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의 탄생 -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 숨은 과학
캐스린 하쿠프 지음, 김아림 옮김 / 생각의힘 / 2019년 3월
평점 :
절판



탐보라 산에서 터진 화산재가 전지구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처럼 콜레라 또한 대단한 흔적을 남겼다콜레라는 인도에서 처음 시작되어 (......) 1819년 20년 사이에만 12만 5000명이 죽었다. (......) 그러던 6월 16일에 바이런이 이렇게 제안했다. “우리 각자 유령 이야기를 써봅시다.”



Frankenstein 1994


<프랑켄슈타인> 읽어 보셨나요꽤 오래 전에 무척 인상적인 영화로도 개봉되었습니다. SF팬이라면 저자인 메리 셸리를 잘 기억할 수도 있겠지요잠깐 퀴즈<프랑켄슈타인>은 누구의 이름일까요(누가 진정한 괴물인가하는 철학적이고 비평학적인 논의는 잠시 접어 두시길 바라며.)

 

1. 창조자 박사

2. 창조물 괴물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이후에 등장한 거의 모든 미치거나 사악한 과학자 캐릭터의 전형이 되었다. (......) 하지만 히스테리와 집착사악한 야망에 가득 찬 과학자라는여러분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지도 모를 과학자 상은 1816년에 메리 셸리가 창조한 캐릭터와는 무척이나 다르다메리가 묘사했던 주인공은 자신의 과학적 시도에 대해 분명히 목적의식이 있었고 (......) 미친 사람으로 그리지 않았다. (......) 그에게 선견지명이 없었을지언정 메리는 결코 빅터의 의도를 사악한 것으로 보여주지 않았다.

 

어린이 판본으로 처음 읽고 나서는 여러 차례 우스꽝스러운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위협적이지 않은 조각난 몸들이 움직이는 꿈들이 대부분이었지요성장하면서 의학적으로 신체 이식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서 무척 놀라기도 했고 일부를 이식받은 이들이 모두 괴물로 변하지 않는 현실에 안도하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공상과학이란 모멸적인 장르로 불리던 과학소설이 지구공동체를 문학적으로 경험하고 훈련하는 좋은 자료로도 쓰인다니 고색창연한 표현감개무량이 떠오릅니다십 대(19)의 여성이 쓴 최초의 과학소설여전히 읽히고 회자되고 재평가되니 반갑기만 합니다.

 

메리 셸리의 대뷔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 하나를 만드는데 그치지 않았다이 소설은 과학소설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의 시발점이었다.

 

특히 이 책은 화학자가 쓰고 생물학과학사과학철학을 합동 연구한 과학자가 번역한 책이라 두근두근합니다역자의 이력에 심히 공감하는 유사한 여정을 저도 오래전에 열심히 걸었거든요제가 더 멀리 갔습니다길을 완전히 잃을 정도로여긴 어디 나는 누구.

 

그리고저는 저자와 가족과 사적인 일화가 있습니다물론 그들은 모르고 저만 압니다만영국에 머무는 여러 해 중 어느 여름기숙사를 박차고(?) 나와 해안가가 아름답고 절벽 바위틈에는 고생대 삼엽충 화석이 있다고 하는제인 구달의 고향이기도 한 본머스(Bournmouth)에서 체류한 적이 있습니다한 낮에 책 한 권 들고 슬슬 산책하다 앉아 쉬려고 들어간 교회에서 이 가족들을 만났습니다모두 런던에 계신 줄 알았는데!


그때 제가 들고 있던 책은 [여성의 권리 옹호]로 번역되는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1792), 메리 셸리를 낳고 11일 후에 사망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의 책이었습니다전혀 몰랐던 일이고 찾아 간 것도 아니라서 너무 놀라 책 떨어뜨릴 뻔했습니다정신 챙기며 둘러보니 이 가족들의 이름이 여기저기서 저를 쳐다보고 있더군요그렇게 우연히 만났습니다.



