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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은교.
참, 야리꾸리한 이름이다. 소설 제목으로 딱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이건 아니잖아..싶기도 한.
나이가 들면서 말랑말랑해지는 것 같은 작가의 새로운 책을 읽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그를 또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촐라체》에서의 뜨거운 마음이 아직도 느껴진 까닭이었다.
평생 올곧게 시를 쓰기만 하다가 고요히 떠나간 이적요 시인은 죽으면서 노트 한 권을 남겼다. 일년 후에 개봉이라는 단서를 달고 변호사 앞으로 남겨진 그 노트에는 이적요 시인의 숨겨진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내 마음속 영원한 젊은 신부, 은교'와 무기재료학과에 다니다가 우연히 이적요 시인의 강의를 청강하면서 시를 쓰는 쪽으로 선회하고 평생 이적요 시인 곁에서 수발을 들었던 서지우를 중심으로 넘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돌아가는 팽이는 팽이채를 잡은 인물과 구경하는 인물이 어지럽게 섞인다. 이적요가 남긴 '시인의 노트'와 은교에게 남긴 '서지우의 일기', 변호사 Q의 기록으로 나뉘는데 참으로 맛나게 쓰였다. 수십 년간 글을 써온 노련한 작가의 필체를 보는 일은 즐겁다.
시인의 노트답게 중간중간 등장하는 시는 이적요의 감정에 따라 때로는 쓰고, 때로는 달콤하며, 때로는 소름끼친다.
땅거미 짙어가는 어둠을 골라 짚고
끝없는 벌판길을 걸어가며
누이여, 나는 수수 모가지에 매달린
작은 씨앗의 촛불 같은 것을 생각하였다.
가고 가는 우리들 생의 벌판길에는
문드러진 살점이 하나,
피가 하나,
이제 벌판을 흔들고 지나가는
무풍의 바람이 되려고 한다
마지막 네 뒷모습을 지키는
작은 촛불의 그림자가 되려고 한다
저무는 12월의 저녁달
자지러진 꿈,
꿈 밖의 누이여
- 박정만 「누이여 12월이 저문다」에서
이적요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이 마지막 인용시는 가슴 아프다. 시인 이적요와 시인이 되고자 했지만 결코 글을 쓸 수 없었던 서지우, 풋풋한 고등학생 은교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숨막히는 감정 싸움은 결코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온몸으로 살기를 내뿜는다. 그렇지만 서지우와 이적요는 거울의 양면이다. 시인답게 멋지게 늙은 거장 이적요가 밝은 면이라면 그가 경멸한 서지우는 잘 감춰두고 있어 보이진 않지만 밖으로 나오고 싶어 안달하는 거울 뒷면의 추한 이적요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일 줄 모르고 거부했던 둘은 결국 한 쪽이 없어지자 견디지 못하고 붕괴된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선생님'의 뜻이 무언인지를 확인한 순간에 거역하지 못하고 울면서 가버린 서지우는 결국 이적요가 자신의 추한 면을 마음 놓고 드러낸 제물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