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근의 들꽃이야기
강우근 글.그림 / 메이데이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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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항상 이렇게 힘든가요? 아니면 어릴때만 그래요?" 

이책을 읽으면서 왜 <레옹>의 마틸다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네 덕에 삶이 뭔지도 알게 됐어.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잠도 자고 뿌리도 내릴거야."
이 구절 때문이었던 듯도 싶다. 

실은 이 책을 읽으면서, 김훈의 <내 젊은 날의 숲>을 겹쳐 읽었다.
그래선지 이 책의 들꽃 얘기들이 내 젊은 날의 숲으로 오버랩 됐다.
들꽃은 영어로 'wild flower' 정도 될 것 같고,
wild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자연 그대로의' 라는 뜻도 있다. 

참 이상하게도 나는 들꽃을 야생의 그것이라는 생각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 그대로'는 순리의 다른 이름 쯤이라고 생각했다.
순리는 다른 이름으로 혜안이 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이름으로 나이듦이라고 생각했었다.
야생을 젊은 날의 치기쯤으로 생각한 논리였다. 
그래서였을까?
들꽃의 '들'을 'wild'랑 연관시키는 것이,
' wild'에 '야생의'라는 뜻 외에 '자연 그래로'의 뜻이 있다는 게 생소했다.
그 생소함은 <내 젊은 날의 숲>한 구절로 익숙해 졌다.

나무줄기의 중심부는 죽어 있는데,그 죽은 뼈대로 나무를 버티어주고 나이테의 바깥층에서 새로운 생명이 돋아난다. 그래서 나무는 젊어지는 동시에 늙어지고, 죽는 동시에 살아난다. 나무의 삶과 나무의 죽음은 구분되지 않는다.나무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르다. 내용이 다르고 진행방향이 다르고 작용이 다르다.
                                                                                - 김훈의 <내 젊은 날의 숲>215쪽 -

내게 이 책의 저자 '강우근'은 좀 특별나다.
난 '강우근'을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닌,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이 분의 <호랑이 뱃 속 여행>같은 그림을 우리 아들 어렸을 때 많이 봤었다.
'태몽을 호랑이 꿈을 꿔서'라고 억지로 개연성을 부여해 본다. 

그 후 7년동안 연재되었다는 이 글 중 몇 개만을 어디서 주워 읽었었다.
읽으면서 실은 들풀들과 그림으론 실제를 연상할 수 없어서, 사진이 있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미련스럽게 투덜거렸다. 사진이 실제를 고스란히 담아 낼 수 없다는 걸,<내 젊은 날의 숲>에 나오는 세밀화가를 통해서 알게 됐다.
그러고 나서야 이 책의 그림들이 오히려 진짜라는 걸 알게 됐다.그림으로 알게 됐지만,그의 글들도 좋았다.
가득 찼지만 넘치지는 않았다.

새벽시장에서 야채 파는 할머니를 안고 흘리는 대통령 눈물은 가짜다.나물 파는 할머니가 등을 기댈 수 있고 또 찬바람을 막아주는 양버즘나무는 진짜 가로수다.(26쪽) 
 

"외래종을 뽑아낸다는 것은 다시 교란을 불러일으키는 행위이기 때문에 또 다른 외래종의 침입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므로 외래종이 침입한 환경에서 고유의 자연을 보강하여 안전성을 도모하는 생태적 복원이 바람직한 외래종 퇴치 방법이다."(한국생태학회,<서울의 허파 남산>,<서울의 생태>생태적복원이란 병든 부분을 도려내기보다는 몸 전체를 튼튼하게 해서 질병을 물리치는 방법이다. (34쪽)


이렇게 사람이 가꾸는 곳에서는 천이가 멈춰 버린다.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뿌리 내리고 살아가는 귀화식물이 오히려 서울 토종에 걸맞지 않을까?(35쪽)

