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나는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도 같다.

여기서 방점은 '살아 있다'는 것에 찍혀야 한다.

보거나 만질 수 없어도,

이 땅 위 하늘 아래 어딘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보거나 만질 수 없는 걸,' 안전거리를 확보했다'로 치환시켜 겸허히 받아들이려 했었다.

 

그러니까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것은,

감정을 공유하거나 공감하는데 문제가 될 게 없다고 내 자신을 세뇌시켜왔었다.

 

그런데 나이는 공평하게 먹어서,

내가 한 살, 또 한살 먹으면, 상대방도 한 살, 또 한살 먹게 마련이다.

나이를 먹으며 주변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아픈 곳도 한 곳, 두 곳 생겨난다.

곁에 있으면 이마라도 한번 짚어주고, 배라도 한번 쓸어주고, 아니 손이라도 가만히 잡아줄 수 있을텐데,

떨어져 있어 마음이 번거로워지는 걸 에방할 수 있는...안전거리를 확보하는덴 성공했지만,

아프다는데 어떻게도 손쓸 수가 없고,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어, 좌절한다.

'아프지 마라, 아프면 안된다'는 공허한 소리만 반복한다.

'롤랑 바르트'가 어떤 의미로 사용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가 아프다.

 

 

나이가 들면서,

다양한 직ㆍ간접 경험을 하게 되고,

경험한 만큼 시야가 넓어지고,

시야가 넓어지는 만큼 식견도 넓어졌다.

한컷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하고 짱짱했던 내가 느슨해지고 둥글어졌다.

이젠 포기하고 양보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함부로 욕심내면 안된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모든 요일의 기록
 김민철 지음 / 북라이프 /

 2015년 7월

 

대학생 때 이모에게서 걸려온 전회를 받았다. 이모는 다짜고짜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부분을 읽어주었다. 내겐 딱히 와 닿는 부분이 없는 한 구절이었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내게 이모가 말했다.

"죽이지 않냐? 세익스피어는 마흔이 넘어서 다시 읽으니까 진짜 좋네. 구절구절이 너무 좋아서 다 필사할 지경이야. 너는 어려서 모르겠지. 근데 진짜 ㆍㆍㆍㆍㆍㆍ!"

나는 셰익스피어를 읽었다, 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세익스피어에 대해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읽었다는 사실만 기억한다. 그건 읽은 것일까? 마흔이 넘어 내게도 셰익스피어의 시간이 올까? 간절히 오기를 바랄 뿐이다.(32쪽)

김민철의 이모는 마흔이 넘으니 세익스피어가 다시 읽힌다고 하는데,

나에게 고전은,

한 번쯤 읽었으나 기억이 나지 않거나,

어디에선가 줄거리나 내용만 주워 듣고는 읽었다고 착각을 하거나,

읽지를 않았으니 다시 읽을게 없다.

게다가 그동안 앞만 보고 내달려와서,

고전이 아니더라도 읽은 책을 묶혀두었다 다시 읽을 생각을 모했다.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다시 읽고 필사할 수 있는 책을 갖고 싶다.

   결혼 후, 대구 엄마 집에 내려가서 엄마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치고, 남편은 엄마의 악보를 넘겨주고, 나는 아예 건넌방에 누워 그 소리를 듣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나의 위대한 음악 선생님 두 명이 그들끼리 음악으로 교감한 순간이었다. 나는 먼 방에서 혼자 감격하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즐길 줄 아니까. 그 순간에 그 음악에 뛰어들 줄 아니까. 그 정도면 넘치도록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훌륭한 선생님 두 분을 옆에 모시고도 학생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고? 어쩔 수 없다. 그게 나다.(105쪽)

 

그리고 나도 김민철, 그녀처럼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즐길 줄 아니까. 그 순간에 그 음악에 뛰어들 줄 아니까. 그 정도면 넘치도록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라고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한해의 끝에서 돌아보고 정리하고 새해를 계획해보자면,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이 말을 하려고 넘 멀리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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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밥 2015-12-29 01:20   좋아요 1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양철나무꾼 2015-12-29 01:27   좋아요 1 | URL
넋두리인데 좋다고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꾸벅~(__)

하늘바람 2015-12-29 01:25   좋아요 0 | URL
언니
서재 왔는데 언니 글 있어서 반가웠어여

양철나무꾼 2015-12-29 01:30   좋아요 1 | URL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하남요?

누군가 아픈데,
아픈걸 해결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내 주변의 그들에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싶어 자괴감에 빠졌습니다여~ㅠ.ㅠ

서니데이 2015-12-29 01:30   좋아요 1 | URL
양철나무꾼님도 아프지 마시고 건강한 연말 보내세요^^

양철나무꾼 2015-12-29 01:31   좋아요 3 | URL
네, 서니데이 남 댁내에도 두루 평안하시길~!!!
어여, 주무셔요~ㅅ!

