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저쪽
정찬 지음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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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길, 저쪽

◎ 지은이 : 정찬

◎ 펴낸곳 : 창비

◎ 2015년 5월 26일, 초판 1쇄, 267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표지가 왠지 낯익다. 이 기시감이 뭘까 생각해봤더니 『고통의 해석』 안에서 본 프란츠 카프카의 <법 앞에서>의 상황이 떠올라서 그런 모양이다. 문지기가 들여보내 주지 않았던 그 문이다. 길, 저쪽이라 하니 지겹게 인용되어 온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도 떠오르고 난리다. 길은 늘 인생과 동급으로 취급되어 왔다. '인생=길'이라는 공식을 따르자니 한숨이 나오지만 근사한 어떤 비유도 떠오르지 않으니 어쩔 것인가.

중년 사진작가 윤성민이 이십 년이 넘은 필름을 인화하며 그곳을 함께 갔던 김준일을 생각하는 동안 희우의 편지가 도착한다. 오랜 세월 연락이 끊긴 그녀에게 온 편지로 인해 성민은 아픈 과거를 떠올린다. 변혁운동가였던 김준일과 그의 영향을 받았던 자신의 옥살이와 고문. 그들이 지나온 6월 항쟁, 6.29민주화선언, 대통령 선거의 절망적 패배.

-우리는 역사의 발전을 믿었다. 비록 지금은 '길, 이쪽'에 있지만 언젠가는 '길, 저쪽'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희생의 대열 속에서 그토록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194쪽)

-고백하자면, 저에게 사회주의는 언제나 현실 너머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가 아닌 저쪽에서 꿈의 형태로 존재한 것입니다. (221쪽)

감옥에 있을 때 이별을 통보하는 편지만을 보내고 파리로 떠나버린 희우. 그녀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가 그립다며 편지를 보내왔고 만나기를 원한다. 이야기는 희우의 편지를 매개로 과거의 일들이 중첩되는 구조다.

-고통은 소멸되겠지만 고통의 기억은 소멸되지 않아요. 몸 어디엔가 숨어 있어요. 고통에 대한 원한 역시 숨어 있어요. 의식이 닿지 않는 어떤 곳에 말이에요. 그 원한이 어떤 계기로 분출될 때 폭력이 발생하는 거예요. 폭력적 인간이란 고통에 대한 원한이 쉽게 노출되는 인간이에요. 야만적 사회는 우리의 몸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고통의 기억을 자극해요. 폭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나치스가 그랬고, 스딸린 체제가 그랬어요. 우리의 청춘이 통과했던 70년대와 80년대 한국 사회도 그랬어요. 수많은 청춘들이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어요.(260쪽)

-폭력에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폭력을 인정하는 행위예요. 분노를 껴안으면서, 분노를 넘어서는 감정이 슬픔이에요. 슬픔은 분노가 또다른 폭력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고귀한 감정이지요.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럼에도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슬픔에 감싸여 있기 때문이에요. (261쪽)

희우가 성민 때문에 사복경찰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아비를 모르는 아이를 낳게 되었다는 사실은 성민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주역의 효사에 나오는 말이다. 나뭇가지에 마지막 남은 씨과실이 석과다. 석과는 먹어서는 안되는 과실이다. 마지막 씨앗을 먹어버리면 나무를 다시 심을 수 없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11쪽)

-사람의 마음에는 마지막 피안지대가 있어. 어떤 고통도 닿지 않는 본질적이며 절대적인 공간이라고 할까. 생명의 원천 혹은 씨앗 같은 거지. 사람의 마음에도 석과가 있는 거야.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마음의 석과를 잃었기 때문이야. 어떤 아귀가 그들의 석과를 먹었을까. (13쪽)

마음의 석과. 그것을 잃지 않았기에 희우는 젊은 시절의 자신을 과거에 남겨둔 채 딸 영서를 낳고, 돌아와 다시 한 번 성민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성민을 사랑했던 또 한 명의 여자 윤하는 석과를 잃은 쪽인데, 어릴 때 엄마 잃은 상실감을 성민을 사랑하는 것으로 채우려 했지만 성민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희우를 발견한 뒤 자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주문 너머 부처의 세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절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거의 완벽한 폐허였다. 그 허허로운 벌판을 거닐면서 부처의 세계란 어쩌면 이런 폐허가 품고 있는 아름다움 속에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239쪽)

폐사지만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던 성민은 어쩌면 자신, 그리고 혹독하게 인생을 갈취당했던 그 시절 청춘들의 마음을 보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상처받은 마음들 안에서 새롭게 살아갈 희망을 발견하고 싶었던 건지도.

이 책은 70년대와 80년대 사회를 아주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찌 보면 너무 많이 들어서 고리타분할 수도 있는 이야기, 이제는 지겹다며 손사래치고 싶은 그 시절 이야기지만 분명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다. 숨쉴 공기가 있다는 걸 자주 까먹는 것처럼 우리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이 자유가 어디로부터 왔는가도 가끔씩 일깨워야 한다. 소중한 걸 또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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