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과거의 나를 잊어라


공부를 시작하는 것은 어렵다. 사실 새롭게 시작하는 일은 무엇이든 어렵게 마련이다. 왜 새로운 도전은 항상 어려울까? 외국어를 배우거나 자격증 취득을 준비하거나 등등 그것이 무엇이든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한 도전은 늘 어렵다. - P55

도전이 어려운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가 하는 도전이 ‘어려운 것이어서는 아니다. 평상시에 안 하던 짓을 하기 때문도아니다. 원인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더 정확하게는 ‘자기가 만든 자기 자신‘에게 있다. - P55

공부가 어려운 진짜 이유


공부가 어려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기초 단계를 막 배우기 시작할때는 ‘공부를 잘하는 자기 자신‘을 떠올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너무 많은 것을 잃는다. 우선 ‘공부를 못하는 나‘는 책을 잡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공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하더라도 언젠가 공부를 잘하게 되는 자신을 상상하기 쉽지 않기때문에 금방 흥미를 잃고 만다. 그뿐만이 아니다. - P57

뒤에서 잡아 주겠다는 달콤한 거짓말로 ‘자전거를 잘 타는 나‘를 깨닫게 해 줄 친절한 조력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포기해야 하는 걸까?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자기가 스스로를 뒤에서 잡아주면 된다. 스스로 ‘공부 잘하는 나‘를 깨닫게하고, 그런 자신을 구체화하며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책을 잡기로 마음먹은 순간 우리는 책을 잡기 전의 나를 완전히 잊어야 한다. - P58

왜 내 목표는 갈수록 초라해질까?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반드시 할 일이 있다. 바로 ‘목표‘를 정하는 것이다. - P59

겨울 방학 때 우리의 모습

겨울 방학, 이선생님의 강의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어쩌지? 오늘 점심을 너무 맛있게 먹은 탓일까? 계획대로라면 강의를들어야 할 시간이지만 졸음이 쏟아져 결국에는 책상에 엎드려 단잠에 빠지고 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1시간이나 지난 뒤다. 벌써 다음 공부를 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고는 생각한다.
‘아, 오늘은 어쩔 수 없지. 내일부터 진짜 열심히 해야겠다.‘ - P60

이미 이룬 것을 목표로 착각하는 사람들


목표란 꼭 도달하고 싶은 것을 일컫는다. 그래서 우리가 겨울 방학 때 세운 공부 계획과 3학년을 맞이하며 세운 목표 대학은 당당하게 ‘목표‘라고 부를 수 있다. - P61

사실 이런 나란한 목표에라도 이른다면 다행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란한 목표의 정말 무서운 점은 노력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미 이룬 것이나 다름없는 목표를 위해 어떤 사람이 피땀 흘려 노력을 하겠는가. - P61

도대체 공부를 얼마나 해야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내가 공부와 관련해서 단언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수험 생활이 힘들다는 점이다. 1년이란 시간이 길어 보일지 몰라도 적어도 수험생으로서의 1년은 정말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린다. 그래서 시간상으로 엄청난 압박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시간만 효율적으로 쓴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와야 한다. - P62

게으른 나와 절대 타협하지 말자


우리가 아직 수험 생활의 피로에 잠식되지 않고 새 도전에 대한열정이 가득할 때는 목표를 향해 한 치의 미련도 남지 않는 노력을쏟아부을 수 있다. (중략)
누군가 내게 수험생에게 딱 한 가지만 조언해 달라고 한다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것이다. - P63

학년이 올라갈수록
추락하는 성적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내가 다닌 내동중학교는 당시 같은 지역의 다른 중학교에 비해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였지만 공부에 관심이 많던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 P27

사실 중학생 시절 나에게는 공부를 하는 이유가 딱히 없었다. 공부에 간절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단순히 수석이라는 이미지가 깎이는 게 싫어서 공부했을 뿐이다. - P28

상황이 그렇다 보니 선생님들도 최대한 쉽게 수업을 진행했고, 시험에 나올 만한 부분은 재차 강조하며 어떻게든 아이들의 성적을높여 주려고 애를 쓰셨다. 여러 선생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부하는 학생 자체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상위권에 도달할 수 있었다. - P28

공부가 절실하지 않던 시절


(전략).
 수석으로 입학한 나는 1학년 때만 하더라도 수학과 영어 두 과목 모두 높은 성적을 유지해 A반에서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2학년 때 치른 어느 영어 시험에서 처음으로70점대 점수를 받아 그다음 학기에 B반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 P29

비단 영어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반에서는 물론 전교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수학을 잘하는 아이였다. 그런데 2학년이 되자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성적이 밀리기 시작하더니, 3학년 때는 수학에서는 아예 이름을 내밀기도 애매한 겨우 A반 컷의 최후의 보루를 담당하곤 했다. - P29

"외고가 뭐에요?"

(전략).
중학교 3학년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의 관심사가 고등학교로 쏠리기 시작할 무렵 담임 선생님이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영준아, 너 외고가라."
사실 당시 나는 입시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외고가 일반고랑 뭐가 다른지조차 몰랐다. - P30

외고에 도전하기로 결심한 순진한 이유


이유는 단순했다. 우선, 영어를 잘하고 싶었다. 나는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영어를 잘하고 싶어서 외고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성적은 떨어지기 시작해서 이대로 두면 끝없이 추락할 것이 분명했다. 굳이 성적이 아니더라도 신경 쓰이던 것이 바로 회화였다. 나는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원어민과의 영어 수업에서 ‘에이스‘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회화를 거의 안 해서였는지 2학년 때부터는 듣기 평가도 잘해야 80점대가 나왔다.  - P31

그때 나는 공부에 목숨을 걸었다.
내 목표가 ‘쉽게 이룰 수 없고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가치 있고 짜릿한 성취감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힘들지 않았다. 공부에 지친 친구들이 꼭 알았으면
하는 게 있다. 지금의 어려움이나 고통은 본인이
성장하는 증거라는 사실을. 지금 힘든 만큼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맛볼 성취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을.


공부는머리가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
: 실력이 쑥쑥 느는 공부습관 - P105

나의 일과
-고3 시절, 나는 매일 이렇게 공부했다

내가 다닌 김해외고는 기숙 학교였다. 아침 6시 20분 전교에 울려퍼지는 기상송과 함께 하루가 시작되었다.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점호하러 나가야 하기 때문에 기상이 일과 중 가장 험난한 산이었다. - P107

하루의 시작은 국어 공부와 함께


샤워를 마치고 정신을 차리면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아 국어 공부를했다. 국어 중에서도 비문학을 공부했다. (중략).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이 끝난 지 얼마 안 된1학년 시절에는 영어 라디오를 듣거나 영어 단어를 외웠다. - P108

일찍 밥을 먹고 8시쯤 학교에 도착하면 교실에는 나밖에 없거나 간혹 1~2명의 친구가 있었다. 3년간 등교 시간을 지켜보면서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등교 시간은 8시 20분까지였는데 8시 15분까지는 거의 아무도 등교하지 않다가 15분에서 20분 사이에 거의 모든학생이 우르르 등교한다는 사실이었다. 역시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에서든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 P108

과제는 밤 11시 이후에


과제가 많은 주에는 잠이 부족해 지각을 밥 먹듯이 했다. 우리 학교는 수행 평가로 발표나 리포트를 작성해야 하는 과목이 많았다. 그런데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배려해 주어 과제는 시험 기간이 아닌때에 내 주셨다. 열 과목 이상의 선생님들이 그런 배려를 해 주시기 때문에 하루에 소화해야 하는 과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 P109

요즘 고등학생들은 시험공부도 해야 하고 이것저것 조사할 게 많은 발표도 해야 하기 때문에 학교생활이 너무 빡빡한 것 같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 P109

