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참 괜찮은 죽음 - 어떻게 받아들이고 준비할 것인가
헨리 마시 지음, 김미선 옮김 / 더퀘스트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신경외과 의사의 자전적 기록이라는 이 책은 의학서라기보다는 수필집에 가깝다.
그만큼 그가 행했던 의료행위의 나열이라기보다는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마음 사이에서의 방황의 기록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읽는 동안 치료가 아니라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한걸음 떨어져서 이 책을 읽게 되니 우리나라와는 좀 다른 의료현실을 접할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영국의 의료보험 제도의 단점을 생각해볼 수 있었고,
그건 또 우리나라 의료보험 제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은 의료보험제도가 발달되어,
그 비용을 세금에서 충당하기때문에 의료보험료도 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비교적 간단한 질병 뿐만 아니라,
암이나 수술 따위도 따로 돈을 내지 않는다.
물론 민간보험으로 운영되는 병원이 따로 있지만,
그런 병원은 개인이 따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듯 하고,
책 속의 헨리 마시도 따로 보험을 들었고,
개인이 운영하는 곳에서 속전속결로 치료를 받는다.
국가가 운영하는 병원은 융통성 없고 고지식할 뿐더러 무엇보다 느리게 굴러가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수술 후 예후가 비관적이더라도,
때로 깨어나지 못 하고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는데,
수술을 택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환자분이 평생 불구가 된다고 해도 정성스레 보살필 만큼 사랑하시나요?"
이 말은 그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십중팔구 우리는 결국 수술을 하게 된다. 수술하고 끝내는 편이 솔직한 심정을 말하고 고통스러운 대화를 이어가기보다 쉽기 때문이다. 긴 설명 끝에 나는 당직 레지던트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자네는 환자가 살아서 병원을 떠나니까 수술이 성공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몇 년 뒤 환자가 사는 모습을 보면 그 수술은 사람이 일부러 만든 재앙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ㆍㆍㆍㆍㆍㆍ
하지만 내가 경험을 통해 수술의 한계를 더 현실적으로 가늠하게 되어서 그런 것만은 결코 아니다. 온전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확률이 거의 없다면 과연 수술로 목숨만 살려놓는 것이 그 환자를 위한 길인지 의문이 점점 커진다.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진 삶을 살 바에는 평화롭게 죽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보다 더 기꺼이 받아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이런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예측하는 실력이 늘어서가 아니라, 남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지 신경을 덜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예후란 항상 불확실하기 때문에 무사히 회복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니 의사로서 일을 쉽게 하려면 그냥 모든 환자를 수술해버리면 된다. 이를 통해 많은 환자들에게 끔찍한 뇌 손상이 생길 수 있고 그 환자들의 인생이 망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다.(173~175쪽)
위 문단을 읽으면서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살짝 비껴가는 부분을 담고 있는 예가 될텐데,
외과 의사가 수술을 하다가 하게 되는 치명적 실수와 관해서 말이다.
의사도 이전에 사람인데 실수를 하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수술은 잘 되어도, 후유나 장해가 남게 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수술이 잘 될 가능성이 없는데도,
환자가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못하고 수술을 원할 경우 등에 관해서 말이다.
환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 뿐만 아니라,
의사의 입장에서 흠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때로는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무시무시한 결과와 함께 사는 법(9쪽)을 배우지 않는다면,
깊은 보람은 커녕 본인의 삶도 받아들이기 힘들테니까 말이다.
이때 배워야 할 것이,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면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법이 아닐까.
가장 공감이 가고 아프게 와닿았던 부분은 그의 의대 면접과 관련해서이다.
