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한 권을 샀다.
시가 마음에 들어,
시인이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라서 시집을 사기도 하지만,
시가 어려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데도 꾸역꾸역 시집을 사 읽은 건,
순전히 해설을 내가 애정하는 신형철 님이 하셔서 이다.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이수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9월 

해설의 일부분 만을 옮겨보면 이렇다. 

특별히 긴장하지 않으면 삶은 대체로 자신이 가장 편안하다 여기는 쪽을 향해 흘러간다.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례들도 실은 그렇다. 어떤 이가 불행의 늪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어 보일 때, 그는 삶을 바꾸려드는 순간 더 큰 불행이 올 것을 예감하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어떤 이가 고난의 길을 자청하고 있을 때, 그는 그 고난을 피하면 겪게 될 마음의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마음의 자질이 존경받을 만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물며 그렇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이렇게 태만하고 진부한 '편안함의 세계'를 떠나지 못한다. 그러나 때로 이런 의문과 마주치는 것마저 피하기는 어렵다. 나는 왜 내가 아는 세상만을 살고 있나? 나는 왜 내가 아는 나로만 살아가는가? 그럴 때 어렵고 신기한 시를 읽는 일은 특별한 일이다. 우리는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고 두꺼운 책도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어렵고 신기한 시를 읽을 때면 그런 것들은 문득 소용이 없어지고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처음 보는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 왜냐하면 시란 "내가 최초가 되어 최초의 사물을 바라보는 것" (이수명, '횡단', 문예중앙, 2011, p. 74)이니까.

한동안 알라딘 서재에 들어오기가 힘들었다. 
온라인 관계의 허망함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요번엔 내 존재 자체에 정체성을 갖게 됐다고나 할까?

언젠가 텔레비젼 드라마 '아내의 유혹'에서 보니까 얼굴에 점 하나를 찍으니까 구은재가 민소희로 바뀌고 하던데...
그와 비슷한 일이 내 주변에서 일어났다.
게다가 난 그녀를 오프라인에서 본 적도 있는지라...친하다고 생각했고(누구 맘대로?...내 맘대로~!)
그녀가 이 곳 서재를 폐쇄하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탈퇴를 하고 하는 과정에서, 
(그렇다,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는 못하고...) 주기적으로 안부 문자는 넣었었고,
어떤 때는 답장을 받고, 어떤 때는 답장을 받지 못했었다. 

문제는 요번 추석 무렵에 발생했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난 안부문자를 넣었고, 답 문자도 받았다.
비밀 댓글로 그녀가 서재를 다시 개설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트랙백해보니,
서재 개설일이 반년도 전이고,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도 먼저 이 사실을 알고 왕래도 하고 있었나 보다. 

그녀가 이제서야 내게 서재 주소를 알려준게 서운한 것도 잠시...
다른 사람들은 쿨하게 이해하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 자신을 돌이키게 되었고,
내 자신의 정체성, 내지는 존재론적 회의로까지 이어졌다.

요즘 울 아들은 아침마다 풍경 사진을 찍어 어디 대형 포털에 올리는 모양이다.
밥상머리의 화제는 파워 블로거 얘기였고,
자연 내가 이곳 알라딘에 꾸리는 서재 얘기가 나왔고, 시큰둥한 이유를 설명하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울 아들 曰,
"엄마,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만...
 내가 보기에 엄마 당한 거 같아." 

난 쿨하게 인정하기로 하였다.
"좋아, 좋다구...근데,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지?"
"간단하게 생각하자구, 세가지 경우의 수가 있지.
 첫째, 엄마가 스스로를 따 시켜 그 사람에게서 분리시켜 내는거야.
 독고 다이, 혼자 노는거지... 
 둘째, 엄마가 주위 사람들이랑 편먹고 그 사람을 따시키는 거야.
 근데, 고결하신 엄마 성격 상 그건 안할거고...
 셋째, 그냥 흐지부지 자폭하는거지, 뭐~."

결국 내 삶은 신형철을 빌리지 않고서라도...대체로 내 자신이 가장 편안하다 여기는 쪽을 향해 흘러 가려나 보다.
 
시가 어렵다보니...자연 외우는 건, 짧은 시 몇 수 이다.

 의인화

 순식간에 얼굴은 이루어지기에 지상에 거처를 가지지 않는다. 몇 개의 면이 서로 닿았는가. 너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사랑한다. 입술이 없이 말이 흘러나오는 밤이어서 밤 대신 목소리를 저지를 것이다. 나무에 녹는 나뭇잎이 적절하다. 나뭇잎을 덧붙이기 위해 나무의 무관심이 적절하다. 미리 잠드는 버릇이 이렇게 환하다. 머리맡이 가늘게 찢어진다. 어쩌면 이런 문턱, 다른 표시에 베일 것이다. 너라는 표시에 연루될 것이다. 내가 베어 물었을 때 너는 썪으려 한다. 단 한 차례의 생애에서 우리가 의인화되는 순간이다.