시험 기간에 수면 시간은 하루 3시간

(전략). 보충이 없는 날에는 4시 30분부터 자습이시작된다. 저녁 식사를 위한 1시간을 제외하곤 새벽 1시까지 계속자습을 했다. 나는 그런 생활을 3년간 했다.  - P110

힘들어도 버틸 수 있던 것은

그런데 선생님과의 첫 상담 이후 간절한 목표가 생기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졸린다고 자는 게 내 목표와 비교해 과연 얼마나 가치 있는일이지?‘
대답은 너무 뻔했다. 너무나도 가치 없는 일이었다. - P111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 정도로 그때의 나는 공부에 목숨을 걸었다.  - P111

많은 수험생이 공부가 너무 힘들고 잠을 줄이는 건 더더욱 힘들다고 말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주위 후배들만 하더라도 그런 고민으로 내게 상담하는 친구가 꽤 있었다. 그런 친구들이 꼭 알았으면하는 게 있다. 지금의 힘듦, 어려움, 고통 등 그 모든 것이 본인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표이자 명예로운 상처라는 것을. - P112

하루를 두 배로 늘려주는
자투리 시간 활용법
-성적은 자투리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학년의 시험 과목은 총 열 과목이었다. 시험 기간이 다가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하루에 두세 과목씩 총 3~4일에 걸쳐 전 과목을 공부하는 사이클을 만들고 시험 당일까지 그 사이클대로 공부했다. 그런데 나는그렇게 하지 않았다(물론 내 방식이 더 좋다고 이야기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마다 각자의 공부법이 있다). - P118

하루에 열 과목을 전부 공부할 수 있는 시간 활용법


하루에 열 과목을 공부하던 그 시절은 내가 살면서 공부를 가장 열심히 한 시기일 것이다. 앞으로도 그보다 열심히 하는 것은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당시 나는 잠을 하루에 3시간만 잤다. 새벽 5시에 일어나 5시 30분부터 바로 공부를 시작했다. - P119

. 아침에 밥을 먹으러 갈 때, 밥을 먹고 다시 교실로 갈 때, 교실에 도착해서 조례를 기다릴 때 등등의 자투리 시간에도 귀마개를 한 채 영어 지문을 외웠다. 쉬는 시간에도 종이 치는순간 바로 귀마개를 하고 지문을 보고, 점심시간에도 밥을 빠르게먹고 와서 지문을 외웠다. 청소 시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 P120

그 짧은 자투리 시간에 도대체 뭘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수도있을 것 같다. 그러나 자투리 시간을 하루에 15분씩만 모아도 한달이면 7시간 30분을 더 공부할 수 있다. 30분을 모으면 한 달에 15시간을 더 공부하는 효과를 얻는다. 비록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과제를 미루다가 여러 날 밤을 지새우기도 하는 나지만, 시간에 관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시간은 쓰고자 마음먹는 만큼 주어지는 것이라고. - P121

내가독서실에
다니지 않은 이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한데 열정만큼 몸이 따라주질 않는다. 이번 방학 때 정말 마음먹고 공부하려고 야심 차게 목표도 정하고, 하루 시간표도 더는 좋아질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준비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방학한 지 일주일도 안 돼 몸과 마음이따로 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 P130

공부가 잘되는 공간을 찾아라


‘공부는 환경이 중요하다.‘
누구나 들어 봤을 법한 말이고 실제로도 매우 중요한 말이다. 다들 그런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시험 기간에 공부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평소에 어지럽혀 놓은 책상이 그날따라 유독 거슬려서 집중이 되지 않는다. 책상을 빨리 정리하고 공부하자고 마음먹지만,
결국 그 정리가 대청소로 이어져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왔을 때는이미 1시간이 훌쩍 지나 있는, 그런 경험. - P131

공부 장소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법

지금까지 공부 환경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여기서 살짝더 나아가 공부 환경을 좀 더 효율적으로 쓰는 법에 관해 언급하려한다.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라면 하루에 최소 두 가지 이상의 환경에서 공부할 확률이 높다. 교실, 독서실, 학원, 집 등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공부하는 게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장소에서 똑같은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긴 쉽지 않다. - P134

수험생이라면 반드시 본인의 환경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해 보면 좋겠다. 본인이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찾고, 그 환경에서 언제든 공부할 수 있게 세팅을 해 놓고,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자신의 집중도를고려한다면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P135

내 간절한 목표는 옆에서 자고있는
저친구를 이기는 것

내가 성적이 안 좋았을 때도 어떻게 그렇게 흔들림 없이 공부할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공부에 매진할 수 있게 했는지에 관한 질문인데, 나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열에 아홉은 ‘정의로운 검사‘라든가 ‘전교1등‘과 같은 뭔가 거창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운 목표를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내 목표는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 P136

(전략). 이렇듯 마음속에 공부의 ‘최종 목표‘를 품고 사는 것은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런 목표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대학에 가고 싶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다와 같은 목표는 당장 다가온 중간고사에서 큰 힘을발휘하지 못한다. 물론 중간고사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잘 넘어서야할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최종 목표가 눈앞에 놓인 중간고사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 P137

눈앞의 목표가 가장 강력한 목표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 치른 배치 고사에서 뒤에서 2등이라는 충격적인 성적을 받아 들고 좌절하던 그때, 나를 공부하게 한 것은 미래에 검사가 되고 싶다는 꿈도 아니고, 전교 등수를 높여서 좋은 대학교에 가겠다는 의지도 아니었다. (중략). 더 정확히는 ‘나보다 공부를 덜 하고도 성적은 더 좋은 친구들‘이었다. - P137

1학년 때 공부 동기는 명확하게 딱 하나였다.
‘얘네는 이겨야겠다.‘
노력하는 학생이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한다는 내 믿음을 현실에서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거짓 하나 없이 그때의 나는 국어를 몇 등급 받고 수학을 몇 등급 받아야지하는 등수와 관련된 목표가 아예 없었다. - P138

목표가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많은 학생이 ‘목표‘에 대해 약간의 오해를 하는 것 같다. - P138

그런 측면에서, 대학교나 장래 희망 같은 거대한 목표와 더불어 지금의 나와 그 거대한 목표를 이어주는 수많은 ‘징검다리 목표‘를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조금 저속한 표현일지 모르나, 당장 자신보다 공부를 덜 하는 것 같은데 성적은 더 잘 나오는 ‘재‘를 이겨야지 하는 마음도 좋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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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나는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작가이다. 더없이 우아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내는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내가 이 점을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 나는 대략 이렇게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다. - P9

나는 단지 이야기의 실마리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것 같다. - P10

손이 떨린다. 고함치고 싶다. 아니면 뭐라도 박살 내고 싶다.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다・・・・・・ 이런 기분으로는 이야기를 차분히 펼쳐나갈 수가 없다. 심장을 긁어댄다. 끔찍한 느낌이다. 진정해야 한다.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태연자약할 것. 주지한바와 같이 초콜릿은・・・・・・ (초콜릿 생산 장면을 상상해보시라.) - P11

나는 방금 긴 간극이 있었음을 독자에게 알릴 필요를 느낀다. 그사이 후지산을 닮은 산 위에 떠 있는 연노란색 구름들을 불태우며 길을가던 태양이 졌다. 무거운 피로감에 잠겨 한동안 나는 앉아 있었다. 소음과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여백에 코를 그리기도 하고, 선잠이 들락 말락 하다 갑자기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 P12

요컨대 나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그는 한 시간 후에 올 거라했다. 할 일도 없는데 좀 거닐까 하고 밖으로 나갔다. 바람이 불었다. 날은 쾌청했다. 얼룩덜룩한 그림자가 여기저기 드리워 있었다. 여기서 부는 바람의 먼 친척뻘인 바람이 좁은 거리를 따라 날아다녔다. - P12