St. Peter’s Churchyard, Bournemouth, Dorset, England 

Mary Wollstonecraft with Husband William Godwin and next to Daughter Mary Shelley.

 

개인사나 가족사말고 작품 이면의 과학적 배경들에 대해 특히 재밌게 읽었습니다. 통시적인 관점은 특히 제가 좋아하는 역사 서술 방법론인데 과학사를 읽는 일은 종종 반복해줘야 빠진 것들도 채워지고 오류도 수정되면서 전체적인 그림을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18세기는 과학 발견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엄밀하게 말하자면 근대 이후 서양학문을 배우는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벤저민 프랭클린의 번개가 전기현상이라는 증명볼타 전지 발명생물 전기와 전기 화학 간의 논쟁 등이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새로운 발견에 놀라 전기란 죽은 자를 되살릴 수도 있고 오늘날의 심박 조율기는 실제로 그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전기 자체가 생명력이나 생명 자체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메리 셸리는 이 점을 작품의 과학적 배경으로 영민하게 활용했습니다.

 

놀라운 점은 결과가 그렇게 나빴는데도 전기에 대한 관심이 그토록 오래 유지되었다는 것이다의학적인 효능은 의심쩍었지만 전기는 확실히 몸에 어떤 효과를 일으켰다화학적이거나 기계적인 자극이 살아 있는 동물은 물론이고 움직임을 멈춘 지 한참 지난 죽은 동물의 몸에서도 근육에 경련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전기 자체뿐만 아니라 전기와 신체의 상호작용은 어딘지 특별해 보였다.

 

나는 생명의 기구들을 내 주변으로 그러모아발치에 놓여 있는 생명 없는 물체에 존재의 불꽃을 불어넣으려고 했다.”*

 

갈바니즘Galvanism: 사체의 근육에 전기로 자극을 주어 움직이게 한다는 뜻개구리 다리소 머리사형수의 머리 등으로 실제 실험되었다.


Galvani: Galvanism, 1791 is a photograph by Granger which was uploaded on September 26th, 2013.

 

물론 의학의 발달이 중요한 과학적 자극이 되었지요해부학이 필수과목이 되고 신기하게도 대중적 인기까지 얻으면서무덤 도굴시체 판매가 창궐했다고 합니다작품 속 빅터 박사 역시 신선한 시체를 구해부패하지 않게 보존하고조립 이식 수술을 시행합니다아직 혈액형의 존재도 몰랐던 시절이니 여러 문제들이 연이어 발생했을 것이고 놀랍게도 면역 반응이나 새로운 종의 출현까지 언급됩니다새삼스럽게 19세 저자의 천재성에 감탄을!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때 가만히 뜯어본 적이 있었다그때도 흉측했다하지만 근육과 관절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그것은 단테마저 상상하지 못했을 끔찍한 존재가 되었다.” 그동안 이 프로젝트에 푹 빠져 있던 빅터는 자기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를 만들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그것이 생명을 얻은 순간에야 비로소 그는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실감했다창조물의 생김새에 혐오를 느낀 빅터는 그것을 괴물’ ‘악마’ ‘더러운 피조물이라 불렀다이 살아 숨 쉬고 생각하는 존재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상상으로서는 완벽한 창조였으나 잘못 퍼진 이미지처럼 창조물은 어눌하고 지능이 나쁜 괴물이 아니라 뛰어난 지성을 가진 생명체였습니다누구도 그 과정을 모두 밝혀 내지 못한 놀라운 아이디어와 메시지는 200년이라는 세월을 무색하게 합니다우리가 성취한 유사하게 가능한 방식은 유전자 조작이나 줄기세포 연구이겠지요.

 

메리의 원작에서 창조물은 지적이고 사려 깊으며 감정을 잘 표현했고 움직임이 우아했다빅터만 한 과학적인 지식은 없었어도 창조주의 행동이 불러일으킨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빅터보다 훨씬 잘 이해하고 있었다스스로 깨우친 지혜가 대학 교육을 받은 빅터보다 뛰어났던 셈이다.

