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와 교회 -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교회에 대한 가톨릭·동방 정교회·개신교적 이해를 찾아서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황은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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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Miroslav Volf)의 가장 큰 장점은 자료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독해 능력일 것이다. 방대하고 폭넓은 텍스트를 다루면서도 핵심을 짚는다. 또한 그 텍스트를 적절하게 배치한다. 뿐만 아니라 적절한 비판과 대안제시는 감탄을 자아내게한다. 자칫 철학과 인문학적 사상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전혀 새로운 가치나 독특한 관점을 제시할만한데, 그는 철저히 신학적 작업을 수행한다. 그는 결코 그 중심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신학은 삼위일체 중심적이다. 그는 삼위일체의 영원한 페리코레시스적 교제 안에서 기독론과 성령론, 교회론을 재해석해낸다.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통찰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을 보여준다. 본 서평에서는 『삼위일체와 교회』의 모든 장을 다루지 않고, 핵심적인 장들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내용을 전개함에 있어 이후의 장들은 앞의 챕터들의 내용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Ⅲ장 ‘교회의 교회성’에서는 교회론에서 다루어야 할 핵심적인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미로슬라브 볼프의 언급대로 교회성에 대한 질문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 즉 교회가 갖추어야 할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일 것이다. 이것은 다름아닌, 교회의 전제조건은 무엇인가?’ 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 교회론은 다른 조직신학의 각론과 분리되지 않으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히 저자는 교회론은 구원론과 인간론, 삼위일체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관점을 통해서만 온전한 교회론을 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교회론은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에 근거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자연스럽게 종말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속적으로 고대한다. 한편으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 사건과 성령 하나님의 보냄 이후에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그것을 드러내야한다.


저자는 교회성의 공통된 두 조건으로 성례전과 하나님의 백성의 현존을 말한다. 초기의 자유교회 전통은 여기에 그리스도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교회의 성서적 조직을 추가한다. 볼프는 이와 같이 최초의 침례교도인 존 스미스(John Smyth)의 신학을 적절하게 활용하며, 스미스의 사상을 자유교회 전통의 핵심적 사상으로 간주한다. 이후에도 볼프는 스미스와 Ⅰ,Ⅱ장의 라칭거(Joseph Aloisius Ratzinger)와 지지울라스(John D. Zizioulas)의 교회론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이를 비교분석한다. 이는 곧 감독제와 자유교회에 대한 비교이다. 감독제와 자유교회의 가장 특이할 만한 차이점은 보편교회와 지역교회에 대한 차이일 것이다. 


저자는 보편교회와 지역교회을 연결하는 주요한 통찰들을 제시한다. 특히 공동체적 신앙 고백이 개인적이고 사적인 사안을 넘어서는 사회적이고 공적인 차원임을 말한다. 교회적 발화의 객관적 수행과 교회의 모든 개인적 구성원들의 주관적 신앙을 연결시키는 통찰도 큰 공감을 일으킨다. 다만 교회의 존재에서 직임과 성례전의 중요성을 말하는 부분에서 성례전에 비해 직임에 대한 분량이 적은 것이 아쉽다.


제Ⅴ장 ‘삼위일체와 교회’에서 볼프는 라칭거와 지지울라스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교회와 삼위일체 사이에 상응하는 지점의 가능성과 한계를 분석하고 있다. 삼위일체적 개념을 면밀하게 분석함으로서 교회의 통일성과 보편성, 상호관계성 등을 고찰할 수 있다. 즉, “삼위일체적 용어를 통해 보편화와 다수화 사이의 이원론을 피해가는 것이다(323).” 삼위일체에 대한 풍성한 이해를 통해서 교회의 교회됨에 대한 더욱 다양한 발전적 논의가 가능하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는 이미 삼위일체적 논의를 통해 교회론을 발전시켰다. 물론 서방교회 전통에서 신적 본질의 통일성이 우선되고, 동방교회 전통에서는 삼위 인격의 삼중성이 우선된다. 그렇기에 이러한 차이는 서방교회는 보편교회를 우선하고, 동방교회는 지역교회를 우선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신학적인 차이가 실제적인 현상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교회 전통에서는 교회와 삼위일체의 상응 관계에 대한 개념은 발전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학적 근거가 기독론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볼프는 자유교회의 교회론을 삼위일체적으로 재구성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모든 유비에는 한계가 있지만, 추상적이고 명제화된 개념에 비해 유비는 더욱 풍성한 이해를 함에 있어 많은 기여를 한다. 교회론적 인격과 교제의 개념에 있어서도 우리는 삼위일체에 대한 유비를 통해 더욱 풍성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비록 인간 존재는 피조물적 방식으로만 하나님에 상응할 수 있지만, 이러한 점을 인정하면서 우리의 인식을 더욱 확장할 필요가 있다. “교회적 교제는 언제나 인간 존재를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게 하는 세례와 그러한 교제가 완성되는 종말론적인 새 창조 사이에 있는 길에서 실현된다. 이 지점에서 교회는 역사적 최소치와 종말론적 최대치 사이에 존재하게 된다(333). “우리의 교회에 대한 이해는 이 사이에서 역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볼프는 보편 교회와 지역 교회의 관계를 삼위일체의 개념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분석하고 있다. 라칭거로 대표되는 서방교회와 지지울라스로 대표되는 동방교회의 차이는 각각의 전통이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확연하게 구분된다. 우리는 제3의 길을 모색해야하며, 저자는 이를 ‘페리코레시스’의 개념을 통해 발전시키고 있다. 물론 삼위일체의 페리코레시스를 통해서 보편 교회와 지역 교회의 상관성을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교회의 교회됨에 대한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더욱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성령의 내주함’이 교회의 페리코레시스적 교제의 매우 주요한 근거로 제시하는데, 어떻게 성령의 내주함이 가능한지에 대한 더욱 구체적 설명이 있었다면(물론 논지를 벗어나는 우를 범할 수 있지만), 더욱 실제적이고 현실적이었을 것 같다. 


