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삶의 터전은 무엇인가. 네 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방이다. 방과 방을 연결하는 마루와 마당과 그 마당에 조금씩 피어있는 빛 좋은 작은 꽃이며 그 모든 것을 어루안고 있는 담이다. 그리고 그 담을 잇대고 있는 이웃의 담이며 이웃의 꽃이며 마루며 이웃의 방이다. 담과 담 사이에 갓 지은 밥냄새가 삶의 터전, 그것이다. (16쪽)
-폐허 도시의 죽음의 시간은 지금과 가장 가까운 시간이다. 그러나 놀라워라, 인간의 시간과는 달리 폐허 도시의 시간은 죽음의 시간인 지층을 파내면 순간순간마다 유년과 청년과 장년과 노년이 한 지층 안에 어우러져 숨쉬고 있다. 각각의 지층이 머금고 있는 시간의 스펙트럼. 발굴은 도시의 죽음을 파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21쪽)
-기록자가 절대 화자인 고대인들의 글쓰기는 강력한 위계질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한 기록자가 사실 전부를 지배하고 있는 이 태도에는 글쓰기, 라는 것이 주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고대적인 인식에서 비롯되며 그 주술의 힘을 타인하고 나누지 않으려는 '혼자서 말하는 자'를 수없이 태어나게 했다. (33쪽)
-사물에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을 반복해 외우는 길을 통하여 아마도 그들은 세계와 자신과의 관계를 문자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고정되지 않은 사물의 세계가 문자로 고정되면서 나, 라는 존재 역시 문자 안으로 들어오는 그런 경험을 그들은 했는지도. (39쪽)
-아무리 찬란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발견되지 않은 과거는 고고학적인 사실로 들어오지 않는다. 고고학적인 조사를 통하여 얻어지는 과거는 그러므로 언제나 잠정적인 결론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고고학적인 결론이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혹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이라는 단서가 붙여진 결론이다. (65쪽)
-컴퓨터 앞에 앉아 고향을 생각한다. 고향이 겪어내는 당대성을 같이 경험하지 못하는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이주자 가운데 하나인 이 '시간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구체적인 당대성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그 꽃빛일까, 그 꽃빛 아래 어찔해서 말을 잊고 한 생애의 오후를 정지시키는 그 마음일까. 그 마음의 주인은 누구일까, 어떤 대륙도 주인을 가지지 않았는데, 누구도 어떤 한 뼘 땅의 주인이 될 수 없는데…… 오,오, 이동의 역사여,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하라. (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