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릇 없고, 안하무인이라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답답한 서희의 마음이 전해져 찌르르하다. 윤씨 부인이나 어머니, 아버지인 최치수, 혹은 봉순네만 살아 있어도 그늘이 되어주고 병풍이 되어줄 수 있었을 것을.
-마을의 살림이 전보다 점점 더 어려워 허덕이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 원인은 물론 조준구의 과도한 수고(收穀)강요에 있었고 희망을 잃은 마을 사람들의 무기력해진 심리상태에도 있었다. 마을사람의 기색을 살피며 제법 온정을 베풀고 너그러이 행세했던 왕시 그 무렵은 조준구의 기반이 다져지기 이전이요 농사꾼이란 우마(牛馬)와 다를 것이 별로 없고 일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음이 분명하다는 따위의 말을 서슴지 않는 요즈음은 그의 지반이 그만큼 탄탄해진 것을 의미한다. (323쪽)
-을사보호조약으로 나라의주권은 일본제국으로 넘어갔고 새로운 실권자를 추종하는 새로운 세력군이 형성되는 혼돈 속에 권력과 동반하게 마련인 경제의 유동, 그 중에서도 후일 대다수의 농민들이 피땀에 전 땅을 버리고 남부여대 기약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게 한 악명 높은 착취기관 동양척식회사 설립의 소지는 다져지고 있었다. (324쪽)
나라는 여전히 어수선하고 마을도 어수선하다. 조준구의 횡포로 살기가 어려워진 평사리 사람들은 '그러나 지금 양반 상민, 있는 놈 없는 놈, 백성하고 관가, 그런 쌈이 아닌 기라요. 다만 그자를 치자는 거는 딱 두 가지 까닭이 있실 뿐인데, 그 하나는 그자가 시적 왜나막신이라도 끌고 나올 만큼 왜놈들 편에 빌붙어서 자개 영화만 생각는 역적이니께 이 차에 목을 쳐서 뽄뵈기로 삼자는 거요, 다른 하나는 누구 재물이든간에 고방에 썩고 있는 거를 우리 의병이 써야겄다 그겁니다. (339쪽)
-어리석은 삼수. 그가 아무리 악독하다 한들 악의 생리를 몰랐다면 어리석었다 할밖에 없다. 악은 악을 기피하는 법이다. 악의 생리를 알기 때문이다. 언제나 남을 해칠 함정을 파놓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궁극에 가서 악은 삼수가 지닌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반드시 지니고 있다. 왜냐, 악이란 정신적 욕망에서든 물질적 욕망에서든 간에 그릇된 정열이어서 우둔할밖에 없고 찢어발길 수 있는 허위의 의상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349쪽)
이렇게 들고 일어나지만 마루장 밑에 숨어 있던 조준구를 삼수가 모른 척 구해주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간다. 한몫을 떼어받고자 했던 삼수는 목숨이 달아나고 일에 가담했던 무리들은 일단 몸을 피한 뒤 간도로 떠나기로 한다. 서희와 김훈장까지 합세한 무리는 두 패로 나뉘어 일단 부산에서 모이기로 했으나 봉순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진즉 마음을 표현해주지 못한 길상의 안타까운 마음만 .. 간도에 가서 어찌 사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