제 Ⅶ장에서 볼프는 교회의 ‘catholicity’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교회의 보편성이 전체성을 지향하긴 하지만, 저마다의 특정한 방식을 따라 보편적이라고 말한다. 가톨릭과 동방정교회는 ‘보편성’에 대해서 강조하지만, 정작 상대방의 교회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보편성을 잃어버렸다. 즉 보편성이라는 용어를 자신들의 교회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말처럼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논의는 항상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고자 노력할 때에만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보편성’은 언제나 통일성과 다수성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즉 전체성에 대한 이해는 그것을 요구하거나 허용하는 통합과 차별의 정도에 따라 다른 것이다. 결국 교회의 내적 문제임과 동시에 외적 문제인데, 이러한 외적 차원은 포용성과 배타성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보편성의 문제는 양적 이해와 질적 이해로 분류되는데, 저자는 양적 이해는 교회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보지 않는다. 지리적 차원에서의 보편적 확장은 교회의 결정적 특질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보편성의 양적 이해를 비판한다. 결국 보편성은 질적 이해로 귀결되며, 이는 충만함(fullness)으로 표현될 수 있다. 구원의 충만함이 실현된 교회가 보편적임은 모두가 동의하지만, 이를 어떻게 실제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볼프는 이를 종말론적 구도 안에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하나님의 종말론적 새 창조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 보편성은 오로지 하나님의 새 창조의 종말론적 전체성이라는 틀 안에서만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새 창조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의 영화롭게 된 백성들이 상호 내주하는 것이다(계 21-22장). 인간과 세계의 전체 역사는 심판에 의해 부정성으로부터 해방되어서 새 창조라는 포괄적 실체로 편입될 것이다. 새 창조는 따라서 그 시초로부터 계속된 창조세계 전체의 총괄갱신(recapitulation), 즉 하나님, 그분의 전체 백성, 전체 우주가 하나의 분화된 통일성을 구현할 전체성일 것이다. 그 분화된 통일성은 교제인데, 삼위 하나님이 '만유 안에 계시'게 될(엡 1:10; 고전 15:28을 보라) 그러한 교제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 전일성은 오로지 하나님의 새 창조의 종말론적 전체성이라는 틀 안에서만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 전체 하나님의 백성이 가지는 전일성은 결국 창조된 실제 전체를 위한 구원의 종말론적 충만함이 가지는 교회론적 차원이다.(p. 442)"



통일성은 각각의 독특성과 함께 가야하며, 교회는 이러한 이해를 잘 실현시키고 구현해야 할 것이다. 삼위 일체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전체 하나님의 백성과의 포괄적 관계를 통해 우리는 교회의 보편성뿐만 아니라 각 그리스도인의 인격적 보편성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됨의 핵심적 요소이며, 필수불가결한 전제이다.


