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어머니의 임종을 옆에서 지키면서 좀 힘들었다.
의사표현을 전혀 못하시는 어머니 옆에서 나는 끝까지 어머니를 놓을 수 없어하였고,
아버님은 너무 힘들어 하시니 이쯤에서 포기하자 라는 말씀을 여러번 하셨었다.
그때 난 서랍 속의 반지는 누구에게 주고 통장의 돈들은 누구에게 남겨주고...이딴 게 궁금한게 아니라
의사표현을 못하시는 어머니의 의중이 궁금하였다.
이 세상에 오는 건 순서가 있지만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순서가 없다.
그래서 나는 갑작스레 이 세상을 떠날 때를 대비하여, 유서를 남겨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장기 기증과 각막 기증, 이딴 건 벌써 여러번 내 의견을 얘기하였었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유서로 남겨야 겠다.
근데, 막상 유서를 쓰려고 하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연습이 필요하다, 하루하루 일기를 쓰는 일부터 시작하여야 겠다.
**
나에겐 몹쓸 지병이 있었다.
밤에 잠을 잘 못자는, 굳이 이름 붙이자면 불면증인데...
그동안 난 '불면증'을 대단치않게 생각했었다.
좀 단순하게 밤에 못자면 낮에 자면 되고,
몸을 좀 혹사시키다보면 밤에도 잘 수 있다는 걸 경험도 했다.
근데, 요즘은 밤에 잠을 잘 못자면 낮에 잘 수 있게 되는게 아니라,
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아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위태위태하다.
그래서 밤에 잠을 자볼 요량으로 내린 처방이 약간의 알콜 섭취.
원래, 나의 주량은 소주 반병 정도.
주당이 봤을때는 주량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지만,
온갖 종류의 술을 사다가 병아리 눈물만큼 헐어마신다.
남는 건 남편의 차지고, 이러다가 남편을 알콜리즘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살짝 걱정스럽다.
두보의 '곡강에서'라는 시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한조각 꽃잎이 날려도 봄빛이 줄어드는데,
온천지 바람에 날리는 꽃잎 못 견디게 시름겹다
스러지는 꽃잎 하나가 눈 앞을 시치는데,
몸이 상한다고 목을 축일 술을 마다하나
새로 얻은 병도 하나 있는데...
호흡이 짧아졌다.
예전엔 장편소설이 좋았다. 대하소설도 곧잘 읽었다.
잘 짜여진 장편소설 한권을 플롯을 따라 손에서 놓지 못하고 밤을 지새워 읽고 나면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었다.
요즘 책 읽기도 뜨문 뜨문이었다.
누군가는 내가 좋아하는 류의 장르소설은 하나 같이 두꺼워 손에 들고 읽기도 무겁겠다고 했는데,
그말을 들어선지 이상하게 책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쭉 연결해 읽지를 못하니, 읽다가 그만 둔 곳을 다시 찾아 읽는 것도 벅차서 관둬 버리고,
이리저리 들춰 읽을 수 있는 시집,잠언집,명상집 따위의 짧고 굵은 것들만 이리저리 들추게 된다.
최승자님의 신작 시집이 나왔다.
최승자님이 편찮으신 거야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최승자님처럼 유명한 시인도 글쓰기로 밥벌이가 힘들어 번역으로 연명하셨었고,
이젠 그것도 힘들어 국가의 보조를 받는다는 얘기는 눈물나고 맘 아프다.
나는 글쓰기로 밥벌이가 될 정도의 실력이 안되니 이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겠지만,
온몸을 불살라 하는 무언가가 밥벌이가 안된다는 현실이 받아들이기 버겁다.
요번 시집은 노장 사상에 한발 더 다가간 것이, 그래서 더 선문답 같고 공안 같다.
서서히 말들이 없어진다
- 최승자 -
세상이 펼쳐져 있는 한
삶은 늘 우울하다
인생은 병이라는 말도 이젠 그쳤고
인간은 언어라는 말도 이젠 그쳤고
서서히 말들이 없어진다
저 혼자 깊어만 가는 이상한 江
人類
어느 누가 못 잊을 꿈을
무심코 중얼거리는가
푸른 하늘
흰 구름 한 점
(사람이 사람을 초월하면
자연이 된다)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 최승자 -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어서
우연히 연기처럼 모였다 흩어지는 걸까
오늘도 北海의 물고기 하나
커다란 새 한 마리로 솟구쳐 오르고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속살속살 눈 내리는 밤
멀리서 침묵하고 있는 대상이
이미 우리 가운데 그윽히 스며 있다.
편찮으시다고 해서 생각나는 또 한 분은 최인호 님이다.
이분은 3년째 침샘암으로 투병 중이시란다. 그런 분이 5년 만에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라는 책을 내셨단다.
난 최인호 님은 읽을 때도 있었고 건너 뛸 때도 있었다.
요번 소설은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담담한 말투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고 하니, 한번 읽어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