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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 양장본
이브 엔슬러 지음, 김은지 옮김 / 푸른숲 / 2024년 4월
평점 :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결심이 기록된, 해방의 언어, 라고 읽기 전부터 많은 추천을 받았다. 펼치는 순간부터 모든 문장을 세 번 씩 읽으란 신탁을 받은 듯 읽고 다시 읽는다. 그래도 아쉬워 필사를 해본다.
“이것은 사유reckoning에 관한 이야기다.”
“사유하기와 그것에서 파생되는 되돌아보기, 이해하기, 책임지기 같은 것들은 시간과 관심을 요구한다. 아주 길고 고요한 진공 상태가 필요하다.”
“사유의 과정은 기억하기, 인식하기, 책임지기의 행위를 수반한다. 눈앞에 있으나 우리가 바라보기를 거부하는 바로 그것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들여다보고 살펴보고 수치심을 기꺼이 끌어안으라고 요구한다. 사유는 개인과 집단의 책임과 그 둘이 언제, 어떻게 교차하는 지를 결정한다. 진정한 사유에는 실수와 잘못, 악행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필요하다면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는 일까지도 뒤따른다.”
“과격한 허위 정보들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사유하기란 평범한 행위가 아니다. 사유는 가짜 뉴스와 그럴듯한 거짓말, 거북한 역사를 덮으려는 우파의 간교한 시도에 대한 해독제다.”
“글쓰기는 하나의 생존 방식일 수도 있다. 혼란을 염려하는 방식, 타인의 횡포에 휩쓸리기를 거부하는 방식,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 흘리는 방식.”
“이제야 내가 얻은 가장 깊은 깨달음은 어쩌면 평생 두려워했던 ‘무無’가 사실은 전혀 두려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왔을 지도 모른다. (...) 그리고 내가 존재하고 불러온 그것은 어쩌면, 떠나기 전 지금 이곳에서 만나는 다른 이들의 손을 그저 잠시나마 꼭 붙잡아 보려는 타오르는 갈망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읽기 시작한 후 ‘서문’과 ‘글은 타올랐다’ - 1장 도입 전 - 만 거듭 읽는 색다른 경험을 한다. 10년 전 다른 작품을 번역본으로 읽었을 때와 많이 다른 느낌이다. 원작자도, 번역가도, 독자인 나도 모두 달라졌으니 당연한 것인가.
읽는 내내 행복하고, 줄어드는 분량에 아쉬울 책이다. 이렇게 시작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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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은 무엇이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조야한 감정들의 침전물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란 말일까?”
구역질을 하기 싫어서 이를 물고 참았더니, 눈물이 차올랐다. 울다 지치는 게 싫어서 눈물도 참았더니,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눈에 비친 문자들이 온 몸의 감각으로 전해지는, 그렇게 읽게 되는, 망가지고 부서지고 혹은 살아남고 더 많이 죽임 당한 이야기들.
“눈물은 나를 무너뜨려 아무것도 아닌, 더는 사실로 똘똘 뭉쳐진 무언가가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정의, 권위, 명성에 매달리던 내 욕구는 산산조각 나 액체의, 비정형의. 내가 알아볼 수 없는, 나와 닮지 않은, 내가 아닌 것이 되었다. 오로지 걸쭉한 진짜만이 남았다. 곤죽이 된 피투성이 덩어리, 그것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지금 읽는 이 내용을 빨리 넘길까, 하는 생각을 너무 자주 했다. 대신... 잠시 멈췄다 다시 호흡을 들이켜고 읽기 시작했다. 힘든 일을 겪은 이들이 저기 있고, 그걸 듣고 본 이들이 저기 있고, 그들을 치료하고 살리는 이들이 저기 있고, 기록한 이들도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안전한 곳에서 읽기만 하면 되는 일이란 걸 거듭 상기했다.
“제가 녹아들 수 있게 해주세요. 뒤섞이게 해주세요. 갑옷처럼 단단한 저의 자아를 해방시켜 주세요. 원 안에 받아들여지게 해주세요. 저를 앞세우지 않게 해주세요. (...) 그리하여 나의 차례, 나의 메시지, 나의 몫, 나의 작품, 나의 순간을 걱정하는 마음을 버리게 해주세요. 마침내 원 안에 앉을 준비가 되게 해주세요.”
운 좋게 안전하고 협소한 경험 속에서만 살면서, 경험하지 못한 일들은 부재와 같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엄연히 존재하는, 현재 진행 중인, 더욱 확대되고 악화될 가능성이 더 높은, 폭력과 전쟁 속에서 “값싼 무기”로 공격당하는 이들. 21세기에 무슨 전근대적인 전쟁이야, 했던 말이 부끄러워 눈물이 또 차오르고, 참을 때마다 배가 무지근하게 아파왔다.
“이것은 경제 전쟁입니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대량 강간이 일어나는 모든 곳에 콜탄이 묻혀 있어요. (...) 세상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하려고 여성들이 유린당하고 살해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쪽에서 살고 있는 나는, “고통에 찬 이들의 울부짖음을 가볍게 무시해 버리”지 않기 위해, 기껏 새로운 디자인에 혹해 전자기기를 바꾸지 않는 다는 결심과, 반전 지지 서명과 후원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세상에 있는 수천 명의 또 다른 여성들을 생각한다. 강간을 현실에 존재하는 문제로 만들어 내고 우리를 향한 이 병적 폭력 현실과 증오를 끝내기 위해 오랜 시간 자신의 마지막 세포까지 모조리 소진하는, 사력을 다해 노력하는 여자들을 생각한다.”
생존한 여성들이 전하는 ‘삶’으로 향하는 이야기가 빛나고, 생존자인 저자의 기록과 고통의 해체작업이 눈부시고, 수없이 절망이 이어지고 더 큰 절망감이 들어도 멈추지 않고 애쓰는 분들이 찬란하다. 지금, 이쪽의 나의 최선이란 끝까지 읽고 기록하는 것밖에 없다. 부디 더 많은 분들이 함께 읽어주시기를 부탁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무엇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왔을까? 무엇이 우리, 그러니까 이 지구상에 살아 있는 우리 한 명, 한 명을 인간으로 만들까? 어떤 사랑이, 얼마나 깊은 사랑이, 얼마나 사납고 맹렬한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