 

퍼시와 메리 셸리는 노예무역을 비판한다고 알려져 있었으며 프랑켄슈타인은 주변 사람들과 겉모습이 확연히 다른 인종의 사람들에 대한 취급방식을 다룸으로써 노예제를 비판했다고 해석되었다.

 

메리가 소설의 등장인물을 잉골슈타트로 보낸 것은 흥미로운 선택이었는데그 이유는 (......) 1472년에 세워진 이 대학은 18세기에 들어 여러 음모의 진원지가 된 비밀 결사일루미나티Illuminati(계몽을 뜻하는 라틴어)의 중심이 되었다. (......) 뚜렷한 반종교적 성향을 띤 동시에...... 평등주의 같은 개념에도 흥미를 가진 자유사상가들의 모임이었다. 19세기 독자들은 이 소설에 등장한 잉골슈타트 대학교를 비밀결사 그리고 위험한 혁명적 실천과 연결지어 이해했을 것이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과학과 문학과 영화 각각에 번개’가 내리친 충격처럼 강렬한 영감과 생명력을 선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독자로서 여러분들은 어떤 분야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으셨나요?

 

1. 신의 생명창조 레시피를 얻은 것처럼 전지전능한 조작기술을 끝없이 키워나가는 과학

2. 세상에 없었던 장르가 탄생하고 수많은 자극들이 전 세계에 전기 충격파처럼 번져나간 SF문학

3. 일일이 다 헤아리기도 벅찬 작품수와 공포에 질린 관객들의 새된 비명소리로 명성을 가늠하는 기기묘묘한 공포영화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 필적할 수 있는 현대 창작물로는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

저는 생각이 안 떠오르네요. 늦은 밤, 만성 피로, 길어지는 불면 , 노화 탓을 해봅니다.


1831 edition of Frankenstein by Mary Shelley


정말 즐거운 멋진 책 읽기였습니다. 세상엔 재미난 책들이 끝없이 태어나나 봅니다. 오로지 시간이 부족한 것만이 아쉽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셜록 홈스의 범인 찾기 추리퀴즈 빨간콩 논리책 4
상드라 르브룅 지음, 로익 메헤 그림, 김영신 옮김 / 빨간콩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건 9추리의 고전 셜롬 홈즈의 사건들이라해도 어린이책!

원작을 읽기도 했는데 이쯤이야 거만한 마음으로 아이들과 책을 펼쳤습니다.

간출하게 연필과 메모지를 들고......

 

첫 사건인 오리엔트 특급열차는 사건 전개를 다 말해줄 수도 있는 지라 

한층 더 거만하고 느긋하게 사건 전개를 읽었습니다......



간단...... 하지가 않습니다......

관찰증거 모으기단서 분석이전 상황 다시 찾아 재분석......

 

아하하하...... 도전적으로 복잡합니다!

 

증거도 단서도 여러 명의 진술 증언도 사건 현장도.

긴장이 될 만큼 즐...... 겁습니다!

 

워크시트가 있긴 하지만 메모지는 A4 이면지 다발로 바뀌었습니다.

 

아이들의 눈빛이......🤨😑😣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사건 해결을 위해 하라는 대로 일단 다 해봅니다......


관찰하고 분석하고 추론하는 모든 과정을 다 기록해야 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하기만하면 어렵지 않고 재밌게 해결할 수 있다고 분명 그랬는데......

야아아아~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을 만큼 신......납니다!


피해자와 목격자가 36용의자가 10......

겨우 46명입니다. 



재도전 하기 전에 간식을 먹고 잠시 쉬는 시간을 꼭 가지길! 

9개를 모두 해결해야 완벽한 탐정 졸업장을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가능한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가족들은 모두 모이세요!

...............


뜻밖의 수준 높은 추리 퀴즈에 고무되는 저녁이었습니다.

저자가 의도한 읽고 쓰고 기록하고 기억하고 어휘력 늘리고 추리력 훈련하고

두뇌 훈련은 확실히 할 수 있습니다.


