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지음 / 레제 / 2023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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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너무나 많은 여름이

◎ 지은이 : 김연수

◎ 펴낸곳 : 레제

◎ 2023년 7월 3일, 1판 2쇄, 301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그날의 낭독회 이후, 소설에 대한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산문보다는 소설을 더 많이 쓰게 됐다.

강연회보다는 막지은 짧은 소설을 읽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낭독회를 더 자주 하게 됐다.

그런 낭독회에서 사람들에게 읽어주기 위해 쓴 소설들이 모여

이렇게 한 권의 책이 됐다.

작가의 말 중에서. 297쪽

그런 연유일까? 모든 이야기가 작가의 삶 속으로 스며들거나 거기서 배어나온 느낌이 들었다. 다 겪었던 일일 것만 같다. (심지어 화자가 여자일 때도!) 이런 게 능력이고 연륜이겠지. 읽어가면서 음악을 듣는 기분이 들었는데 작가의 말을 읽고나서야 낭독을 위한 글들이어서 그랬구나 싶은 찰나 뒷편에 '너무나 많은 여름이_플레이 리스트'라는 게 보인다. (여기에 이르면 딱 생각나는 인물이 하나 있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좋아하는 <먼 북소리>와 더불어서 말이다. 그 책은 음악과 와인이 빠지면 섭하거든. )




바로 옆 쪽에는 2021년 10월 제주 '어나더페이지'부터 2023년 6월 창원 '주 책방'까지 낭독회가 열린 서점, 도서관이 나열되어 있다. 아, 인천 연수도서관에서도 했구나. 가볼 걸 그랬네. 아쉬워라. 이래서 인생은 늘 타이밍이 중요하다니까. 4월 11일의 나는 무얼 하느라 이것도 놓쳤을까?

그 아래엔 큐알코드를 따라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장치까지 되어 있다. 고마운 일이다. 안 그래도 대부분 생소한 이 음악들은 어떤 느낌일까 했는데...(지금 그 음악들을 연속으로 틀어놓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렇게 하니 또 내가 낭독회의 작고 불편한 의자에 몸을 부려놓고 그의 글을 듣는 것만 같다.)

여기 실린 20편은 아주 짧거나 비교적 덜 짧은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손바닥동화' 같기도 한데 장편을 선호하는 내가 이렇게나 열심히 이 단편들을 읽은 이유를 딱 하나만 대라면 말없이 이 문장들을 들이밀 테다. 이것은 또한 작가 김연수를 좋아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신도 이제는 교대해줄 수 없는 존재들 <두번째 밤> 9쪽

-모든 것이 산산조각날 때 세상에는 지혜가 가장 흔해진다. <두번째 밤> 14쪽

-그렇게 서너 번 달이 차올랐다가 다시 이지러지는 동안 그는 감각적으로 다소 묵음의 상태였기 때문에 세상으로 향한 문에서 몇 발짝 뒤로 물러서 있었다. <그사이에> 69쪽

-과거는 밀봉된 채 선반 위에 올려놓은 통조림과 같아. 그래서 우리는 라벨만 보며 얘기하는 거지.

하지만 거기 통조림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그사이에> 79쪽

-어색하기만 했던 행복이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토키도키 유키> 204쪽

스무 편의 글들이 깔끔하게 모이지는 않았지만 몇 개의 그룹으로 묶어보자면,

떠나기, 돌아오기

다들 끊임없이 어디론가 간다. 인생을 길에 비유하는 건 아주 오래된 장치지만 그것만큼 또 인생을 잘 나타낸 것도 없을 테니까. 엄마의 죽음 뒤, 태어나기 전 엄마 뱃속에서 보았을 툴루즈로 간 뒤에야 이별한 '너'를놓아줄 수 있게 되는 <그 사이에>, 이상에 대한 소설을 쓰는 내게 유고집을 건네준 김충식에 의해 이상이 죽은 뒤 화장된 곳이라는 우구이스다니를 보러가는 <우리들의 섀도잉>, 사진작가 이진혁에 의해 알게 된 경주 팔복서점. 아들을 사고로 잃고 그곳에서 살기로 결심했다는 주인 할머니 서지희의 사연까지 끌어온 <저녁이면 마냥 걸었다>, 신혼여행지로 고른 겨울의 홋카이도, 불안정한 행복을 느끼던 그들이 그곳에서 들었던 '때때로 눈'이라는 '토키도키 유키'라는 말을 아이에게서 들으며 비로소 안정이 되는 <토키도키 유키>

기억과 추억소환

영화배우였던 엄마의 추억이 담긴 사진 한 장을 찾아가는 <첫 여름>, 죽은 반려견 궁금이와의 추억이 깃든 나무가 재개발로 사라진다는 얘길 듣고 다시 떠올린 기억들. '이 나무의 이름은 궁금이와 함께 웃는 나무입니다.' <나혼자만 웃는 사람일 수는 없어서>, 오래된 카세트테이프가 불러온 기억과 그 기억 속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주인공, 그러나 그녀는 나오지 못하고 그녀와의 추억만을 떠올린다. 그녀는 죽은 걸까? <풍화에 대하여>, 추워지기 시작한 무렵, 호텔 프런트에 근무하는 내 앞에 나타나 신혼여행 때 묵었던 전평호텔을 찾는 노인. 직원휴게소에서 자게 한 덕분에 인생을 통틀어 가장 따뜻한 밤을 보내게 한 <보일러>

