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먹힌 꽃나무에게
-이성복

 

나도 너에게 해줄 말이 있었다

발가락이 튀어나온 양말 한 구석처럼

느낌도, 흐느낌도 없는 말이 있었다.


아, 너도 나에게 해줄 말이 있었을 거다.

양말 한 구석에 튀어나온 발가락처럼

느낌도, 흐느낌도 없는 말이 있었을 거다.


*******

신발을 늘 편한 걸로 신는 습관이 있어서

스타킹을 사기보단 양말을 사는 편인데

많이 걸어서 그러지 양말이 쉽게 뚫어지는 것 같길래

지난 겨울에는 아예 똑같은 양말이 세트로 들어있는 것으로 장만을 했다

내 서랍 속에 가지런히 들어 있는 회색 양말을 보면 마음이 이상해진다

양말들은 서로를 기억할까?

같이 포장되어 한 켤레씩 들어 있을 때 짝이었던 양말이 보고 싶을까?

만약 내가 짝을 잘못 골라 신으면 기분 나빠할까?

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많이 드는 편인데



어느 날인가

양말을 휙 뒤집어 벗는데 엄지발가락 쪽에 구멍이 난 게 보였다

엄마 같으면 전구 넣고 기워주셨을 테지만 바느질에는 영 소질이 없기도 하고,

당겨서 꿰맨 자리가 불편하기도 해서 과감히 그걸 버리기로 했다

한 짝을 버리고 나니 짝 맞춰 뭉쳐놓은 사이로

한 짝만 쓸쓸하게 남아 있는 게 너무 안쓰러워

돌돌 말아 두 짝이 있는 것처럼 해주었다.

그 양말은 기뻤을까?

제 몸이나마 따뜻하게 감싸 안고 있었으니....




봄이다.

예전에는 새싹이 움트면서 초록빛이 나무를 휘감는 걸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그 움직임에 나도 맞춰 괜히 기운이 나곤 했었는데

나이가 든 모양이다. 봄인데 괜히 서럽다.

구멍 난 양말에 비죽 나온 발가락처럼 괜히 몸이 움츠러들고

내 정신도 움츠러든다


누군가가가 내 양말을 나 몰래 버린 모양이다.

쓸쓸해서 내 몸을 도르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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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가 된 앤트 보림어린이문고
베치 바이어스 지음, 마르크 시몽 그림, 지혜연 옮김 / 보림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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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면서 제일 어려운 일이 '~답다'에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

어른이면 어른답게, 학생이면 학생답게, 선생님은 선생님답게, 소방관은 소방관답게..

이렇게 되기는 너무나 힘들고, 갈 곳을 몰라 헤매는 사람들처럼 빙글빙글 남의 구역에서 맴을 돌기 바빠서

어른이 아이다워지고, 아이가 어른다워지고, 학생이 선생처럼 구는 게 당연하게 보이기도 하는 세상이다.

이 책 <강아지가 된 앤트>에서는 아이다운 앤트와 아이다운 놀이와 아이다운 대화가 정겹다.

과장하지 않아서 좋고,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를 따뜻하게 그 장면 그대로 옮겨줘서 더 좋다.

책장을 덮었는데도 "형, 놀자~" 하는 앤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 책을 먼저 봤다면 <내동생 앤트>도 꼭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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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6월 29일 미래그림책 27
데이비드 위스너 글 그림, 이지유 옮김 / 미래아이(미래M&B,미래엠앤비)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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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나가봤더니 하늘에 순무나 오이나 당근이 둥둥 떠다닌다면?

그게 또 어마어마하게 커서 한 개만 갖고도 한 마을 사람들이 다 먹을 수 있다면?

즐거운 상상이다.

홀리가 실험을 위해 띄웠던 식물들이 하늘에서 쑥쑥 자라 돌아온 줄만 알았더니

외계인이 식사 준비를 하다가 실수로 우주선에서 채소들을 몽땅 쏟아뜨린 것이라는

결말에 이르러는 얼마나 웃었던지.

데이비드 위스너의 또다른 책 <구름공항>의 물고기들처럼 하늘을 가득 채운

순무들과 양배추와 피망들의 물결을 보면서 뭐가 생각나냐고 물었더니

'타고 싶어요'

'집으로 만들면 좋겠어요'

'배고픈 사람들이랑 나눠먹을래요'

'창고에 저장했다가 하나씩 꺼내서 일년내내 먹으면 좋겠어요'

이런 얘기들을 하는데 나는 정말 어른인가보다.

저것들을 저장하지 못하거나 한 번에 먹지 못해 썩어버린다면

그 악취를 어떻게 하나 하는 고민이 먼저 떠올랐으니.

내 이런 걱정에 아이들의 대꾸는 기가 막히다.

'외계인이 보낸 거니까 절대로 안 썩어요'

이래서 아이들과 나누는 대화는 재미있다.

*1학년부터 즐겁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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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것을 생각하고

길을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어쩌면, 이렇게도 내 마음과 똑같을까..

 

비가 오는 이 아침에 나는 바다가 너무 그리워

한참을 써내려가야 하는 이 시를 고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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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샘이 하나 있다

-문태준

 

맹꽁이가 운다

비를 두 손으로 받아 모으는 늦여름 밤

맹꽁이는 울음주머니에서 물을 퍼내는 밑이 불룩한 바가지를 가졌다

 

나는 내가 간직한 황홀한 폐허를 생각한다

젖었다 마른 벽처럼 마르는

흉측한 웅덩이

 

가슴속에 저런 슬픈 샘이 하나 있다

 

**

황홀한 폐허라는 건 없다

폐허는 폐허일 뿐이다.

내 폐허는 먼지 냄새 가득하고 삭막하고

감정의 찌꺼기들만 남아 있어

거기에 들어서는 순간

숨막혀 죽을 것 같다

 

내 폐허에 갇혀서

나는 폐허를 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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