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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난 일본어를 배운 적이 없다.
일본어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일본어를 모른다고 해서 아쉬울 것도 없었다.
발음마저 온화한(?) 온다 리쿠를 만나기 전에는..
게다가 난 단편 혐오증도 걸려 있는데
1920년대의 화려한 단편 시대가 가고
점점 어설픈 신변잡기만 잔뜩 늘어놓은
90년대의 우리나라 단편에 질렸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같은 값이면 오래도록 읽을 수 있는 책을 선호하는지라
책이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내게는 대환영인 셈이다.
이 책은 여러 모로 내게 선택되어질 기회가 희박했는데
커다란 가죽 가방을 들고 책에서 걸어나오는 모자 쓴
남자의 모습이 인상적인 책 표지와
'익명의 작가가 사본 200부를 제작해 배포했으나
곧바로 절반 가량 회수했다는 수수께끼의 책,
라는 짧은 소갯말에 끌려서 보게 되었다.
4부 연작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각각의 이야기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면서도 읽어나갈수록 어떤 축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게 바로 책 속의 책인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다.
1부는 수수께끼의 책을 찾아헤매는 이야기
2부는 수수께끼의 책을 쓴 작가를 찾아 떠나는 여행
3부는 수수께끼의 죽음에 감추어진 진상 밝히기
4부는 이 책 <삼월은 붉은 구렁을> 쓰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와 어떻게 해야 4가지 이야기가 연결될까 고민하는
이야기로 이제부터 책이 씌어질 참인 것이다.
참으로 묘하다.
등장인물도 각각 다르고 배경도 다른데
산에 올라가면 길을 잃지 말라고 묶어둔 붉은 리본처럼
한결같이 '붉은 책'이 등장한다.
그 끈을 놓지 않고 무사히 4부까지 와야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이 책을 열면 서장에 해당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게 바로 로알드 달의 <찰리와 초컬릿 공장>의 한 부분으로
윌리 웡커씨가 운 좋은 다섯 명의 아이들에게 공장 견학을
시켜주겠다는 내용을 석간 기사로 표현한 것이다.
처음엔 이게 왜 여기 있을까? 생각했다
다 읽고나서 난 그 의미를 내 나름대로 해석했다.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 행운이 있기를!'
윌리 웡커 씨가 발표한 내용의 맨 마지막 문장이다.
그리고 중간 부분인
'초콜릿 다섯 개는 전세계 어느 나라, 어느 도시, 어느 거리,
어느 과자 가게든 웡커의 초콜릿을 팔고 있는 가게라면
어디에나 있을 수 있습니다.'
미스테리 형식을 띤 이 책답게 단서를 잘 찾아보라는 의미인
동시에 이 책을 보게 된 독자에게 던지는 즐거운 환영인사는
아닐런지..
잘된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이야기 같은 착각을 하는 것은 인간에게 몇 종류의 이야기가
입력되어 있는데 입력된 이야기와 일치하면 빙고(!)상태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작가의 이야기에 나도 공감한다.
이 책은 '잘 쓴 이야기'다.
온다 리쿠..그녀의 책을 몽땅 읽고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