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레오는 트리 하우스에서 자동차 진입로를 올라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보자 손을 흔들고는 밧줄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레오를 다시 보자 전율이 흘렀다. - P59

언젠가 헬렌이 미용실에서 몰래 가져온 《보그》 잡지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사진 속 게이브리얼은 타자기 앞에 앉아 있었고 옆에는 위스키 잔이 놓여 있었다. (중략). 그는 독설가이자 애주가인 여성 등장인물들과 야하고 도발적인 성적 묘사로 용감한 작가라는 명성을얻었고, 때로는 내 눈물을 쏟아냈다. - P60

집안에 들어서자 추억이 밀려왔다. 현관에서 나는 냄새도 똑같았다. 사방에서 풍기던 왁스 광택제와 오래된 나무 냄새. 참나무 판자를 붙인 벽, 쪽마루를 깐 바닥, 내가 좋아한, 양말 신은 발로 밟으면 미끄러웠던 낡은 원형 계단 게이브리얼과 함께 아버지의 담배를 훔치러 가던 주방. 그곳에서 약간 떨어진 방에 게이브리얼이 있었다. - P60

"여보 우리 강아지 어디 있어? 오늘 오후에 데려온다고 하지 않았어?" 저녁을 먹으러 목장에서 돌아온 프랭크가 물었다.
"게이브리얼 아들에게 줬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프랭크는 말이 없었다.
"레오가 강아지 훈련하는 걸 도와주려고 그런 일이 다시 생기는 건 싫으니까." - P62

프랭크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베스, 그 애와 엮이지 마. 그 애는 우리 아들이 아니야. 그런다고 우리 아들이 돌아오지 않아.‘ 이런 말을 하고 싶겠지.
그 대신 프랭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울프와 그 아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걱정할 일일까?" - P63

재판


내가 일반 방청석에 자리 잡자 다들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중략).
이 이야기가 처음 알려졌을 때, 사진기자들이 우리 집을 찍으려고 목장에 몰래 들어왔다. (중략).
나는 우리가 구상해서 다듬고 매일 연습하며 완벽하게 만들려고 애쓴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하기를 바라면서.
진실을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쉬울까? - P64

과거


게이브리얼의 텐트 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른 우주에 들어간듯한 분위기였다. 더블 사이즈 매트리스에는 시트가 깔려 있고 담요가 놓여 있었다. - P65

그는 침대 옆에 펼쳐서 엎어놓은 소설책을 집어 들어 내게 보여주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편 『스완네 집쪽으로』였다.
"다음 학기 토론 수업에서 잘난 척하려고 고른 책인데 생각보다 괜찮더라. 꽤 재미있는 대목도 있고" - P66

그는 내 손을 잡았다.
"우리가 밤을 같이 보낸다고 해서 이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마."
"내가 원한다면?"
"그러면 이야기를 해봐야겠지."
"원해" - P67

우리는 천천히 서로를 향해 움직였고 곧 본능에 굴복하고 말았다. 계획된 게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분이 좋았다. - P68

잠시 후, 나는 게이브리얼 쪽으로 몸을 살짝 움직였다.
"괜찮아? 아파? 그만할까?"
"게이브리얼? 부탁인데 입 좀 다물어."
"노력할게"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 P69

이건 러브 스토리였고 과거에 내가 꿈꿨던 그 어떤 이야기다 훨씬 좋았다. 내게 단 하나의 소원이 허락된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의 이야기가 해피엔드이기를 - P69

1968년


레오를 만나러 가는 첫날, 나는 프랭크와 지미와 함께 양들이 풀을 뜯는 들판에 나와 있었다. 우리는 암컷 양에게 먹이와 물을주고 새끼 양을 살펴보았고, 다음 주 경매에서 어떤 양이 먼저 팔릴지 이야기하며 목록을 수정했다. - P70

그는 내 옷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오늘 나는 평소에 입던 프랭*크의 낡은 비옐라 셔츠와 코듀로이 바지를 입지 않았고 무릎까지 오는 장화도 신지 않았다. 


* 양모와 면을 섞은 옷감 - P71

나는 문을 두드렸다. 한때 지금과 매우 다른 이유로 가슴 두근대며 이 자리에서 있었던 기억을 머릿속에서 밀어냈다. - P72

"베스, 들어와 널 보면 아주 좋아할 사람이 있어."
때마침 레오가 강아지를 안고 현관으로 뛰어왔다.
"아직 이름 안 붙여줬어?" 내가 물었다.
"히어로예요." 레오가 대답했다. - P72

"벌써 가는 거 아니죠? 가야 해요?" 레오가 물었다.
레오가 별 뜻 없이 한 말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그 순간 아이의 외로움이 보였다. "그 전에, 트리 하우스 보여줄래?"
레오는 무척 기쁜 표정이었다.
트리 하우스 내부는 전혀 뜻밖의 모습이었다. - P74

