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낙원에서 만나자 - 이 계절을 함께 건너는 당신에게
하태완 지음 / 북로망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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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숨결과 빛, 그 안에 조용히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할 때, 비로소 웃게 됩니다.


누군가 제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먼저 행복해야 해요.
사역도, 가정도 다 떠나서요.
그건 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일 뿐이에요.
선물은 기쁘라고 준 거지,
목숨 걸라고 준 건 아니잖아요.”

그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떠올랐습니다.


하태완 작가의 『우리의 낙원에서 만나자』는
일상을 누리고, 그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도록 이끌어 줍니다.

거창한 사건이 없어도,
먼 미래를 바라보지 않아도,
오늘 이 자리에서 숨 쉬듯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글은 몽글몽글하고 잔잔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깊은 위로와 용기가 숨어 있습니다.

마치 따뜻한 차 한 잔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스며듭니다.
읽는 동안 마음이 느슨해지고, 표정이 부드러워집니다.


책 속에서 작가는
우리가 놓치기 쉬운 순간들을 붙잡아 줍니다.

햇살이 비치는 창가,
길가에 핀 작은 꽃,
오랜만에 들려온 반가운 목소리 같은 것들.

그것들은 거창하지 않지만,
하루를 환하게 만드는 낙원의 조각들입니다.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행복은 기다릴 대상이 아니라,
발견할 대상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그 발견은 멀리서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것을요.


아마도 우리의 낙원은,
이미 우리 곁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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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 2025-09-16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화로운 숲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나무에 기대어 편안하게 숨을 들이키는 듯한 기분이 드는 책이예요
 
낮은 자리에서 보이는 것들 - 인생의 바닥에서 하늘을 만난 사람들
구미정 지음 / 비아토르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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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자리에서는 멀리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보려면, 더 낮아져야 합니다.

땅에 닿은 눈높이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우리가 그리는 세상의 지도는 대개 높은 자리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넓게 조망하지만, 그 안의 숨소리와 눈빛은 잘 담기지 않습니다. 낮은 자리에서만 보이는 풍경이 있습니다. 발밑의 흙, 맞닿은 시선, 서로의 숨결이 스며 있는 자리입니다.

​

구미정 저자는 이번 책에서 그 낮은 자리를 걸어갑니다. 여성신학자로서의 깊은 통찰, 인문학적 상상력, 그리고 주변부를 향한 애정이 글마다 묻어납니다. 이전 저서들처럼, 그는 멀리서 설명하는 대신 그 자리에 서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낮은 자리의 시선은 불편함을 줍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우리를 깨웁니다. “우리는 왜 그들을 보지 못했는가?” “그들의 자리에 서면 무엇이 보이는가?” 질문은 단호하지만, 사람을 향한 태도는 부드럽습니다. 비판과 환대가 한 문장 안에 공존합니다.

​

이 책은 신학이자 인문학입니다. 현장에서 보고, 듣고, 함께 걷는 저자의 경험이 성경과 만나 새로운 의미를 빚어냅니다. 『교회 옆 미술관』에서 성화를 통해 성경 인물을 새롭게 보았듯, 이번에는 낮은 자리에서 삶과 신앙을 다시 봅니다. 높이 나는 조망 대신, 발을 붙이고 천천히 걸으며, 사람과 사건을 세밀히 바라보게 합니다.

​

책을 덮고 나면 나의 자리를 묻게 됩니다. 혹시 너무 높은 곳에서만 판단하고 있지 않은지, 너무 멀리 서서 바라보고 있지 않은지. 낮은 자리에서 보이는 것들은 우리에게 이해와 환대, 그리고 함께 살아갈 용기를 건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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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시간 낭비다. 그러나 참으로 고귀한 시간 낭비다. 예배는 우리를 그 가운데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고귀한 광휘에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다른 사람과 함께 누릴 수 있게 하는 기회, 우리의 시간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목적에 들어가게 하는 기회이다. 그 결과 우리는 변화된다. 그러나 우리의 변화는 우리가 하는 어떤 일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집중하고 복종하는 대상인 하나님ㄴ께서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써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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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기독교인이 드리고 싶으면 드리고, 드리기 싫으면 드리지 않아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드리는 종교 활동도 아닙니다. 예배는 기독교인의 기본적인 자세이며, (기독교인들은 주장하기를) 실제로는 참 인간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worship)라는 단어는 ‘가치 있는 것‘(worth-ship)이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 그분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모든 것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 P8

예배는 겸손함과 기쁨입니다. 예배는 모든 것을 잊고 하나님께 몰두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자신의 진리가 아닌 하나님의 진리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겉치레가 아니며 소란한 난장판도 아닙니다. 진정한 예배는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며,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드려지지 않으며, 계속해서 시계를 보는 것이 아니며,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 열려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기다리며, 어둠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 P21

사람들로 하여금 경배하게 하며,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십자가는 그 지저분한 작업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이 직접 오셨고 직접 그 일을 행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그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사셨고 우리와 같은 죽음을 맞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가 하셨던 것과 같은 소명을 맡기셨다고 말합니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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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유 2026-10-29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의 소망]
대한민국은 자칭 종교인이 ‘사기’를 쳐서, 돈을 뜯는 사람이 없는,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기를 소망한다.