 어느 날 

 날이 차갑다. 날이 또렷하다. 날에서 상한 냄새가 난다. 리듬이 끝났다. 너는 볕을 쬐려 한다. 볕을 조금만 더 쬐려 한다. 둥근 등받이 의자에 너를 걸쳐놓는다. 날이 차갑다. 두개의 날이 섞이지 않는다. 두 개의 날이 어떤 날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어느 날 너는 날을 침범한 것이다. 날과 날의 영역을 범한 것이다. 다시 날이 차갑다. 너는 볕을 쬐려 한다. 울퉁불퉁한 볕을 향해 몸을 기울인다.

 
얼마전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때 아들의 카카오톡 테마는  '종갓집 장손은 괴롭다'였다.
제법 비장한 표정까지 지어가며, 
엄마가 아빠의 조건이 아닌 사랑에 눈이 멀어 결혼했듯이 자기에게 눈이 멀어 결혼해 줄 여자가 있을까 하길래...
난 쿨하게
"걱정마라, 지금도 국제 결혼이 대세이지만...
 너 결혼할 때쯤이면 또 아니, 외계인이랑 결혼하게 될지?
 거 뭐냐, 메트릭스 봐라, 바퀴벌레처럼 생긴 외계인 나오잖아. 
 바퀴벌레는 종속번식이 최대의 사명이니...너처럼 종갓집 장손이 각광 받게 될지도 모르지..."
하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속으론 유산이나 유전처럼 보이거나 증명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물려지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종갓집 맏며느리'라는 자리는 내가 피할 수도 있는 자리였지만, '종갓집 장손'이라는 자리는 내 자식으로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자리이다.
 

 

 

그레이트 하우스
니콜 크라우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그레이트 하우스>를 읽었다.
저자는  무형의 물려주고 물려받음의 관계를 유형의 '책상'을 가지고 얘기하려고 하고 있다.
어떤 이는 열쇠 구멍을, 어떤 이는 바닥의 타일을, 어떤 이는 닳아빠진 문지방을...따위를 물려주고 물려받고를 모두어 보면 '유대인의 영혼'이라는 '그레이트 하우스'에 이를 수 있다고도 얘기하고 있다.

유대인의 영혼이나 그레이트 하우스라고 했을땐 근사하지만,
물려주고 물려받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느 누구도 열쇠구멍이나 바닥의 타일, 닳아빠진 문지방 따위는 선택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자신의 것이 되어 버렸지만,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아들에겐 구시대적 풍습이고 버겁고 때론 아프기만 한 타이틀인 '종갓집 장손'이라는 타이틀처럼 말이다. 

암튼, 유대인이나 그레이트하우스에 대해서 알면 내용이 풍부해지고 깊어지긴 하겠지만...몰라도 인간관계에서 내가 남과의 경계를 만들기 위해 쌓아올린 벽과 파들어간 깊이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매력을 갖고 충분히 재미있게 읽힌다. 

이 소설엔 그 책상을 매개로 관습이나 타성에 상처입은 영혼들이 등장하는 데, 그들은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도 치유받지 못함은 물론, 문을 닫아걸고 벽을 쌓는다.

저를 깊이 움직인 음악들을 들을 때 늘 그렇듯이, 그 곡도 다른 사람과 있을 땐 듣지 않았어요. 제가 특히 아끼는 책은 빌려 주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죠. 말하려니 부끄럽기도 하네요. 어떤 본질적인 결핍이나 제 본성 속에 숨은 이기심을 드러내는 행동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본능과는 반대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하게 되면, 그 열정을 나누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 속에 같은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싶어 하는 그런 본능 말이에요. 그런 타인들의 열과 성이 없었다면 저 역시 제가 아끼는 책이나 음악들을 모르고 지냈을 거라는 사실도 알아요,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이 끼어들 때마다 즐거움이 커지는 게 아니라 줄어드는 기분이 들었고, 저와 작품 사이의 친밀함에 금이 가고, 사생활이 침범되는 것 같았어요. 최악의 경우는, 제가 이제 막 떨리는 심정으로 읽기를 마친 어떤 책을 다른 사람이 아무렇게나 후루룩 살피는 경우였죠.(49~50쪽)

이 소설이 슬픈 것은 서로 엇갈리고 어긋나면서도 맞춰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것이다. 

