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밤이 실종됐다.
밤만 실종된게 아니라, 느긋한 아침 시간도 실종됐었다.
아들은 어느새 학교를 갔는지, 침대 위 이불 무덤만 지난 밤의 흔적을 전하고,
어이가 없어 넋을 놓고 앉아 있는 나를 향하여 남편이 한마디 한다.
"걔가 한두살이야? 엄마가 안 챙겨줘도 알아서 잘 해."
"?????"
나는 안 떠지는 눈을 간신히 실눈 뜨고 앉아 있었는데, 그게 보기에 따라서는 째려보는 모습이 되길 바랬었다.
"엄마 닮아서 아침 잠 많은데 어떻게 일어났냐구?
니가 아침마다 드리던 문안 전화 안드리니까 무슨 일 났는 줄 알고, 아버지가 전화 하셨더라.
덕분에, 앞으로 니가 종종 늦잠 자거나, 한번씩 알람 고장나도 되겠더라, ㅋ~."
결혼 후 16, 17년동안 빨간 날만 빼고 드린 아침 문안 전화 덕분에 아들은 지각을 면한 모양이다.
"건강 칼럼은?"
"군화,상화, 홧병?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심장 타령이냐?
내가 싹수 노오~랗다 판단해서 잠이나 제대로 자라고 작년인가 재작년 춘곤증 칼럼 긁어다 올렸어."
여러가지 벌려 놓은 일이 겹쳐 바쁜 중에,
미국에서 오랜 친구가 나왔으나, 내가 제일 가까운 이웃, 친지에 속해 가이드 역할까지 도맡아야 했다.
게다가 마음 쓰는 일까지 있어서 뾰족해질때로 뾰족해진 채로 보낸 20 여일이었다.
마음 쓰고 있던 일을 떨어내고 나니, 홀가분해져서 잠이 밀려들었었나 보다.
근 12시간이 블랙 아웃인것 치고는, 큰 말썽은 없었던 듯 하여 숨고르기를 하며 멍 때리는 표정을 추스리려는 나를 향해, 남편은 이런 말로 잠을 완전히 깨웠다.
"요즘 하트가 아니라, 브레인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거 알어?"
"어? 증말...? 어떤 사람도 나보고 그렇게 얘기했었는데...흐흐흐~"
"어이구구, 얘 좀 보게? 나, 너 칭찬한게 아냐..."
이럴때 잔소리를 막는 방법은 말을 끊어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것 뿐이었다.
"줄 거 있음 빨리 줘보지 그래?"
"ㆍㆍㆍㆍㆍㆍ?"
"어제 직원들이랑 점심 먹구나서 디저트로 나온 사탕이라도 챙겨 놨을 거 아냐?"
남편은 이상한 CD를 하나 가져 온다.
"설마 이게 for me라는 건 아니겠지?"
"설마...라니? 그럼, 뭐가 돼야 for you가 되는 건데?"
잔소리를 막아볼 요량이었는데, 또 다른 잔소리로 이어지려는 듯 어째 분위기가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니, 요즘 음악이나 책이나 다 특별난 거 없더라. 다 거기서 거기더라...는 얘기지"
빨리 꼬리를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음악이나 책을 탓할 게 아니라, 무뎌진...니 귀랑 니 눈을 개비해야 되겠다.
어떻게 들어보지도 않고 그래...특별난거 없더라, 다 거기서 거기더라...라는 말이 그리 쉽게 나오니, 나오길?"
"아니, 나는 남편이 자기 좋아하는 음악 CD를 사면서 기념일 하나가 그냥 묻어 지나갔다 그런 얘기를 한거지.^^"
"옛날엔 취향이 비슷해서 좋다고 하나에서 열까지 갖다 맞출려고 기를 쓰더니 말야...
이제 같이 살아서 자연 동화되고 닮으니까, 구태의연해서 싫다고 하고 싶어?"
"ㆍㆍㆍㆍㆍㆍ"
"이거, 귀한 CD, 호사스런 귀 위해 힘들게 구한 거거든...전에 버벅거리며 네이버 뮤직 검색하고 난리쳤던 거 기억 나, 안 나?
무스타파, 무하마드 나오는, 무슬림 음악 좋다고 강요했던 사람이 나였니, 너였니?
옛날에 도어즈 들을때 혼자 Shaman's blues 귀 터지게 듣던 사람은 누구였더라?"
언젠가 우연히 듣게 된 Sami Yusuf는 브리티쉬 싱어송 라이터로 아제르바이젠 출신이란다.
