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커 래빗홀 YA
이희영 지음 / 래빗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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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와 함께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아프다. 이희영 작가는 아마... 그 간절함을 밀도 높은 생생함으로 작품 속에서 경험하게 해줌으로써 누구에게나 유일한 현실이자 삶인 현재에 더 집중하게 해줄 것이다.

 

평생을 오직 한 사람으로 살아간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수많은 들이 찰나에 존재했다. 덧없이 사라지고 다시 존재함을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탈피하고 그 껍질을 버리는 갑각류처럼,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애틋하고 서러운 나의 기억들과 함께 읽게 될 반가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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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중년의 선입견이 이토록 강고한 사람이 되었을까. 표재와 소재에서 짐작한 것보다 훨씬 더 묵직한, 철학적인 토로와 고찰을 이어나가는 구성에, 청소년 소설 맞지, 하는 질문이 거듭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전작 <페인트>도 무척 진지하고 심층적인 소재와 메시지였는데, 빨리빨리 대충대충 피상적인 현실의 분위기에 시달려서인지, 그렇게 휩쓸려 사는 게 편해서 동조하며 살아서인지, 결정에 이르기까지 오래 선택을 고민하는 과정이 오랜만의 감동이라서 진짜 같아서 먹먹해진다.

 

이렇듯 말도 안 되는 상상이 현실이 됐는데 나우는 오히려 주춤거렸다. 거짓말 같은 행운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 전부를 잃어야 하니까.”

 

과거로 돌아가 친구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내 삶이 바뀌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과거의 장면을 바꿀 것인가. 그 선택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없을 결과라고 하더라도?

 

이런 힘든 일은 아무에게도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지만, 작가가 독자를 데려가는 곳은, 미리 상상할 수 있는 흔한 둘 중 하나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래서 기대한 만큼 좋았고 고마웠다.

 

인생에서 뒤늦은 ‘if’는 의미 없는 상상에 불과했다. (...) 이 모든 지나간 if는 삶에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인간이라 말할 수 있었다. 무의미하게 과거를 생각하고 그때마다 반복되는 후회로 아쉬워하니까.”

 

지금은 그것만생각하는 법을 종종 잊는다. 생각은 내 몸이 경험하지 못한 속도로 사방으로 달려 나간다. 도착지가 실상이 아니라서 생각은 곧 길을 잃는다. 아무리 고민해도 내 생각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들은 너무 많다.

 

길이 없으면 어떻게든 만들기라도 할 텐데, 갈 수 있는 곳도, 가야 할 곳도, 가고 싶은 곳조차 없었다. 어디를 도착하면 이 모든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한다고 찾을 수 있는 답이 몇 개나 될까, 행동한다고 유의미하게 바뀌는 미래는 얼마나 될까. 하지만, 생각과 행동을 빼면 다른 살아갈 방법이 뭐가 있을까.

 

친구의 생명이 걸린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질문도 답도 친구와는 관계가 없어서, 오랜 숙원처럼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 같아서, 청량한 바람을 들이킨 듯 머리가 시원해졌다. 우리가 천착하는 건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들이다.

 

신은 인간에게 미래를 준비할 혜안을 빼앗는 대신, 그 미래가 현실로 닥쳤을 때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버텨 낼 힘을 주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나우는 깨달았다.”

 

우주와 세상의 비밀을 조금 알았을 땐, 막 종교에 입문한 것처럼 완고해졌다. 인간의 짧은 수명을 반(넘어) 살아보니, 겨우 생각들이 말랑해진다. 시공간을 감각하는 것도, 몹시 자연스럽게 시제를 넘나들줄 알게 되었다.

 

작품에서의 시간 여행은, 사랑하는 상대의 눈을 잠시만 바라봐도,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고, 직접 경험한 지난 삶조차 내 것이라 할 만한 게 있었는지, 얼마나 공고히 실재했는지 지금은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상처를 지닌 마음들이 상처를 입은 채로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매일 배우는 중이다. 매일 애틋하고 매일 응원하는 중이다. 읽고 나니 주인공 나우’*의 이야기가 치열한 고민을 차분하게 함께 나눈 귀한 만남처럼 느껴진다. * 지금,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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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을 걷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1
김솔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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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 틈새... 책을 처음 펼친 날은 비 오는 날이었는데 산책이 가고 싶었다. 공간 사이를, 시간의 틈을, 혼몽하게 오래, 고요하게 깊게.

 

뇌졸증이 찾아온 그 밤을 도살장의 한낮처럼 환하게 기억한다. (...) 네발짐승처럼 기어서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어둠이 집의 창자를 절반 이상 파먹은 뒤였다.”

