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영혼
필립 클로델 지음, 이세진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제1차 세계대전 무렵.

프랑스 동부의 작은 마을은 전쟁도 비껴가고

이 마을 주민들은 군수물자를 납품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것으로

그 시대를 살아간다.

그런 조용한 마을에서 열 살짜리 여자 아이가 살해된다.

이름 그대로 아주 어여쁜 ‘벨 드 주르(햇님같이 예쁜이라는 뜻).

그 아이의 죽음을 파헤치는 나(경찰관)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


검사였던 ‘데스티나’, 마을의 선생님으로 머물렀던 ‘리지아 베르아렌’

‘나’의 아내인 ‘클레망스’와 가죽 아줌마로 불리우던 ‘조세핀’

판사인 ‘미에르크’와 그와 죽이 잘 맞았던 ‘마치예프 대령 ’

v시의 식당 주인이자 벨의 아버지인 ‘부라슈’ 등등


이 모든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덤덤하게 이어지는데

신기한 것은 마치 술에 잔뜩 취한 어떤 이에게서 듣는 것처럼

뒷부분을 먼저 이야기했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가

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죽었다고 툭 뱉었다가 살아있을 적에는......하는 식이다.

결말을 먼저 이야기하는 경우 대부분 맥이 빠져서

뒷부분을 읽고 싶지 않은 게 보통이지만,

이 소설은 그런 맥빠짐을 허용하지 않는다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지만 내 옷을 누군가가 잡아당기고

있음을 느낄 때와 같다.

긴장감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

그렇다고 누가 범인일까에 골몰하지는 않는다

이미 누구일지는 모두 알고 있는데

그 사실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오히려 이 많은 등장인물들의 삶에 얽혀 있는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묘한 책이다.


표지는 칙칙한 회색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황금두건을 쓴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 아이가 바로 벨이다. 순교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벨.

순수하고 맑았던 아이 벨을 죽인 것은

이미 사람들 마음속의 선함이 죽어버렸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남은 어떻게 되건 상관없이 자기 몫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지금 시대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잘못이 바로 내게로 돌아와

나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도 닮았다.



인생은 참 이상하다.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

왜 계속 살아가는지는 영영 알 수 없는 것 아닐까?

내가 ‘사건’을 들쑤셨던 것도 사실은 나 자신에게 진정한 질문을

던지지 않기 위해,

입에 올리거나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조차 마다할 그 질문을 던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우리의 영혼, 진정 그것은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회색일 뿐이다.

........나, 나는 여기 있다. 나는 살아온 게 아니다.

그냥 살아남은 거다.


화자인 ‘나’의 독백처럼 나도 이런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듣는 게

두려워서

혹은 대답을 못 얻게 될 경우의 무력감에 빠지고 싶지 않아서

무언가에 몰두하며 산다.

책 읽기에 골몰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사람들과의 만남을 지속하고

이런 시시껄렁한 류의 글도 끊임없이 써대면서 산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아 이런 질문이 나를 옥죄어올까봐

나도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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