저 멀리에서는 멋지게 생긴 가파른 산이 벽이 되어 하늘 위로 솟구쳐 있었다. 산을 오르기로 했다. 산의 장관은 눈속임이었다. 계단이 난 오솔길이 키 작은 너도밤나무와 딱총나무 사이를 지그재그로 지나고 있었다. 자, 자! 이제 금방이라도 경이로운 야생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어떤 장소에 다다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곳은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P13

나는 옹이투성이인 난간에 팔꿈치를 괸 채 저 아래 옅은 안개에 덮인 프라하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지붕들, 연기 나는 굴뚝들, 병영, 작은 백마. 다른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 P13

오케스트라, 팡파르! 아니 이게 낫겠다. 곡예를 할 때처럼 숨을 헐떡이며 쪼개져라고 북을 쳐라! 믿기지 않는 순간이다. 이게 지금 진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내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자리에 앉았다. 솔직히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른 사람이 그 모습을 봤다면 폭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 P14

일단 벌써 중요한 대목에 도달했고 가려움증을 가라앉혔으니, 자, 이쯤에서 내 이야기에 이렇게 명령하는 게 부적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쉬어! 조용히 되돌아가! 그리고 그날 아침 내 기분이 어땠는지,
계약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산책하러 나선 길에 언덕을 기어올라서는, 바람 부는 5월 어느 날의 푸른 하늘 사이로 저 멀리 둥글둥글하고 불그스레한 가스탱크를 바라보았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분명히 밝혀! 되돌아가서 밝히자. - P15

올 한 해 나는, 강하게 발달했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내 정신이 골몰해 세운 저 논리의 집이 지닌 놀라운 명확성과 조화를 철저히 시험했다. 직관의 유회, 창작, 영감, 내 생을 치장해온 고상한 모든 것이, 말하자면 문외한에게는, 심지어 똑똑한 문외한에게도 가벼운 광기의 서곡으로 비칠수 있으리라. 하지만 진정하시라.  - P15

그는 코를 벌름거리며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생의 파문이 얼굴에일었다. 그로 인해 약간 흐릿해지긴 했지만, 기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눈을 뜨고 곁눈질로 나를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하품을 주체하지 못하며 기름진 어두운 금발 머리를 긁기 시작했다. - P16

"담배 있습니까?" 체코어로 그가 물었다. 예기치 못하게 낮고 차분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그는 두 손가락을 벌려 담배 피우는 시늉을 했다.
나는 내 커다란 가죽 담뱃갑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에게서 한순간도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는 손바닥을 땅에 짚고 조금 움직였다. 그사이에 나는 그의 귀와 움푹 들어간 관자놀이를 살펴보았다.
"독일제구먼." 그가 말하며 미소 지었다. 잇몸이 드러났다. - P17

내가 물었다. "당신 뭐요, 하는 일 없소?"
그는 애처롭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다시 침을 뱉었다. 하층민은침이 어쩌면 그리 많이 나는지 나는 항상 놀란다.
"나는 내 부츠보다 더 오래 걸을 수 있지요." 자기 두 발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그의 신발은 정말로 보잘것없었다. - P18

"이보시오." 나는 참지 못했다. "정말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겠소?"
그가 몸을 돌려 일어나 앉았다. "뭘 말입니까?" 그가 물었다. 미심쩍어하는 음울한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쳐갔다.
내가 말했다. "눈이 멀었구먼."
한십초 남짓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의 왼손은 들리지 않았다. 거의 그걸 기대했는데, 나는 왼쪽 눈을 게슴츠레 떠보았지만, 그의 두 눈은 열린 그대로였다. - P19

나는 그의 머리를 내 머리 쪽으로 당겨서 관자놀이를 맞댔다. 거울속에서 두 쌍의 눈이 춤추듯 헤엄치듯 움직였다.
거들먹거리며 그가 말했다. "부자가 가난뱅이를 닮을 리가 있겠소. 잘 알면서 그러시네・・・・・・ 그러고 보니 저잣거리에서 봤던 쌍둥이가떠오릅니다. 1926년 8월인가 9월이었소. 아니 8월이었던 것 같네요. 거기서는 정말 그 둘을 분간할 수 없었소. 다른 점을 찾는 사람에게100마르크를 걸었지요. ‘좋소‘ 하고 붉은 머리의 프리츠가 말하더니느닷없이 쌍둥이 중 한 녀석의 귀싸대기를 찰싹 때리는 겁니다. 그러고는 말하길, ‘보세요. 이 사람은 귀가 빨간데, 저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당신 100 마르크 이리 주세요.‘ 배꼽을 잡았지요!" - P20

"현재로선 자넬 도와줄 길이 전혀 없네." 나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한테 자네 주소를 줘보게." 나는 수첩과 은 연필을 꺼냈다.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별장에서 산다고 말해봐야 소용없는 노릇이겠지요. 숲보다는 건초 더미 위에서 자는 게 더 낫지요. 그렇지만 딱딱한 벤치보다는 숲에서 자는 게 더 낫소."
"하지만 그래도 자넬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알고 싶군." 내가 말했다. - P21

교회의 먼지가 밀려들어 콧구멍이 꽉 막혔다. 코를 풀며 침대 끝에걸터앉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콧속의 가려움, 허기, 레스토랑에서 먹은 송아지 커틀릿의 불그레한 맛 같은 존재의 사소한 징후들이 이상하게 내 주의를 끌었던 것이 기억난다. - P22

실로 그 사람은 특히 자고 있을 때, 이목구비의 움직임이 없을 때, 내 얼굴을, 내 마스크를, 티 없이 깨끗한 내 시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시체라고 말하는 이유는 오직 내 생각을 극도로 선명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무슨 생각? 바로 이런 생각 말이다. 우리는 똑같은 이목구비를 지녔다. 그리고 완전한 수면 상태에서 이 동일성은 아주 분명해졌다. 죽음, 그것은 얼굴의 안식. 얼굴의예술적 완벽이다. 생은 그저 내 분신을 망칠 따름이다. 그렇게 바람은나르시스의 행복에 안개를 드리운다. 그렇게 화가가 없을 때, 그의 제자가 들어와서 시키지 않은 덧칠로 대가의 초상화를 망친다. - P23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여러분 모두를 납득시키고 싶다. 불한당인 당신들을 강제로라도 믿게 만들고 싶다.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말 그 자체의 본성 탓에 닮은 두 얼굴을 말로는 완전히 묘사할 수 없다는 점이 두렵다. 그러니까 말이 아니라 물감으로 그들을 나란히 그려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말하는 바가 관객에게 분명해지지 않을까? - P24

나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 내가 내 주장을 입증했음을 알기때문이다. 모든 상황이 멋지다. 독자여, 그대는 이미 우리를 보고 있다. 둘이지만 하나인 얼굴! 하지만 가능한 결함들을, 자연의 책에 존재하는 사소한 오식들을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생각지는 마시라. 유심히 보시라. 내 치아는 크고 누렇다. 반면 그의 치아는 더 조밀하고 하얗다. 그러나 과연 이게 중요한가? 내 이마에는 다 그리지 못한 ‘생각‘ 같은 혈관이 부풀어오른다.**


** 이마에 혈관이 불완전한 M자 모양으로 부풀어오른다는 뜻. ‘생각‘을 뜻하는 러시아어
‘미술‘과 러시아어 철자 M의 옛 명칭 ‘미슬레테‘를 연관시킨 언어유희. - P25

바로 지금 나는 단춧구멍에 온전히 남은 마지막 제비꽃을 꽂은 채 팔을 늘어뜨리고 자고 있는 그를 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나란히 있는 우리를 주목하고 벌떡 일어나 에워싼 다음 경찰서로 끌고 가지는 않을까? 왜? 왜 나는 이 글을 쓰는 걸까? 그저 익숙한 펜 놀림인가? 아니면 두 사람이 두 방울의 피처럼 서로 닮았다는 것 자체가 실제로 이미 범죄인 걸까? - P26