 

뇌졸증은 두려운 질환이지만, 뇌졸중으로 주인공처럼 뇌가 두 쪽이 나지 않아도, 분리와 단절과 파편화는 매일 진행 중이다. 내가 경험한 과거의 나를 모두 기억하지 못하는 현재의 나는 얼마를 영원히 잃고 사는 낯선 존재인지. 얼마나 짧은 순간, ‘존재라고 믿는 결합체는 분해되고 마는 것인지.

 

내게 시공간은 물리학이 정의한 세계였다. 시간의 일방향성부터 배웠고, 이해하지 못한 해밀토니안Hamiltonian 방식의 우주는 시제 없음의 시제와 수축과 확장만이 존재하는 막막 공간이었다.

 

사회 속에서 나이 먹어가며 살다보니, 현실 사회 여기저기 뚫린 시공간의 여백들이 점점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 여백을 떠도는 말들이 소란스러웠다. 누군가는 그 여백을 채워야한다는 강박으로 살았고, 누군가는 비어있는상태를 죄나 적처럼 무찔러야 한다고 믿었다.

 

한꺼번에 죽이지 않고 조금씩 죽이고 있는 이유는 죽음의 신만이 알고 있을 것인데, 그걸 굳이 알고 싶진 않다.”

 

작가를 모르고 읽은 첫 작품에 나는 얕은 감탄사를 계속 내뱉었다. 이렇게 우울감의 타격이 심한 날에도, 깜빡이며 녹아 흐르는 촛불처럼 가슴 한가운데 기쁨이 명멸하곤 했다. 어둡고 건조하고 무거운 범죄 같은 분위기가 다 그만 두고 싶은 어두운 내 기분에 쿵쿵 위로가 되는 시간이었다.

 

불가능한 미션을, 신탁을 받은 것이라 믿는 이들은, ‘뛰어넘을 수 없는 것들을 뛰어넘으라고’. 불가능은 오직 노력 부족, 용기 부족, 실천 부족이라는 가스라이팅을 믿고 퍼트렸다.

 

지금보다 더 끔찍한 인생을 살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몸을 잔뜩 웅크리고 혀를 깊게 삼켰으며 숨을 오래 참았다. 하지만 짓누를수록 침묵은 더욱 유려해졌다.”

 

자연의 시공간과 같아야하지만, 다른 인간 사회의 수많은 간격과 단절은 인간을 집어 삼키기도 했다. 뇌를 가른 틈 사이로 빠져나가는 인간적인 것들과, 하천과 그 주변에 응축되고 굳어진 역사와 모순들은, 때론 이야기로 흐르다 넘치기도 하고 한 자리에 고여 썩기도 했다.

 

내게서 가장 먼저 사라진 부위가 사랑을 주관했고,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것들은 증오의 찌꺼기라고 굳게 믿겠다. (...) 마음이 이미 도달해 있는 곳에 몸이 미처 닿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럽다.”

 

행간이라는 시공간을 걷는 일은, 한 개인의 내면과 삶에 죽죽 그어진, 소통을 그만 둔 조각난 파편들을 주워 모으는 일 같기도 했다. 어리석고 미숙한 실수들로 이어지고 채워진 삶의 궤적, 현재를 만들었기에 제거 불가능한 과거에 결국 잡히고만 여생. 후회가 된다면 변화가 있을까.

 

괴로운 밥벌이에 몰입하느라 너와 나는 육체의 영혼 어느 쪽도 단련하지 못한 채 늙었다. (...) 순차적으로 전개되지 않는 인생에서 기억과 망상을 거의 구분할 수 없었다.”

 

삶은 정말 이야기일까, 완결 없이 중단되는 결말이 더 많을 지라도. 들키느니 파괴해버리자는 그 금고 속에, 내가 담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가뿐히 건너뛸 수 있으며 싫증이 날 때쯤 새로운 것으로 대체될 수도 있는 것이 인생에 몇 개나 있었나, 있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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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 양장본
이브 엔슬러 지음, 김은지 옮김 / 푸른숲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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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결심이 기록된, 해방의 언어, 라고 읽기 전부터 많은 추천을 받았다. 펼치는 순간부터 모든 문장을 세 번 씩 읽으란 신탁을 받은 듯 읽고 다시 읽는다. 그래도 아쉬워 필사를 해본다.


이것은 사유reckoning에 관한 이야기다.”

 

사유하기와 그것에서 파생되는 되돌아보기이해하기책임지기 같은 것들은 시간과 관심을 요구한다아주 길고 고요한 진공 상태가 필요하다.”