"아빠가 여름에는 잘 거랬어요. 아빠는 야영을 좋아하거든요.
어릴 때 호숫가에서 야영했대요."
나는 가슴이 두근댔지만 애써 외면했다.
"언젠가 주말에 호수를 그린 적도 있어요. 그런 다음에 여기 올라와서 저녁을 먹고 촛불을 켜놓고 카드 게임을 했어요. 정말 최고였는데." - P74

"학교 가는 게 정말 싫어요." 레오는 갑자기 화난 표정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항상 혼나요. 선생님이 매일 교장 선생님한테 보내고요. 아니면 교실 밖에서 벌을 세워요." - P75

"아줌마 가기 전에 보드게임 한 판 할까?"
"좋아요." 레오는 밝은 표정으로 상자에 손을 뻗었다. - P75

과거


해가 쨍쨍 내리쬐는 8월의 어느 한 주 동안 게이브리얼의 부모님이 스코틀랜드 하일랜드로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들꿩 사냥하러 가시는 거야. 그래, 잔인하지. 하지만 그 덕에 우리가 뭘 누리게 되었는지 봐. 일주일 내내 이 집에서 마음대로 지낼 수 있다고" 게이브리얼이 말했다. - P76

이 집의 아름다움에 주눅 들지 않기란 힘들었다. - P76

응접실 피아노 위에 걸린 가족사진을 유심히 보았다. 1930년대에 결혼한 신부 테사 울프는 그 어떤 할리우드 스타보다 아름다웠다. (중략).
가장 마음에 든 사진은 게이브리얼의 사진이었다. 아홉 살쯤되어 보였는데, 반바지에 흰색 셔츠를 입고 다리를 꼬고 앉아서통통한 검은 래브라도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 P77

메도랜즈에 가는 날, 어머니가 의사에게 부탁한 페서리*를 내밀어서 깜짝 놀랐다. 게이브리얼과의 관계를 어머니와 이야기해본 적은 없었지만, 내가 호숫가에서 자고 오는 날이 많았기 때문에 눈치채신 게 분명했다.
"엄마는 괜찮아요?" 내가 물었다.
"둘이 진지해 보이는데. 게다가 남자들은 결혼하기 전에 여러연인을 만나잖니. 여자라고 안 될 게 있겠어?"


* 질 경부에 씌워 정자가 자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여성용 피임 도구. - P78

일주일 동안 우리는 한 사람처럼 지냈다. (중략).
우리는 신선한 식재료가 떨어져서 저장 식료품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점점 희한한 요리를 해서 먹었다. 통조림 햄을넣은 콩소메 수프, 너무 오래 익혀서 접착제처럼 끈적해진 쌀, 큰 통조림 완두콩을 곁들인 구운 감자 같은 것들이었다.  - P79

"우리가 뇌를 공유한 기분이야. 현실로 다시 돌아가면 어떻게 적응하지?" 게이브리얼이 말했다. - P79

우리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것도 와인에 취해 혀가 풀린 이런 밤이었다. 나는 게이브리얼을 만나기전에 나를 사랑한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아서 걱정된다고 털어놓았다. - P80

나는 적당한 말을 생각하느라 잠시 멈추었다. 그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어머니의 불륜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가 그 관계를 정리하고 게이브리얼과 아버지에게 분노와 원망을 표출했기 때문이었다. 이기적이고 모진 사람 같았다. - P81

"날 떠나지 않을 거지?" 함께 보낸 마지막 밤에 게이브리얼이 물었다. - P81

1968년

(전략). 바비가 죽고 나서 사람들은 명상을 권했고 도서관에서 불교나 고대 요가 수련에 관한 책을 빌려다 주기도 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정말이지, 몇 분 동안 심호흡한다고 내 고통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는건가?‘ 어디에서나 바비가 보여 고통에 몸부림치던 초반 몇 달동안에는 글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 P83

시골 사람들은 대부분 그랬다. 우리는 도시 사람들보다 예의를 중시하며 산다. 적어도 나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중략).
하지만 현관문을 열었을 때 게이브리얼이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 P84

게이브리얼은 그 사진을 유심히 보았다.
(중략).
"마감일이 다가오는데 일이 많이 밀려서, 매일 레오를 몇 시간정도 봐줄 사람이 필요해. 당연히 유급이고, 학교 끝나는 시간에 레오를 데려와서 내가 글 쓰는 동안 같이 뭔가를 해주면 돼. 혹시 해줄 수 있어?" - P85

게이브리얼의 말이 옳았다. 지난 몇 주 동안 나는 메도랜즈에서 점점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었다. 잘 웃고 재잘대고 호기심많은 레오와의 편안한 우정은 그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 P85