2장


나는 거리를 두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데, 스스로의 모델이 되는 데 몹시 익숙해져버렸다. 바로 그 까닭에 내 문체는 꾸밈없는 자연스러움의 은총을 잃어버렸다. 나는 이제 도무지 원래의 내 껍질 속으로 돌아가서 옛 자아 안에 편안히 기거할 수 없다. - P27

 나는 늘 같은 가게에서 담배를 사곤 했는데, 행복한 미소가 변함없이 날 맞아주었다. 버터와 달걀을 사던 가게에서도 그와 같은 미소가 아내를 맞이했다. 토요일이면 우리는 카페에 가거나 영화를 보러 갔다. 우리는 중산층 중에서도 잘사는 축에 속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사무실에서 돌아오면신발을 벗고 소파에 누워 석간신문을 펼치지 않았다. - P28

아니, 여기에서 ‘증오‘는 너무 강렬한 단어인 것 같다. 그건 뭔가 가정적이고 기초적이며 여자들한테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특히 일요일이면) 비나 (특히 새 아파트에서) 빈대를 좋아하지 않듯이, 아내는 볼셰비키를 좋아하지 않았다. - P28

아내는 로이드 조지를 증오한다. 그 사람 때문에 러시아가 파멸했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내 손으로 목 졸라 죽여버려도 시원찮을 영국 놈들" 독일인들은 밀폐된 열차 때문에 혼이 난다. (그건 레닌이 수입한 볼셰비즘의 통조림이다.)****


*** 소비에트 혁명 직후 벌어진 내전 당시 (1918~1922) 영국의 총리로 볼셰비키와의 전쟁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러시아 망명자들의 증오를 샀다.
**** 1917년 2월 혁명 직후 스위스에 머물던 레닌과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독일제국 정부가 독일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가해준 덕분에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독일정부는 레닌이 독일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밀폐된 열차를 제공했다. - P31

아내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관찰력이 부족하다. 한번은 그녀가 ‘신비주의자‘라는 말을 항상 지소사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검은 토가를 두른, 얼굴이 별처럼 초롱초롱하고 몸집 큰 어떤 진정한
‘신비주의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음을 알게 된 적이 있다.

** ‘신비주의자‘를 뜻하는 러시아어 ‘미스티크‘의 ‘이크‘를 지소(指小) 접미사로 착각했고, 그래서 진정한 ‘큰‘ 신비주의자인 ‘미스트‘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 P32

아내에게 나는 이상적인 남자였다. 나는 명석하고 결단력이 있다.
게다가 나보다 더 맵시 있게 차려입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통 큰바지에 새 턱시도를 걸쳤던 때가 기억난다. 그녀는 조용히 두 손을 꼭쥐더니 살짝 기운이 빠진 듯 의자에 주저앉아 소곤거렸다. "오, 게르만!......" 그건 천국의 비애에 가까운 환희였다.
아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며 그녀와 타협하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건 그녀의 행복을 위한 선하고 유용한 일이라는 느낌,
아마도 나는 이런 분명치 않은 느낌과 함께 쉽게 믿는 그녀의 성향을 이용하고 있었다. - P35

조건 없이 맹목적으로, 일종의 자연적인 헌신으로 아내는 나를 사랑했다. 내가 왜 다시 과거시제로 빠졌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뭐 상관없다. 그게 더 쓰기 편하다. 그래, 그녀는 날 사랑했다. 사랑에 충실했다. 아내는 내 얼굴을 이쪽저쪽 찬찬히 뜯어보기를 좋아했다. - P36

내가 프라하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리다는 부엌에 있었다. 컵에 달걀을 풀어 고골모골 거품을 내고 있었다...... "목이 아파요." 그녀가 걱정스레 말했다. 레인지 모서리에 컵을 세워두고 손등으로 노란 입술을 닦더니 내 손에 입을 맞추었다.

*달걀에 설탕 등을 넣어 거품을 낸 음료로 목이 쉬거나 아플 때 치료 수단으로 쓰인다. - P37

나는 그 만남에 며칠을 짓눌려 있었다. 지금 내 분신이 내가 모르는 길을 따라 터덜터덜 걷고 있고, 잘 먹지 못하고 추위에 떨고 비에 젖고 있으며, 오한에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상하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가 일을 찾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가 아늑하고 따뜻하게 지낸다고, 하다못해 안전히 감옥에라도 갇혀 있다고 확인할 수 있다면야 기분이 좀 나으련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 P39

6월 중순 우리는 (아르달리온의 열렬한 설득에 못 이겨) 처음 그곳에 갔다. 내 기억으로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아르달리온을 태우러 그의 집에 들러서 창을 바라보며 연신 경적을 빵빵댔다. 창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리다가 손으로 확성기를 만들어 소리를 질렀다. "아르달리오샤!" 술집 간판 바로 위에 있는 아래쪽 창에서 커튼이 사납게 홱 젖혀졌다. - P41

"내 땅이다! 이제 알겠어!" 정오 무렵 쾨니히스도르프를 지나 아르달리온이 아는 큰길로 접어들었을 때 그가 환호성을 질렀다. "어디서돌려 들어가야 할지 알려드리지요. 안녕, 안녕, 내 오랜 나무들아!"
"아르달리온칙, 바보짓 좀 하지 마." 리다가 차분하게 말했다.
길 양쪽에 펼쳐진 울퉁불퉁한 황무지, 모래밭과 히스 꽃 군집. 작은소나무들이 간간이 섞여 있었다. - P42

리다가 말했다. "아르달리오샤, 우리 그냥 큰길로 곧장 발다우로가는 게 어때. 거기 큰 호수랑 카페가 있다고 했잖아."
"절대 안 돼." 아르달리온이 흥분해서 반대했다. "첫째, 그 카페는이제 막 설계에 들어갔다고. 그리고 둘째, 내 땅에도 호수가 있어. 자,
자, 어서요!" 그가 내 쪽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쭉 가세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 P44

"내려서 걸어가는 게 어떨까요?" 리다가 제안했다.
"당신 말이 맞아. 누가 새 차를 훔칠 생각을 하겠어?" 내가 말했다.
"그래, 이건 위험해." 그녀가 즉시 동의했다. "그럼 당신들 둘이서갔다 오는 게 어때? (그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르달리온이 당신에게 땅을 보여주고, 난 여기서 당신들을 기다리지 뭐. 그다음에 발다우로 가서 수영하고 카페에 좀 앉아 있자."
"무례하군요, 마담!" 격한 어조로 아르달리온이 말했다. - P45

"대체 뭐 하느라 안 돌아오는 거야? 길을 잃고 헤매는 거 아닐까?"
나는 차에서 나와 잠시 주위를 서성거렸다. 흠집투성이였다. 무료해하던 리다가 아르달리온의 불룩한 서류가방을 만지작거리더니 열어보았다. 나는 몇 걸음 물러섰다. 아냐, 아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발에 밟힌 잔가지를 살펴보고는 돌아왔다. 리다는 차 발판에 걸터앉아 휘파람을 불었다. 둘이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침묵. 그녀는 입을 일그러뜨리며 옆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 P47

"당신 얼굴은 까다롭네요." 그가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어, 보여줘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리다가 소리쳤다.
"머리 좀 들어보세요." 아르달리온이 말했다. "그래 그렇게 됐어요."
"아이. 좀 보여줘." 잠시 후 리다가 다시 소리쳤다.
"내 보드카를 어디다 팽개쳤는지 먼저 보여주시지." 아르달리온이 투덜거렸다.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은 안 돼." 리다가 대꾸했다.
"넌 내가 있을 때는 술 못 마실 줄 알아." - P49

