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나는 그런 병동에 앉아 <씨네21>에 연재하던 코너에 제정신이 아닌 글을 볼펜으로 종이에 꾹꾹 눌러 써써서 면회 온 친구에게 건네면 그 친구가 컴퓨터로 쳐서편집부에 송고해주곤 했다. 하루에 한번 진찰을 오는 교수님은 혀를 차면서 말했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대체로 불행한데ㆍㆍㆍㆍㆍㆍ."(79쪽)
다른건 몰라도 내가 김현진이랑 비슷한 건 기억력이 좀 된다는 거다.
고리고릿적 옛날에 나랑 독서취향이 비슷해서 좋아했던 누군가가,
지금은 그사람 이름도 얼굴도 잊어버렸지만,
그가 내 글보다 김현진의 글이 좋다고 했던 것만은 용케 기억하고 있다가,
책이 나올때마다 족족 꿰어주셨고 두루 섭렵해 주셨었다.
그녀의 글들을 처음 접했던게 10여년 전이었는데,
그때는 감각적으로 쓰는 것과 잘 쓰는 것을 동의어로 생각했었는지 열심히 읽었던 것 같은데,
이젠 잘쓴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나의 가치관이 바뀌었는지라,
그녀의 글들이 치기 어린, 현란한 말장난 같이 느껴져서 읽다가 집어던지길 여러번 결국 완독에 실패하고 말았다.
김현진이랑 나랑은 기억력이 좀 된다는 것 말고도, 부모와의 애착 관계 결핍이라는 면에서 닮았다.
꼭꼭 숨기고 감추어야 할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상처 입은 옹이를 훈장처럼 내보이고 떠벌리고 광고해야 될 사안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린 나이에 삶의 질곡과 인생의 간난신고를 겪은 듯 하지만,
그녀만 겪은 일은 아닐진데,
코스프레나 광대 놀음마냥 상황을 극단으로 몰아붙여 가며 비극의 여주인공이양 행세한다.
누가 잘해주면 일부러 술을 더 마시고 주사를 부렸다. 이래도 잘 해줄 거야? 빨리 나를 막 대하란 말이야. 사실은 서글프게 묻고 싶었던 것이다. 이래도 나를 사랑할 건가요. 물론 어리석은 짓었지만 당신이 나를 때릴 사람인지 나는 알지 못했으니까. 현명한 남자들은 재빨리 도망쳤고 고집이 있거나 미련한 남즈들은 달래보려고 참다 참다 화를 내거나 결국 폭발했다. 그러면 나는 잔해 속에 혼자 남아 안심했다. 그래, 이렇게 되는 거야. 그렇게 참화 후 혼자 남고서야 비로소 내 영혼은 몸으로 돌아왔다. 그러면 그때서야 통증이 온다. 그게 둔중해지도록 하기 위해 술을 마셨다.(81쪽)
'결핍'은 어떤 의미로는 '장애'이다.
극복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헤치고 나왔을때 비로소 내 삶의 진정한 여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힘들지만 치료하면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어 있다는 채워 가질 수 있다는 것이기에, 과잉이나 잉여보다는 희망적인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나에게,
그녀처럼 온몸으로 부딪쳐 삶의 의미를 찾는 이를 향하여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를 한다고 툴툴 거릴 수도 있겠다.
책 제목의 '육체탐구생활'이 '섹스'를 말하는게 아니라 '노동과 매질'을 얘기하는 거라는걸 알기나 하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뭔가를 쓰면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어서,
뭔가 열심히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의 기록이어서,
그녀의 몸(=육체)를 드나들었던 삶의 기록이어서,
그런 제목을 취했다고 하면 뭐 할말은 없다.
그런데 꼭 '육체 탐구생활'이라는 자극적 상상을 불러오는 제목을 달고 나왔어야 했으며,
화보집도 아닌 것이 그녀의 얼굴을 표지에 내걸어야 했을까, 는 나만 궁금한 것인가 모르겠다.
육체탐구생활
김현진 지음 / 박하 /
2015년 9월
이래서 나이가 들면 고전을 찾아서 읽게 되나 보다.
경험에서 비롯되어 삶을 통과하여 나온것이라고 해도,
산만하기만 할뿐 되돌아오는 울림이 없다.
주자평전 박스 세트 - 전2권
수징난 지음, 김태완 옮김 / 역사비평사 /
2015년 9월
깊이 있는 고전이 그리워 고른 책이 '주자평전'
깊이 뿐만 아니라 두께도 만만치 않다.
누군가는 책베개 대용으로 딱이라는데,
'주자평전'을 베고 누웠다가는 목디스크로 고생하기 딱이겠다, ㅋ~.
아침에 일어나면 밥 먹듯 한 두쪽씩 읽어봐야 겠다, 불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