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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집 - 상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0월
평점 :
어릴 때 학교에서 집까지 걷는 길은 꽤 멀었다. 버스 정류장 3개 정도는 지나쳐야 할 만큼 먼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흙길이라 비라도 오면 운동화는 금세 붉은 흙물이 들고 젖은 흙이 운동화를 질기게 붙잡는 힘에 지쳐 힘이 다 빠지곤 했다.
완만하게 휘어진 길 옆으로는 몇 기의 무덤이 보이는 얕으막한 산이 있어 밤이 되면 머리털이 바짝 곤두설 지경이었지만 새 소리와 봄, 여름, 가을을 관통하는 꽃 향기에 흠뻑 취할 수 있었고 풀과 나무들이 많아 공기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상쾌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그 하얀 길을 친구들과 삘기를 뽑거나 애기똥풀을 잘라 누런 물이 나오는 걸 손톱에 발라보기도 하면서 걷는 일은 유쾌했다.
그러다가 중간 쯤 이르면 마을이 다른 아이들이 하나둘씩 손을 흔들며 다른 길로 들어서고 우리 동네 아이들과 윗동네 아이들 몇 명만 남아 반쯤 남은 길을 조용히 걸어가곤 했다. 딱 그 중간에 외롭게 산 밑에 하나 있던 외딴집. 빨간 기와를 얹은 그 집을 우리는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그저 '외딴집'이라고 불렀다. 엄연히 거기 사는 친구가 있으니 누구네 집이라고 불러도 되련만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모두들 외딴집이라고만 불렀는데 누가 사는 것 같지 않게 늘 조용하던 그 집에서 뿜어져나오는 괴기스러움을 지금도 기억한다.
얼마 전에 우연히 구름처럼 떠 있는 덧없는 세상살이를 그린 풍속화란 뜻을 가진, 에도 시절 널리 유행한 채색 목판화를 가리키는 말이 '우키요에'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책이 배달된 순간 이런 유키요에 대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안도 히로시게의 <소나기>가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으니 반갑다기보다 뭔가 묘한 인연으로 얽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림과 겹치면서 어린 시절 '외딴집'이 떠올랐다.
미야베 미유키는 《화차》로 알게 된 작가인데 그때도 참 치밀하고 깔끔한 문장에 감탄을 했지만 이 책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추리소설의 형식을 띠고는 있지만 실제로 뻔히 드러나는 형식이고 보면 '감출 것 없이 다 보여주겠지만 네가 이걸 알아내겠느냐? '하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를 듣는 것 같다.
1603년에서 1867년 사이에 지금의 도쿄인 에도를 중심으로 펼쳐진 일본의 막부 시대였던 에도 시절, 어미가 죽고 아비에게도 버림받다시피한 열살짜리 '호(바보의 '호')는 집의 재앙을 씻어내기 위한 참배객으로 마루미 번에 왔다가 그대로 주저앉게 되어 의원인 이노우에 가에 맡겨진다.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라고 생각하는 호지만 고타에 님이 정성껏 가르쳐주시는 것들을 배우면서 이제서야 사람다운 삶을 살고 있었지만 고타에는 어느 날 가지와라 가의 미네에게 독살당하면서 또 비틀어지고 만다.
쇼군이 유배보낸 가가님을 마른폭포저택에 모시기 위한 울타리를 세우면서 부상자가 생기고 고타에가 죽고, 마른폭포 저택을 다녀오는 담력시합을 하다가 드러누운 아이들이 생기자 마루미 번 사람들은 모두 가가님이 귀신이고 악령이라 그런 일들이 생긴다고 굳게 믿는다. 자기 자식을 죽이고 부인까지 죽인 사람, 후나이 가가노 가미모리토시. 막부의 재정부교까지 지낸 인물이지만 나쁜 일을 몰고 다닌다는 흉흉한 인물. 마을에서는 마른폭포저택에 가까이 가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고토에가 독살당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마을의 안녕을 위해서 그 일을 입밖에 내면 안 되는 호는 히키테 일을 하는 우사에게 맡겨지지만 또다시 우여곡절끝에 마른폭포저택에서 하녀로 일하게 된다. 착하고 정직한 호는 우연히 가가님을 보게 되고 그에게서 글자와 산술을 배우면서 또다른 이름 '호(이번에는 방향을 가리키는 方)를 받는다. 그리고 가가님의 죽음과 함께 다시 '호(이번에는 보물을 뜻하는 寶)라는 이름을 받는다. 그야말로 순수하고 깨끗한 보물이라는 뜻이다. 아무도 진실되게 대해주지 않았던 가가님에게 순수하게 다가갔던 호를 기억하는 이름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듯 보이지만 이권을 둘러싼 마루미 번 내 아사기 가와 하타케야마 가의 보이지 않는 싸움과 또 가문 안에서도 서로 우위를 차지하려는 자들의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마루미 번 안에서도 염색하는 집들과 어부들, 마을관리들의 반목이 위태롭다가 결국 가가님이 뿌려놓았다고 믿는 음험한 기운과 불신들이 한 데 뭉쳐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마루미 번은 평화롭다. 마치 홍수가 물러난 뒤 노아의 방주에서 선택된 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처럼.
일이 일어날 때마다 번번히 등장하는 번개와 천둥, 그리고 비. 유난히 번개가 잦은 고장 마루미 번에서는 이상할 일도 아니지만 그 번개 속에 숨어 마루미의 하늘과 땅을 차지하려 내려온 괴물인 뇌수를 가가님이 물리치고 신령이 되었다고 믿게 되는 모습은 어리석은 백성들이 얼마나 쉽게 조정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뇌수는 다름 아니라 일을 그렇게 되도록 조정하는 사람들이었음을 아무도 모른다. 아니,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이 되었다.
음모와 술수가 횡행한 시대, 사실 그게 지금이라고 크게 다를 것도 없지만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모든 일을 좌지우지하는 그 시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떠올리기도, 외우기 힘든 관직 이름 때문에 초반에는 몰입이 힘들었지만 탄탄한 문장과 잘 된 번역은 800쪽이 넘는 방대한 작품을 끝까지 궁금해하며 읽게 만들었다.
미야베 미유키. 외워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