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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와 포용 ㅣ IVP 모던 클래식스 11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박세혁 옮김, 강영안 해설 / IVP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볼프(Miroslav Volf)는 『배제와 포용』에서 민족적이고 인종적인 갈등에 대한 이미지로부터 서론을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체성과 타자성이다. 그동안의 정체성과 타자성의 문제에 대한 접근과 해법은 사회적 구조(social arrangements)에 집중했었다. 하지만 저자는 사회적 구조에서 사회적 행위자(social agent)로 초점을 돌린다. 결국 이러한 접근이 신학적 접근임을 그는 강조한다. 특히 그는 우리의 신학적 전제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1장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악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며, 분별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 악을 변형하여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포장하기까지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화해자로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열망조차 잃어버렸다. 우리는 종교적 힘을 빌려 우리의 죄악을 교묘하게 강화한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가 있는 곳에는 화해와 평화, 치유가 임한다. 그 곳 가운데 기쁨이 있으며, 참된 용서가 있다. 혹여나 우리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는 곳에 갈등과 반목이 가득하다면, 우리는 다시금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진정한 '회개'가 필요하다.
저자는 ‘거리두기’와 ‘소속하기’에 대해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사도 바울의 신학을 통해 논지를 발전시킨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문화적・가족적 관계를 끊고 모든 가문과 모든 문화의 하나님이신 그분께 순종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그는 기꺼이 이방인이 되고자 했다. 이러한 아브라함식의 ‘떠남’은 주요한 비판을 야기한다. 첫번째 비판은 질 들뢰즈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던 사상이다. 이는 아브라함의 떠남은 목적없는 떠남이며, 이곳 저곳 떠돌아다님을 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떠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며, 특정한 장소로의 떠남이다. 분명한 목표가 있는 떠남이다. 두번째 비판은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으로, 분리와 독립이 아닌 관계망 속에 들어가고, 내재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관계성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묶여 있었다. 또한 그는 유랑하는 공동체에 둘러싸여 있었다.
볼프는 바울의 신학을 통해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긴장에 대한 해법을 소개한다. 한 분이신 하나님은 보편성을 요구하시며, 보편성은 인류의 평등을 함의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혈통적 약속의 성취인 동시에 하나님께 접근하는 특권으로서의 혈통의 마침표다(68).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다른 몸을 한 몸으로 연합시키신다. 그 연합은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다. 또한 성령하나님은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그 특수성을 가지면서도 하나되게 하신다. 한 몸을 이루게 하신다.
우리는 죄악이 만연한 세상과 이러한 문화 가운데서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모습으로 선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책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방법론을 제시하고, 전제를 두고 있는 부분이기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앞의 질문들은 앞으로의 논리전개를 볼 때 곧 해결될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의 삶 가운데서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 같다.
볼프(Miroslav Volf)는 『배제와 포용』 2장 ‘배제’에서 인간의 내재된 교묘한 죄의 모습으로서의 배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더불어 사회구조적인 악의 모습으로 배제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볼프는 먼저 서구에서 말하는 ‘포함’이라는 환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들은 상대를 대상화하고, 자신들은 그릇된 행동과는 무관한 사람들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지금 여기’의 악과 벽을 보지 못한다. “배제는 ‘선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악이자 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야만성인 경우가 많다(91).” “포함의 역사 이면은 배제의 역사다(93).”
볼프는 구별과 배제, 판단을 새롭게 정의한다. 구별은 “상호 의존의 패턴을 낳는 ‘분리하고 결합하는’ 창조적 행위(99)”이다. 구별이란 분리와 결합이다. 단순한 분리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관계를 맺고 있다. 결국 우리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과 구별 짓기의 결과면서 타자와의 관계를 내면화한 결과다(100). 배제는 그러한 관계 맺음 가운데서 극단적 독립을 추구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배제는 상호 의존의 존재로 인식되지 않게 한다. 따라서 배제는 배타적인 것이며, 이는 곧 다른 사람과의 창조적 만남을 가로막는 것이다. 배제적인 판단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은 정당한 ‘구별’과 정당하지 않은 ‘배제’가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고, 적절하고도 겸손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저자는 바울의 갈라디아서 2장 19-20절의 말씀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자아와 중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볼프는 이를 통해 성경에서의 ‘자아’는 중심을 지녔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잘못된 중심으로부터 벗어나야하며, 이러한 행동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자아를 변화시킨다. 새로운 중심으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의 자아는 해체되지 않고, 중심을 재설정하게 된다. 새로운 중심은 자아를 개방한다. 또한 타자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죄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에 ‘죄’라고 명명된 많은 행동들에 대해 새롭게 이름 붙여주신다. 그는 자신의 삶과 사역을 통해 경직되고 이분법적인 논리를 무력하게 하셨다.