엄청 배가 고파지니 식사를 맛있게 할 수 있겠습니다.

(몸무게의 2%인 뇌가 20% 넘게 칼로리를 소모한다고 합니다.)


! 저자의 이력이 범상하지 않습니다.


도전을 즐기시는 분들은 

아이들과 경쟁(?) 혹은 격려(!)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시기 참 좋은 기회입니다.

추리하기를 좋아하시면 더욱 그렇겠지요.


요즘 어린이들은 굉장하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되는 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3
최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2월
평점 :
품절



태어나 살면서 겪어내는 무수한 일들 중에 덜컥마음을 꺾어 주저 앉히는 것이 무엇일 지는 당하는 그 순간까지 모르는 법이다. 어린 '태희'의 이야기를 느긋하게 읽다가이 정도의 행복하지만은 않은 경험쯤은 별난 것도 아니잖아하는 무심해서 가학적인 생각이 슬며시 떠오르는 순간에 다행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프게 기억하면 선명하게 아픔이 되는 것이고고민이 있어 괴로우면 괴롭게 기억되는 것이다그 모든 아픔들이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가야 할 방향은 어디인지의 물음들에 스며들었다가 지치도록 소환되기도 한다.



흔히 증거로 제출되는 유년기의 불행한 경험이 언제나 곧바로 이후의 삶을 예상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닐 수도 있다그 사이의 시공간을 당사자가 어떻게 지나왔는지틈과 간격을 뛰어 넘었는지바로 앞에서 멈춰 버렸는지도무지 알 수도 기억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태희가 마주친 어려움들과 반응하는 양식을 보고 어린 시절 때문이지하고 비열할 만큼 게으른 분석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러니까……어린 태희가 어른 태희의 원인이거나 과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이 둘 사이에는 원래부터 세상에 없는 경우이기도 하지만 단절이 없었거나이 둘은 동일한 아픔을 경험하고 있는 여전한 동일인이라고 느낀다.

 

나는 꺾이는 중이었고 부러지기 직전이었다.”

 

어머니와의 전화 내용이 너무 슬퍼서 왈칵 눈물이 났다소천하신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이백만원의 돈과 편지를 남기셨다변명의 여지가 없는 반응을 쏟아내는 태희를 읽으며 이 정도로 망가졌었구나싶어 내게 있어 태희라는 인물이 지금 막 태어났구나하는 감정이 생겼다짜증과 절망과 무력감으로 짓눌린 태희의 삶을 보듬는 것은 편지 쪽이다.

 

편지는 이상하다봉투를 열고 편지지를 펼치면 내가 전혀 몰랐던 마음이 펼쳐진다중략편지를 쓸 때의 그 마음을 나는 확실히 가진다.”

 

할머니가 남기신 편지글 내용이 위로와 위안이 되는 관여 방식이 아니라태희가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자구적인 노력이라는 방식을 통해 시공간의 통로가 연결된다태희라는 존재에 표시된 무수한 단절과 틈이 신선한 상처처럼 여전히 벌어져 있었다면작용한 힘의 정체가 무엇이건 편지가 오가는 시공간의 연결은 분명 치유의 행위일 것이다.

 

과거는 꿈이 아니다나의 미래는 나.”

 내가 될 수 있는 건 나뿐이다자칫하면 나조차 될 수 없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오직 나만이 우리를 망칠 수 있다.”

 

더하기(+)의 삶과 빼기(-)의 삶*, 연산을 위한 수치들은 힘겨움의 척도가 아닌 듯하다어린 태희가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유일하게 주어진 삶에 적응하는 방식아픔이건슬픔이건힘듦이건어려움이건 자신의 삶에 고스란히 얹어 두는 법 말고는 몰랐던 시절이 묵직한 더하기의 세계이다.