"그런데 말이오, 모든 얼굴이 정말 유일무이하다고 생각하나요? 우선 실제로 특정한 얼굴형이 있잖소. 이를테면 동물형 얼굴 같은 유인원같이 생긴 사람도 있고, 쥐같이 생긴 사람도 있고, 돼지형 얼굴도있고...... 그다음 유명한 사람들의 얼굴형도 있잖습니까. 나폴레옹타입 남자나, 빅토리아 여왕 타입 여자 같은 경우 말이오. 난 내가 아문센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을 듣곤 했소. 톨스토이풍 코를 난 심심찮게 봤어요. 음, 또 미술 작품형도 있지 않소. 성화(聖畵)에 나오는 얼굴, 성모형 얼굴. 생활 방식이나 직업 때문에 닮은 얼굴형은 또 어떻소......" - P50

3장

우리 이 장을 어떻게 시작할까? 몇 가지 제안을 할 테니 골라보시라. 첫번째 안이다. 이건 실제 작가나 작가의 대리인에 의해 서사가전개되는 일인칭 소설들에서 흔히 만나게 된다. - P52

(전략).
그런데 이 기법은 남용되어왔다. 작가입네 하고 거짓을 떠벌리는 장사치들이 찢어발겨서 누더기가 되어버렸다. 이건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진실해졌으니까. 그럼 이제 두번째 안으로 주의를 돌리자.
요점은 곧장 새 인물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오를로비우스는 불만스러웠다. - P53

문학과 관련하여 나는 모르는 게 없다. 내겐 늘 이런 기벽(奇癖)이있었다. 어릴 적 나는 시와 긴 이야기를 쓰곤 했다. - P55

 어리석은 상황 속에 말을 집어넣기. 말장난의 위장결혼으로 말들을 결합하기. 안팎을 뒤집기. 불시에 덮치기. 내가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것들이다. ‘베테리나르‘라는 말 속에서 소비에트의 ‘베테르‘는 무얼 하고 있는가? ‘압토마트‘ 속의 ‘토마트‘는 어디서 온 걸까? ‘주브르‘로 ‘아르부스‘를 어떻게 만들지?*** 나는 수년간 더없이 기이하고 끔찍한 꿈에 시달려왔다.


*** 러시아어로 ‘베테리나르‘는 수의사, ‘베테르‘는 바람, ‘압토마트‘는 자동기계 혹은 기관총, ‘토마트‘는 토마토, ‘주브르‘는 들소 혹은 고수(高手), ‘아르부스‘는 수박이라는 뜻. - P56

내 것, 내 것을, 청소년 시절 내 실험들을 무의미한 소리들에 대한내 사랑을・・・・・・ 그건 그렇고 그 시절 나는 이른바 어떤 범죄적 성향을 가졌던 걸까? 지금 나를 골몰케 하는 건 바로 이 물음이다. - P57

"말하기 무겁지만, 내가 보기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젊었을때 나는 최상의 것만을 가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최상의 것‘은 그의 입에서 극도로 침울하고도 번드르르하게 울려나왔다.) 그때 이후로 이 생각에 변함이 없어요. 내 생각을 지배하는 건 옵티미스무스*입니다."
"당신 직업에 꼭 필요하지요." 미소를 머금으며 내가 말했다.
오를로비우스가 도끼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진지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고객을 확보해주는 건 페시미스무스**입니다."


* ‘낙관주의‘라는 뜻의 라틴어.
** ‘비관주의‘라는 뜻의 라틴어 - P58

"빌어먹을 놈의 초콜릿 사업이 결딴나게 생겼어." 내가 말했다. 나도 하품이 나왔다.
"다 잘될 거예요." 리다가 중얼거렸다. "그냥 좀 쉬어요."
"휴식이 아니라 삶의 변화가 필요해." 거짓 한숨을 내쉬며 내가 말했다.
"삶의 변화라." 리다가 말했다. - P60

"알아맞혀봐. 자, 첫번째 마디, 이건 프랑스어로 ‘덥다‘는 뜻이야. 두번째 마디는 튀르크인을 꽂아 죽이는 뾰족한 ‘말뚝‘이야. 세번째 마디, 이건 우리가 이르든 늦든 다다르게 될 곳이지. 이것들을 합한 게날 파멸로 이끌어."*
바스락 소리를 내며 자동차가 지나갔다.

*한 낱말을 여러 마디로 나눠 맞히는 낱말 수수께끼. 각 마디의 발음을 표기하면 쇼-콜-아트(지옥)이고, 전체 단어는 ‘쇼콜라‘, 곧 ‘초콜릿‘이다. - P60

"난 눈은 항상 마지막에 그려요." 아르달리온이 우쭐대며 말했다.
그는 팔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이제 그리기 시작한 초상화를 두고 고개를 이리 숙였다 저리 숙였다 했다. 그는 자주 와서 목탄으로 나를그리곤 했다. 우리는 보통 발코니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 나는 시간이 남아돌았다. 그래서 짤막한 휴가 비슷한 뭔가를 궁리해냈다. - P62

내 삶은 온통 망가지고 꼬였다. 그런데도 난 여기에서 이 발랄한 묘사 한 토막과 이 친밀한 일인칭 복수와 여행자에게, 별장의 휴가객에게, 그림같이 어우러진 초목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건네는 이 눈길과노닥거리는 바보짓을 하고 있다. 하지만, 독자여, 참으시게. 내가 지금 그대를 거닐게 하는 건 다 까닭이 있어서라네. - P64

나는 수차 이 단조로운 산책을 반복했다. 숲에서 단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다. 오지(奧地). 정적. 호숫가 땅은 한 군데도 팔리지 않았다. 정말이지 사업 전체가 망해갔다. 그곳에 갈 때면 하루 종일 사람이라곤 우리 셋뿐이어서 원하면 발가벗고 수영해도 거리낄 게 없었다. - P65

자, 이제, 친애하는 독자여, 아무도 없는 건물 6층에 있는 조그마한 사무실을 상상해보자. 타이피스트는 떠났고 나 혼자다. 창에는 구름낀 하늘. 벽에는 달력. 어쩐지 황소의 혀를 닮은 거대한 검은색 숫자9. 9월 9일. 탁자 위에는 채권자들이 보낸 편지의 모습을 한 연이은걱정거리와 나를 배신한 라일락 부인이 그려진 초콜릿 상자, 상징적으로 비어 있다. 아무도 없다. 타자기의 덮개는 열려 있다. 정적. - P67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멍한 상태를 떨쳐냈다.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열쇠를 꺼내 죄다 잠그고 떠날 참이었다. 거의 벗어나려는 순간,
그러나 나는 복도에서 멈췄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떠날 수 없었다. 나는 되돌아갔다. 창가에 서서 건너편 집을 바라보았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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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어느 바보의 공부 이야기
-전교 꼴찌가 수능만점받기까지


나는 바보였다.
일반 고등학교와는 다른 외국어 고등학교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중학교 졸업 직전에야 알게 되었다. 외고에 가는 친구들은 입학 전에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을 미리 배운다는 것도 학교에 들어가서야알았다. 그러니 배치 고사에서 꼴찌에서 두 번째 등수를 차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P4

공부에 대한 중요한 진실 한 가지

그럼에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은 것은 공부에 대한 중요한 진실 한가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공부의 양과 성적은 비례하지 않는다는사실이었다. 공부를 1시간 한다고 해서 성적이 반드시 1점 오르는것은 아니다. - P5

그렇게 오로지 앞만 보며 나아가기 시작한 나는 수면 시간을 반으로 줄이고,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을 찾아가 질문하고, 매주 서점에가서 문제집을 닥치는 대로 사서 풀었다. 참가할 수 있는 모든 교내대회에 신청서를 내고,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의 질문에 말이 되든안 되든 생각나는 대로 의견을 쏟아 냈다. - P6

내 이야이가 힘이 될 수 있다면.