무죄한 사람이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아야한다. 자기 정당화와 기만 등으로 우리의 죄악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는 것들을 걷어내야한다. 우리는 오로지 무죄하신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서만 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 하나님은 자아의 요새로 들어가셔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드신다. 우리의 중심을 해체하시고, 우리가 배제의 힘에 저항할 수 있게 해주신다.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포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볼프의 논증을 통해, 우리 안에 교묘하게 뿌리 박혀 있는 죄악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죄악이 얼마나 깊고 넓게 우리의 자아를 차지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있는지를 보게 되었다. 이러한 교묘한 죄악의 문제에 대하여 아주 세밀하게 논증해나가는데에 감탄하며 읽어나갔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교묘한 이 죄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되고 회복될지에 대한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앞으로의 논지전개가 사뭇 기대된다.
볼프(Miroslav Volf)는 『배제와 포용』 3장 ‘포용’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 인간이 타자와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하는지를 논증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적대하며, 언약을 깨뜨리는 인류를 끝까지 보듬고 품으면서 자신과의 교제의 관계로 받아들이셨다. 이러한 본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하는지를 유추해보고, 우리가 추구해야할 방향에 대한 목표를 세울 수 있다. 저자는 포용으로 이동하고자 할때 필요한 네 가지 계기, 즉 ‘회개’ ‘용서’ ‘자신 안에 타자를 위한 공간 마련하기’ ‘기억의 치유’를 다룬다. 저자는 배제에서 포용으로 나아갈 때, 흔히 설명되어지는 ‘희생자’와 ‘가해자’의 양극적 이해를 피해려 노력한다. 이는 양극성이 없음을 의미하기보다는, 양극성을 지나치게 주장하게 되면서 갖게 되는 또 다른 부정적 영향 때문이다. 갈등이 지속될 수록 이러한 갈등은 혼란스러운 양상을 띄게 된다. 가해자와 희생자의 그 분이 모호해지고, 희생자가 해방자가 될 때 생기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올바른 물음은 ‘최종적인 화해를 이룰 것인가’가 아니라, ‘최종적인 화해가 없더라도,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결국 볼프는 우리가 추구하는 최종적 화해는 인간이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면서 그는 ‘회개’를 강조한다. 이는 완전한 전환이다. 실수 했음을 고백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죄를 범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해자 뿐만 아니라 억압받고 있는 희생자들에게도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과 태도의 변화 없이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참된 변화를 맞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이전 세계에 침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옛 세계의 변혁을 이끌어 낸다.
참된 회개 이후에는 ‘용서’다. 용서는 정의에 대하여 긍정한다. 용서가 어려운 것은 원수를 공동체로부터 배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도 죄인의 공동체로부터 배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배제를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극복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가능하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보여준다.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드러낸다. 용서는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참된 용서를 위한 용기를 얻게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전인류를 포용하신다.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의 원수를 향해 팔을 벌리게 된다. 그들을 포용하고 포옹하기 위해 행동을 취하게 된다.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서 서로를 포용하라는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나님의 포용의 역사 가운데 기억의 잊어버림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역설이다. 우리의 모든 죄를 잊어버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러한 방법을 취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마주하게 된다. 새 언약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관계로 초대받는다. 우리 편에서 언약을 깨뜨렸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편에서 새롭게 언약을 베풀어 주신다. 다른 사람을 포용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나님의 극적인 용서를 경험하고서도 여전히 우리의 자존심이 우리를 발목잡는다. 때로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척 하는 모습도 우리에게 많이 보인다. 실제적인 포용의 과정을 자세하게 서술한 볼프의 책을 통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포용의 과정을 밟아가기를 원한다.
볼프(Miroslav Volf)는 『배제와 포용』 4장 ‘성 정체성’에서 성 정체성과 젠더의 문제를 다룬다. 이 문제는 신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최근에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주제이며, 뜨거운 주제일 것이다. 볼프는 성경 말씀을 토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정체성을 통해 이 주제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고자 한다. 젠더 라는 주제와는 상관이 없을 것 같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를 통해 볼프는 본 장을 시작하고 있다. 볼프는 「우상의 황혼」에서 등장하는 경구, “남자는 여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그의 신, 그의 ‘이상’의 갈빗대로부터”라는 말을 통해 두 가지의 중요한 통찰을 이끌어낸다. 즉 그것은 ‘여자’라고 말할때 의도하는 뜻은 문화적으로 구성된 개념이며, 그 일차적인 행위 주체가 남자들임을 강조한다는 것이고, ‘여성성’의 내용이 남자의 신, 남자의 이상과 관계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볼프는 하나님께서는 성적 구별을 초월한 존재이며, 혹여나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에서 우리의 언어로 통해 젠더가 규정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피조물의 영역에서 유례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바르트(Karl Barth)조차도 인간의 유비에 하나님을 규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에 관해서 어떠한 은유를 사용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특정한 젠더에 규정되어지시는 분이 아니다. 그는 특정한 젠더의 모범이 아니라, 공통된 인간성에 대한 모법이다.