그동안 교회의 하나됨에 대한 우리의 호소는 추상적인 구호에 머물렀던 것 같다. 논리적인 근거가 많이 부족하여, 그만큼 설득도 쉽지 않았다. 볼프의 이러한 주장은 지역교회와 보편교회의 관계에 대한 풍성한 이해를 갖게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 각 그리스도인들은 전 세계와 우주적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과 어떤 관계를 갖게 되는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준다. 더불어 계속되는 질문은 수많은 교단으로 분열된 한국 교회의 현실 가운데 어떻게 하나됨을 이룰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또한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에서 탈피해서 전체를 바라보는 눈을 어떻게 하면 향상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새 창조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의 영화롭게 된 백성들이 상호 내주하는 것이다(계 21-22장). 인간과 세계의 전체 역사는 심판에 의해 부정성으로부터 해방되어서 새 창조라는 포괄적 실체로 편입될 것이다. 새 창조는 따라서 그 시초로부터 계속된 창조세계 전체의 총괄갱신(recapitulation), 즉 하나님, 그분의 전체 백성, 전체 우주가 하나의 분화된 통일성을 구현할 전체성일 것이다. 그 분화된 통일성은 교제인데, 삼위 하나님이 ‘만유 안에 계시‘게 될(엡 1:10; 고전 15:28을 보라) 그러한 교제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 전일성은 오로지 하나님의 새 창조의 종말론적 전체성이라는 틀 안에서만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 전체 하나님의 백성이 가지는 전일성은 결국 창조된 실제 전체를 위한 구원의 종말론적 충만함이 가지는 교회론적 차원이다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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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와 포용 IVP 모던 클래식스 11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박세혁 옮김, 강영안 해설 / IVP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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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Miroslav Volf)는 『배제와 포용』에서 민족적이고 인종적인 갈등에 대한 이미지로부터 서론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체성과 타자성이다. 그동안의 정체성과 타자성의 문제에 대한 접근과 해법은 사회적 구조(social arrangements)에 집중했었다. 하지만 저자는 사회적 구조에서 사회적 행위자(social agent)로 초점을 돌린다. 결국 이러한 접근이 신학적 접근임을 그는 강조한다. 특히 그는 우리의 신학적 전제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1장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악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며, 분별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 악을 변형하여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포장하기까지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화해자로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열망조차 잃어버렸다. 우리는 종교적 힘을 빌려 우리의 죄악을 교묘하게 강화한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가 있는 곳에는 화해와 평화, 치유가 임한다. 그 곳 가운데 기쁨이 있으며, 참된 용서가 있다. 혹여나 우리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는 곳에 갈등과 반목이 가득하다면, 우리는 다시금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진정한 '회개'가 필요하다.

저자는 ‘거리두기’와 ‘소속하기’에 대해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사도 바울의 신학을 통해 논지를 발전시킨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문화적・가족적 관계를 끊고 모든 가문과 모든 문화의 하나님이신 그분께 순종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그는 기꺼이 이방인이 되고자 했다. 이러한 아브라함식의 ‘떠남’은 주요한 비판을 야기한다. 첫번째 비판은 질 들뢰즈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던 사상이다. 이는 아브라함의 떠남은 목적없는 떠남이며, 이곳 저곳 떠돌아다님을 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떠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며, 특정한 장소로의 떠남이다. 분명한 목표가 있는 떠남이다. 두번째 비판은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으로, 분리와 독립이 아닌 관계망 속에 들어가고, 내재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관계성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묶여 있었다. 또한 그는 유랑하는 공동체에 둘러싸여 있었다. 

볼프는 바울의 신학을 통해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긴장에 대한 해법을 소개한다. 한 분이신 하나님은 보편성을 요구하시며, 보편성은 인류의 평등을 함의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혈통적 약속의 성취인 동시에 하나님께 접근하는 특권으로서의 혈통의 마침표다(68).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다른 몸을 한 몸으로 연합시키신다. 그 연합은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다. 또한 성령하나님은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그 특수성을 가지면서도 하나되게 하신다. 한 몸을 이루게 하신다.

우리는 죄악이 만연한 세상과 이러한 문화 가운데서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모습으로 선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책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방법론을 제시하고, 전제를 두고 있는 부분이기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앞의 질문들은 앞으로의 논리전개를 볼 때 곧 해결될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의 삶 가운데서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 같다. 


볼프(Miroslav Volf)는 『배제와 포용』 2장 ‘배제’에서 인간의 내재된 교묘한 죄의 모습으로서의 배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더불어 사회구조적인 악의 모습으로 배제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볼프는 먼저 서구에서 말하는 ‘포함’이라는 환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들은 상대를 대상화하고, 자신들은 그릇된 행동과는 무관한 사람들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지금 여기’의 악과 벽을 보지 못한다. “배제는 ‘선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악이자 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야만성인 경우가 많다(91).” “포함의 역사 이면은 배제의 역사다(93).” 