(전략).
대학생이 되어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생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그들의 고민을 들어 주며 함께 해법을 찾아보는 게 내 주요 업무였다. 일을 하면서 학생들이 대체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P7

그러던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마친 뒤 지하철을 타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공부에 지친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고 힘을 낼 수 있다면 책을 내는 것도나쁘지 않을 듯싶다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좌절을 겪으며 알아낸 내나름의 공부 노하우가 지금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의 실수와 후회를 막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괜찮을 것 같다고. - P7

내가 생각하는 1등과 꼴찌의 차이

모든 수험생의 목표가 수능 만점일 필요는 없다. 현재 본인 수준보다 높은 것을 목표로 삼되, 그게 반드시 최정상일 필요는 없다는뜻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까?  - P8

노력의 진가는 우리를 더 높은 곳, 더 좋은 결과로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노력해 봤다는 경험‘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력해서 작은 난관을 넘어 본 사람은 또 다른 난관을 만났을 때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 P8

나는 고등학교 생활을 전교 꼴찌로 시작했지만 졸업할 때는 수능에서 전국 1등이라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꼴찌와 1등의 차이는 생각만큼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 P8

 ‘비관주의자는 모든 기회 속에서 어려움만 보지만, 낙관주의자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 기회를 알아본다‘라는 원스턴 처칠의 말처럼 꼴찌는 ‘뭘 해도 안 될 거야‘ 라는 생각에 핑곗거리만 찾고, 1등은 어떻게든 해 보려는 생각에 방법을 찾는다. - P9

포기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국어 시간에 ‘좋은 책은 하나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하는 것이라고 배운 기억이 난다. - P9

 그리고 그때까지 이 말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스스로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공부는, 그리고 노력은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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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고리치아-유럽 땅 끝에서 일어난 혁명


이것은 혁명이었다. 계급혁명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혁명이었다. 이 혁명은 사람들에게 영혼을 얼굴을 심지어 옷까지도돌려주었다. 그때까지 그들은 모든 것을 박탈당해 있었다.
-엔초 콰이¹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무엇을 바꾸고 싶은가? 그건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하루하루 지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자 사람들은이렇게 물었다. "이렇게 해서 어디로 가려는가?" 나는 대답했다. "모른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알지 못했다.
-프랑코 바잘리아²

1965년에 고리치아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이 정신병원 내부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 P15

제1부 고리치아, 1961~1968년

제1장 고리치아-유럽 땅 끝에서 일어난 혁명


1 Michele Sartori, ‘L‘infermiere della rivoluzione‘, L‘Unità, 1996년 12월 8일자.

2 Corso di aggiornamento per operatori psichiatrici. Trascrizione di duelezioni/conversazioni di Franco Basaglia con gli infermieri di Trieste,
lezioni intervallate da un dibattito. 1979, deistituzionalizzazione-trieste it. - P493

그 시작-유배지에서


나는 이 말을 슬라비치에게 들려주고 싶다. 우리가 이 공공시설 안에서 이 모든 활동을 시작했을 때 이곳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이제 이곳에는 우리가 100명은 된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을 했고, 그런 행동이 일정한 결과로 이어졌다.
프랑코 바잘리아(1968)⁴ - P16

4 Franco Basaglia, ed., L‘istituzione negata. Rapporto da un ospedalepsichiatrico (1998), Milan: Baldini & Castoldi, pp.253-4. 이 책 『부정되는 공공시설』은 여러 판본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앞으로 토리노의 에이나우디 출판사가 1968년 이후로 펴낸 여러 판본도 언급할 것이다. - P493

 때는 1961년 겨울이었고, 고리치아는 지구의 끝 같아 보였다.⁷ 여러 면에서, 적어도 유럽의 관점에서 그곳은세상의 끝이었다. 이 현립⁸ 정신병원은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던 1911년에 설립됐으며 원래 이름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즉 공산권이라는 저쪽 세계를 가르는 철의 장막이 병원을 정통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다만 곳에 따라 바닥에흰색으로 국경을 표시했다.) - P17

7 안토니오 슬라비치에 따르면 바잘리아가 고리치아에 부임한 날은 1961년 11월 2일이다. Antonio Slavich, La scopa meravigliante. Preparativi per lalegge 180 a Ferrara e dintorni 1971-1978, Rome: Riuniti, 2003.p.257.n.1.

8 이 병원이 고리치아현 전체를 담당했는데, 당시 인구는 13만 명 정도였다. 이 숫자는 1965년에 바잘리아가 제시한 것이다. Basaglia, Scritti. I.p.263에 수록된 ‘La "Comunità Terapeutica" come base di un serviziopsichiatrico‘.) 이탈리아 통계청 자료에는 1951년 13만 3550명, 1971년 13만 7745명으로 되어 있다. 1947년 이전 인구는 그 두 배에 가까운 약 25만명이었다. - P494

높은 담과 정문, 울타리, 철창, 굳게 닫힌 출입문이라는 고전적인 구조의 건물 안에 600명이 넘는 환자가 있었다.¹¹ 그 가운데 3분의 2는슬로베니아 출신이고, 절반 정도는 이탈리아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이었다.¹² 이들 중 약 150명은 종전 이후 평화협정에 따라 수용된 사람들이었다. - P18

11 슬라비치에 따르면 1962년 3월에는 629명의 환자가 있었다(Balconi.
L‘esperienza Goriziana dal ‘61 al ‘72, p.495에 수록된 인터뷰). 도널리는 "대형(800병상 규모) 지역 정신병원"을 언급한다. Michael Donnelly,
The Politics of Mental Health in Italy, p.40.
12 이제까지 바잘리아와 고리치아에 관한 문헌에서 이 문제는 거의 다루어지지않았다. - P494

고리치아의 마니코미오(manicomio, 정신병원)는 어둡고 불길한 시설로, 가난한 사람과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을 버리는 곳이자 배척하는 장소였다. 당시 이탈리아의 정신질환자 보호소가 대부분 그렇듯 세월이 지나면서 가두고 통제하기 위한 시설물이 늘어나, 가장 통제하기어려운 환자를 감금하는 우리와 움직일 수 없도록 구속된 사람의 배변을 위해 구멍이 뚫린 병상을 갖추고 있었다. - P18

혁명을 시작하겠다는 생각이 들 만한 곳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바잘리아는 이곳의 직책을 맡았고, 그로부터 8년 만에 고리치아는 유럽전체는 아닐지 몰라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정신질환자 보호소가 되었다. (중략). 고리치아의 ‘혁명‘은 거의 우연히 일어났다. 바잘리아가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그곳의 정신질환자 보호소는 필15시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을 것이다.¹⁵ - P19

15 그 밖에 많은 곳이 1960년대를 지나는 동안 마리오 톰마지니, 일바노 라지멜리, 미켈레 차네티 같은 정치가들이 외부에서 개입함으로써 변화했다. - P495

프랑코 바잘리아(1924년 베네치아 출생)는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엔리코 바잘리아는 수익성이 좋은 세금 수금 회사를 경영했다. 프랑코는 베네치아의 산폴로 지구에서 자랐다. 그의 가족은 파시스트정부에 충성했지만, 바잘리아는 이내 반항자로 자라났다. 그는 십대 학생일 때 시내의 반파시스트 운동에 가담했다. - P20

베네치아는 전쟁에서 일어나는 최악의 참상을 많이는 겪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탈리아의 다른 모든 도시와 달리 폭격을 겪은 일이 드물었다(포르토마르게라 산업지구와 메스트레에 폭탄이 떨어졌고 때로는 베네치아 석호 자체에 가끔은 시내에 폭탄이 떨어지기는 했다).²¹ - P21

