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 세종 더 그레이트 킹 세종 더 그레이트
조 메노스키 지음, 정윤희, 정다솜, Stella Cho 외 옮김 / 핏북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푸른 눈의 외국인, 그 유명한 《스타트렉》의 작가가 세종대왕에 대한 역사소설을 썼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것도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한국인이 썼다면야 그려러니 했겠는데, 외국인이 썼다지 않은가. 심지어 그 유명한 스타트렉 작가가, 그것도 국문과 영문 동시출판이라니. 얼마나 잘 썼는지, 이건 꼭 읽어봐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와, 뚜껑을 열어보니... 이건 생각보다 수작이었다. 예컨데 역사소설 ‘뿌리깊은 나무’ 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충격을 받았다. 첫번째 외국인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쓸 수 있는지, 외국인이 조선 궁중문화를 이렇게 자세히 알고있는지(예를들어 왕실 어른이 돌아가셨을때, 궁 기와에 올라가 ‘상위복’을 외치는 것이라던가), 훈민정음 창제의 바탕이 어떤 것인지 등. 와 이건 정말 한국을 사랑하고, 세종대왕을 사랑하고, 한글을 사랑하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쓸 수 없는 내용이었다. 거기다가, 내가 보았던 세종 관련 매채는 대게 그 시각이 ‘국내’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이 책은 조선이라는 땅을 벗어나, 명나라, 몽고, 왜(일본)까지 시각을 동아시아로 확장시켰다.



※이 리뷰에는 스토리 진행에 절대 중요하지 않은(ㅋㅋㅋ) 아주아주 의미없는 곁가지 스포일러가 아주 조금 있습니다. 거기다 이 소설과는 아무 상관없는 감상도 포함되어있습니다. 이런 책은 스포일러 당하면 절대 안되는 책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책 꼭 읽어보세요. 강추강추!





세종이 바라는 세상은 언제나 백성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삶이었다. 그래서 그는 생의 모든 순간을 백성들을 위해 쏟아부었다. 해서 백성들이 글을 읽고, 쓸 줄 알기를 바랐다. 그저 말하지 못하여 당하지 않도록, 억울한걸 억울하다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문자는 지배층의 점유물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왕조시대에, 한자를 쓰며, 한자를 발명한 중국에 사대를 하는 유학자들이 정치를 하는 그 시대에, 세종의 이러한 발상은 한 나라를 망국으로 일으킬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생각이었다.



세종은 물시계를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여겼다. 너무도 익숙한 옛 동료나 오랜 친구인 양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장영실은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난 것인가? 왕은 물시계를 발명한 사람을 그리워했다. p 108



그래서 이 책속의 세종은 언제나 자기 뜻을 이해하고, 어떻게든 실행시키려고 하던 친구 ‘장영실’을 그리워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바탕으로하는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서는 왠만하면 나오지 않는 인물 ‘장영실’. 그 장영실이 이 책속에선 왕왕 등장한다. 



소설속의 세종의 침전 건너방, 그곳에는 물시계가 있다. 시간을 다스릴 수 있도록, 그 시간으로 백성들이 더 잘 살 수 있도록, 그런 세종의 바람을 담아 장영실이 만든 물시계. 바로 그 물시계가 그 방에 있었다. 세종은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풀지 못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원할때, 심적으로 지칠때 이 물시계를 보러 왔다. 오랜 친구 장영실을 만나기 위해.



세종이 그렇게나 아꼈던 장영실. 유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등용했던 장영실. 그런 장영실을 왕의 가마를 망쳤다는 이유로 곤장을 내렸다는 기록 이후엔 기록속에서 사라진 장영실. 만약 역사의 타임머신이 있다면, 세종에게가서 “장영실은 어떻게 되었나요?”라고 꼭 묻고 싶었다. 역사속에서 사라졌기에, 장영실은 세종 후반기 이야기에서도 사라졌고, 많은 사람들도 그를 잊었다. 심지어 그가 만들었던 발명품들은 조선중기 이후에는 그 조작법조차 모를 정도가 되었다.