 

반면 성인이 된 태희가 참고 참고 또 참으며 모든 시간 빠져나가게 둘 수밖에 없었던그래서 무기력하게 잃어버리는 삶의 내용들이 빼기의 세계이다그러니 더하기와 빼기라는 삶의 방식은 둘 다 오답으로 작동하는 연산체계이다그래서는 어떤 형태이든 우울하게 견디다 망가지는 길 밖에 걸을 수 없다.

 

이 작품에서 어린 태희의 삶이 전개되는 내용은 (+) 표기로어른 태희의 것은 (-)로 표기되어 있다.


할머니는 짧은 유서에

 

잘못과 사랑은 나눌 것.”

 

이라고 남기셨다.

 

누구나 어릴 적부터 수없이 듣긴 하지만 뜻하는 대로 늘 살지 못하는 실천 지침 나누기(÷). 사칙연산기호로 표기된 의미는 바뀐 외모만으로도 낯설고 새로운 힘을 얻은 듯 보인다음식을 나누고시간을 나누고기쁨을 나누고즐거움을 나누고사랑을 나누고슬픔을 나누고아픔을 나누고어려움을 나누고산다는 일은 온통 나누는 일이다더하기와 빼기만으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는 없다.

 

하지만표현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더라고슬픔과 아픔과 어려움을 나누는 일이 사회적으로 불편한 장소와 순간들은 어쩌면 여전하다어른이 되어 사회의 중심부로 이동할수록 더욱 그러하다타인과 물리적 세계를 자신의 존재와 명확하게 구분하여 적합한 행동과 변별력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살지 않으면미숙하고 공적이지 못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불편한 어른스럽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이는 어른스럽다는 말이 아이들에게 칭찬으로 사용되는 세상에서도 동일하다.

 

할머니는 잘못과 사랑 모두를 나누라고 적어 두셨다둘이자 하나인 태희들은 편지를 쓰고 받는 방식을 통해 존재, 관계,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를 나눈다.



형편없는 우리를 위해서는 뭔가를 할 자신이 없어그래서 핑계가 필요해지금보다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핑계네가 핑계가 되어주면 좋겠어.”

 

내 안에 갇힌 나를 꺼낼 수만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래 봤자 나는 나겠지마트료시카처럼 나는 계속 나일뿐이지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 같고이별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 같고포기를 위해 꿈꾸는 것만 같다.”

 

매순간 달라질 수도 있지만똑같은 존재로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지만그 모든 것도 일 뿐이다내가 되는’ 법이란 나는 언제나’ 나라는 것을태어나면서부터 단 한 순간도 내가 가 아닌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나는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리고 내가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던 영속성을 지닌 모든 것이다.

 

젊은 시절의 엄마 아빠처럼 자신을 견딜 수 없어 상대를 증오하는 방법으로 정신없이 화를 내며 살고 있는 나를 찾아왔다.

어린 시절의 내가.

 

이거 야광이다.

말해 주려고.

 

원치 않던 모습들이 모두 한 번에 사라져주진 않을 것이다그래도 태희()에겐 아픔슬픔어려움힘듦을 마주할 새로운 힘이 보태졌을 것이다그러니,

 

우리는 또 울겠지만 절대 같은 이유로 울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천명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다짐을 계속하며 우리는 어른이 되겠지남들은 절대 알지 못할 하루와 마음을 끌어안으며.”

 

그러니까……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가야할 방향은 어디인지를 모른 채 체념한 상태라면,

지금처럼 고인 채로 매일 짜증내며 조용히 썩어 가는 삶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최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 안의 무수히 많은 ()’,

모두 다른 모습으로 살아 온 모두 ()’,

같은 온기로 손을 잡아 줄 단 한사람인 ()’,

떠올리자.


가장 크고 화려한 마트료시카를 열어

안의 어둠 속에 갇힌 ()’를 찾아내자.