장맛비를 맞고 수부구북 자라나는 저 흔한 잡초들도 한 포기,한 포기가 수만 개 씨앗 가운데 살아남은 하나다. 쉽게 자라나는 것 같지만 수만 가지 시행착오를 피하고 살아남은 하나다. 쉽게 자라나는 것 같지만 수만 가지 시행착오를 피하고 살아남은 것들이다.
...
그런 쥐꼬리망초 삶에 요행이란 없어 보인다.쥐꼬리망초가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은 실용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하지만 쥐꼬리망초에게는 그게 최선의 방식이지 않을까.(49쪽)


명아주에서 이 얘기로 넘어가다니, 가득 찼지만 넘치지 않는 것은 그의 내공이 점점 깊어지기 때문인가 보다.

명아주는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되는 들풀이다.
초록의 풀만을 본 사람들은 명아주가 '청려장'이라는 지팡이로 태어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한다. 명아주는 풀이기 때문에 가벼워서 어르신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팡이로 태어난다. 중풍에 좋다고 하는 데 근력이 떨어져 무거운 지팡이를 들 수 없기 때문인것도 같다. 무협지를 보면 도인들이 자기 몸체보다 큰 휘휘 꼬인 지팡이를 들고 나타나는데, 다 청려장이니까 가능한 얘기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절실하게 느끼는 게 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누구나 다 못난 구석이 있으면 잘난 데가 있게 마련이고,게다가 잘나고 못나고도 보기 나름이라 못났다는 게 다르게 보면 잘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잘나고 못난 게 아니라 다양하다는 것이다.엘리트주의에 찌든 교육 행정 관료들은 자기네들이 만든 잣대 하나로 이 다양한 것들을 재서는 일등에서 꼴찌까지 줄 세우려 한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경쟁을 해야 한다고 외치지만, 그건 소수 가진 자만이 살아남는 것을 합리화시키는 논리일 뿐이다. 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다양한 것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게 얼마나 재미난 삶인 줄 알지 못한다.(157쪽) 

처음 내가 'wild'에 품었던 생각을 짐작이나 했던 듯 깔끔하게 정리해 놓기도 한다.


자연은 스스로 치유하고 스스로 살아간다.그래서 자연이다. 잡초가 많다는 것은 자연이 망가졌다는 것이고, 망가진 자연이 스스로 치유하고 있다는 표시다. 몸에 상처가 나면 생기는 상처딱지 같은 게 잡초다. 자연이 스스로 회복되면 상처딱지가 떨어지듯 잡초는 더 이상 그곳에서 자라지 않는다. 그러니 무작정 잡초만 뽑는 것은 아물지도 않은 상처딱지를 떼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꾸 이벤트를 벌이고 돈을 들여 그럴 듯하게 뭔가를 만들고는 있지만 그건 상처를 덧나게 할 분이다.(185쪽) 
 
들꽃은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 오로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키를 낮추어 틈새에서 자라든 넓게 무리를 이뤄 자라든, 짧은 시간에 자라서 꽃 피고 열매를 맺든 긴 시간 끊임없이 꽃을 피워 많은 씨앗을 만들든, 들꽃은 홀로 살아남기 위해 여러가지 생존방식을 터득해 냈다. 또 한편으로 들꽃은 홀로 살아가지 않는다. 한 가지 식물만 자라는 곳은 사람이 가꾸는 밭뿐이다. 밭작물은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한다. 들꽃이 자라는 곳에는 여러 풀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 주름잎 둘레에는 질경이가 꽃을 피우고, 새포아풀이나 개미자리가 섞여 자라고, 개망초, 괭이밥, 다닥냉이 따위도 함께 어울려 자란다.(210쪽)