백성을 위했던 세종, 그런 세종을 위해 각종 발명품을 만든 장영실. 하지만 그 보다 더 백성에게 중요했던 문자. 하지만 반상이 유별하고, 유학의 나라였던 조선에서는 이 모든걸 다 가져갈 수 없었다. 그래서 세종은 장영실을 버리고, 백성을 위한 문자를 지킨게 아닐까. 뭐 그런생각을 많이 했더랬다.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진 장영실을 저자는 물 위로 끌어내었다. 물론 이미 장영실이 죽었다는 가정 하에, 죽은 장영실을 그리워하는 세종이었지만 그게 어디인가. 그리고 진짜 그렇게 곤장을 맞았다면, 세종이 뒤로나마 구출하지 못했다면, 진짜로 그날 이후로 장영실은 생을 달리했을테니 말이다. 이렇든 저렇든 시기의 세종을 그린 각종 매체에선, 장영실의 'ㅈ'짜도 없었는데, 이렇게나마 세종이 계속 장영실을 그리워했다는 이 모습이 나는 너무 좋았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이 소설을 쓴 외국 작가에게 너무 고마울 뿐이다.



“그자에게 진 빚을 내가 어찌 갚을 수 있겠소? 아직 살아 있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민초들에게 진 빚을 내가 어찌 갚을 수 있단말이오? 그들이 자기 목소리를 세상에 알릴 방법은 말하는 것이 유일할 게요. 하지만 죽은 뒤에는? 그들의 목소리를 그들이 죽고 난 뒤에도, 우리 조선인이 모두 죽고 난 뒤에도 길이길이 알릴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엇이겠소?” p 146



문자는 귀족들의 권력이었다. 해서 일개 백성들, 사람취급 받지 못한 천민들, 그들은 억울해도 억울하다 할 수 없었다. 문자를 모르기 때문에. 기천년간 이어져온 왕조시대, 수 많은 나라에서 수 많은 왕이 나왔지만, 이러한 생각을 한 왕은 몇 없고, 몇 없는 왕중에서도 이를 고쳐보고자 실행한 이는 적어도 공인된 역사속에서는 조선의 4대왕, 세종대왕 이도 한 사람 뿐이다.



“지금 우리 조선에서 사용하는 소리는 중국의 소리와 달라 한자로 표현할 수 없다. 그 결과 한자를 배우지 못한 일반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 사연을 글로써 전달할 방법이 없다.” p 182



재위기간 내내 백성을 위해, 백성에게 좋은 것만 생각하던 세종대왕이 말년에 만든 우리글, 훈민정음. 이 훈민정음은 한글이 되어, 오백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우리가 사용하고 있다. 



훈민정음을 반포하던 그 날, 조정에 있던 대다수의 유학자들이 반대하였다. 심지어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는 훈민정음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반대하는 제일 큰 이유로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 큰 나라를 모시는 작은 나라가, 감히 큰 나라의 문자를 버리고 일개 ‘기예’에 불과한 문자를 쓰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다 일반 백성과 천한 것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다면,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모든 예의범절이 파괴될 것이라 하였다. 최만리의 상소를 통해 조선이란 나라가 사대주의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알 수 있고, 있는 자들의 권력욕구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본디 글을 안다는 것은 권력을 가진 것과 같다. 하여 조선은 차지하고 고려, 그 전까지도 우리 역사상에서 한낱 백성들이 글을 배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은 권력을 독점한, 소수의 지배층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쇄혁명이라 일컫는 금속활자가 최초 발명된 곳은 바로 우리 땅이었다. ‘직지심체요절’이 바로 그 증거이다. 심지어 서양의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2백년 앞선다. 그러나 금속활자가 나온 이후의 세상은 서양과 동양이 극명하게 달랐다. 우리는 금속활자를 꽁꽁 숨겨두었다. 왕실을 비롯하여 공자왈 맹자왈 하는 돈있는 양반네들, 그리고 사찰에서만 통용되었다. 해서 모든 정보는 왕실, 양반, 사찰에서만 독점하였고, 이러한 정보 독점은 권력으로 이어졌다. 금속활자인쇄가 발명된 이때도 이럴진데, 목판으로 인쇄했을 시기는 정보 독점은 오죽했을까.