 

어떤 내 모습이라도 부끄럽지 않고,

내가 나눠져 달라고 부탁하는 초라한 것들을 힘겨워하지 않고

끝까지 비밀을 지켜줄 단 하나의 무수한 ()’,

 

내 말을 영원히 들어주고

내 마음을 알아 줄 유일한 위안인 ()’,

 

나의 꿈이자 나의 미래인 ()’,

모든 순간 새로운 내가 되고 있는 ()’,

만나자.



.........................

 

현대문학 핀시리즈는 작가의 작품과 예술가의 작품을 접목해서 한층 더 아름답게 두 작품 모두를 소개하는 기획이다전체적인 책 디자인무게감표지의 예술작품내지의 글이 모두 감탄과 경이를 부른다서른세 번째인 이 작품은 타이틀title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표지 제목<Untitled>소설의 제목<내가 되는 꿈>과 더할 수 없이 친밀한 동행을 한다참 멋지다.



최진영 작가의 2019년 출간작 <이제야 언니에게>를 읽고 그칠 수 없는 화를 뿜다울음을 울다 심신이 탈진한 경험이 있다작가가 그리 의도한 작품은 전혀 아니지만 자그마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처럼 새 책을 펼치기가 무서웠다<내가 되는 꿈>은 필요한 만큼 예리하고 섬세하고 아프지만나는 2019년의 내가 아니라서그때보다 좀 더 내가 되어 온 나라서명치가 조이는 견딜만한 통증만 느끼면서 모두 읽을 수 있었다다음 생의 우주를 치밀하게 준비 중이다라고 여전히 자신을 소개하셔서 무척 기쁘다다음 생에도 최진영 작가와 같은 시공간을 나누는’ 우주에 태어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원한 동맹이라는 역설 - 새로 읽는 한미관계사
김준형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년인가 회자되던 한국인은 국난극복이 취미다라는 말은 농담도 가짜뉴스도 코로나 방역에 한정된 것만도 아닌 역사적 사실이다그렇게 된 것은 한국인들이 특이하게도 그런 취미를 즐겨서가 아니라 뭐라 형언할 수 없이 지독한 지정학적 위치가 중차대한 요인이다.

 

대륙을 건너오기도 했을 터이고 대양을 건너오기도 했을 최초의 한반도 정착민들은 초기에는 바로 그 지형 덕분에 수많은 부족들이 명멸하는 중에도 비교적 안전하게 자신들만의 영역에서 생활문화유적을 남길 수 있을 만큼 적당히 구분되어 살 수 있었으나이동수단이 발전하고 국가 형태를 이루면서 주변 거대 공룡들로부터 끝없는 침략을 당하게 된다.

 

1,000번이 넘는 부침 속에서도 독립국가로서 언어정치문화사회 체제를 유지한 것은 한 편으로는 기적에 다름 아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를 이어가며 견뎌낸 경험이 유전자에 명시되었을 처절한 고난을 겪었다는 뜻이다불편(?)하게도 과거의 공룡들은 현실의 강대국이라는 이름으로 러시아중국일본 주변에 포진해있다.

 

유기적이고 복잡한 요인이 작용했지만어쨌든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의 본질이 우호적이지 않은 현실의 반영인 듯무척 먼 곳의 이웃과 동맹同盟’ 관계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이 길다동맹이라 해서 온전히 평등한 파트너십이라고 믿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고 사실 또한 아니다계약 주체들 간의 관계만으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 현실의 약속은 존재한 적이 없다이는 다자간 외교의 모습일지라도 체계가 잘 잡힌 프로세스라기보다는 각국의 이익 관계에 따라 정신을 차리기 어렵게 시시각각 급변하는 혼돈의 벽과 더 닮아 있을 것이다.

 

한미관계는 내용을 다 알아도 볼 때마다 어처구니없는 불평등한 사기계약,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공식적인 관계가 시작되었다막장처럼 비유하자면 불리한 조건들만 가득한 사기결혼을 했는데 배우자가 배신까지 한 관계랄까시작은 그러했다힘세면 다 그럴 수 있는 야만과 혼돈의 시절이다여기서 퀴즈배신은 단 한번이었을까요둘 사이에 폭력이나 위협 등 강제성의 흔적은 없었을까요?