AgalmA 2015-12-29 02:07   좋아요 1 | URL
요즘 베토벤에 대한 글을 읽고 있는데, 베토벤이 열렬히 좋아한 작가 중에 하나가 셰익스피어^^...곡을 쓰기도 했고.

양철나무꾼 2015-12-29 14:59   좋아요 0 | URL
베토벤의 굿 프렌은 살리에르 아니었나요?
아니다, 모짜르트의 굿 프렌이다, ㅋ~.

그랬군요, 베토벤이 셰잌 아저씨를 좋아했군요.
덕분에 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꾸벅~(__)

AgalmA 2015-12-30 04:16   좋아요 0 | URL
살리에르는 베토벤이 음악작법을 잠깐 배웠던 선생님이었을 뿐 이후 친분은 없었어요^^

yureka01 2015-12-29 08:52   좋아요 1 | URL
하기야 면역력을 높이는 노오력도 없이 건강이 그냥 주어 지는 것은 유전뿐네요..
나이들수록 운동하고..책을 가까이 해야 하는 노오력...단지 노오력이 노오력으로 끝나지 않고
조금 즐기면..더 건강해지니까요.그런데 너무 안하기도 하고..그렇다고 너무 과잉이기도 하고..
뭐든 적당한 시간이라야 하는데..참 어렵..이 적적성의 노오력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은데..
저도 사실 잘 못합니다 ㅎㅎㅎ

양철나무꾼 2015-12-29 15:05   좋아요 1 | URL
언젠가 헬스를 하신다는 댓글을 본 것도 같은데...
무늬만 헬스셨남여?

근데 나이 들어 운동은 조금 즐기면 더 건강해지는 그런게 아니라죠.
필수불가결한거 라는데,
이 뚱뚱한 엉덩이를 어쩔거냐구요, 글쎄~(,.)

단발머리 2015-12-29 12:51   좋아요 1 | URL
저도 뛰어들고 싶어요.
음악에도 뛰어들어서 치다 만 소나타들도 마저 치고 싶고,
책들도.... 책들도 마구마구 읽고 싶네요.

고전이 다시 읽히는 시간이네요, 저한테도 그런 시간이예요.
읽기만 하면 된다는 ㅎㅎㅎ
행복한 연말 되세요, 양철나무꾼님~~

양철나무꾼 2015-12-29 15:19   좋아요 1 | URL
저도요, 저도요.
음악에도 뛰어들고, 책에도 뛰어들고 하고 싶은데,
음반을 사고, 책들을 사 모으면...다 충족될거라고 착각하고 산다는~ㅠ.ㅠ

근데, 요즘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다보면,
예전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는,
시야가 확 넓어지는 묘한 경험을 하게 돼요.
그 재미에 자꾸만 클래식을 찾게 된다는...ㅋ~.

님도 행복한 하루하루 되셔요~^^

해피북 2015-12-29 13:46   좋아요 1 | URL
저도 그런 책들이 있는거 같아요. 이십대에 읽었을때는 뭐 이런게 다있노 했는데 삼십대에 읽어보니 아! 감탄사가 나오는 책이 말이죠. 하지만 이걸 누군가와 공유할 수 없는게 슬프더라고요. 지극히 개인적일수밖에 없는 감정이라서요ㅜㅜ
그리고 양철나무꾼님을 올해 만난 중반까지 글을 자주 접할 수 있다가 후반기부터 드문드문 만나게 된게 참 아쉬웠지만 드물게 만날수록 더 곰삭은 맛이 나는 글이었어요. 깊이 생각하게 되고 느끼게 되는 글들 말이죠. 그래서 참 좋습니다. 올 한해 마무리 잘하시구 내년을 부탁드려요 으흐흐^~^

양철나무꾼 2015-12-29 15:22   좋아요 0 | URL
이 짧은 댓글에서도...전 님을 무한 부러워 한답니다.
삼십대셨군요~!
좋을 때예요, 즐기셔요~^^

제가 젓갈은 못 먹는데, 곰삭다고 해주셔서 좋아요.
그렇게 나이 먹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부탁은 제가 드려야죠.
님 글 참 맛깔나거덩여~^^

2015-12-30 0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병통치약 2016-01-03 21:21   좋아요 1 | URL
복많이 받으라는 인사가 아니라 복 많이 지으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닿네요. 이제는 받을 나이가 아니라 지을 나이가 된 것 같기도 하고요. 두고 두고 새기겠습니다.

만병통치약 2016-01-03 21:25   좋아요 0 | URL
(사실 저 새해인사글에 단 글인데 마우스 잘못 움직였는지 이 글에 남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