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B급좌파 : 세 번째 이야기
김규항 지음 / 리더스하우스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언젠가 아침 출근길에 자전거 공식 유니폼인 쫄바지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김규항을 본 일이 있다.
난 김규항을 좋아하고,그의 전작을 사서 읽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를 사진이 아닌 실제로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삼거리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면서가 아니면 옆을 지나쳤어도 몰랐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그날 하루는 행복하게 시작 할 수 있었다.
사실 난 左라던가 右라는 말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울을 놓고 바라보는 것처럼,
기준을 나로 하느냐 상대방으로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변화무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이런 나도 하늘에 뜬 해나 달,별 따위를 향해선 절대적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는데,
좌라고 인정하고 하늘에 걸린 해나 달이나 별처럼 우러르는 사람이 김규항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좀 거창한데...그의 사상이나 이념들은 변하지 않아 우러를 수 있다.
간혹 그의 홈페이지에 들러 놀기도 하고,
종이로 된 신문이나 주간지 따위에서 그의 글들을 발견하면 스크랩 해 여러번 읽기도 하고 보고 베껴써 보기도 하는 나로서는,이 책 <B급좌파-세번째 이야기>가 새로울 건 없었다.
여기에 사진도 참 불친절해서 조그맣고 흑백이다.
다만 위안이 되는 건,따님인 김단의 그림 솜씨를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는 거다.
아니나 다를까 책 뒤에 '일러스트 김단'이라고 또박또박 적혀있다.
홈페이지에서 봤던 글들을 다시 봤다고 해서 지루하다거나 진부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그게 김규항의 <문장론>의 힘인 것 같다.
나의 문장론
나는 글의 소재를 얻기 위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글을 쓴다.
......
간결함,리듬,그리고 쉬움 같은 문장에 대한 내 모든 태도들은 오로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나는 이오덕 선생이 말씀한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믿는다.모름지기 글은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글을 씀으로써 내 일상의 에피소드들은 비로소 내 생각으로 정리되며 그렇게 정리된 생각들은 다시 내 일상의 에피소드에 전적으로 반영된다.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것도 아니다.결국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18,19쪽)
앞쪽의 매체 기고글보다는 뒷쪽의 일기와 단상이 내겐 깊은 울림을 줬는데,
예를 들면,<바람><내 팔자야>같은 경우가 그렇다.
바람
자전거는 앞쪽으로 달리기 때문에 뒤에서 부는 바람은 잘 느껴지질 않는다.그저 '오늘따라 잘 나가는데'하는 것이다.돌아오는 길,마파람에 힘이겹기 사작해서야 바람이 나를 도왔다는 걸 깨닫게 된다.(429쪽)
내 팔자야
후배가 읽고 있던 신형철 평론집을 잠시 일별했다.문학동네에서 낸 책에다"처음 글을 쓴 게 문학동네였고 죽기 전 마지막 글도 문학동네에 쓰고 싶다"고 말하는 '청년평론가'가 좀 한심스럽긴 하지만,인텔리 독자들에겐 꽤나 쾌감을 줄 만한 글들이다.글재주와 감성과 재미를 마음껏 펼쳐내는,창작에 기생하는 글로서 평론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창작인 이런 글을 보면,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를 끝없이 되새기며,수사를 펼치긴커녕 군더더기를 쳐내고 또 쳐내며 쓰는 나는,한편 부러운 생각도 든다.내 팔자야,나도 자유주의자 할 걸,싶은 것이다."독자 입장에서 선배 글과 신형철 글은 정반대인 것 같아요.신형철의 글은 읽을수록 생각의 갈래들이 펼쳐지는 데,선배 글은 읽을수록 생각의 갈래들이 하나로 모아지거든요.(480쪽)
나는 신형철의 글들도 참 좋아하는데,비교하며 읽어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역저
'관점은 물론 학술적 완성도에서도 '역저'라는 말이 전혀 과하지 않은 책이다.책 값이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이따금은 외식비보다 비싼 책도 사야 하는 법.' (484쪽)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는 이 구절 때문에 구입하였으나 읽을 엄두를 못내고 모셔두었고,
반면 <길은 복잡하지 않다>는 사서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김규항이 변했다고 느낀 건,<힘들다><말러>같은 글들에서이다.
힘들다.
내가 변하긴 변했나 보다.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글을 쓰고 나면 어찌나 마음이 쓰이는지 한참 동안 힘들다.(488쪽)
말러
오래전 나에게 말러를 권했던 후배에게 오늘에서야 "왜 그랬냐?"물었더니 그랬다.
"말러는 제정신이 아닌 낭만주의자라는 점에서 선배와 닮았습니다." (330쪽)
삶의 인문학
책이 인문학 공부에 유용하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그러나 책을 통한 인문학 공부는 인문학 공부의 가장 낮은 차원에 불과하다.(510쪽)
<삶의 인문학>은 내가 책이라도 읽을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12년동안 그의 족적을 열심히 따라왔다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그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았고,
또는 장님 코끼리 만지듯 그의 보여지는 일부분 만을 가지고 그의 전체인양 오독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러 곳에서 이미 접했던 단편적인 얘기들이지만,
그것을 한데 아우르고 온기와 생기를 불어넣어 김규항이라는 사람의 사상과 철학으로까지 승화시킨다.
그러고 보면 온기와 생기는,감정과 동의어는 아닌가 보다.
여전히 그의 글들은 따뜻하며 발랄하며,감정적으로 흐트러짐 없고 단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