 

아마도 1/10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영원한 동맹이라는 역설>의 가치들 중 하나는 근현대만이 아니라 미국이 강화도 공격!”이라고 외친 순간부터 대한민국 공화국의 정권별 관계 변화까지다양한 관점들은 물론이고 깊이 있는 역사적 이해와 분석을 통해미국이라는 존재가 한반도에 끼친 영향을 큰 판에서 볼 수 있게 들려주는 점이다.

 

동네에서 제일 힘이 센 친구라서 든든하기도 하지만 그 친구 모르게는 맘대로 화장실도 다녀오지 못하는 불편함이 공존하는우방이자 가스라이팅 가해자인 듯그 이상의 다양한 모습을 지닌한반도 지정학 못지않게 복잡하게 얽힌 운명의 상대이다즉 끊임없이 살벌한 외교 게임을 벌여야 하는 대상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한반도를 꼭 집어서 눈도 한번 안 떼고 일일이 지시를 내릴 만큼 큰 관심을 일관되게 차별적으로 보여줬다는 말은 아니다오래 전 영국에서 친구들과 산책하다 웃긴 엽서들을 구경했는데문구 중 하나가 미국인의 세계 이해법이라는 것이었다We,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he rest of the world.

 

웃겼지만 웃기기만 한 것은 또 아니라 마침 학교에 초청 받아 오신 미국인 교수 두 분께 물어보았다물론스몰토크처럼가볍게재미난 답변을 기대한다는 표정으로그런데두 분이 슬프고 난처하고 등등의 복잡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자신들은 정말 그렇게 학교교육을 받았다고 하셨다그야말로 예상 못한 충격서늘한 파장이 피부 위로 지나갔다.

 

이 책에서 정리된 내용을 읽다 보면 미국이 전 세계를 내려다보며 자국에 유리한 입장을 키워나간 일련의 과정이 보인다그 시행들에게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거나 동맹으로서의 신의를 지킨다거나 하는 절대 굽히지 않는다사수한다는 원칙은 없고 자국 이익을 최우선한다는 대원칙1원칙만이 눈에 띈다그걸 비난하려는 건 아니고 할 수 있지만 주변국들을 살피고 세계 평화를 위해 진정한 수호자로서의 역할이었다면 아름다울 수 있었겠다, 그런 순진무지한 생각을 해본다.

 

복잡하고 앙금이 없는 것도 아닌 여전히 불편하기도 한 관계이지만 한미관계는 굳건히 유지될 것이다군사동맹은 미국과 수출입동맹은 중국과의 비중이 더 높은 대한민국으로서는 분쟁이 없어도 늘 분쟁지역인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한 여전한 줄타기를 이어가야한다더 이상 누구도 누구의 편을 무조건 적으로 들기 어려운 시대이며미국은 역사적으로 누구보다 더 단호하고 냉정하게 자신들의 실익을 위한 결정만을 반복해왔다설혹 그것이 타국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군사쿠데타를 지원하는 일일지라도설혹 그것이 무관한 수많은 양민의 목숨을 대가로 요구할지라도.

 

오늘도 일본 스가 총리와 대중국전을 선포하는 당만 바뀐 미국대통령의 모습과 발언을 잠시 듣고 보았다트럼프가 아이언맨처럼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는 영웅이 되고자 했다면 바이든은 동맹을 이유로 중국전에 임할 것이다대한민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국난극복을 취미처럼 해치웠지만 외교전에 돌입하는 일은 갈수록 복잡하고 힘겨워질 것이 뻔하다부디 우리도 쓸 수 있는 카드를 모두 다 영민하게 다 쓸 수 있기를이번엔 이용당하지 말고 생존과 번영을 위한 외교전에서 대한민국이 미국을 우리 카드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위에서 건방지게 1/10이라 했지만 1/100쯤 되는 일독이다. 이 책이야말로 독서모임을 통해 함께 읽고 배워야할 충실한 텍스트이다. 아쉬운 것들이 줄지 않는 시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환한 숨
조해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

이런 식의 설명으로는 이 소설이 전하는 분위기와 섬세함을 전혀 소개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고통으로 탁한 숨을 내뿜는 병실에서

옆에 앉아 가만 토닥여 주며 숨결이 편하게 잦아들 때까지 지켜보고,

이불을 올려 덮어 주고,

조용히 일어나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나서는 이가 들려주는 차분하고 온기 있는 병상일지…… 같다.