글의 처음 레옹으로 돌아가,
죽어야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삶이 있다는 게 좀 서글프지만,
레옹이 죽고 그의 화초가 들판에 심기는 걸 보고, 잘 뿌리 내리길 바라는 건 나만이 아닐게다.
우리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들꽃이다.
너란 이름 나란 이름을 갖고 어울리고 흐드러지고 등돌리고,
또 다른 누군가와 어울리고 그러면서 '우리'라는 또 '동지'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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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03 20:42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소개하신 스텔라님의 글도 잘 읽었는데, 나무꾼님도 소개하시니
읽어보고 싶네요. 저자가 그림을 그린 분이셨다니 책 속의 저자의 그림들이
궁금하기도 하고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양철나무꾼 2010-12-04 11:14   좋아요 0 | URL
저 이 책 나오길 학수고대했었어요.^^
그림도 있고 판화도 있는데, 참 좋았어요.
글도 죽음이었구요.

책이 넘 좋아서 몇권 더 구입하려구요.
연말인사 하기 좋겠어요~^^

stella.K 2010-12-04 12:15   좋아요 0 | URL
저는 좀 분개하면서 읽었는데...
뭐 이를테면 정치하는 사람들 뭐하는 사람들인가 싶어서 말입니다.
이렇게 꽃 하나 지켜주지 못하면서 인간을 위한다는 게 같지 안 잖아요.
전 그림도 나쁘지 않았지만 사진으로 보았더라면 더 좋았을 걸
아쉽더군요.
양철님 리뷰에 비하면 한없이 저질이라 부끄럽군요.ㅜ

2010-12-03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4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0-12-03 23:27   좋아요 0 | URL
김훈의 신작을 우선으로 낭독녹음하고 있어요.
제가 하고 싶어 먼저 신청하고 시작했어요.ㅎㅎ 반쯤 했는데요,
세밀화와 나무와 꽃과 풀과 숲과 생명에 대한 이야기가 김훈만의 필치로 괜찮더군요.
강우근의 저 책도 관심이 갑니다.
야생초편지도 왠지 떠오르네요.

양철나무꾼 2010-12-04 11:20   좋아요 0 | URL
왠지 프레이야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지는 아침인걸요~

김훈 책, 소리내어 읽기도 괜찮죠?^^
저 며칠전 13개월 짜리 조카를 잠깐 봐줄 일이 있었는데,
제 책을 갖고 와서 읽어 달라고 졸라서 좀 읽어줬는데...
호흡 고르기가 쉽고 편하더라구요~

야생초편지 떠올리기 쉬운데,
야생초편지와는 많이 틀려요~^^

gimssim 2010-12-04 07:56   좋아요 0 | URL
김훈의 소설을 글로 찍는 사진이지요.
저도 얼른 읽어봐댜겠어요.

양철나무꾼 2010-12-04 11:22   좋아요 0 | URL
김훈은 어떤 분껜 소리내어 읽는 책이 될 수도,
어떤 분껜 글로 찍는 사진이 될 수도 있군요~^^

2010-12-06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7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같은하늘 2010-12-09 02:52   좋아요 0 | URL
이 책이 여기저기 보여요.
또 다시 찜 목록이 늘어나고 있네요.^^

양철나무꾼 2010-12-09 14:33   좋아요 0 | URL
'찜 목록'이란 표현 예쁜걸요.
전 요즘 책장도 비워내고,장바구니도 비워내고 있어요~^^
장바구니가 가난해지니까 책장이 헐렁해진다는 게 적절하겠네요.

감은빛 2010-12-09 03:28   좋아요 0 | URL
며칠 전에 이 기막힌 리뷰를 읽고 뭔가 댓글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창을 닫아버렸습니다.
오늘 다시 들어와 읽었는데, 또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네요.
이 멋진 글에 어울리는 멋진 말을 남겨야 할텐데,
도저히 생각이 안나서, 그냥 다녀간 흔적만 남깁니다.

양철나무꾼 2010-12-09 14:35   좋아요 0 | URL
흠~
이 책 감은빛님의 리뷰 죽음이었는데 말이죠.
때론 말줄임표 하나로도 느낌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고맙습니다,기막힌 리뷰라고 칭찬해 주셔서...꾸벅(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