 

사유의 과정은 기억하기인식하기책임지기의 행위를 수반한다눈앞에 있으나 우리가 바라보기를 거부하는 바로 그것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들여다보고 살펴보고 수치심을 기꺼이 끌어안으라고 요구한다사유는 개인과 집단의 책임과 그 둘이 언제어떻게 교차하는 지를 결정한다진정한 사유에는 실수와 잘못악행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필요하다면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는 일까지도 뒤따른다.”

 

과격한 허위 정보들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사유하기란 평범한 행위가 아니다사유는 가짜 뉴스와 그럴듯한 거짓말거북한 역사를 덮으려는 우파의 간교한 시도에 대한 해독제다.”

 

글쓰기는 하나의 생존 방식일 수도 있다혼란을 염려하는 방식타인의 횡포에 휩쓸리기를 거부하는 방식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 흘리는 방식.”

 

이제야 내가 얻은 가장 깊은 깨달음은 어쩌면 평생 두려워했던 가 사실은 전혀 두려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왔을 지도 모른다. (...) 그리고 내가 존재하고 불러온 그것은 어쩌면떠나기 전 지금 이곳에서 만나는 다른 이들의 손을 그저 잠시나마 꼭 붙잡아 보려는 타오르는 갈망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읽기 시작한 후 서문글은 타올랐다’ - 1장 도입 전 - 만 거듭 읽는 색다른 경험을 한다. 10년 전 다른 작품을 번역본으로 읽었을 때와 많이 다른 느낌이다. 원작자도, 번역가도, 독자인 나도 모두 달라졌으니 당연한 것인가.

 

읽는 내내 행복하고, 줄어드는 분량에 아쉬울 책이다. 이렇게 시작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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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은 무엇이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조야한 감정들의 침전물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란 말일까?”

 

구역질을 하기 싫어서 이를 물고 참았더니, 눈물이 차올랐다. 울다 지치는 게 싫어서 눈물도 참았더니,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눈에 비친 문자들이 온 몸의 감각으로 전해지는, 그렇게 읽게 되는, 망가지고 부서지고 혹은 살아남고 더 많이 죽임 당한 이야기들.

 

눈물은 나를 무너뜨려 아무것도 아닌, 더는 사실로 똘똘 뭉쳐진 무언가가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정의, 권위, 명성에 매달리던 내 욕구는 산산조각 나 액체의, 비정형의. 내가 알아볼 수 없는, 나와 닮지 않은, 내가 아닌 것이 되었다. 오로지 걸쭉한 진짜만이 남았다. 곤죽이 된 피투성이 덩어리, 그것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지금 읽는 이 내용을 빨리 넘길까, 하는 생각을 너무 자주 했다. 대신... 잠시 멈췄다 다시 호흡을 들이켜고 읽기 시작했다. 힘든 일을 겪은 이들이 저기 있고, 그걸 듣고 본 이들이 저기 있고, 그들을 치료하고 살리는 이들이 저기 있고, 기록한 이들도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안전한 곳에서 읽기만 하면 되는 일이란 걸 거듭 상기했다.

 

제가 녹아들 수 있게 해주세요. 뒤섞이게 해주세요. 갑옷처럼 단단한 저의 자아를 해방시켜 주세요. 원 안에 받아들여지게 해주세요. 저를 앞세우지 않게 해주세요. (...) 그리하여 나의 차례, 나의 메시지, 나의 몫, 나의 작품, 나의 순간을 걱정하는 마음을 버리게 해주세요. 마침내 원 안에 앉을 준비가 되게 해주세요.”

 

운 좋게 안전하고 협소한 경험 속에서만 살면서, 경험하지 못한 일들은 부재와 같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엄연히 존재하는, 현재 진행 중인, 더욱 확대되고 악화될 가능성이 더 높은, 폭력과 전쟁 속에서 값싼 무기로 공격당하는 이들. 21세기에 무슨 전근대적인 전쟁이야, 했던 말이 부끄러워 눈물이 또 차오르고, 참을 때마다 배가 무지근하게 아파왔다.

 

이것은 경제 전쟁입니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대량 강간이 일어나는 모든 곳에 콜탄이 묻혀 있어요. (...) 세상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하려고 여성들이 유린당하고 살해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쪽에서 살고 있는 나는, “고통에 찬 이들의 울부짖음을 가볍게 무시해 버리지 않기 위해, 기껏 새로운 디자인에 혹해 전자기기를 바꾸지 않는 다는 결심과, 반전 지지 서명과 후원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세상에 있는 수천 명의 또 다른 여성들을 생각한다. 강간을 현실에 존재하는 문제로 만들어 내고 우리를 향한 이 병적 폭력 현실과 증오를 끝내기 위해 오랜 시간 자신의 마지막 세포까지 모조리 소진하는, 사력을 다해 노력하는 여자들을 생각한다.”

