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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 용산 ㅣ 걸어본다 1
이광호 지음 / 난다 / 2014년 6월
평점 :
이 책이 좋다는 얘기는 그동안 여러 군데서 들었었으나 구해놓고도 쉽게 찾아 읽게 되지는 않았었다.
그동안의 책 구매행위와 독서행위를 반성하게 되는데,
구매했다고 모두 다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읽어내는 행위로까지 연결되어야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
읽으면서 그동안의 명성이 괜한게 아니구나 싶을 만큼 좋았는데,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란 제목의 의미를 책의 'preface'를 펼치자마자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친절한 여행 안내서도 아니고 글쓴이의 얼굴이 오롯이 드러나는 수필도 아니며 소설이나 시라는 이름의 문학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여행기에도 지리학에도 환경사회학에도 미치지 못하며 자전적인 에세이에도 미달하는 글쓰기. ㆍㆍㆍㆍㆍㆍ전달해야 할 정보들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침묵의 언어 사이의 감당할 수 없는 흔들림 때문에 이렇게 이상한 독백이 생겨났다. 이런 얼굴 없는 글쓰기를 '익명적인 에세이'라고 부르려 했다.
라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이 산문이라고 하지만 마냥 느슨하지만은 않다.
적당한 단어와 문장들이 알맞은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눈에 그리고 가슴에 콕콕 박힌다.
콕콕 들어와 박힌다는 것은 문장들을 잘 갈무리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했다는 것이지, 뾰족하거나 과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라임이 떨어지거나 스타카도가 느껴지는걸 시적이라고 하는걸 볼때,
이 책의 제목은 '시적인 거리'가 되어도 좋지 않을까 싶었을 뿐이고~(,.)
이 책이 이렇게 다양한 형태를 띄고 다양한 장르로 불리울 수 있는 것은,
'기획 과정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공부를 하느라 여러 사전류와 기사, 리포트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자료들을 참고'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레 기행문이나 이런 형식의 책들을 볼때 과한 사진이 부담스러웠는데,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글쓴이의 휴대폰으로 촬영되었다는 것도 반가웠다.
또 한가지,
기실 난 서울 토박이이지만 길치여서, '용산'으로 뭉뚱그려지는 지명을 심심찮게 들어봤지만, 좌표를 찍을 수는 없었다.
무심코 책표지를 뒤집어 펼치다 이런 지도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숨은 보물을 찾은 기분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하면, 그의 글쓰는 태도와 글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걸어본다' 시리즈 답게 산책이란 것에 방점을 찍은 글쓰기도 좋았지만,
그 산책의 공간이 그가 사는 '용산'을 매개로 했다는 것도 좋았다.
'용산'이 갖는 장소적, 시간적 의의를 그만의 감성과 사유로 적적히 버무려 내고 있다.
나중에 나왔지만 먼저 읽었던 '박연준과 장석주'의 '시드니'편과 비교되는 걸 어쩔 수 없다.
박연준과 장석주의 그것이 지극히 사변적이었고,
그런 행태에 질려버려 이 시리즈를 한쪽으로 치워놨었으니 말이다.
ㆍㆍㆍㆍㆍㆍ'정'을 전한다는 광고를 본 적이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같은 너무 익숙한 광고 문구. 위로란 때로 어떤 마비를 의미한다.(26쪽)
문장들이 반듯하고 단정하며,
산문인데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벼리고 벼린 흔적이 엿보이는 이런 문장들은 시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
겨울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 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오래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최승자의 시 '청파동을 기억하는가'를 인용하면서, 이런 문장을 읊어내는데, 어이쿠야, 좋다.
절대로 닿을 수 없을 만큼 누군가와 떨어져 있다면, 죽음처럼 건너갈 수 없는 곳에 누군가가 있다면, 너는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것이다. 아득한 거리는 아득한 시간이다.(37쪽)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라고 하면,
용산과 함께 한 '역사적 순간과 거리들'을 간과하지 않고 언급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현재의 용산을 힘을 주어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용산 참사를 언급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지 않고,
원고를 마무리 하는 중에 만난 세월호 참사를 'preface'의 지면을 빌어 무게감 있게 싣고 있다.
원고를 정리하는 중에 너무 많은 생명들이 어처구니없는 참사를 당했다. 용산과 세월호 사이의 서로를 마주보는 비극의 연대기와 '국가'의 참혹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만 했다. 무력감과 죄의식은 오래고 익숙한 것이나, 한 시대의 애도는 한 개인의 애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어떤 글쓰기는 피할 수 없이 애도의 제의가 될 수밖에 없다. 예정된 망각과 마비와 자기기만으로부터 끈질긴 애도를 지키는 것은 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기다림의 문제이다.(8~9쪽)
난 문학적이지도 않고, 정치적이지도 않지만 오래 이 책을 곁에 둘 것이고,
이 책과, 이 책에서 꼬리를 무는 다른 책들을 가끔 들추어 읽는 방식으로 기억하고 애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