볼프는 구별과 배제, 판단을 새롭게 정의한다. 구별은 “상호 의존의 패턴을 낳는 ‘분리하고 결합하는’ 창조적 행위(99)”이다. 구별이란 분리와 결합이다. 단순한 분리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관계를 맺고 있다. 결국 우리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과 구별 짓기의 결과면서 타자와의 관계를 내면화한 결과다(100). 배제는 그러한 관계 맺음 가운데서 극단적 독립을 추구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배제는 상호 의존의 존재로 인식되지 않게 한다. 따라서 배제는 배타적인 것이며, 이는 곧 다른 사람과의 창조적 만남을 가로막는 것이다. 배제적인 판단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은 정당한 ‘구별’과 정당하지 않은 ‘배제’가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고, 적절하고도 겸손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저자는 바울의 갈라디아서 2장 19-20절의 말씀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자아와 중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볼프는 이를 통해 성경에서의 ‘자아’는 중심을 지녔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잘못된 중심으로부터 벗어나야하며, 이러한 행동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자아를 변화시킨다. 새로운 중심으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의 자아는 해체되지 않고, 중심을 재설정하게 된다. 새로운 중심은 자아를 개방한다. 또한 타자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죄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에 ‘죄’라고 명명된 많은 행동들에 대해 새롭게 이름 붙여주신다. 그는 자신의 삶과 사역을 통해 경직되고 이분법적인 논리를 무력하게 하셨다.    

무죄한 사람이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아야한다. 자기 정당화와 기만 등으로 우리의 죄악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는 것들을 걷어내야한다. 우리는 오로지 무죄하신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서만 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 하나님은 자아의 요새로 들어가셔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드신다. 우리의 중심을 해체하시고, 우리가 배제의 힘에 저항할 수 있게 해주신다.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포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볼프의 논증을 통해, 우리 안에 교묘하게 뿌리 박혀 있는 죄악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죄악이 얼마나 깊고 넓게 우리의 자아를 차지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있는지를 보게 되었다. 이러한 교묘한 죄악의 문제에 대하여 아주 세밀하게 논증해나가는데에 감탄하며 읽어나갔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교묘한 이 죄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되고 회복될지에 대한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앞으로의 논지전개가 사뭇 기대된다.


볼프(Miroslav Volf)는 『배제와 포용』 3장 ‘포용’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 인간이 타자와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하는지를 논증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적대하며, 언약을 깨뜨리는 인류를 끝까지 보듬고 품으면서 자신과의 교제의 관계로 받아들이셨다. 이러한 본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하는지를 유추해보고, 우리가 추구해야할 방향에 대한 목표를 세울 수 있다. 저자는 포용으로 이동하고자 할때 필요한 네 가지 계기, 즉 ‘회개’ ‘용서’ ‘자신 안에 타자를 위한 공간 마련하기’ ‘기억의 치유’를 다룬다. 저자는 배제에서 포용으로 나아갈 때, 흔히 설명되어지는 ‘희생자’와 ‘가해자’의 양극적 이해를 피해려 노력한다. 이는 양극성이 없음을 의미하기보다는, 양극성을 지나치게 주장하게 되면서 갖게 되는 또 다른 부정적 영향 때문이다. 갈등이 지속될 수록 이러한 갈등은 혼란스러운 양상을 띄게 된다. 가해자와 희생자의 그 분이 모호해지고, 희생자가 해방자가 될 때 생기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올바른 물음은 ‘최종적인 화해를 이룰 것인가’가 아니라, ‘최종적인 화해가 없더라도,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결국 볼프는 우리가 추구하는 최종적 화해는 인간이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면서 그는 ‘회개’를 강조한다. 이는 완전한 전환이다. 실수 했음을 고백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죄를 범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해자 뿐만 아니라 억압받고 있는 희생자들에게도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과 태도의 변화 없이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참된 변화를 맞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이전 세계에 침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옛 세계의 변혁을 이끌어 낸다.

참된 회개 이후에는 ‘용서’다. 용서는 정의에 대하여 긍정한다. 용서가 어려운 것은 원수를 공동체로부터 배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도 죄인의 공동체로부터 배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배제를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극복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가능하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보여준다.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드러낸다. 용서는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참된 용서를 위한 용기를 얻게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전인류를 포용하신다.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의 원수를 향해 팔을 벌리게 된다. 그들을 포용하고 포옹하기 위해 행동을 취하게 된다.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서 서로를 포용하라는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나님의 포용의 역사 가운데 기억의 잊어버림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역설이다. 우리의 모든 죄를 잊어버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러한 방법을 취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마주하게 된다. 새 언약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관계로 초대받는다. 우리 편에서 언약을 깨뜨렸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편에서 새롭게 언약을 베풀어 주신다. 다른 사람을 포용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나님의 극적인 용서를 경험하고서도 여전히 우리의 자존심이 우리를 발목잡는다. 때로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척 하는 모습도 우리에게 많이 보인다. 실제적인 포용의 과정을 자세하게 서술한 볼프의 책을 통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포용의 과정을 밟아가기를 원한다.