 

생존한 여성들이 전하는 으로 향하는 이야기가 빛나고, 생존자인 저자의 기록과 고통의 해체작업이 눈부시고, 수없이 절망이 이어지고 더 큰 절망감이 들어도 멈추지 않고 애쓰는 분들이 찬란하다. 지금, 이쪽의 나의 최선이란 끝까지 읽고 기록하는 것밖에 없다. 부디 더 많은 분들이 함께 읽어주시기를 부탁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무엇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왔을까? 무엇이 우리, 그러니까 이 지구상에 살아 있는 우리 한 명, 한 명을 인간으로 만들까? 어떤 사랑이, 얼마나 깊은 사랑이, 얼마나 사납고 맹렬한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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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가 되어
김아직 지음 / 사계절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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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말대로 잃어버린 양말짝들은 집 안에서 발견되었다. 돌돌 말리고 먼지가 잔뜩 묻은 채로 언제나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이것이 잃어버린 양말 이론의 시발점이다.”

 

물총을 든 컬러풀한 인물의 표지에 중년의 선입견이 또 발동해서, 작고 두껍지 않은 외양의 흥미로운 청소년 문학인가 했는데, 작품의 강렬함은 추리 미스터리 원작의 공포 액션 영화를 본 것처럼 느껴졌다.

 

먼지가 우주 내 모든 존재의 전생이자 미래라는 천문학적 낭만을 좋아하는데, 이 작품을 읽고 나니, 먼지 자체가 괴생물처럼 느껴진다. 얼핏 물살이(물고기)처럼 들리는 이름 - 강유어 - 의 주인공은 괴생물과의 싸움에서 이름이 복선인 듯한 무기를 찾아낸다.

 

강유어의 동생 강유슬이 실종되었다. (...) 최초 발견자에 따르면 사람들은 온데간데없고 건물 내부에 흙먼지만 수북했다고 한다.”

 

스케일도 큰 추리 미스터리가 호러 스릴러로 느껴진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을 먼지로 만드는 괴물이, 강유어의 현실에서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며, 내 현실에도 있어서, 사회의 그늘을 넓히고 정의를 꺾고 삶을 일그러트린다. 가족과 사회에서 점점 비가시적이 되고 밀려나는 이들에게, 괴물 타르디그는 낯선 존재이기만 할까.

 

오하석이 있는 취업의 세계도, 아빠가 있는 가족이란 세계도 유어가 뚫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더럽고 치사한 기분을 그 세계들 곁에서 먼지처럼 떠돌았으니, 유어는 이제 다른 세계를 찾아 떠나고 싶었다.”

 

세상이 망하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이들의 세상은 벌써 망한 상태가 아니었나 하는 슬픈 생각을 했다. 더구나 K- 장녀, 맏이라는 주인공에게 지워진 저주와 난치병”... 물리는 방식이 끔찍했지만, 어느 쪽이 더 끈질기게 무시무시한 병증인지가 자꾸 헷갈린다.

 

한 줌의 흙먼지로 인류의 형이상학과 전통들, 앞으로도 집 한 칸 내줄 것 같지 않은 도시들, 오하석의 젊음을 쥐어짜다가 마흔 중반쯤 되면 폐부품 취급할 게 뻔한 자본주의, 그 전부를 엿 먹이고 해체시키는 먼지 혁명이었다.”

 

유어는 달아나지 않았다. 외부에서 계속 자신을 쫓아오던 모든 버겁던 요구들과 생존조건들에 시달리다가, 처음으로 뒤쫓고 사냥하는 입장이 도리어 반가웠다고 한다. 그 해방감이 시원하기보다 서글프다. 가족과의 완전한 절연을 위해 동생을 구하자는 선택이 아프다. 목숨 정도는 걸어야 가능한 일이라는 듯.

 

인수공통 질병의 위험은 날로 더 커지고, 미래는 모르겠고, 위기 경보는 계속 울리는데, 나도 사람들도 살던 대로 살고 있다. 사회의 그늘을 훌쩍 뒤집어 보여주는 이 작품은, 역시 추리 미스터리보다 더 진한 공포감을 전한다.

