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렁탕과 로맨스
- 정끝별 -
처음 본 남자는 창밖의 비를 보고
처음 본 여자는 핸드폰의 메씨지를 보네
남자는 비를 보며 순식간에 여자를 보고
여자는 메씨지 너머 보이는 남자를 안 보네
물을 따른 남자는 물통을 밀어주고
파와 후추와 소금을 넣은 남자는 양념통을 밀어주네
마주앉아 한번도 마주치지 않는 허기
마주앉아 한번 더 마주보는 허방
하루 만에 먹는 여자의 국물은 느려서 헐렁하고
한나절 만에 먹는 남자의 밥은 빨라서 썰렁하네
남자는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여자는 숟가락을 들고 늦도록 국물을 뜨네
깜빡 놓고 간 우산을 찾으러 온 남자는
여전한 여자를 처음처럼 한번 더 보고
혼자 남아 숟가락을 들고 있는 여자는
가는 남자를 처음처럼 한번도 안 보고
그렇게 한번 본 여자의 밥값을 계산하고 사라지는 남자와
한번도 안 본 남자의 얼굴을 계산대에서야 떠올려보는 여자가
단 한번 보고 다시는 보지 못할 한평생과
단 한번도 보지 못해 영원히 보지 못할 한평생이
추적추적 내리네 만원의 합석 자리에
시월과 모래내와 설렁탕집에
어제는 양곰탕이 먹고 싶었다.
점심시간에 밀린 잠을 자고 일어나 앉아 몸을 움직이려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렇다, 난 고도의 육체노동자이다.
어머니께 가기 전에 무엇을 좀 먹어야 할텐데, 먹고싶은 게 하필 양곰탕이었다.
하긴 어머니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계실때도 어김없이 내 배는 고팠고,
그 어느 때보다 끼니를 더 잘 챙겨 먹었었다.
집밖에서는 혼자 밥을 먹어본적이 없었는데, 혼자 씩씩하게 밥을 한그릇 씩 뚝딱 해치웠다.
그리고 어제 퇴근길에 혼자 모래내 면옥에 들러 양곰탕 한그릇을 뚝딱 해치우는데,
저 시에서처럼 밥값을 대신 내주는 로맨스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누군가와 한 테이블에 같이 앉아 밥을 먹었었다.
쓸쓸하여 목이 메이거나 하지도 않았다.
양곰탕을 먹고,
'외로운 마음에 꽃비가 내려요'를 부르는 것도 지겨울 즈음 찾아낸 게 장사익이었다.
(난 그러니까 장사익의 CD를 가지고 있는 거였다.)
연분홍 치마가 봄 바람에~~~
장사익을 이리저리 웹서핑을 하다가,
김규항의 블로그 에 실린 두 편의 글을 보고 생각이 복잡하다.
2008년 2월25일자 <단호하네>라는 글만 봤다면...충격이 덜 할 수도 있었을텐데,
같은해 2월26일자 <꼬마작자 6인전>까지 같이보게 된지라 후폭풍이 대단한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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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잘 하는 아저씬데 이명박 취임식한다고 춤추고 노래하네...
예술가가 말이야...예술은 훌륭한데 생각은 없는 사람하고,
예술은 정말 형편없는 데 생각은 훌륭한 사람하고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해?
- 2008년 2월25일자 <단호하네>일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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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이 예술가란 자신의 창작욕와 상상력 그리고 이런저런 사회적 여건이나 제약이라는
두가지 힘 사이에서 끊임없이 부유하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김단이 그걸 요령있게
줄타기하며 세속적 인기와 안락을 얻는 속물이 아니라 현명하게 넘어서는,그러나 고립되진
않는 예술가가 되길 나는 바란다.
-2월26일자 <꼬마작가 6인전>일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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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딸의 자연스런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아버지의 질문하는 의도를, 눈치빠른 딸이 금방 알아챌 수 있다는 거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부모가 자식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부모의 견해나 가치관을 자식에게 주입시키는 건 반대다.
바로 그 다음날 글에서,
'예술가란 자신의 창작욕와 상상력 그리고 이런저런 사회적 여건이나 제약이라는 두가지 힘 사이에서 끊임없이 부유하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하고 전날보다 누그러진 입장을 보인다.
어느 부모라도 자식에게는 너그러울 수 있겠지 하다가도...그렇다면 전날 장사익을 향한 감정이 너무 과격하다 싶다.
또 한가지,
예술은 훌륭한데 생각이 없는 사람보다, 예술은 형편없는데 생각은 훌륭한 사람이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상가'도 예술가의 범주에 넣지 않는다면,예술은 수단이나 목적이 아닌...예술 그 자체가 아닌가?
솔직히 그간의 난, 장사익보단 김규항의 생각들과 더 친숙했었기 때문에 장사익의 입장을 잘 모른다.
하지만, 감정을 삭이고 걸러내고 승화시킨 그런 노래들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 생각이 없어서, 김규항으로하여금 '장사익 경사났네'라는 소리를 하도록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한겨레21>쾌도난담코너에서 최보은, 김규항, 김훈이 대담할 적에...김훈이 한말들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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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당시 신군부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자기가 모조리 작성했다는 것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안 썼으면 딴 놈들이 썼을테고...난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어.그때 나를 감독하던 보안사 놈한테 이런 얘기를 했지.내가 이걸 쓸테니까 끌려간 내동료만 때리지 말아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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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도 어쩜 김훈과 같은 심정으로 그자리에 나섰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난 장사익도 믿고 싶지만,
내가 아는 김규항이라는 사람이 아무런 사전,사후 조사없이 그런 글들을 쓰지는 않았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국어시전에 나온 예술의 뜻 중 두번째를 보면,
'특별한 재료,기교,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활동 및 그 작품'이라고 되어있다.
어찌되었건 예술이라는 건 '감상'이라는 '생각'을 '표현'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오직 '생각'만을 소유하고, 지금이 아닌 되어야 할 행위를 추구하는 것도,
지금 현재를 치열하게 표현하고는 있지만 '생각'이 없어 미래를 꿈꿀 수 없는 것도 ...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