볼프(Miroslav Volf)는 『배제와 포용』 4장 ‘성 정체성’에서 성 정체성과 젠더의 문제를 다룬다. 이 문제는 신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최근에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주제이며, 뜨거운 주제일 것이다. 볼프는 성경 말씀을 토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정체성을 통해 이 주제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고자 한다. 젠더 라는 주제와는 상관이 없을 것 같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를 통해 볼프는 본 장을 시작하고 있다. 볼프는 「우상의 황혼」에서 등장하는 경구, “남자는 여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그의 신, 그의 ‘이상’의 갈빗대로부터”라는 말을 통해 두 가지의 중요한 통찰을 이끌어낸다. 즉 그것은 ‘여자’라고 말할때 의도하는 뜻은 문화적으로 구성된 개념이며, 그 일차적인 행위 주체가 남자들임을 강조한다는 것이고, ‘여성성’의 내용이 남자의 신, 남자의 이상과 관계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볼프는 하나님께서는 성적 구별을 초월한 존재이며, 혹여나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에서 우리의 언어로 통해 젠더가 규정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피조물의 영역에서 유례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바르트(Karl Barth)조차도 인간의 유비에 하나님을 규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에 관해서 어떠한 은유를 사용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특정한 젠더에 규정되어지시는 분이 아니다. 그는 특정한 젠더의 모범이 아니라, 공통된 인간성에 대한 모법이다. 

볼프는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이 “동일자의 논리”에 가깝기에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유의미한 대안을 제시해주기에는 부적합한 삼위일체론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복합적인 성 정체성 관념을 계발하기 위하여 요제프 라칭거(Joseph Aloisius Ratzinger)와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의 삼위일체론을 비교한다. 라칭거는 신적 ‘자기 계시’를 중심으로 하나님 안에 일어나는 대화를 삼위일체 교리의 근거로 삼는다. 또한 성자의 “전적 개방성”, 즉 ‘타자에게 자아를 내어줌’과 ‘자아 안의 타자의 존재’라는 쌍둥이 개념을 말한다. 하지만 이 개념은 성자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켜 내지 못하고, 삼위일체 내의 근본적 서열을 야기하기에 전적으로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볼프는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을 통해 라칭거의 삼위일체론을 더욱 발전시킨다. 몰트만은 ‘위격’과 ‘관계’를 모두 보존하기 원한다. 그리하여 몰트만은 ‘페리코레시스’를 통해 삼위일체론을 설명한다. 

볼프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이상을 세울 것이 아니라, 각각을 구별되는 몸을 통해 그 근거로 삼으면서, 신적 위격의 정체성과 관계성을 통해 젠더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삼위일체와 마찬가지로 젠더는 한 젠더가 다른 젠더로 변형되어서는 안되며, 두 젠더가 하나의 새로운 종합으로 바뀌어서도 안된다. 환원할 수 없는 이원성과 성 정체성의 역동적 구성을 강조하면서도 우리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근본적인 평등을 놓쳐서는 안된다. 결국 자신의 확고한 정체성 가운데서, 타자를 향해 열려있는 관계가 필요하다고 볼프는 강조한다. ‘자기 내어줌’은 ‘자기 상실’이 아니다. 실제적으로 볼 때, (볼프도 우려를 하고 있지만) ‘자기 내어줌’이 온전하게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구체적인 관계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한 쪽의 희생을 통해 다른 한 쪽이 수혜받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 희생이 순환적이고 평등하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지속적으로 한 사람의 희생이 강요받는 구조가 된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혹은 일상의 관계 가운데서도 우리는 매우 빈번하게 이러한 관계를 보게 된다. 따라서 볼프의 통찰과 제안이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가능할지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필요할 듯하다.


볼프(Miroslav Volf)는 『배제와 포용』 6장 기만과 진실에서 기억의 중요성으로 서두를 연다. 우리는 기억의 의무를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는 알게 된 것을 기억해야 하고, 기억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 더불어 볼프는 자아와 타자, 혹은 그 두 문화와 그들의 공통된 역사를 아무 관점 없이 바라보기 보다 그것을 두 관점으로, 즉 ‘여기로부터’ 동시에 ‘거기로부터’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신의 외부로 걸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사회적 경계를 가로질러 타자의 세계로 들어가 잠시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타자를 우리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왜 우리는 ‘여기로부터’ 그리고 ‘거기로부터’ 상황을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진리를 찾기 전에 그것을 찾는 데에 관심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리에 복종하려는 의 지가 없다면 진리에 대한 의지는 유지될 수 없다.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진리를 대면했을 때 그것을 볼 수 있기 위해, 두려움 없이 진리를 외치기 위해, 진실한 삶이 필요하다. 진리에 대한 의지는 타자를 포용하려는 의지, 공동체를 향한 의지를 동반해야 한다. 타자를 포용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진리도 없을 것이며, 사람들 사이에 진리가 없다면 평화도 없을 것이다. 


