대다수의 어린이는 학교에 다니지 못할 것이다. 어떤 학교에든 착실한 의사가 반드시 한 명은 있으니, 오히려아플 때 등교하는 편이 낫다. - P42
요시로는 무메이와 함께 체온계를 모노노묘지¹⁴에 묻어버렸다.
14) ものの墓地. 물건의 묘지(墓地)라고도 읽힌다. - P42
새하얀 사기 날에 갈려서 주황색 즙이 흐른다. 피도 아니고 눈물도 아닌, 오렌지색 과즙을 매일 철철 흘리면서 살고 싶다. 주황색이 가진 명랑함, 따뜻함, 단맛과 몸을 옥죄는 듯한 신맛을 모두 받아들여 자신의 장으로 태양을 느끼고 싶다. - P44
딸 아마나는 무메이 정도 되는 나이였을 무렵에, 과자 상자를 자물쇠로 잠가 놓지 않으면 비스킷 한 통 혹은 초콜릿 한덩어리를 통째로 먹어 버리곤 했는데, 요시로가 혼내면 곧장 말싸움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안 되지." "왜요?" "몸에 나쁘니까." "왜요?" - P45
요시로는 손자에게 준 가르침들이 틀렸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도쿄 일등 지역에 땅이 있으면 장래에 그 가치가 떨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부동산처럼 믿을 만한 건 없어."라고 손자에게 말했던 기억이 있다. - P48
손자에게 재산이나 지혜를 물려주려고 했던 것은 자신의오만이었을 뿐이라고, 요시로는 생각한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증손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려면 유연한 머리와 몸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100년이 넘는 동안 옳다고 믿었던 것들을 의심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 P49
요시로는 선 채로 신문을 펼쳤다. 사실 젊었을 때는 신문을읽지 않았는데, 언젠가 한번 신문이라는 매체가 사라진 적이 있었다. - P50
신문을 현관에 놔두고 부엌으로 돌아와서 요시로는 막 짜낸 오렌지주스가 들어 있는, 입구가 작은 대나무 컵을 무메이에게 건넸다. "오렌지는 오키나와에서 나지요?" 하고 무메이가 한 모금마신 뒤 묻는다. "그렇지" "오키나와보다 더 남쪽에서도 나요?" 요시로는 침을 삼켰다. "글쎄, 잘 모르겠구나." - P50
"좋은지 어쩐지는 모른다. 하지만 쇄국을 하면, 적어도 일본기업이 다른 나라의 가난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위험은 줄어들겠지. 또 외국 기업이 일본의 위기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위험도 줄어들 거다." 무메이는 알쏭달쏭한 얼굴을 했다. - P51
시코쿠 지방은 농산물을 거의 다 자급자족하는 정책을 펴는 데다, 특허를 낸 사누키 우동 만드는 법, 독일 빵 만드는 법으로 돈을 번다. 한번은 요시로가 빵집에서 귤을 파는 모습을 발견하고 바로 두 개를 샀다. "시코쿠산"이라고 쓰여 있었다. 빵집은 역시시코쿠 지방과 뭔가 깊은 인연이 있는 듯했다. - P51
새로 생긴 휴일은 역대 천황의 생일이 아니라, 대부분 이름도 날짜도 국민 투표로 정한 민주주의에 따른 정식 휴일이었다. - P52
‘경로의 날‘과 ‘어린이의 날‘은 이름을 바꿔 ‘노인 힘내라 날‘, ‘어린이에게사과하는 날‘이 됐고, ‘체육의 날‘은 몸이 뜻대로 자라지 않은 어린이가 슬프지 않도록 ‘몸의 날‘이 됐으며, ‘근로감사의 날‘은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는 젊은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날‘이 됐다. - P52
