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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약 190쪽에 달하는 자그마하고 간단한 이 책은
어딘가 묘한 기운을 띠고 있는데 겉표지에 보이는 여인의 모습
때문인 듯 하다.
(연약한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억센 이미지인데
단추가 목까지 달린 매우 답답한 하얀 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
사진인 듯 보이기도 하고, 그림인 듯 보이기도 하는 이 여인은
어깨가 지나치게 넓어 머리를 길게 덧붙여 놓은 남자같이 보인다)
에스터는 사랑하는 남자 라요스를 언니에게 빼앗기고 난 후
홀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누누라는 먼 친척과 함께 하는 삶은 고즈넉하고 평온하기만 한데,
어느날 조카들과 일련의 이상한 사람들을 대동하고 라요스가 돌아와
'우리는 서로 용감하게 사랑하지 않았소.
그게 바로 문제였고, 그건 당신의 잘못이었소.
남자들이 사랑에서 보이는 용기는 하잘것없기 때문이오.
사랑, 그것은 당신네 여자들의 작품이오.
사랑할 때 당신들은 위대하오
그런데 당신은 실패했소. 그리고 당신이 실패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모든 것도 물거품이 되고 의무와 임무,
알맹이 없는 삶이 되고 말았소.
남자들이 사랑에 책임이 있다는 말은 맞지 않소.
당신들이 영웅적으로 사랑해야 하오.
그런데 당신은 여자로서 할 수 있는 최악의 행동을 했소.
당신은 자존심이 상해 도망쳤소. '
이렇게 말하고는 의무를 다 할 것을 종용한다.
결국, 에스터와 누누가 살아가는 터전이었던 집과 정원을
몽땅 주게 된다.
평생 거짓말과 허풍으로 일관한 이 남자, 라요스를 보고 있노라면
윤흥길의 작품 <백치의 달>에서의 ‘영무’를 떠올리게 된다.
사기꾼이면서도 지나치게 순수하게 보이는 인물,
그에게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
정말 닮은꼴이다.
작가가 남자라서 이런 말을 한 것일까?
사랑이 여자들의 책임이라니...
‘사랑할 때 당신들은 위대하오 ’여자들을 추켜세우는 척하더니
결국에 가서는 몽땅 책임을 전가하려는 비열한 수작이다.
따귀를 한 대 올려붙여주고 싶은 놈, 라요스
어느 한 쪽만 좋아하는 감정이 있다고 해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터에
감정적으로 우세한 여자들이 사랑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에이..마음에 안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작품은 매력이 있다.
그의 다른 작품 <열정>에서도 설정은 똑같다.
죽음을 앞둔 장군 콘라드에게 절친했던 친구,
그러나 자신의 아내와 함께 자기를 배반한 친구가 돌아오는 것이다.
하룻밤 동안의 기록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두 사람만의 대화만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적극 추천이다.
한 시간 정도만 투자한다면 서점에서 볼 수도 있을 테니..
굳이 두 권 중 한 권을 추천하라면,
<열정>을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