7장에서 볼프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고통보다는 힘과 권력을 가지신 예수님을 더 따르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폭력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한다. 하지만 폭력을 근절하고자 했던 칼이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고 만다. 우리는 악순환 속에 갇혀 있다. 많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폭력에 반대하여 이성을 통해 정의와 진리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문명화 과정”이 폭력의 감소를 가져온다는 관념은 순진한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이 폭력 자체의 감소를 필연적으로 수반하지는 않았고, 불규칙한 폭력만 감소시켰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것인가? 우리는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 십자가는 폭력을 승인하기 위한 자기 부인이 낳은 비극적 결과가 아니라, 폭력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위해 싸우는 삶에 일어날 수 있는 예견된 종말이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하나님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셔서 불의하고 기만적인 세상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주장이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죄를 스스로 지심으로써 기만적인 세상에 관한 진리를 말씀하셨고,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를 왕좌에 앉히셨다. 계몽주의는 우리에게 이성이나 폭력 중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폭력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 즉 하나님이 진리와 정의를 붙들러 오셨고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라는 지식 속에서 타자를 포용하기 위해 폭력을 기꺼이 흡수하려는 태도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하셨듯이, 속이는 이들과 불의 한 이들을 기꺼이 포용하려는 사람들만이 이성과 담론을 폭력이 아니라 평화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현실세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간다고해도 폭력적인 세상을 단번에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폭력이 아닌 평화와 사랑을 선택하는 삶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한다면, 서서히 세상이 변화되어 갈 것이다. 그렇다면 거대한 악과 폭력 앞에서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평화를 선택할 수 있는 대안적 삶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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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풂과 용서 -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김순현 옮김 / 복있는사람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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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는 1장부터 3장에 걸쳐 베푸는 삶에 대하여 말한다. 1장에서 그는 우리가 만든 그릇된 하나님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실재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점과 한계, 욕망에 따라 대체되어진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실제 모습과는 별개로 하나님을 흥정꾼으로 혹은 산타클로스로 대체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시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힘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선물인 것이다. 볼프는 선물에는 답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선물에 상응하는 것을 드릴 수는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우리가 믿음으로 수용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베풀어야 하는가? 2장에서 볼프는 우리의 베풂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저 주신 하나님을 본받아서 이웃에게 베풀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롭게 흔쾌히 베푸신다. 그것은 자발적인 베풂이다. 우리 또한 다른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기꺼이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뻐하시길 원하신다. 우리는 서로 베푸는 가운데 기쁨을 공유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베푸는 삶을 통해 기뻐하신다. 우리는 얼마나 베풀어야 하는가? 신세진 것보다 더 많이 베풀되,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나 우리의 도덕적 청렴으로 덕을 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것은 평범한 선물이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이다. 