반면에 서양은 금속활자는 성서 인쇄를 비롯하여 수 천권의 책들이 금속활자에 찍혀, 대폭적으로 전 계층에 퍼져나갔다. 왕실, 귀족, 서민 관계없이 누구나 손쉽게 책에 접근 할 수 있었다. 기존에는 왕실에서만 독점하던 정보를 일반 서민들까지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되면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서양의 각종 학문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졌고, 여러 개혁들이 잇달아 발생하였다. 그렇게 서양은 동양과는 다르게, 아주 빠르게 시민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고, 근대 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다.



동양은 소수의 지배층이 인쇄술을 독점하고, 문자를 독점하여 권력을 유지했고, 서양은 누구나 인쇄물에 접근할 수 있었고, 인쇄물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문자를 배웠고, 문자를 배움으로써 옳고 그름을 깨우치게 되었다.



자, 이쯤에서 다시 보자. 최만리가 훈민정음을 반대하는 상소문에 썼던 ‘예의범절이 파괴’, 이 말이 과연 적중했는가? 서양은 예의범절이 파괴되어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시민혁명이 일어났고, 산업혁명이 일어났는가? 서양은 예의범절이 파괴되어 세계의 패권을 잡았던 것인가? 반면에 지배층이 끝까지 한자를 쓰고, 문자를 독점한 조선은 예의범절이 살아있어서 삼정의 문란이 일어났고, 예의범절이 살아있어서 백성들을 쥐잡듯이 잡았고, 예의범절이 살아있어서 외세에 나라를 팔았는가?



세종이 만들었던 훈민정음은 유학자들의 격렬한 반대로 조선의 정식문자로 채택되지 못하였다. 여성들이 쓰는 문자로 전락하고, 천민들이 쓰는 문자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훈민정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백여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한글이 된 훈민정음을 쓰고 읽는다. 



많은 사람들이 한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모습을 세종대왕이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라는 가정을 많이들 하는데, 난 그 반대의 가정을 하곤 한다. 그렇게 대국의 문자라고 한자를 극찬하던 유학자들이, 지금의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그렇게 대국의 문자라던 칭송하던 한자는 저 멀리 내팽개쳐져, 한국에서 사장된거나 다름없어진 이 모습을 보면 최만리를 비롯한 유학자들이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정말 궁금하다.



그것은 왕이 받은 첫 번째 편지였다. 왕 자신이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쓰인 첫번째 편지!


세종은 큰 소리로 쪽지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황씨부인은 읽고 쓸 수 있사옵니다. 전하, 감사하옵니다.” p 227



내가 조선조에 태어나, 훈민정음을 처음 접했다면, 나는 가장 처음으로 어떤 글을 썼을까? 아마, 황씨부인처럼 글을 알고, 쓸수 있게해준 세종에 대한 ‘감사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의미에서 황씨부인의 저 쪽지는, 훈민정음을 배우게 될, 세종에게 감사함을 갖게 될, 과거와 먼 미래인 오늘날 모든 백성들의 편지와 다름 없다.



.


.


.


.


.


.



...........는 여기까지!!!!!!!!!!!!!!!!!! 최대한 책속의 내용은 피하고,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ㅋㅋㅋ) 내용에 대해서만 내 생각을 덧붙여보았다. 그러니까, 이 리뷰를 읽은다 한들 이 책의 내용은 알 수 없단 이야기.




뭐라고 해야할까? 이 책은 흡입력이 최고조에 달한다. 책을 쓴 저자가 스타트렉 작가여서 그런건지, 책을 읽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기분이다. 소설이자 드라마로 방영되었던 《뿌리깊은 나무》가 그저 국내판이라면, 이 책은 세계판으로 상위호환한 느낌이랄까?



읽으면서 국뽕이 넘쳐흐르는 구간도 있었고(특히 반포할 때), 슬퍼서 눈물이 찔끔한 구간도 있었으며(희생된 사람들이..하...ㅜㅜ), 욕지꺼리가 나온 구간도 있었다(최만리가 한 작태라던가 뭐 그런..... 상소문에서 멈췄어야지 이 양반아!!). 거기다 어디까지나 ‘역사판타지 장편소설’임을 감안하였음에도, 사실과 허구가 너무 조화롭게 배치되어서 그런지, 만약 이 책을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하면 그대로 믿을 사람들도 많을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런 의미에서 영화로 제작된다면, 극장을 잘 안가는 나지만 이것만큼은 영화 보러 갈 수 있을 것 같기도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