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연모의 정은 더욱 애틋한 법이다. 겨우 1년에 한번 만나는 견우와 직녀는 오죽했을까. 그러기에 유치환은 통영 앞바다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매일 연애편지를 썼다. 핸드폰이며 인터넷이 일상이 된 이제 우체국 한구석 편지 쓰던 자리는 치워진 지 오래다. 여기 어딘데 한 오분 뒤쯤 도착할 거야. 버스 타고 가며 수시로 통화를 하니 커피 한 잔의 초조한 기다림도 이제는 사라졌다. 멋진 연애시며 소설이 나오기는 어렵겠다.
이 재미없는 기계들이 요즈음 직접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인터넷 공간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전문가 못지않게 광우병을 잘 알게 되었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러니 대통령도 장관도 교수도 함부로 큰소리 칠 수가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요즈음 집회 현장에서는 딱딱하기 그지없는 헌법 조문까지 즐거운 노래로 바꾸어 부른다. 문자 그대로 생활정치다. 당위 따로 현실 따로가 아니라 당위를 ‘지금 여기’ 현실에 끌어오는 순발력. 기껏해야 ‘일송정 푸른 솔이 …’를 비장하게 부르던 70년대에 비하면 요즈음 젊은이들의 상상력이 부럽다.
사실 구체적 현실을 보면 민주주의라는 게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란 생각이 든다. 인민주권을 내세웠던 루소가 이미 이 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영국인들은 투표할 때만 자유롭고 투표용지가 함에 떨어지는 순간부터 노예다.” 다스리는 이와 다스림을 받는 이가 동일하다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이지만 현실에서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투표가 끝나는 순간 대통령이며 국회의원들은 제 갈 길을 간다. 국민들은 다음 선거를 통해서나 그들을 평가할 뿐 4년, 5년의 긴긴 세월을 일방적으로 통치받는다.
민주공화국의 모델이 된 프랑스 1791년 헌법이 이미 그 길을 예정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 계급은 도시·농촌의 민중계급을 제치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루소의 인민주권론 대신 국민주권론을 내세웠다. 그리고 헌법에다 ‘모든 국가권력의 유일한 원천인 국민은 대표자에 의해서만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대표기관은 입법기관과 군주다’라고 못박았다. 파리 시민 봉기로 만들어진 1793년 헌법에서는 주권은 인민에게 있으며 인민이 의원들에게 구체적 명령을 하고 저항권과 반란권까지 가진다. 그러나 이 헌법은 시행도 못 해 보고 폐기되었다.
우리 헌법도 1791년 프랑스 헌법처럼 국민은 그저 대표자인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출할 수 있을 뿐이다. 이들은 임기 동안 국민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모든 권력을 대통령이 독점하는 현 체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삼사십 프로 지지를 받았어도 나라 전체를 자신의 뜻대로 끌고 간다. 법으로 임기가 보장된 자리마저도 온갖 방법으로 제 사람을 심는 현실에서 국민들의 다양한 생각과 이익을 골고루 정치에 구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루소의 인민주권이 제대로 실현되려면 승자 독식이 아니라 권력이 분점되고 인민이 직접 권력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 중심제를 비롯한 통치구조 전반에 대해 실질적으로 논의할 때가 되었다. 기원전 500년에 이미 그리스 시민들은 그 대표를 적극적으로 통제했다. 참주·독재자의 싹이 보이는 정치가 이름을 조개껍질에 적어 6천표가 넘으면 10간 국외 추방. 우리도 임기 중간쯤에 조개껍질 대신 인터넷에 인민의 뜻에 반하는 대통령, 국회의원들 이름을 적어 중간평가를 하면 어떨까.
김형태 변호사 -----2008년 6월 4일자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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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합니다! 라고 하고 싶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제발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잘해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