우리 안에 이기심과 교만과 게으름이 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안에 가득하게 있음에도 우리는 어떻게 베풀 수 있는가?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다함없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작은 행동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모든 것을 다 채워주지 못하겠지만, 하나님께서 다양한 은혜의 방편을 통해 후하게 채워주실 것이다. 또한 우리는 나누는 삶을 통해 물질과 타인,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뀜을 알 수 있다. 절대적 영향으로 자리 잡았던 것들이 상대적으로 변하게 된다. 우리는 내면적인 풍성함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경쟁상대로 여기지 않으면서, 우리의 존재까지도 부요하게 되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미 풍성하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기꺼이 즐겁게 나누면, 그 나눔을 통해 우리 또한 풍성하게 되어질 것이다. 명제적이거나 추상적인 앎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이 베푸는 삶이 될 수 있는 과정들이 조금 더 기술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볼프는 4장부터 6장에 걸쳐 용서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악행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용서’라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이전에 잘못한 행동을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이며, 잘못을 행한 사람은 죄책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볼프는 용서가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의 잘못이 없다고 하는 행위가 아님을 말한다. 용서는 철저하게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그것이 잘못된 행위라고 규정하고 명명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용서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용서의 더 적극적인 의미는 가해자에게 선물을 베푸는 것이다. 잘못된 행동이 그릇되었다고 명명하지만, 그 행위의 책임을 가해자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왜 용서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용서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악행을 그저 두지 않으셨다. 잘못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꾸짖으셨다. 그것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났는가? 바로 성부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를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위해서 정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희 의로우시다.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속죄를 베푸심으로 정의의 문제를 해결하신다. 그는 우리의 모든 빚을 갚아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그의 의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져간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손을 활짝 펼쳐,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인다. 또한 우리는 회개를 통해 우리가 용서받아야 할 죄인임을 고백하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회개가 있기 전부터 용서를 베풀어 주시지만,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에게 용서하라고 강권하신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를 철회하신다고 볼프는 강력하게 권고한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악으로 악을 이기려고 한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죄성은, 우리에게 가해한 사람에게 용서를 베풀지 않게 만든다. 실제로 용서는 너무나 힘겹다. 우리를 가해한 사람들이 행한 그 잘못된 행동이 계속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전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데, 우리가 왜 용서해야하는가하는 질문이 머리를 맴돈다. 볼프의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용기를 얻게 된다. 볼프는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힘과 권한까지 주어졌다고 말한다. 우리가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그릇된 기억 혹은 해석으로 가해자에게 또 다른 가해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를 철저한 피해자로 위장하고, 우리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잘못을 잘못 다룰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또한 실수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볼프는 이 책을 통해 용서에 대한 여러가지 질문들, 우리의 실제적인 고민에 세밀하게 응답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용서가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공동체를 통해 용서가 어떻게 일어나는지가 조금 더 많이 다루어졌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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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 예배.세계관.문화적 형성 문화적 예전 시리즈 1
제임스 K. A. 스미스 지음, 박세혁 옮김 / IVP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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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은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더욱 풍성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가 모호했던 많은 크리스쳔들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하지만 정작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한 사람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가?'하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 무기력한 듯 보였다. 더 많은 것을 알게되면 더 많이 행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앎이 더해진다고해서 우리가 원하는 인재상에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저자인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캘빈 칼리지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기독교 철학자이다. 그는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 논의를 뛰어 넘어, '예배'라는 관점으로 인간, 문화, 교회를 바라보고 있다. 또한 이를 통한 대안적인 기독교교육을 모색하고 있다.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 논의가 지성을 위주로 논의되었다면, 새로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통합적 관점에서 인간의 욕구에 더욱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그는 관점이나 관념, 즉 지성적인 작용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한다. 즉 우리의 궁극적인 사랑을 '욕망'으로 표현한다면, 이러한 욕망은 우리에게 그저 전달되는 관점이 아니라, '실천'에 의해서 '형성'되어진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전제에 따른다면 우리의 예배는 다른 차원의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즉 우리의 예전(예배)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게'하는 반복적인 실천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를 제자로 훈련시키는 교육 방식이 된다.


사역을 하면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나 자신 조차도 사고의 변화가 곧바로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음을 경험했다. 좋은 교재나 강의 등을 통해 한 사람이 변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소그룹에서의 교제와 사랑, 관심과 지속적 만남 등이 훨씬 더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그동안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던 사랑과 변화의 관계성에 대해서 이 책을 통해 속시원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저자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속 사회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대응은 지성적인 가르침에 매우 의존되어 있었다. 우리의 전 존재는 이미 세속 사회의 다양한 문화적 공격 혹은 감화? 등을 통해 형성되고 있다. 그러함에도 교회는 대항문화를 형성하지 못하고, 이끌려가는 모양새다. 더욱이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경험과 감성 등이 더욱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는 이전의 모습만 답습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된다. 제임스 스미스는 이러한 세속 문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세계 형성적 예배'를 제안하고 있다. 


온 몸으로 경험하며, 반복적으로 형성해가는 전인격적 앎을 강조하는 저자의 주장을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지적으로 충족시켰다는 점은 참 아이러니하다. 그럼에도 앞으로 이 책은 세계관 논의 뿐만 아니라 예배와 제자도, 하나님 나라 등의 굵직한 주제들을 위한 기본적 전제로서 매우 중요한 텍스트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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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왕의 복음 - 당신의 삶에 예수의 통치가 임하게 하라!
스캇 맥나이트 지음, 박세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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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캇 맥나이트는 이 책을 통해 '복음'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복음'이라고 사용되어진 용어에 근본적인 수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수정이라함은 확장이라는 의미다.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복음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다. 하지만 복음이 구원의 문제로만 축소된다면 그것 역시 복음이 아니다!"(14) 스캇은 예수가 전하고 살아낸 복음과 바울의 복음이 다르지 안하고 말한다. 바울의 복음은 구원의 방법을 포함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온 세계의 합법적이고 영예로운 주님이자 왕이며 구원자이신 예수 이야기에 중점을 둔다"(15)라고 말한다.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는 오늘까지의 대부분의 복음전도가 누군가를 결단시키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의도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제자 삼기를 목표로 하는 복음전도가 아님을 의미한다. "결단에 초점을 맞추는 복음전도는 복음의 의도를 온전히 구현하지 못하는 반면, 제자 삼기를 목표로 하는 복음전도는 서두르지 않고 예수님과 사도들의 온전한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이야기로서의 구원을 말한다. 성경의 전체 이야기를 통해 참되고 온전한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이스라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 이야기로 결론을 맺는다. 사도적 복음 또한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저자는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사도적 복음이 무엇인지를 세부적으로 설명한다. "바울의 복음은 예수님의 승천과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고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때의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성취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83) 우리는 개인적인 구원에 관한 이야기로 복음을 축소시키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의 복음은 훨씬 더 광범위하고 통전적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복음의 이야기를 만유 가운데 계신 하나님, 창조로부터 최종적 성취까지로 나아가는 이야기로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이 복음을 압도하게 되었을까? 저자는 예수님 시대부터 종교개혁기까지 교회를 지배했던, 고린도전서 15장을 기초로 세워진 '복음의 문화'가 종교개혁기에 구원의 문화로 재편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당시의 상황(가톨릭 교회의 총체적 문제)으로부터 교회를 지키려는 움직임이었다. 저자는 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이후에 미국의 부흥 운동과 근본주의자와 현대주의자들간의 문화 전쟁을 통해 강력한 복음주의 문화가 만들러졌으며, 그 결과로 복음의 문화가 상실되었다고 한탄한다.(120)