사랑, 그리고 계속 살아가기

죽음을 기다리는 폭격이 뒤덮은 도시에서 모든 것이 반복되고 있다는 알려주며 그러므로 세상은 다시 만들어질 거라고 희망을 주는 <두번째 밤>, 아내와 사별후 다시 깨어난 코메디언 신기철이 작가가 되기까지 일을 인터뷰 형식으로 쓴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 조기축구회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다가 동맥이 파열된 기태. 세겹의 막 중 하나가 터져버려 극도로 조심해야 하는 그가 오래전 연인이었던 화영과 재회한 곳에서 '아직도 사랑한다'는 거짓말을 했으나 그녀 역시 마찬가지라는 말을 들음으로써 생명이 연장된다는 <위험한 재회>, 마치 무릉도원에 갔다가 돌아와보니 오랜 세월이 흘렀더라처럼 사랑에 빠져 순간을 영원처럼 살다가 남들에게는 스무 살, 스스로 인지하기엔 여든 살에 죽은 남자 이야기 <강에 뛰어든 물고기처럼>, 엄마의 임종과 나의 과거, 그리고 미래까지 한꺼번에 뭉뚱그려지는 <너무나 많은 여름이>

'인간답게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는 철학자들도 아직 명확한 답을 구하지 못한 질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 질문에 끊임없이 답을 구하며 산다. 그러다가 생을 마감하게 될 지라도 답을 구하는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 그 과정이 바로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결국 모든 이야기는 이 해답으로 가는, 무수히 많은 길이다. 그래서 작가가 제시한 일들을 해볼 만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 등장하는 미야노와 이소노의 편지 얘길 안 할 수가 없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편지는 "좋은 여름이 될 거야." "최고의 여름이 될 거야." 이들이 말하는 좋은 여름, 최고의 여름은 미야노가 죽고 난 뒤 여름이다. 삶이 끝난 뒤 남겨질 무수히 많은 여름을 행복하게 떠올리는 이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가 죽은 뒤에도 아름다운 세상이길 바라는 마음이며, 죽음이 두려워 남아있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보인다.

-지금 이순간, 기다릴 만한 것을 기다리기. 아무리 작고 사소하더라도 변화에 민감하기. 비가 그친 뒤 바람의 미세한 변화나 '오늘은 산책을 나가도 되지 않을까?' 같은 생각들을 흘려보내지 말고 알아차리기. 좋아하는 것들 앞에서는 온몸으로 기뻐하기. <나 혼자만 웃는 사람일 수는 없어서> 18쪽

-이 삶은, 오직 꿈의 눈으로 바라볼 때, 다른 불순물 없이 오롯하게 우리의 삶이 된다.

<젊은 연인들을 위한 놀이공원 가이드> 45쪽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플롯이 바뀝니다.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 113쪽

-누구도 스스로 존재할 수는 없다. 누군가를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풍화에 대하여> 143쪽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눈덩이를 굴리는 일과 비슷했다. 사랑할수록 더 사랑하게 된다.

<관계성의 물> 166쪽

-밖에서도 검게 칠하고 안에서도 검게 칠하면, 인간은 그 즉시 하찮아집니다.

<다시 바람이 불어오기를> 194쪽

-죽은 뒤에야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잘 살고 싶다면 이미 살아본 인생인 양 살아가면 된다. <나와 같은 빛을 보니?> 214쪽

-우연을 '나'의 인생으로 녹여낼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우연에서 새로운 시작을 발견한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 262쪽

또 하나는 서점 이야기다. 경주 대릉원옆 포석로에 있다고 해서, 정말 있을 것만 같아서 찾아본 곳, 팔복서점이다. 아니, 있기를 바랐다고 하자. 그래서 내가 찾아갈 수 있도록 그곳에 있기를 바랐다. 서점 주인을 만나 따뜻한 차 한 잔도 건네고 말없이 천마총을 바라보며 앉아있을 수도 있게. 그리고 '이 책방의 운영 방침은 두 가지야. 첫째,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름이 적히지 않은 소설에 이름을 적을 기회를 준다. 단, 이것은 오로지 선물이므로 팔지는 않는다. 둘째, 선물은 소유할 수 없으니 여기 꽂아두고 간다. <고작 한 뼘의 삶> 187쪽' 여기 등장하는 서점은 꿈속에서 작가들이 만나는 서점이다. 그곳에서 내 이름을 적으면 그게 바로 내 소설이 되는 것이다. 부럽기도 하지. 이런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건져오는 겁니까?

나는 아우구스티누가 우리에게 남긴 지침을 한 번 더 읽었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

<너무나 많은 여름이>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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