무메이는 귤을 손에 쥔 날이면 기분이 좋아서, 제 손가락끄트머리만큼이나 부드러운 귤의 살점을 누르며 놀았다. 요시로는 "먹을 것 가지고 장난하면 안 된다."라고 말할 뻔했으나, 귤로 자기 입을 틀어막고 아무 말 없이 침을 삼켰다. 먹을 것으로 장난해도 된다. - P53
증손자에게 먹일 과일을 사려고 혈안이 된 노인들은 시장에서 시장으로 유령처럼 떠돈다. 옛날에는 책 정도만 가격이 정해져 있었는데, 지금은 과일과 일부 채소가 전국에서 같은가격이다. 예컨대 오렌지는 부족하든 남든 한 개당 10만 원으로 정해졌다. - P54
혼슈 지방은 거칠고 변덕스러운 기후가 된 탓에 농사를 짓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동북 지방은 그나마 나아서 ‘신종 잡곡‘이라 불리는 영양가 높은 비싼 곡물을 생산했고, 그러한 혜택에 더해 기존의 쌀, 보리도 생산량은 줄었지만 여전히 출하했다. - P54
가뭄과 폭풍과 큰비에 쫓기다시피 하여, 혼슈에서 오키나와로 많은 남자와 여자가 이주했다. 농업으로 번성한 지역이라면 오키나와 외에 홋카이도를 들 수 있는데, 오키나와와 달리 홋카이도는 이주자에게 배타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 - P55
오키나와는 애당초 혼슈에서 이주해 오는 사람들을 제한없이 받아들일 방침이었지만 남성 노동자만이 늘어날까 봐 우려했다. 그리하여 오키나와 농장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은 부부로 신청해야만 했다. - P55
나이를 속이려고 얼굴에 주름을 그리고 머리를 탈색해 취직하려 한 여성이 신문에 실렸는데, 실제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게하기는 의외로 어렵다. 오래된 농기구의 스위치에 적힌 영어ON, OFF를 이해하지 못해서 의심받았고, 결국 아직 젊은 나이임이 들통났다고 한다. 영어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다. - P56
요시로의 외동딸 아마나와 그 신랑은 육십 대의 젊디젊은근육을, 특별히 주문한 파란색 무명 작업복으로 감싸고 힘차게 오키나와로 이주했다. - P56
오키나와의 여러 섬에서는 농장의 농산물을 ‘마차‘로 항구까지 운반하고, 거기서 규슈 운송 회사 소속의 배가 다시 신마쿠라자키 대항구까지 실어 나른다. 마차라고 해도 말은 한마리도 없다. 개, 여우, 멧돼지가 과일을 실은 수레를 끄는 풍자화가 가끔 신문에 실리는데, 어쩌면 풍자화가 아니라 현실묘사일지도 모른다. - P57
특산품을 만들어서 지역을 재생하려는 시도는 도쿄에도있었다. 산업화 이전 도쿄의 매력을 되살리기 위해 ‘에도‘라는 브랜드와 신제품을 개발한다는 프로젝트를 신문에서 읽었을때 요시로 역시 참가해 볼까 하고 고민했다. - P58
도쿄 ‘서역‘에서도 콩과 메밀, 신종 보리는 적잖이 재배하지만 다른 지방으로 수출할 만큼의 생산량은 아니어서, 이 지방고유의 특산품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 - P58
가설 주택은 걸레나 빗자루로 간단히 청소하게끔 고안되었기에, 우선 가설 주택에 사는 사람들부터 청소기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세탁기도 모습을감췄다. 무명 속옷을 문질러 빨아서 바깥에 너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늘어난 곳도 가설 주택이다. - P59
요시로는 젊었을 때 세탁기 소리를 듣기만 해도 기분이 처지곤 했는데 지금은 그런 걱정이 없다. - P59
전자 제품을 안 쓰기로 소문난 도쿄 가설 주택의 생활 방식이, 전국 라이프스타일의 첨단을 선도하는 모범이 됐다. 하지만 ‘있는 물건을 쓰지 않는다.‘라는 생활 방식을 특산품으로 팔기는 어렵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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