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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애도하지 않는다 - 아버지의 죽음이 남긴 것들
사과집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4월
평점 :
태어나면 누구나 죽는다. 혹자는 인간은 죽기위해 살아간다고 하기도 한다. 매일 아침, 저녁 뉴스를 보면 누가 죽었고, 왜 죽었는지 보도가 안되는 날이 없다. 그 정도로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가까이에 있는 죽음을, 나 또는 내 주변인과 결부시키지 못한다. 특히 내 주변인과 결부시킨다는건 왠지 죄악같아서 더더욱 그렇다.

그러다 어느날, 내 주변인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 죽음을 이겨낼 수 있을까? 온전히 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사람을 추모하며, 내 삶을 돌아볼 수 있을까? 이 에세이는 바로 그 점을 이야기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하지 못했던,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바빴던, 딸이 아버지의 죽음과 마주하며 닥친 일상을 담담하게 써내려갔다.
그 일상에는 사라진 줄 알았던 가부장제의 잔재가 발견되기도 하고, 직장에서 죽어도 산재승인을 받을 수 없는 사회의 부조리함도 있다. 반면에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던 인간관계에 대한 고찰도 있다. 무엇보다 글쓴이의 이야기가 언젠가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정말 모든 자녀들이 읽기를 바란다. 그래야 언젠가 내 부모의 죽음과 맞딱드렸을때, 우왕좌왕 하지않고, 오롯이 내 부모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고, 그 상황에 처한 내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테니까.
내가 목격하고 체험한 장례란 가부장적 ‘정상’ 가족이 얼마나 잘 살아왔는지를 평가하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여성과 남성이 할 일은 엄격히 나뉘어 있었고, 여성은 장손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해 겸허히 한 발짝 뒤에 서야 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그간 모든 제사와 명절에서 반복된 전통적 여성상이 가장 강하게 재생산되는 곳이 바로 장례식장이었다. p 023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본래 의례란 것은 산 자를 위해 존재하는 법이다. 그러나 불합리한 허례허식이 보일 때마다 애도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감정이 순간순간 치솟을 때마다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다. 아빠의 죽음 앞에서도 냉소를 감추지 못하는 나 자신을 질책하게 됐다. p 030 |
오백여년간 주자성리학에 함몰되었던 우리나라, 여성에게 많은 제제가 있었다. 하지만 그 제제도 몇십년의 시간을 지나, 많이 약화되었고 사라지기도 하였다. 선택적이긴 하지만 자녀가 엄마의 성을 쓸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에게 제제가 남아있는 문화가 있으니, 그게 바로 장례문화다.
그저 죽은 자를 애도하고, 죽은 자를 떠나보내기 위한 숭고한 의식이 장례식인데, 정작 저자가 마주한 아버지의 장례식은 허례허식이 난무한 한국의 장례식이었다. 고인은 분명 나의 아버지이고, 아버지의 자식은 바로 나인데, 여자라는 이유로 상주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남자라는 이유로 일년에 한번 볼까말까한 사촌오빠가 상주가 되었다.
지금까지는 한국의 장례문화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다녔던 장례식장을 떠올려보았다. 세상에, 모든 상주는 남자였다. 심지어 꽤 오래전 내 삼촌이 돌아가셨을 때는, 자녀였던 딸들이 아닌, 동생이었던 삼촌들이 상주가 되었다. 아, 그때 내 사촌동생들은 본인의 아버지의 죽음에서 배제되었었구나. 이제서야 알았다.
그러니 나는 상상한다. 육개장을 먹지 않아도, 남자 상주가 없어도 존엄하게 떠날 수 있는 장례식. ‘나 없는 송별회’가 이루어지는, 조금은 산뜻한 애도의 장을. 적어도 내가 죽고 없을 때도 고인을 애도함에 있어 성별이나 가정의 형태가 제약을 주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나는 나의 죽음을 천천히 준비하기로 한다. p 041 |
만약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면? 정말 다행스럽게도 나에겐 남동생이 있다. 또한 내 남편이 있다. 이런걸 다행스럽게 생각해야하는 한국의 장례문화란 대체 무엇일까. 지금의 대한민국은 핵가족화에 이어 1인가구가 많아지고, 편부/ 편모가정도 많다. 과거의 ‘정상가족’이라던 범주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가족형태가 변경되면서 나라의 정책도 변화하고 있는데, 왜! 장례문화는 고릿적 모습에 갖혀 변화하지 않는 걸까.
누구나 태어나면 죽고, 나 역시 언젠가는 죽는다. 해서 언젠간 내가 상주가 될수도 있고, 또 언젠간 내가 장례식의 고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내가 주체가 되는 장례문화의 변화에 대해선 소심하게굴까. 허례허식이 난무하지 않는 장례식, 오롯이 고인을 추모하고, 고인을 떠나보낸 사람들의 마음을 추수리는 장례식. 그런 장례문화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봐야할 때다.
면담은 예상과 달랐다. 노무사는 아빠의 죽음에 ‘이 정도’ 로는 부족하다며 ‘적당한 정도’의 승소 케이스를 보여줬다. 그 중 하나는 공사장에서 포크레인에 떨어져 하반신이 마비가 된 사람의 산재 승인이었다. p 075 |
저자가 아버지의 죽음에서 맞딱드린건 한국의 장례문화 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선 정말 어려운, 근로자의 죽음에 대한 산재 문제, 바로 그것이었다. 직장에서 과로로 죽은 아버지기에 산재를 받고자 했지만, 산재를 신청하면서도 당연히 안될거라 생각했다. 그게 대한민국이니까. 그리고 정말 산재 승인을 받지 못했다.
우리는 뉴스에서 수많은 과로사를 마주한다. 배달을 하다가 과중한 업무에 죽은 피해자들, 반도체공장을 다니다 백혈병에 걸려 죽은 피해자들. 그들의 유가족들은 산재승인을 받기 위해 대기업과 싸웠다.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들은 산재승인을 받지 못했다. 업무와의 인과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 하나로.
근로자의 과로사가, 근로자에게 없었던 질병이 발병된게 정말 업무와 인과관계가 없는건가?모두가 의심하지만, 대기업과 정부단체는 없다고 일축한다. 그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나랑 상관 없는 일인데?’ 라고 생각하며 무시하기엔, 우린 모두가 근로자다. 내 부모가 대기업 임원이라, 대기업 대표라, 혹은 부동산 부자가 아닌 이상은, 우리같은 일개 서민들은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근로자다. 그래서 이런 과로사는 내 일이 될수도 있고, 내 친구의 일이 될 수도 있고, 내 부모의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대기업과 정부가 산재 불승인을 내는 것을 남일이라고 간과하면 안되는 것이다.
사실 부모의 죽음, 조부모의 죽음에 관한 생각은 최대한 미루고 싶다. 하지만 묫자리 탐방과 엄마가 원하는 죽음 이후를 들으며, 이상하게 미뤄온 일을 끝냈을 때의 후련함을 맛보았다. 가족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남은 생에 내가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p 151 |
위에서도 말했듯 이 책은 갑작스럽게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한 한 여성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 여성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을 사는 모든 자녀들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이 책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자녀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20대 자녀는, 30대 자녀든, 40대 자녀든. 그 누구든 내 부모가 살아있다면 꼭 한번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