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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들의 도서관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에서 길어올린 책들은 어제 오후 늦게서야 도착했다.
비가 오는 어제 느낌대로라면 시집 중에서 한 권을 골라야 정상이겠지만
수분이 가득한 날에는 우울함이 따라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가는 데 20분, 오는 데 20분. 가볍게 흔들리는 전철 안에서만 허락된 읽기 시간에
<악기들의 도서관>은 9:1 경쟁률을 뚫고 나를 즐겁게 해줄 사명을 떠안았다.
<자동피아노>, <매뉴얼 제너레이션>, <비닐광 시대>, <악기들의 도서관>,
<유리방패>, <나와 B>, <무방향 버스>, <엇박자 D>
단편 8개가 나란히 들어있는 소설집.
이 중에서 <유리 방패>와 <무방향 버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음악과 관련이 깊어
표지그림에서처럼 쉬지않고 음악이 흘러나오는 느낌을 준다.
다루는 악기라곤 고작해야 피리 정도? 그것도 한 소절에 한 번은 삑사리가 나는
형편 없는 실력을 갖고 있으니 장난으로라도 취미란에 악기연주라고 적는 건
손 부끄러워 하지 못하는 내게 여기 나오는 주인공들은 숭배의 대상이다.
'예술가란 자신의 몸을 통째로 예술에게 빌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동피아노>에서 주인공인 '나'에게 피아니스트 비토 제네베제가 해준 말이다.
이 말을 들으면서, 아니 보면서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음악이나 문학이나 미술이나 모든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비수같은 말.
예술에게 몸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예술을 빌려와 내 옷처럼 입었던
수많은 가짜들에게 던지는 말처럼 느껴져서 한동안 이 문장에서
단 한 줄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어쩌면 잘나가는 피아니스티인 주인공'나'도 그런 느낌을 받은 게 아닐까?
그래서 자신의 연주를 듣고 자동피아노같다는 평가를 들은 뒤
예전같은 연주를 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웃기는 게 뭔지 알아? 나는 음악선생에게 맞기 전까지단 한 번도 내가 음치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대부분의 음치들은 자신이 음치라고 생각하더라.
자신이 알아낸 게 아니고 들어서 아는 거지. 평생 그렇게 세뇌를 당하는 거야.
나는 음치다, 나는 음치다.'
<엇박자 D>에서 20년 만에 만난 엇박자 D가 공연기획자가 된 나에게 털어놓는
사연이다. 음치였기 때문에 합창을 망쳐놓은 엇박자 D가 음치들만의 소리로
아름다운 공연을 마치고 났을 때도 또 한 방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
한동안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에서처럼
누군가가 '넌 재능이 있으니까 계속 글을 써도 되겠다.'라든가
'이제 그만 해라. 아무리 해도 그게 다야.'라고 정확한 진단을 내려준다면
정말 개운할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천재성을 타고 난 것도 아니면서
노력은 하지 않으려고 했던 안일했던 순간들.그런 기대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너, 혹시 음치라고 단정을 짓는 거니? 그래서 노래는 안 하려구?
이런 노래도 부를 수 있다는 걸 몰랐어? 틀에서 안주하려니까 앞이 안 보이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물론 작가가 하려는 말이 이런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원래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게 사람이니까.
카메라를 만지다보면 가끔씩 뷰파인더를 통해 보는 사물들이 낯설어보일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가둬 둔 틀안에서만 보이던 사물들이 신선하게 다가와 기분 좋은 충격을 주는데
김중혁의 소설들이 그렇게 다가왔다.
분명히 일상을 다루고 있는데 지루하다든가, 평범하다든가, 따분하다든가,
어디서 본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하나도 없는 이상야릇함. 그러면서도 신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