21 Bobbo, Venezia in tempo di guerra. - P495

1944년 8월 초, 나치는 독일군병사 한 명이 실종되자 새벽에 남자 일곱 명을 총살했다. 카스텔로 지구에서 광범위한 일제 검거도 시행했다. 나중에 문제의 독일군 병사는익사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필시 술을 너무 마신 때문인 듯했다. 희생자들은 ‘7인의 순교자‘로 알려지게 됐다. (후략).²⁵ - P22

25 Bobbo, Venezia in tempo di guerra, pp.327-44. John Foot, Fratture d‘Italia. Da Caporetto al G8di Genova la memoria divisa del paese, Milan Rizzoli, pp.13-14. - P495

베네치아의 산타마리아마조레 감옥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시내로 들어가는 철로 및 도로에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1926년에 문을 연 이 감옥은 베네치아의 전쟁사, 특히 저항운동의역사적 신경중추였다. 1943~1945년 내내 "산타마리아마조레의 수감동과 정치경찰 사무실 사이에 (실제 및 추정된) 반파시스트와 파르티잔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는데, 사무실에서 경찰이 그들을 ‘심문했고 심문은 종종 고문으로 이어졌다."²⁸ - P23

28 Bobbo, Venezia in tempo di guerra, p.39. - P496

바잘리아는 1944년 12월 11일에 체포됐는데, 필시 밀고 때문이었을 것이다.³⁰ 닷새 밤낮으로 경찰 심문을 받고 나서 베네치아의 감옥으로 보내졌다. - P24

30 옹가로와 루비니 모두 밀고자는 프란체스코 루치라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Albanese et al., Memoria resistente, p.1276, 1511), 줄리오 보보의 연구에서는 바잘리아의 사촌인 루초 루비니가 파시스트 경찰에 체포된 뒤 매질당한 끝에 바잘리아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이름을 댄 것으로 보인다(Bobbo.
Venezia in tempo di guerra, pp.412-14). - P496

전쟁 동안 감옥은 공포와 고통, 빈대, 오물, 질병, 그리고 저항의 장소였다. 바잘리아보다 먼저 투옥된 키넬로는 "수감생활은 힘들고 어려웠다"고 썼다.³¹ 바잘리아는 한동안 루비니를 비롯하여 반파시스트 운동에 가담한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한방에서 지냈다. 많은 수의 죄수를수용하는 큰 감방 사이에서는 죄수들의 이동이 잦았다. 그들은 카드놀이와 노래, 독서, 잡담, 토론, 음모와 잠으로 시간을 보냈다.  - P25

31 Chinello, La mia "educazione sentimentale", p.52. - P496

감옥에서 보낸 시간은 바잘리아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지만, 그는 감옥 경험에 대해 심지어 친구나 가족에게조차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감방에서 배운 노래를 간혹 부르곤 했다. 그가 1961년에고리치아의 정신질환자 보호소 체제에 대해 거의 본능적인 수준의 강한 반응을 보인 것의 근원을 젊은 시절 감옥 생활의 기억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 P26

저항운동은 바잘리아의 삶에 다른 방식으로도 영향을 끼쳤다. 학교친구인 알베르토 옹가로는 베네치아 저항운동의 핵심 가담자였으며, 공개적으로 정권에 반대한 최초의 학생 중 한 사람으로서 반쯤 전설이된 인물이다. - P27

(전략).

바잘리아는 파도바에서 좌절을 맛보았음이 확실하다. 1970년대 초에 파르마에서 대학교 체제로 돌아갔을 때 다시금 상부에 의해 승진이 가로막히는 일이 적어도 두 번 있었다.³⁶ 파도바에서 순수 연구원으로 있던 시기에는 많은 학술 논문을 발표했고, 이탈리아 정신의학계라는 보수적이고도 고리타분한 세계에 화가 난 정신의학자를 비롯한 사람들과 접촉하게 됐다. - P28

36 이 정보의 출처는 바잘리아 본인이지만(Ongaro and Giannichedda,
Conferenze brasiliane, pp.155-6)FabioVisintini, Memorie di un cittadino psichiatra (1902-1982), Naples:Edizioni Scientifiche Italiane, 1983, p.189)에서도 확인되었다. - P497

파도바에서 보낸 시간은 우정과 인맥 측면에서 중요했다. 이곳에서 함께 공부한 안토니오 슬라비치는 1962년에 고리치아 에퀴페 (équipe, 팀)의 두번째 구성원이 되었고, 고리치아와 콜로르노의 경험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잘리아와 함께했다. (중략). 1925년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서 태어나 베네치아의 아르메니아대학에서공부한 그는 나중에 바잘리아가 벌인 운동의 중요한 협력자가 되어 다양한 임명위원회에서 그를 도왔다.³⁸
바잘리아는 완전한 외톨이가 아니었을 뿐더러 독불장군도 아니었다. 고위층 친구들이 있었고, 힘있는 사람들과 협력관계를 맺고 함께일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 P29

38 나중에 테르치안은 1982년 베로나에 새로 생긴 대학교의 초대 총장이 되었다. 또 『사페레(Sapere)」지를 창간했다. - P497

그는 주로 아침 일찍 일어나 아주 늦은 시각까지 일했으며, 일하는동안 줄담배와 코카콜라의 힘을 빌렸고 가끔은 위스키도 한잔씩 했다. 그의 저술은 거의 전부 (특히 파도바 이후로) 아내 프랑카에 의해, 프랑카와 함께 쓰였다. - P30

(그를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그의 지성과 사람됨에 반했다. 그는 카리스마 있고 매력적이며 사람들로부터 사랑과감탄을 자아낸 동시에 두려움과 질투, 이따금은 미움도 불러일으켰다.
많은 사람에게 영웅이 됐지만, 1968년과 관련된 운동에 반대한 사람들에게는 나아가 ‘1968년‘ 자체의 일부 핵심 인사에게도) 악인이었다. - P31

고리치아의 직책은 한눈에도 장래성이 없고 위험하기만 했다. 그 일을 맡는다는 것은 정신의학 체제 가운데서도 아무 희망도 없는 분야에 정치적·지리적으로 고립됨을 의미했다. 온 가족이 정든 곳을 떠나야 했고,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 드는 장소를 책임져야 했다. 이 직책을맡을 유일한 이유는 변방에서, 변두리 중 변두리에서 체제 전체를 탈바꿈시켜보자는 것뿐이었다. - P32

고리치아의 중요한 현실 하나는 ‘슬라브인‘과 이탈리아인 간의 분열이었다. 이미 뿌리깊었던 정치적·민족적 적대감이 양차대전 사이에 행해진 파시스트의 인종청소 정책으로 더욱 심해졌다. 1945년에는유고슬라비아의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이 고리치아를 해방한 후 이탈리아인을 대규모로 강제 추방했다.⁴⁴ - P33

44 John Foot, Fratture d‘Italia, pp.33, 119-97 Z. - P497

바잘리아 가족(프랑코, 프랑카, 그리고 어린 두 아이-여덟 살인 엔리코와 여섯 살인 알베르타)은 1961년 말에 고리치아로 이사했다.⁴⁵ 이들은 장중한 느낌의 현 정부 청사 꼭대기 층에 있는 널찍한 아파트에 자리잡았다. 고리치아의 한복판이었고 정신질환자 보호소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아이들은 근처의 학교를 다녔다. 당시 이탈리아의 정신질환자 보호소는 대부분 현 의회에서 재원을 대고 운영했는데 고리치아에서도 그랬다. - P34

45 때로는 바잘리아의 고리치아 생활이 시작된 시기를 1962년으로 잡기도 한다. 슬라비치의 기억에 따르면 그와 바잘리아 모두 한동안 파도바에서 출퇴근했다(Slavich, La scopa meraviglhante, p.257, n.1).
- P497

. 중요한 것은 쿠라(cura, 치료)가 아니라 쿠스토디아(custodia, 구금)였다. 이탈리아의 정신질환자 보호소는 아직도 1904년과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법률 규정을 따르고 있었다.  - P34

