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 책제목 : 나를 보내지 마

◎ 지은이 : 가즈오 이시구로

◎ 옮긴이 : 김남주

◎ 펴낸곳 : 민음사

◎ 2019년 11월 26일, 1판 27쇄, 399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보통의 인간이 복제인간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가 생각나는 작품이다. 필립 K. 딕의 세계관을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이란! 그러니 비슷한 주제를 다룬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주는 건 어렵다. 게다가 두 번째 읽는 작품이 늘 좋거나 신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가즈오 이시구로가 끌고가는 이야기의 방향이 아름다워서 이 정도 별점이 가능했다. 그것은 아마도 영어로 작품을 쓰지만 일본인으로 태어나 깊이 배어든 동양적 정서 탓이 아닐까 싶다.

캐시가 11년 간의 간병일을 마치고 이제 기증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화자로 등장한 이 책은 과거 회상과 현재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뒤로 갈수록 서서히 그들이 다른 인간에게 장기를 기증할 목적으로 사육되는 복제인간임을 드러낸다. 캐시의 회상 속에 등장하는 루스와 토미는 같은 헤일셤 출신으로 루스는 가해자이자 명령권자, 토미와 캐시는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둘은 서로 좋아하면서도 루스에게 휘둘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야만 했다. 그들이 어릴 때 그토록 열심히 시와 그림에 열중해야만 했던 이유와, 엄격하게 선별된 그 작품들이 마담의 화랑에 걸리는 이유를 찾아가는 게 핵심이다.

이들이 추억에 매달리는 것은 혼자가 아님을 스스로에게 각인시켜주는 행위다. 간병사로, 기증자로 힘든 삶을 살아가면서 유일하게 떠올릴 수 있는 행복했던(상대적으로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공유함으로써 정상적인 인간과 다를 게 없음을 보여주는 장치라고나 할까. '당시 우리가 그 모든 일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 이제 확실히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아주 깊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교사들 그리고 바깥세상의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그때 이미 종국에 가서는 기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까지는 정말이지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화제를 애써 피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103쪽)'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내려면,

너희 자신이 누구인지 각자 앞에 어떤 삶이 놓여 있는지 알아야 한다. (119쪽)

-무엇보다도 우리는 인간적이고 교양있는 환경에서 사육된다면 ’학생‘들 역시 일반인들처럼 지각 있고 지성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세상에 증명했어. 헤일셤 이전에 클론들은, 우리는 너희를 ’학생‘이라고 부르는 게 더 좋지만, 그저 의학 재료를 공급하기 위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단다. (358쪽)

-현재의 너희에게서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어떤 걸 우리가 줄 수 있었던 건 원칙적으로 너희를 ’보호‘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러지 않았다면 헤일셤은 존재 가치가 없었을 거다. 좋아, 그러기 위해서는 때때로 너희에게 사태를 숨기고 거짓말을 해야 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린 너희를 ’바보‘로 만들었지.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겠구나. 하지만 우리는 그 세월 동안 너희를 보호했고 너희에게 유년을 주었어. (중략) 우리가 너희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지 못했을 거다. 너희는 수업에 몰두하지 못했을 거고, 그림과 글쓰기에도 몰입할 수 없었겠지. 각자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았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니? (367쪽)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정해진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고, 처음에는 다른 이들을 간병을 하다가도 결국 기증자로서 삶을 마치게 결정되어 있다면 얼마나 절망적일까. 그런 사실들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면 기꺼이 그 삶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들은 어렴풋하게 그런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들이 커서 하고 싶은 일을 고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산다. '그 시기의 우리에게 헤일셤 너머의 장소는 어디가 되었든 간에 환상 속의 세계와 흡사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외부 세상에 대해, 그곳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지에 대해 당시 우리는 극히 막연한 개념만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99쪽)'

캐시 H, 샤로트. F, 신시아 E 로 불리며 정체성을 부여받지 못한 그들이 근원자를 찾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마음일 것이다. 자신의 근원자가 어디선가 근사한 삶을 살고 있을 거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두 정도는 다르지만 자기가 복제되어 나온 근원자를 보게 되면 진짜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과 앞으로의 삶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197쪽)'

배경음악처럼 등장하는 Judy Bridgewater의 'Never Let Me Go'라는 곡에서 따온 제목은 캐시가 갖고 있던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다. '그러면서 나는 평생에 걸쳐 간절하게 아기를 바랐으나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선고를 받은 어떤 여자를 떠올렸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그 여자는 아기를 낳았다. 그 아기를 품에 안고 어르면서 “베이비, 네버 렛 미 고 …….”하고 노래하는 것이다. 그녀는 한편으로 몹시 행복한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아기가 병에 걸리거나 누군가 아기를 빼앗아 가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에 질려 있다.(중략) 내게 있어서 그 노래는 바로 그런 의미였다. (105쪽)'

이런 캐시의 모습에 대해 마담은 '나는 어린 소녀가 두 눈을 꼭 감은 채 과거의 세계,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걸 자기도 잘 알고 있는 과거의 세계를 가슴에 안고 있는 걸 보았어. 그걸 가슴에 안고 그 애는 결코 자기를 보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지. 나는 그 장면을 바로 그렇게 본 거란다. 그건 실제 네 생각이나 행동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372쪽)' 라고 말한다.

제목이 풍기는 향기는 마담의 말과 일치한다. 어떻게 보면 또 자신의 현재 삶을 살 수 있게 기증자로 보내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물론 캐시는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지만 ) 실제로 노래를 들어봤을 때는 담백할 것 같았는데 끈적해서 어리둥절했지만 뭐, 음악도 듣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거니까. 담담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받아들이는 루스나 토미, 캐시, 그리고 그밖의 많은 '학생'들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장기이식과 안락사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오래도록 살기 위해 장기 이식을 선택하지는 않겠지만, 만일 자식들에게 나쁜 병이 있어서 복제인간의 장기를 가져와야 할 경우가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됐고, 우리는 모두 그렇다면 눈 감고 그쪽을 선택하지 않겠는가 라는 답변들을 내놨다. 내 자식에 관한 것이라면 논리적, 윤리적 판단따위는 어디론가 급하게 사라져버린다. 이러니 우리는 평생 인간으로 살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너희 작품을 걷어 온 건 거기에 너희의 영혼이 드러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좀 더 세련되게 말하자면 그걸로 너희한테도 영혼이라는 게 있음이 증명되기 때문이란 말이다. 그녀가 말을 멈추자, 토미와 나는 한참 만에 처음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윽고 내가 물었다. “어째서 그런 걸 증명하셔야 했던 거죠, 에밀리 선생님? 우리한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있었나요?”(357쪽)

작품을 통틀어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면 3년의 유예기간을 얻어 둘이서 행복하게 보낼 시간을 얻는다는 낭설을 굳게 믿은 것만큼이나 아픈 장면이다. 자신에게 영혼이 있다는 걸 추호도 의심해보지 않은 이들에게 세상이 던진 시선이 너무 차가운 게 단번에 느껴진다. 복제인간의 영혼 유무를 따지는 너희들은 영혼이 존재한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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