* 성경의 3대 ‘사기‘극~
① (가짜 하느님) 성경의 창조는 ‘지동설’ 창조가 아닌, ‘천동설’의 가짜 창조이다. 바빌론 제국의 포로 시절에, 유대인들은 수메르 신화를 복제하여 구약을 만들면서, 수메르 신화에서의 천동설 창조의 가짜 창조주 엘림을, 유대인들의 먼 조상이며, 히브리인의 조상, 고대 ‘셈족‘ 부족장, ‘야훼‘로, 그 이름을 바꾸고, ‘야훼’가 마치 창조주인 것처럼 행세 하기 시작했다.

(성경의 창조는 ‘사기‘)~
[①일차] 빛과 어둠을 만들어, 낮과 밤을 구별하게 함 → 지금도, 야훼가 만든 ‘빛과 어둠‘만으로, 태양도 없이 낮과 밤이 구별될까? 야훼가 태양 없이 낮과 밤을 구별하게 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기이고, 거짓말이다.

[②일차] 하늘 뚜껑인 ˝궁창˝을 만듦 → 궁창 즉, 지구의 뚜껑은 ‘야훼‘가, 지구를 평평하다고 생각하며, 지구 뚜껑인 궁창을 열고 닫아, “비”나“눈”이 오게 하는 장치를, 성경에서 ‘궁창‘이라 말한다(욥기 참조). 야훼는, 첫째 날에, 태양이 없어도, 빛과 어둠만으로, 낮과 밤을 구별할 수 있게 했다고, 이미 사람들에게 ‘사기’를 친 후, 더 나아가서, 태초 허공의 우주에는, 지구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야훼가 그 지구에 뚜껑(궁창)을 만들어 씌웠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태초 허공에 ‘지구‘만,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천동설이다. 야훼는 초등학생도 믿지 않는 천동설에 근거한, 창조를 주장하고, 나아가 그 지구에 뚜껑(궁창)까지 달았다며, ‘사기‘를 치고 있다. [③일차] 태양을 창조하지도 않고, 태양을 필요로 하는 풀과 식물을 만들었다고 또 ‘사기’를 친다. [④일차]에 가서, 드디어 야훼는 (지구 창조 없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지구에서, 우주를 향해), 태양과 별, 달을 창조했다고 ‘사기’를 치고 있다(천동설을 말하는, 야훼의 창조는 ‘사기’이다).

이런 엉터리 ‘가짜’ 창조주 야훼를, 한국에 전도하려 하였지만, 야훼라는 이름으로는 한국에서 전도가 되지 않으므로, 사찰에 계신 진짜 하느님과 착각을 유도할 목적으로, 이 가짜 창조주 야훼를, 1891년쯤, 유일신이라며, 숫자 ‘하나’로 바꾸고, 그 숫자 ‘하나‘에 ‘님‘자까지 붙여서, 마치 숫자 ‘하나‘가 살아있는 것처럼 ‘기만’ 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야훼를, 사찰에 계신 진짜 하느님으로 착각을 유도하려는 ‘사기’이며, 사람을 속이는 ˝기만행위‘이다.

천주교도 처음에 천주님이라 불렀는데, 1980년대 김수환 추기경 때부터, 이름을 바꾼 개신교를 본받아, 숫자 하나님의 표준말이라며, ‘야훼’를 숫자 ‘하느님‘으로 바꾸고, 숫자’ 하나’가, 진짜 하느님인양, ‘기만’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개신교는 숫자 ‘하나님‘으로, 천주교는 숫자 ‘하느님‘으로 표기하며 부르고 있다. 숫자 ‘하나’가 살아있나?

불교가 전래되자, 사찰에서는 하느님을 사찰의 삼성각에 모셨다. 삼성각은, 예로부터 하느님(칠성님), 나반존자, 산신님의 3분을 모시는 전각이다. 한민족 자손이 하느님을 배신하고, 하느님을 능멸하면서, 숫자 ‘하나’를 ‘주님’으로 모시는 미친 짓은, 진짜 하느님의 미움을 받을 미친 짓이다. 천동설 창조가 진리인가? 숫자 ‘하나’가 살아있나?