앨범 타이틀은 'Wherever you are'이고, 들어보니 언제 어디선가 'you came to me'라는 곡을 듣고 좋아서 구해달라고 했던 사실을 깨달았지만...한창 나중이었다.
"난 지금 좋고 비싸고 특별한 것만을 좇는 널 갖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예전의, 작고 사소하고 일반적인 것에 특별함을 부여할 줄 알았던 널 이렇게 통속적이고 세파에 찌들게 만든 사람이 난 거 같아서...그게 말야, 속상해."
'남편, 미안~
하지만, 남편...난 말야, 지금 이딴 일로 속시끄러워 지고 싶지 않거든.'
혼자서 중얼거리는 수밖에ㆍㆍㆍㆍㆍㆍ.
느끼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느낌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하지만, 느낌이라는 것이 얻기 위해 안달하거나, 타인에게 강요한다고 해서...함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느낌을 공유한다는 거 - 공감한다는건, 살면서 몇번 못 만나게 되는 그런 귀중하고 소중한 경험이 아닐까?
그걸, 지금 곁에 있다거나 가까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타성에 눈 멀어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볼 일이다.
하지만 어떤 때는 안달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함께 출렁거리고, 파도치는 느낌에 휩싸일 때도 있으니,
그걸로 충분히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이겠다.
부부가 되기 살짝 전의 사랑의 격동기이거나, 서로를 궁휼히 여기는 연민기 때의 일이 아닐까?
그러니 그건 '대상'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시간'에 관한 문제로 봐야 덜 심각하고 덜 진지해 질 수 있을 것 같다.
독립연습
황상민 지음 / 생각연구소 /
2012년 3월
흔히 심리학자가 쓴 심리학 책이라고 하면, 어루만져 준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책은 그저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소 날카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핵심을 꿰뚫는 탐색과 성찰의 눈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난 '서른이 넘으면 자기 마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구절에 혹했다.
마음도 마음이지만,
이제 어떻게 감정의 독립을 해보리라 다짐을 해보는 날들의 연속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독립이 아니라,
내가 마음으로부터 그들을 놓아주는 거지만 말이다.
사랑이란 허울 아래 난 너무 집착했던 것 같다.
어려서는 할머니의 치맛폭,
아가씨 때는 아빠의 보살핌,
결혼하곤 남편,
아들이 태어나곤 아들,
내가 아들을 키운건 맞지만...
잘 커주는 아들을 보면서 나는 정신적 보상감을 맞보곤 했었다.
이젠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보려고 한다.
여기서 key word는 '내'이다.
내가 주체인 삶,
내가 주체인 삶을 살기 위해서, 내 자신에 책임을 내 스스로 지지 않으면 안 되는데,
난 아직도 어렵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할머니를 떠올리거나,
아빠를 찾거나,
남편에게 기대거나,
아들에게 마음으로나마 의지를 하려고 한다.
그들을 탈탈, 훌훌 떨어 다 보내줘 버리고...
'독립 연습'이 아니라, '독립'을 해 보리라~.
남이 해달라는 것을 척척 잘 해줘야 착한 삶일까? 착하게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요구를 잘 들어주는 게 아니다. 대인관계가 도를 닦는 일도 아닌데 그건 지나친 생각이다. 제 몫의 일을 해내면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착하게 사는 거다. 흥미롭게도 우리 사회는 착하게 사는 것을 남의 뜻에 순종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람들이 남의 요구를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다. (28쪽)
현재의 모든 문제가 정말로 트라우마 때문일까? 이것이야말로 프로이트가 만들어놓은 미신이다. 미신은 믿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믿는 순간 불행이 시작된다. 트라우마가 현재의 나를 괴롭힌다고 믿는 순간 나는 과거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과거의 상처를 통해 아픈 마음을 치료하려던 프로이트의 노력이 정확히 반대로 작용하고 마는 것이다. 이제 그만 프로이트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프로이트의 위대함은 몸과 마찬가지로 마음이라는 것이 실재한다는 걸 가르쳐준 것으로 충분하다.(106쪽)
사람들은 흔히 감정을 공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감정은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아내의 기분 좋은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비용을 지불하는 게 마땅하다. 비록 콘서트 티켓 값이 비싼 편이긴 하지만 아내가 행복할 수 있다면 오히려 헐값에 가까운 게 아닐까?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는 비용이 그 정도라면 그건 얼마든지 투자할 만하다. 남편이 이런 방정식을 모를 경우 아내가 가르쳐줘야 한다. (179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