 

유어의 혼란스럽고 불안한 하루가 저물었다. 또 먹고 살아야할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종종 웃었는데, 계속 짠했다. 구해야할 세상은 무엇일까. 계속 미안할 기성세대로서 유어처럼 살아갈 현실의 미래세대를 대책 없이... 힘껏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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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지만 만만하지 않습니다 - 공감부터 설득까지, 진심을 전하는 표현의 기술
정문정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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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alogue: 고대 그리스어 dia(통과하다, 사이로)logos(, 말씀). ‘말을 통과하다’ ‘사이로 말하다말이란 서로를 통과해서 나간다.

 

연습, 실전법, 실용적인 팁들... 이라니 기대가 크다. 휴일이 끝나고 나면 당장 써먹을 일이 한 가득일 테니. 다정하지만 단호하게. 그럴 수 있길 바라지만, 매번 어려운 일이다.

 

불쑥 포기하고 싶어지면 말 자체를 안 하고 싶다. 그러니 다시 배워야지. 나이가 들수록 지금 부족한 면면이 점점 더 나빠질 거란 예감이 든다. 책을 읽는 건 어쩌면 아직은 그런 퇴행에 저항하고 싶다는 의지일거다. 오늘은 다정하고 차분한 이 책에 의지해본다.

 

우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명확하면서도 날카롭지 않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정하지만 만만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말하기에만 모든 문장이 집중된 것이 아니라, ‘글쓰기와 교차되고 비교되고 병렬적으로 함께 설명되는 것이 뜻밖이고 재미있다. 강의를 편안하게 잘 하는 저자라서 책 읽는 시간도 긴장이 덜 하고 편안하다.

 

덕분에 말보다 글이 편하고 - 여러 가지 이유로 - 말보다 글이 더 중요하고 유용하다고 느끼는 나에 대해서도 여러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글처럼 말도 차분하고 더 친절하고 감정이 한 차례 정리된 방식이면 대화의 변화가 짐작보다 클 것이다.

 

진심을 담아 고유의 목소리를 전달해서 공감을 얻어내는 능력이란 인간적 가치를 더욱 강화할 수 있는 핵심 자질이니까요. 그야말로 대체하기 힘든 인간다움이니까요.”

 

글이나 말이나 제대로 표현하고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같거나 유사하다. 어휘력은 물론이다. 며칠 전 우연히 친구로 보이는 4명이 진짜, 짱이다, 대박, 찐이네의 표현을 돌림노래처럼 이어하는 것으로 공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비언어적 표현 - 표정, 몸짓 등 - 도 중요하지만, 덕분에 그 네 가지 표현은 안 쓸 결심을 했다.

 

저자의 의견과 설명으로만 이어지지 않고, 한 주제의 끝에 관련 팁을 주는 구성이 좋다. 도움이 되는 책의 목록을 읽다보면, 장바구니에 담아 두고 잊어버린, 읽기 전인, 책들이 기억나서 잃은 기억을 찾은 듯 기쁘다.

 

실용적인 글쓰기를 하는 저자는 흔히 가치 있고 의미 있고 긍정적인 것들이라 여기는 태도 - 공감, 자기중심성 등 - 의 함정이나 부작용에 대해서도 지적해준다. 세상엔 쉬운 일이 참 없다는 생각도 들고, 진심만으로 부족한 관계와 사회가 버겁기도 하지만, 그래서 잘 알아차리고 알려주는 책이 귀하다.

 

위로의 핵심은 디테일한 표현력에 있는 게 아닙니다. 비루한 표현이라도 쌓이고 쌓여 언젠가 연결되길 바라는 간절함에 있습니다. (...) 뻔한 말로라도 위로해주고자 하는 진심은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사람에게 반드시 가닿으니까요.”

 

상대와 나를 함께 높이고, 권위적인 문화를 바꾸려는 의지이기도 한 호칭의 문제, 비폭력대화의 핵심과 방식을 고민하고 연습하고 실천하는 것, 상대와 나를 존중하고 존엄을 지키면서 싸우는 방법, 막상 상황이 닥치면 쉬울 리는 없지만, 누구나 배우고 익혀서 써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격려가 다정하다.

 

제안하는 방법들 중, 내가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방법부터 시도해보는 것도 좋은 연습과 실천의 방식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남이라는 걸 잊지 말고 부정하지도 말고, 초능력이 없으니 꼭 말로 해야 한다는 것도 기억하고, “일일이 하나하나 말해야정확히 전달되고 이해된다는 것도 명심하고.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예를 많이 들어주어서, ‘그래, 해보지 뭐하는 큰 용기가 필요하지 않은 동기가 생긴다. 곧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할 휴일의 오후에, 위로와 의지가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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