이런 느낌은 단지 환한 나무 꼭대기의 주인공 강희의 직업이 간병인이라서가 아니다.

 

이곳에서라면 찰랑거리는 물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듯 남은 생을 소모할 수 있겠다는 뜻밖의 기대감이 차올랐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제로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그것이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때 내 시계엔 숫자와 눈금이 없었다.”

 

다만 행복한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마음만은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 (...) 행복은 가짜가 아니라고 느끼는 그들의 그 한순간을 위해서가까스로자꾸만 꺼지려 하는 심장을 바닥에서부터 부풀리며하나는 또 한 번…… 하나의 숨을 쉰다.”

 

슬퍼지니 생각이 너무 많아지다 쓸쓸히기도 하여 몸이 꺼질 듯 정신이 까무룩할 것도 같은데,

작가가 멀지 않은 곳에서 조용히 걸어와 옆에 앉아 주는 기분이다.

전작 <빛의 호위>의 잔상이 남아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과 환한’ 이란 제목이 이어져서 연상이 드는 걸까.



환한 나무 꼭대기에서 환하게 빛을 내는 달빛한 시절의 허무가 헛것 같았고 사는 것도 더 이상 무섭지 않다.”

 

그곳에서 사슬 모양으로 내려오는 빛의 입자로 빚어졌으므로 때가 되면 다시 그것으로 흘러가 부서지고 허물어질 거라고도 말하고 싶은.”

 

부조리부당모멸굴레 죽음폭력모욕절망범죄협박거절싸움으로 버무려진,

멀쩡하게 산 채로는 관둘 수 도 없는 현실 곳곳에 작가의 시선이 머물다 떠난다.

 

세상 어디에도 나와 똑같은 모양의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만 같았다감정적으로 친밀한 사람이 생겨도 마찬가지였다. (...) 말하지 않으면 실체가 되지 않는 거라고나는 그렇게 믿었다그건내가 가진 허약하지만 유일한 보호막이었다.”

 

그때는내가 남대문 시장 앞 사거리에 허약한 마음 하나를 두고 왔다는 걸 알지 못했다그 허약한 마음이 숨기고 싶은 파편이 되어 30년 넘게 언어의 외피를 써보지 못한 채 내 삶의 궤도를 떠돌아다니리란 것도그때의 나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여러 문장들 사이에서 내가 아는 얼굴들이 떠올랐다모두들…… 왜 결국은 약하고 선한 건지그들이 독한 이들보다 마주 보기가 힘들어 슬쩍 슬쩍 피하기도 했다잘 지났다 드디어 끝났다 시원하다고 했던 20대가그때 만난 이들이 실체 없이 기억 속에서만 재생되는 건 견딜 수 없이 슬프다.



"저는 다만소설을 읽고 난 뒤 달라진 독자의 내면 풍경을 상상하며 다시 쓰는 것그것만을 할 뿐입니다."


아마도 저는 그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을 것입니다내 고향은 문래라고나의 문장()은 그곳에서 왔다()......”

 

내 부모도 내 이름에 장소를 넣었다그래서 오랜 시간 태어나 자란 곳이 정체성인 양 느끼며 살았다수십 번도 더 지나친 문래*는 오늘에서야 흥미로운 탄생과 신비롭고 어지러운 성장을 거친 모습으로 이해되었다.

 

* ‘물레를 달리 이르는 말고려 시대에문래(文來)라는 사람이 처음 이것을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