② (유령인간 예수) 예수는, 동방박사가 예수 탄생을 지켜보았다면서, 성경에 예수 탄생일이 없다. 그래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인정하면서, 자신도 미트라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예수 탄생일을, 자신이 믿던 태양신 ‘미트라‘의 생일과 같은, 12월 25일로 정했다. 즉, 예수 탄생일은 313년이 지난 후, 태양신의 날짜로, 로마황제가 정했다.

12사도들은 최후의 만찬에 참석 했다면서, 예수 사망일을 몰라, 성경에는 예수 사망일이 없다. 그래서 325년이 지난 후, 천주교 공의회에서, 유대교의 유월절을 예수 사망일로 정했다. 매년 달라지는 유월절에 따라, 부활절과 예수 사망일은 매년 다르다.

성경에, 예수에 대한 탄생일과 탄생연도, 사망일과 사망연도도 없어, 예수는 허수아비 유령인간이며, 성경은 소설책이다. 사실 예수는, ‘바울’이 이집트 호루스와 페르시아 미트라 신화를 복제한 복제품이다. 그래서 유대교의 이단인, 마태를 비롯한, 예수 12제자 등의 사도들은, ‘이단 및 사기죄’로, 모두 처형을 당했다. 바울의 복제품, 허수아비 유령인간, 예수에게 기도하는 자는, 모자라는 인간이다.

③ (사기 구원) 성경은 죽은 자의 귀신을 부정한다(신약에 나오는 귀신은, 천사의 변심인 ‘마귀’를 의미한다). 죽은 자의 귀신을 부정하므로, 제사를 거부한다. 죽은 자의 귀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후세계가 없다는 뜻이다. 사후세계가 없다는 것은, 곧 천국, 지옥이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존재하지 않는 ‘천국, 지옥‘을 운운하는 목사와 신부는 한낱 사기꾼일 뿐이다.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 지옥도, 죽은 시체가 벌떡 일어나야 실현되는, 실현 불가능한 ‘육신 부활‘을 의미하는 ‘사기‘이다.
[대한민국은 ‘사기’를 쳐서, 돈을 뜯는 사람이 없는,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

[출처] 천동설 창조, 성경의 가짜 하나님
https://blog.naver.com/2andsing/223637131673

[출처] (신약 성립 과정) 기독교 성립과정, 이집트신화 조로아스터교
https://blog.naver.com/andsing/224336351217

[출처] (구약 성립 과정) 유대교 성립과정, 슈메르신화
https://blog.naver.com/nandsing/223638647165

[출처] 예수 12제자 처형, 예수 12제자 선정
https://blog.naver.com/techers5/224250621295

[출처] (삼성각) 하느님(칠성)기도, 독성기도, 산신기도 영험 사찰.
https://blog.naver.com/andsing8330/223646576995
 
하얀 기린, 그날 이후 ㅣ 하얀 기린
변준희 지음, 이수연 그림 / 쉼어린이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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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사건이지만, 저마다의 반응과 그 이후의 삶은 다릅니다. 상황은 비슷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해석과 그것을 끌어안는 품의 차이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환경과 상황이 같다고 할지라도 각자의 삶은 다양하게 변주됩니다.


이전의 이야기에서 하얀 기린은 결코 쉽지 않은, 삼키기 힘든 상실을 경험합니다. 여전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본래의 아름다움을 파괴할까요? 자신의 것이 아님에도 자신의 것인 양 행동할까요?


왜 이런 고통이 찾아왔는지 납득되지 않는 나날이 계속됩니다. 마치 나에게만 계속 그런 것만 같습니다. 울분을 쏟아냅니다. 잠시만 멈추어봅니다. 너를 떠올려봅니다. 아픔을 끌어안고 있지만, 다시금 너를 찾아봅니다. 완전하게 소화되지 않지만, 이해되지 않지만, 조금씩 움직여봅니다. 고통을 홀로 끌어안고 있기는 참 벅찹니다.


이제 혼자만의 아픔과 슬픔이 아닙니다. 서서히 주변이 알게 됩니다. 느끼게 됩니다. 공감을 얻게 됩니다. 참으로 힘겨운 상황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것 같았지만,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큰 위로를 얻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고통 가운데 있다는 것을요.


누군가의 품이 그리웠습니다. 따스함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이제 누군가에게 품이 되어주려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상실의 아픔을 치유합니다. 내가 기대했던 방식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며드는 따뜻함은 서로를 녹입니다. 서로를 채웁니다. 그렇게 사랑의 끈은 또다시 살아갈 힘을 우리에게 선물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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