"네가 와준 덕분에 레오가 많이 달라졌어. 나도 그렇고. 네가 날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야. 어색하다는거 알아.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말은,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거야"
"친구잖아." - P86

"프랭크와 이야기해 볼게. 우린 모든 걸 의논해서 결정하거든."
"물론 그래야지. 고마워." - P87

저녁을 먹으며 프랭크와 나는 목장 일과 늘어나는 빚에 관해 이야기했다. 프랭크는 곧 은행에 가야 하는데 걱정된다고 했다. 소규모 목장은 수익이 나지 않았다.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고생스럽지만 목장을 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 P87

"게이브리얼이 방과 후에 레오를 봐달라고 부탁했어. 매일 두시간씩 가끔은 내가 메도랜즈로 가겠지만 난 레오를 우리 집으로 데려오고 싶어. 레오는 목장을 좋아해. 동물을 정말 좋아할거라고"
"안 돼, 베스."
프랭크의 표정이 달라졌다. 내가 싫어하는 표정이었다. - P88

"그 사람의 동정 따위는 필요 없어.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으면서도 그런 걸 고민하다니 놀라운데."
"동정이 아니라 일자리야, 내가 안 하면 다른 누군가가 하겠지.
하지만 난 할 거야. 그래, 돈 때문이야. 하지만 그 애를 위해서가더 큰 이유야 프랭크, 내게도 도움이 된다고."
"그건 위험한 일이야." 프랭크가 나지막이 말했다. - P89

과거

가까이에서 본 테사 울프는 정말 놀라웠다. - P89

게이브리얼의 말에 따르면 테사는 점점 술에 취하고 있었다.
"그냥 어머니 말이 전부 다 맞다고 하면 괜찮을 거야." 저녁 식사 자리에 도착한 내게 게이브리얼은 이렇게 말했다. - P90

음식을 내온 세라는 나보다 두 살이 더 많았고, 우리 둘 다 헴스턴 초등학교에 다녔다. 내가 소고기 조각을 먹는 동안 기다리는 세라를 보자 나 자신이 가짜처럼 느껴졌다. - P90

하지만 세라는 고개만 까딱하며 겨우 아는 체하고는 시선을 피했다.
"옥스퍼드에 지원했다면서? 잘됐구나 어느 칼리지에 지원했지?" 에드워드가 물었다.
(중략).
"사실 세인트 앤스는 평판이 아주 훌륭해. 물론 내가 다니던시절에는 옥스퍼드에 여학생이 하나도 없었지만, 게이브리얼이 정말 부러운데." 에드워드가 말했다. - P91

"부모님은 두 분 다 일하신다고? 어머니가 자식들이 어릴 때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걸 아쉬워하실 것 같구나."
(중략).
일종의 시험 같은 기분이 들었고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 P92

테사는 내 침묵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술잔을 채우고 다른 질문을 쏟아냈다. "게이브와 네 얘기를 해주렴. 그 애를 정말 사랑하니? 대답 안 해도 되겠네. 네 눈에 답이 다 있으니. 그리고 게이브도 널 아주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단다." - P92

나는 게이브리얼이 해준 어머니 이야기를 떠올리며 자신을 위로했다. 테사는 심술궂은 주정뱅이고 자기 인생이 마음에 들지않아서 게이브리얼의 인생에 집착한다고.
그리고 테사가 게이브리얼을 나만큼도 모른다는 사실도 알 수있었다. - P93

"그럼, 이제 저희는 호숫가로 가도 될까요?" 게이브리얼이 적당한 시점에 대화를 끊었다.
(중략).
"그 전에 설거지를 돕고 싶어요." 나는 주방에서 일하는 세라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호화로운 음식을 먹는 동안 시중세라 때문에 죄책감이 들고 당혹스러웠다. - P94

멀리 주방 한구석 싱크대 앞에 세라가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접시가 쌓여 있었다. 내가 들어갔는데도 세라는 돌아보지 않았다. - P94

테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속삭임보다 살짝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기 전에 한마디 할게. 분별 있게 피임은 잘하고 있겠지?"
나는 너무 소름 끼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테사를 보기만 했다. 주방 반대편에 있는 세라에게 이 말이 들릴 리 없었지만, 그럼에도 모멸감을 느꼈다. - P95

(전략).
게이브리얼은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저녁 식사잖아.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내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분노를 통제할 길이 없었다. "넌 이해 못 해. 하긴, 이해할 필요가 없겠지. 넌 그런 사람이니까."
"그게 무슨 뜻이야?" - P96

게이브리얼은 나를 꼭 안았다. (중략).
곧 눈물이 흐를 듯 눈이 반짝였다.
"사실 난 가끔 어머니가 무서워. 어머니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거든 그래도 내가 널 지켜야 했는데 날 용서해 줄래?"
우리는 키스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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