일단 정신질환자 보호소에 들어가면 환자는 사실상 ‘비인격자‘가 됐다. 인권이 박탈되고 ‘세속적 소유물‘을 이론상 한시적으로) 빼앗겼다. 머리를 빡빡 깎고 유니폼을 입히는 경우가 많았다. - P35

 바잘리아가 볼 때 그곳 환자들은 이미 인간 이하였다. 그저 목숨만 이어갈 뿐이었다. 전기충격 치료법을 발명한 우고 체를레티는 1949년에 이렇게 썼다. "창문에는 창살을, 안마당에는 금속 울타리를 둘렀으며, 이 우리 안에 정신질환자들의 슬픈 무리가 제각각의 기괴하고 이상한 동작과 행동 방식을 보이며 빽빽이 몰려 있다."⁵¹ - P36

51 Cerletti, ‘La fossa dei serpenti‘, Il Ponte, V 11, 1949, p.1373. - P498

병원 안에서는 환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많은 수의 간호사가 고용됐다. 이 간호사들은 훈련을 받지 않았고, 힘이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일은 어렵고 대단히 힘들며 스트레스가 많았지만 급료는 형편없었다. 정신질환자 보호소에 의사의 수가 적었다는 점을 볼 때(게다가 의사가 병원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작디작았다는 점을 볼 때) 바로 이 간호사들이 대체로 이 체제의 주된 얼굴에 해당했다. - P37

광기를 가리키는 언어도 중요했다. "마니코미오는 문자 그대로 미친사람을 보살피거나 보호하는 장소를 의미했다."⁵⁵ 나중에 공식적인 맥락에서는 좀더 중립적인 ‘정신병원‘이라는 용어가 쓰였지만, 마니코미오는 여전히 일반적으로 쓰이는 용어였다(오늘날까지도 그렇다). - P38

55 David Forgacs, Italy‘s Margins. Social Exclusion and NationFormation since 1861,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p.198. 이 책이 출간되기 전 초고의 일부분을 내게 주어 읽게 해준 데이비드 포르가츠에게 감사를 전하고자 한다. - P498

고리치아의 소장이 된 바잘리아는 곧 정신질환자 보호소 체제 전체가도덕적 파탄에 이르렀음을 확신하게 됐다. 그는 이런 공공시설 안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기존 방식에는 의학적으로 이점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히려 환자들의 괴상하고 불안한 몇 가지 행동 방식은 시설 자체 때문에 생겨났거나 악화된다고 확신했다. - P38

고리치아 초기의 바잘리아는 그 도시 자체처럼 격리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거의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생각은 극단적이었고, 그래서 학술협의회에서 동료들은 그를기피인물이나 괴짜로 대하는 일이 많았다. 이탈리아에는 정신질환자보호소 체제의 해체를 부르짖는 사람이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 P39

전체적으로 체제(정신질환자 보호소를지원하는 의료·정치·사회 구조) 내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저항이 상당히컸다. 정신질환자 보호소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자원을 끌어들였으며, 대중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목적을 충족해주었다. - P40

지금 돌이켜보면 이제까지 나온 바잘리아의 여러 전기, 바잘리아의 생각에 관한 연구, 바잘리아 운동에 관한 서술에서는 일관성을 부여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런 일관성이 꼭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의 생각과 실천)은 유연하고 유동적이었으며 시대의 조류에 맞춰 움직였다.
어떤 것을 시도해본 후 그 방식을 버리는 식이었다. - P41

그는 어떠한 당의 주의에도 얽매이지 않았으며, 종종 다양한 색깔의사람들이 어떻게든 자신의 관점에 동조하게 만들었다. 현직에 있는 동안 바잘리아는 대체로 공공시설 내부에서 움직였다. 대개는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였지만 그것을 아예 철폐하려는 목적으로 그런 때도 많았다. - P42

이제는 고전이 된 랭의 연구서 『분열된 자기』는 1960년에 나왔지만 영향력 있는 교재가 되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이 책은 부분적으로 랭이 놀이방 시기에 환자들과 접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무엇보다도 랭은 조현병과 광기가 이해 가능한 대상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광기의 언어는 지성으로 이해 가능했다. - P43

한편 남아프리카 태생의 정신의학자 데이비드 쿠퍼는 1962년부터1966년까지 런던 교외에 있는 정신질환자 보호소에서 실험적으로 개방형 병동을 운영하고 나중에 이 경험을 『정신의학과 반정신의학』에서술했다. 이 책은 또하나의 고전이 되었다.⁶³
이 모든 사례에서 완전 통제시설은 (일시적으로) 뒤엎어지고 개혁되거나 내부로부터 잠식당했다. - P44

63 David Cooper, Psychiatry and Anti-psychiatry, London: Tavistock, 1967. Psichiatria e anti-이탈리아어 번역판은psichiatria, Rome:Armando, 1969. - P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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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
: 현대 미술의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는 영국의 화가이자 판화가, 무대 미술가로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호크니는 1937년 7월 9일 영국요크셔주 브레드피트에서 태어났다. - P5

 호크니의 초기 작품은 그의 문학적 열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실제로 몇몇 작품에서 호크니는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시 일부나 문장을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동성애가 법적으로 기소될 수 있는 위법 행위였음에도 <서로를 꼭 끌어안은 우리 두 소년we Two Boys Together Clinging>(1961)과 같은 작품을 통해서 호크니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P6

호크니는 또한 캘리포니아 집들의 내외부 모습과 친구, 친척들의 모습을 그린 이중 초상화를 통해 금세 상당한 명성을얻었다. - P6

 그가 그린 이중 초상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클라크 부부와 퍼시Mr. and Mrs. Clarkand Percy>(1970~1971)이다. 스윙잉 런던* swinging London 에서 가장 유명했던 커플인 스타일리스트 오시 클라크ossi Clark와 텍스타일 디자이너 실리아 버트웰 Celia Birtwell 그리고그들의 반려묘인 퍼시를 그린 이 작품은 그들이 미니멀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아파트에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 1960년대 런던 젊은이들의 문화운동으로 낙관주의와 쾌락주의가 풍미하고 역동적이던 런던의 모습을 가리킨다. - P7

데이비드 호크니는 뛰어난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1970년대에 호크니는 사진을 이용해 새로운 형태의 예술적 표현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1976년 말에는 소나벤드 갤러리sonnabend Gallery에서 1970년부터 촬영한 사진들을 <20개의 사진들 Twenty Photographic25>(1976)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했다. - P7

1980년대 말에 호크니는 회화로 복귀했다. 바다 풍경과 꽃, 아끼는 지인의 초상화를특히 즐겨 그렸으며, 예술과 기술의 결합이라는 아직 누구도 탐험하지 않은 창작의영역으로 첫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1986년, 그렇게 집에서 복사기로 찍어낸 호크니의 첫 복제화들이 탄생했다. - P7

2017년 2월 9일, 런던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은 파리 퐁피두 센터 Centre Pompidou 및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The Met과 협업해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업을 조명한 회고전을 개막했다. - P8

. 호크니에게 있어 예술은 미로같이 복잡한 인생에서 방향을 찾게 하는 나침반이었다. 2011년에는 호크니의 자서전과도 같은 책 《다시, 그림이다A Bigger Message >가, 2016년에는 평론가 마틴 게이퍼드 Martin Gayford와 함께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찾기위한 대담을 담은 《호크니와 게이퍼드가 말하는 그림의 역사 A History of Pictures》가 출간되었다. - P9

픽션이 섞인 이 그래픽 노블은 데이비드 호크니의 개인적인 삶과 예술적 커리어를 돌아보며 20세기부터 21세기에 걸쳐 예술계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에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작품 속 강한 자전적 함축과 다방면에 걸친 예술적 생산은 호크니를 동시대 작가들과 차별되고 독특하게 만든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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