그냥 그렇게 그렇게 끝났다면 그저 그런 작품이 됐을텐데...
요아브와 이자벨이 표현해 내는 희망이 있어 좋아졌다.
얘기를 할때 쳐다보고 눈을 맞춰주는 것, 적당한 추임새를 넣어주는 것,
관계에 있어서 그거면 충분한거 아닐까?
벽이 아무리 높다거나, 속이 아무리 깊다해도 말이다.

누군가 처음으로 나를, 자신이 바라는 모습이나 내가 보이기를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봐 주고 있다는 느낌이 정말 황홀했다.(183쪽) 
그는 모든 이야기를, 아주 작은 세부까지 기억했고 내가 그냥 핵심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도 빼먹지 않고 다 들려주기를 원했다.(184쪽) 

그러고 보면...마음은 잃어버린 게 아니라, 내 안에 가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관계는 벽을 허물었을 때 지속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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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6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6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6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6 1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1-09-26 23:09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오늘 궁금해서 아까 여기 들렀었지요 ^^

2011-09-26 1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09-26 19:59   좋아요 0 | URL
이런. 반가운 마음에 들렸는데. 마냥 반가운 마음만 보이긴 좀 그렇습니다.
벽이 낮아지고 마음의 틈이 좀 채워지셨음 하는 바람입니다 !

2011-09-26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1-09-26 23:12   좋아요 0 | URL
궁금했더랬는데,,,그랬군요...그래도 반가와요~. 많이.^^

2011-09-26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1-09-27 00:58   좋아요 0 | URL
그냥 물이 흐르는대로 바람이 부는대로~~~~~~~~ 살아요,우리!!

2011-09-27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1-09-27 10:36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의 글을 쭈욱 읽어보니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괴롭힐 수가 없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순오기님의 댓글처럼 우리 모두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싶어요.
* * *
누구나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의견보다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더 많은 가치를 두는 것을 나는 언제나 의아스럽게 생각한다. ······ 우리는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일보다 자기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생각하리라고 추측되는 것을 더욱 존중한다.(M.아우렐리우스,『명상록』中에서)

blanca 2011-09-27 11:03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는 요새 사람이 아무리 늙어도 성숙해도 인간 관계에 통달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소통이라는 게 가능은 할까, 그런 의문이 들기도 하고요. 언어의 한계일까요, 이기심의 한계일까요. 양철나무꾼님에게 따라니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실 거죠. 저는 벽을 허무는 게 너무 어렵네요.

2011-09-27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7 1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1-09-27 21:20   좋아요 0 | URL
내가 뭐 그리 예의에 어긋나고 배려없고 비겁한 일을 했는지 묻고 싶군요?
내가 님의 블로그를 공개했습니까, 아님 트랙백을 걸었습니까?

그때 서재 폐쇄의 이유도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왜 갑자기 그때 일로 변질되어 다시 거론되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고,
맘적으로 생긴 거리감은 어쩔 수 없었다 하면서...따시킬 의도는 없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전 서재뉴스레터 관련 제 글을 읽고서야 저와 소통할 결심을 하셨다고 하셨는데, 그럴 필요 없을 것 같군요.

제가 '스스로를 따' 시켜 '님에게서 분리'시켜 내는 그 방법을 택했음을 저와, 님과, 둘 모두를 같이 아는 분들께 상기시켜 드리는 겁니다.


2011-09-27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8 0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잘라 2011-09-28 11:10   좋아요 0 | URL
어어? 양철나무꾼님 화난 모습 처음 봐요.

저는 평소에 하도 잘 삐지고 울그락 불그락 하는지라 제가 화낸다고 누가 뭐 크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지만, 양철나무꾼님이 화내시니까 아무 상관 없는 저까지 괜히 쫄아요. ㅠㅠ

님을 화나게하신 그 분이 누구신지 궁금한건 어쩔 수 없는데, 이런 땐 그냥 못본척 넘어가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도 들긴하는데,, 저는 양철나무꾼님의 글을 즐겨 읽는 한사람인지라, 이런 일로 님의 글이 뜸해지시면 곤란하기때문에, 누군지도 모르는 그 분이 괜히 미워지네요.

창문 활짝 열고 환기 좀 시켜야겠어요.
신선한 가을 바람 쑤아아-

hnine 2011-09-28 18:33   좋아요 0 | URL
에구...양철나무꾼님 토닥토닥...

lo초우ve 2011-09-29 08:05   좋아요 0 | URL
순리대로 산다는것이 가끔 힘들때도 있지만..
그래도...
순리대로 사는것이 제일 낳다는 생각 들어요 ^^

2011-09-29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02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