어쨌든 그는 제물낚시를 즐기느냐고 물었고 나는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의학을 두고 예술도 과학도 아닌 기능의 한 형태로 보는 게 최선이라고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세월이 흐른뒤엔 나도 똑같이 생각하게 된 말이다.(110쪽)
의학이 예술도 과학도 아닌 기능의 한 형태로 보는 게 최선인 이유는,
인간만이 우월하다던가, 어떤 특별한 누군가가 우월하다는 생각해서 벗어나,
세상을 객관성을 갖고 바라보게 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
때로 누군가를 이롭게 한다는 착각으로 또 다른 누군가를 이롭지 않게(= 해롭게) 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는 요즘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엿보기라도 한듯,
그는 환자의 최선만을 생각하기에 의미 없다고 판단한 치료를 과감히 포기한 적도 있지만,
환자의 실낱같은 희망을 위해서라면 가망없는 수술도 감행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배운 게 있다면 나쁜 소식을 전할 때는 가능한 한 적게 말하는 게 최선이라는 것이다. 이런 대화는 무척이나 느리고 아프기 때문에 어색하고 슬픈 정적이 필연적인데 이를 채우려고 무슨 말이든 하려는 충동은 최대한 붙잡아야 한다. 그러나 나를 바라보는 데이비드의 눈길에 더 이상 입을 꾹 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렵게 입을 뗀 나는 만일 내 가족이라면 더 이상 치료 받지 않기를 바랄 거라고 말한 뒤, 마침내 마음을 다잡고 실토했다.
"꽤 여러 해를 버텨왔는데ㆍㆍㆍㆍㆍㆍ.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끝난 것 같아요."(214쪽)
이런 구절만으로도 헨리 마시의 인간성을 짐작할 수 있겠고,
어떤 직업이라도,
남들이 봤을 때 아무리 멋져보이고 훌륭해 보이는 직업이라도,
나름 직업적 애환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우리말 제목이기도 한 '참 괜찮은 죽음'은 헨리 마시의 '어머니의 죽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암세포의 침공을 받아 무너져가는 몸 안에는 '어머니의 자아'가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 모든 뇌세포는 죽었다. 그리고 어머니 - 어떤 의미에서눈 뉴런 수백만 개의 복잡한 전기화학적 상호작용이었던 -도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신경과학에서는 이를 두고 '결합 문제'라고 부른다. 무생물에 지나지 않는 껍데기가 의식과 느낌을 알 수 있다는 신비롭고 굉장한 사실 말이다. 나도 그것을 느꼈다. 어머니가 아무리 죽어가고 있어도 그 몸뚱이 속에는 아직도 '진짜 어머니'가 있다는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괜찮은 죽음의 조건은 무엇일까? 물론 고통이 없어야겠지만 죽음에서 고통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대부분의 의사들처럼 나도 온갖 형태의 죽음을 봐왔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돌아가신 건 정말이지 커다란 복이었다.ㆍㆍㆍㆍㆍㆍ순간적으로 소멸하는 죽음을 끝내 이루지 못한다면 내 삶을 돌아보며 한마디는 남기고 싶다. 그 한마디가 고운 말이 되었으면 하기에, 지금의 삶을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 의식을 차렸다 잃었다 하는 동안 모국어인 독일어로 이렇게 되뇌셨다.
"멋진 삶이었어. 우리는 할 일을 다했어."(274~275쪽)
죽음을 놓고 얘기할때,
'참 괜찮은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겠지만,
나이든 어르신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스스로 예비하고 준비하는 죽음이 그러하고,
오래 아프지 않고 자는 듯 돌아가시는 걸,
그리 생각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ㆍㆍㆍㆍㆍㆍ나는 '실제적'통증과 '심리적' 통증을 구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통증은 어차피 뇌 안에서 만들어진다. 내 혼자들 중 상당수에게 가장 좋은 치료법은 모종의 심리 치료가 아닐까 생각하지만 분주한 외과의 외래 진료실에서 해 줄 처지가 못 된다.(370쪽)
헨리 마시가 멋진 건 이런 것에도 자각하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리뷰의 처음에서 난 치료가 아니라 위로받는 느낌이라고 했는데,
그 말을 바꾸어야 할듯 하다.
어떤 때는 위로가 가장 큰 치료가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