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편의 글들이 깔끔하게 모이지는 않았지만 몇 개의 그룹으로 묶어보자면,
떠나기, 돌아오기
다들 끊임없이 어디론가 간다. 인생을 길에 비유하는 건 아주 오래된 장치지만 그것만큼 또 인생을 잘 나타낸 것도 없을 테니까. 엄마의 죽음 뒤, 태어나기 전 엄마 뱃속에서 보았을 툴루즈로 간 뒤에야 이별한 '너'를놓아줄 수 있게 되는 <그 사이에>, 이상에 대한 소설을 쓰는 내게 유고집을 건네준 김충식에 의해 이상이 죽은 뒤 화장된 곳이라는 우구이스다니를 보러가는 <우리들의 섀도잉>, 사진작가 이진혁에 의해 알게 된 경주 팔복서점. 아들을 사고로 잃고 그곳에서 살기로 결심했다는 주인 할머니 서지희의 사연까지 끌어온 <저녁이면 마냥 걸었다>, 신혼여행지로 고른 겨울의 홋카이도, 불안정한 행복을 느끼던 그들이 그곳에서 들었던 '때때로 눈'이라는 '토키도키 유키'라는 말을 아이에게서 들으며 비로소 안정이 되는 <토키도키 유키>
기억과 추억소환
영화배우였던 엄마의 추억이 담긴 사진 한 장을 찾아가는 <첫 여름>, 죽은 반려견 궁금이와의 추억이 깃든 나무가 재개발로 사라진다는 얘길 듣고 다시 떠올린 기억들. '이 나무의 이름은 궁금이와 함께 웃는 나무입니다.' <나혼자만 웃는 사람일 수는 없어서>, 오래된 카세트테이프가 불러온 기억과 그 기억 속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주인공, 그러나 그녀는 나오지 못하고 그녀와의 추억만을 떠올린다. 그녀는 죽은 걸까? <풍화에 대하여>, 추워지기 시작한 무렵, 호텔 프런트에 근무하는 내 앞에 나타나 신혼여행 때 묵었던 전평호텔을 찾는 노인. 직원휴게소에서 자게 한 덕분에 인생을 통틀어 가장 따뜻한 밤을 보내게 한 <보일러>
사랑, 그리고 계속 살아가기
죽음을 기다리는 폭격이 뒤덮은 도시에서 모든 것이 반복되고 있다는 알려주며 그러므로 세상은 다시 만들어질 거라고 희망을 주는 <두번째 밤>, 아내와 사별후 다시 깨어난 코메디언 신기철이 작가가 되기까지 일을 인터뷰 형식으로 쓴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 조기축구회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다가 동맥이 파열된 기태. 세겹의 막 중 하나가 터져버려 극도로 조심해야 하는 그가 오래전 연인이었던 화영과 재회한 곳에서 '아직도 사랑한다'는 거짓말을 했으나 그녀 역시 마찬가지라는 말을 들음으로써 생명이 연장된다는 <위험한 재회>, 마치 무릉도원에 갔다가 돌아와보니 오랜 세월이 흘렀더라처럼 사랑에 빠져 순간을 영원처럼 살다가 남들에게는 스무 살, 스스로 인지하기엔 여든 살에 죽은 남자 이야기 <강에 뛰어든 물고기처럼>, 엄마의 임종과 나의 과거, 그리고 미래까지 한꺼번에 뭉뚱그려지는 <너무나 많은 여름이>
'인간답게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는 철학자들도 아직 명확한 답을 구하지 못한 질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 질문에 끊임없이 답을 구하며 산다. 그러다가 생을 마감하게 될 지라도 답을 구하는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 그 과정이 바로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결국 모든 이야기는 이 해답으로 가는, 무수히 많은 길이다. 그래서 작가가 제시한 일들을 해볼 만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 등장하는 미야노와 이소노의 편지 얘길 안 할 수가 없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편지는 "좋은 여름이 될 거야." "최고의 여름이 될 거야." 이들이 말하는 좋은 여름, 최고의 여름은 미야노가 죽고 난 뒤 여름이다. 삶이 끝난 뒤 남겨질 무수히 많은 여름을 행복하게 떠올리는 이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가 죽은 뒤에도 아름다운 세상이길 바라는 마음이며, 죽음이 두려워 남아있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