그는 복음서의 이야기가 바로 복음이며, 사복음서는 사도들이 예수님에 관하여 기억하고 가르쳤던 바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는 고린도전서 15장의 사도적 복음 전승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며, 내용적인 측면에서 복음서는 고린도전서 15장이 확장되고 해설되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복음을 선포하셨는가? 예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이라고 선포하셨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자신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확신하셨다. 오리게네스는 이를 아주 명확하게 아우토바실레이아, 즉 "그 나라 자체"라고 표현했다(158-159).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복음서에서의 복음', '바울의 사도적 복음'을 거쳐, '베드로의 복음 설교'로 나아간다. 사도행전에서의 일곱 혹은 여덟 편의 복음 설교(2, 3, 4, 10, 11, 13, 14, 17장)를 통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과 앞에서 살펴보았던 복음의 상호연관성을 살핀다. 사도들의 복음 설교는 이스라엘 이야기가 전해졌으며, 예수님의 이야기 전체가 복음으로 선포되었다. 또한 예수님에 관한 말로 복음을 요약했으며, 당시의 정황에 맞게 적용함으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더불어 사람들에게 응답을 촉구했다. 결론적으로 사도적 복음 전승과 사복음서 안의 복음, 예수님의 복음, 사도행전 안에 있는 복음전도 설교 이 네 증언은 복음이 동일한 것임을 말한다. 즉, 이스라엘의 메시아시며 만유의 주님이시고 다윗의 혈통에서 난 구원자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 안에서 성취된 이스라엘 이야기다.


이를 통해 저자는 오늘날의 복음전도가 어떠해야하는지를 말한다. 복음은 이스라엘 이야기에 의해 규정되고 있으며, 예수님의 주 되심을 중심으로 하고, 사람들의 응답을 촉구하며, 구원하며 구속한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 오늘날의 복음전도가 되어야한다. 복음의 문화는 우리가 그 이야기의 사람들이 되어야함을 말하며, 우리는 더욱 예수님 이야기에 몰입해야 한다. 우리는 현 시대 가운데 적절하게 반응하며, 예수의 복음을 말해야 한다. 이는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상대주의 등에 맞서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아주 짧게 언급되지만, 이후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서 더욱 확장되고 구체화된다) 이 일을 감당하며, 사랑과 긍휼과 섬김을 통해 복음의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책은 아주 명료하지만 풍성하게 복음을 새롭게 정의한다. 사실 재정의한다기보다 본래의 의미를 찾아내고, 회복시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나오는 풍부한 복음을 새롭게 회복해야 한다. 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이며, 살아내신 복음이다.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이며, 성경 전체를 통해 면면히 흐르고 있는 복음이다. 우리의 가치과 세계관으로 복음을 재단할 것이 아니라, 성경과 예수, 사도들이 전하고 가르친 그 복음에 우리의 눈을 맞추고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할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후속적인 연구에 대한 길잡이 역할을 함에 있다. 여기서 소개되고 있는 저자들과 책은 이미 국내에 소개되고 번역되어 있는 것이 많다. 따라서 이 책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소개되고 있는 혹은 추천하는 저자들의 저서를 계속적으로 탐독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그러한 학문적 열의에 충분한 자극제가 된다. 필자도 이 책을 통해 톰 라이트, 제임스 던, 달라스 윌라드의 저서를 읽고 정리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스캇 맥나이트의 다른 저서들도 다시 한번 정리해야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쉬우면서도 깊이있게 복음을 소개하는 이 책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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