볼프는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이 “동일자의 논리”에 가깝기에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유의미한 대안을 제시해주기에는 부적합한 삼위일체론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복합적인 성 정체성 관념을 계발하기 위하여 요제프 라칭거(Joseph Aloisius Ratzinger)와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의 삼위일체론을 비교한다. 라칭거는 신적 ‘자기 계시’를 중심으로 하나님 안에 일어나는 대화를 삼위일체 교리의 근거로 삼는다. 또한 성자의 “전적 개방성”, 즉 ‘타자에게 자아를 내어줌’과 ‘자아 안의 타자의 존재’라는 쌍둥이 개념을 말한다. 하지만 이 개념은 성자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켜 내지 못하고, 삼위일체 내의 근본적 서열을 야기하기에 전적으로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볼프는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을 통해 라칭거의 삼위일체론을 더욱 발전시킨다. 몰트만은 ‘위격’과 ‘관계’를 모두 보존하기 원한다. 그리하여 몰트만은 ‘페리코레시스’를 통해 삼위일체론을 설명한다.
볼프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이상을 세울 것이 아니라, 각각을 구별되는 몸을 통해 그 근거로 삼으면서, 신적 위격의 정체성과 관계성을 통해 젠더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삼위일체와 마찬가지로 젠더는 한 젠더가 다른 젠더로 변형되어서는 안되며, 두 젠더가 하나의 새로운 종합으로 바뀌어서도 안된다. 환원할 수 없는 이원성과 성 정체성의 역동적 구성을 강조하면서도 우리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근본적인 평등을 놓쳐서는 안된다. 결국 자신의 확고한 정체성 가운데서, 타자를 향해 열려있는 관계가 필요하다고 볼프는 강조한다. ‘자기 내어줌’은 ‘자기 상실’이 아니다. 실제적으로 볼 때, (볼프도 우려를 하고 있지만) ‘자기 내어줌’이 온전하게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구체적인 관계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한 쪽의 희생을 통해 다른 한 쪽이 수혜받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 희생이 순환적이고 평등하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지속적으로 한 사람의 희생이 강요받는 구조가 된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혹은 일상의 관계 가운데서도 우리는 매우 빈번하게 이러한 관계를 보게 된다. 따라서 볼프의 통찰과 제안이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가능할지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필요할 듯하다.
볼프(Miroslav Volf)는 『배제와 포용』 6장 기만과 진실에서 기억의 중요성으로 서두를 연다. 우리는 기억의 의무를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는 알게 된 것을 기억해야 하고, 기억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 더불어 볼프는 자아와 타자, 혹은 그 두 문화와 그들의 공통된 역사를 아무 관점 없이 바라보기 보다 그것을 두 관점으로, 즉 ‘여기로부터’ 동시에 ‘거기로부터’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신의 외부로 걸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사회적 경계를 가로질러 타자의 세계로 들어가 잠시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타자를 우리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왜 우리는 ‘여기로부터’ 그리고 ‘거기로부터’ 상황을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진리를 찾기 전에 그것을 찾는 데에 관심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리에 복종하려는 의 지가 없다면 진리에 대한 의지는 유지될 수 없다.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진리를 대면했을 때 그것을 볼 수 있기 위해, 두려움 없이 진리를 외치기 위해, 진실한 삶이 필요하다. 진리에 대한 의지는 타자를 포용하려는 의지, 공동체를 향한 의지를 동반해야 한다. 타자를 포용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진리도 없을 것이며, 사람들 사이에 진리가 없다면 평화도 없을 것이다.
7장에서 볼프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고통보다는 힘과 권력을 가지신 예수님을 더 따르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폭력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한다. 하지만 폭력을 근절하고자 했던 칼이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고 만다. 우리는 악순환 속에 갇혀 있다. 많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폭력에 반대하여 이성을 통해 정의와 진리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문명화 과정”이 폭력의 감소를 가져온다는 관념은 순진한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이 폭력 자체의 감소를 필연적으로 수반하지는 않았고, 불규칙한 폭력만 감소시켰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것인가? 우리는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 십자가는 폭력을 승인하기 위한 자기 부인이 낳은 비극적 결과가 아니라, 폭력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위해 싸우는 삶에 일어날 수 있는 예견된 종말이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하나님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셔서 불의하고 기만적인 세상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주장이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죄를 스스로 지심으로써 기만적인 세상에 관한 진리를 말씀하셨고,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를 왕좌에 앉히셨다. 계몽주의는 우리에게 이성이나 폭력 중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폭력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 즉 하나님이 진리와 정의를 붙들러 오셨고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라는 지식 속에서 타자를 포용하기 위해 폭력을 기꺼이 흡수하려는 태도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하셨듯이, 속이는 이들과 불의 한 이들을 기꺼이 포용하려는 사람들만이 이성과 담론을 폭력이 아니라 평화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현실세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간다고해도 폭력적인 세상을 단번에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폭력이 아닌 평화와 사랑을 선택하는 삶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한다면, 서서히 세상이 변화되어 갈 것이다. 그렇다면 거대한 악과 폭력 앞에서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평화를 선택할 수 있는 대안적 삶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