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되는 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3
최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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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살면서 겪어내는 무수한 일들 중에 덜컥마음을 꺾어 주저 앉히는 것이 무엇일 지는 당하는 그 순간까지 모르는 법이다. 어린 '태희'의 이야기를 느긋하게 읽다가이 정도의 행복하지만은 않은 경험쯤은 별난 것도 아니잖아하는 무심해서 가학적인 생각이 슬며시 떠오르는 순간에 다행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프게 기억하면 선명하게 아픔이 되는 것이고고민이 있어 괴로우면 괴롭게 기억되는 것이다그 모든 아픔들이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가야 할 방향은 어디인지의 물음들에 스며들었다가 지치도록 소환되기도 한다.



흔히 증거로 제출되는 유년기의 불행한 경험이 언제나 곧바로 이후의 삶을 예상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닐 수도 있다그 사이의 시공간을 당사자가 어떻게 지나왔는지틈과 간격을 뛰어 넘었는지바로 앞에서 멈춰 버렸는지도무지 알 수도 기억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태희가 마주친 어려움들과 반응하는 양식을 보고 어린 시절 때문이지하고 비열할 만큼 게으른 분석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러니까……어린 태희가 어른 태희의 원인이거나 과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이 둘 사이에는 원래부터 세상에 없는 경우이기도 하지만 단절이 없었거나이 둘은 동일한 아픔을 경험하고 있는 여전한 동일인이라고 느낀다.

 

나는 꺾이는 중이었고 부러지기 직전이었다.”

 

어머니와의 전화 내용이 너무 슬퍼서 왈칵 눈물이 났다소천하신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이백만원의 돈과 편지를 남기셨다변명의 여지가 없는 반응을 쏟아내는 태희를 읽으며 이 정도로 망가졌었구나싶어 내게 있어 태희라는 인물이 지금 막 태어났구나하는 감정이 생겼다짜증과 절망과 무력감으로 짓눌린 태희의 삶을 보듬는 것은 편지 쪽이다.

 

편지는 이상하다봉투를 열고 편지지를 펼치면 내가 전혀 몰랐던 마음이 펼쳐진다중략편지를 쓸 때의 그 마음을 나는 확실히 가진다.”

 

할머니가 남기신 편지글 내용이 위로와 위안이 되는 관여 방식이 아니라태희가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자구적인 노력이라는 방식을 통해 시공간의 통로가 연결된다태희라는 존재에 표시된 무수한 단절과 틈이 신선한 상처처럼 여전히 벌어져 있었다면작용한 힘의 정체가 무엇이건 편지가 오가는 시공간의 연결은 분명 치유의 행위일 것이다.

 

과거는 꿈이 아니다나의 미래는 나.”

 내가 될 수 있는 건 나뿐이다자칫하면 나조차 될 수 없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오직 나만이 우리를 망칠 수 있다.”

 

더하기(+)의 삶과 빼기(-)의 삶*, 연산을 위한 수치들은 힘겨움의 척도가 아닌 듯하다어린 태희가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유일하게 주어진 삶에 적응하는 방식아픔이건슬픔이건힘듦이건어려움이건 자신의 삶에 고스란히 얹어 두는 법 말고는 몰랐던 시절이 묵직한 더하기의 세계이다.

 

반면 성인이 된 태희가 참고 참고 또 참으며 모든 시간 빠져나가게 둘 수밖에 없었던그래서 무기력하게 잃어버리는 삶의 내용들이 빼기의 세계이다그러니 더하기와 빼기라는 삶의 방식은 둘 다 오답으로 작동하는 연산체계이다그래서는 어떤 형태이든 우울하게 견디다 망가지는 길 밖에 걸을 수 없다.

 

이 작품에서 어린 태희의 삶이 전개되는 내용은 (+) 표기로어른 태희의 것은 (-)로 표기되어 있다.


할머니는 짧은 유서에

 

잘못과 사랑은 나눌 것.”

 

이라고 남기셨다.

 

누구나 어릴 적부터 수없이 듣긴 하지만 뜻하는 대로 늘 살지 못하는 실천 지침 나누기(÷). 사칙연산기호로 표기된 의미는 바뀐 외모만으로도 낯설고 새로운 힘을 얻은 듯 보인다음식을 나누고시간을 나누고기쁨을 나누고즐거움을 나누고사랑을 나누고슬픔을 나누고아픔을 나누고어려움을 나누고산다는 일은 온통 나누는 일이다더하기와 빼기만으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는 없다.

 

하지만표현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더라고슬픔과 아픔과 어려움을 나누는 일이 사회적으로 불편한 장소와 순간들은 어쩌면 여전하다어른이 되어 사회의 중심부로 이동할수록 더욱 그러하다타인과 물리적 세계를 자신의 존재와 명확하게 구분하여 적합한 행동과 변별력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살지 않으면미숙하고 공적이지 못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불편한 어른스럽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이는 어른스럽다는 말이 아이들에게 칭찬으로 사용되는 세상에서도 동일하다.

 

할머니는 잘못과 사랑 모두를 나누라고 적어 두셨다둘이자 하나인 태희들은 편지를 쓰고 받는 방식을 통해 존재, 관계,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를 나눈다.



형편없는 우리를 위해서는 뭔가를 할 자신이 없어그래서 핑계가 필요해지금보다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핑계네가 핑계가 되어주면 좋겠어.”

 

내 안에 갇힌 나를 꺼낼 수만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래 봤자 나는 나겠지마트료시카처럼 나는 계속 나일뿐이지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 같고이별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 같고포기를 위해 꿈꾸는 것만 같다.”

 

매순간 달라질 수도 있지만똑같은 존재로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지만그 모든 것도 일 뿐이다내가 되는’ 법이란 나는 언제나’ 나라는 것을태어나면서부터 단 한 순간도 내가 가 아닌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나는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리고 내가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던 영속성을 지닌 모든 것이다.

 

젊은 시절의 엄마 아빠처럼 자신을 견딜 수 없어 상대를 증오하는 방법으로 정신없이 화를 내며 살고 있는 나를 찾아왔다.

어린 시절의 내가.

 

이거 야광이다.

말해 주려고.

 

원치 않던 모습들이 모두 한 번에 사라져주진 않을 것이다그래도 태희()에겐 아픔슬픔어려움힘듦을 마주할 새로운 힘이 보태졌을 것이다그러니,

 

우리는 또 울겠지만 절대 같은 이유로 울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천명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다짐을 계속하며 우리는 어른이 되겠지남들은 절대 알지 못할 하루와 마음을 끌어안으며.”

 

그러니까……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가야할 방향은 어디인지를 모른 채 체념한 상태라면,

지금처럼 고인 채로 매일 짜증내며 조용히 썩어 가는 삶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최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 안의 무수히 많은 ()’,

모두 다른 모습으로 살아 온 모두 ()’,

같은 온기로 손을 잡아 줄 단 한사람인 ()’,

떠올리자.


가장 크고 화려한 마트료시카를 열어

안의 어둠 속에 갇힌 ()’를 찾아내자.

 

어떤 내 모습이라도 부끄럽지 않고,

내가 나눠져 달라고 부탁하는 초라한 것들을 힘겨워하지 않고

끝까지 비밀을 지켜줄 단 하나의 무수한 ()’,

 

내 말을 영원히 들어주고

내 마음을 알아 줄 유일한 위안인 ()’,

 

나의 꿈이자 나의 미래인 ()’,

모든 순간 새로운 내가 되고 있는 ()’,

만나자.



.........................

 

현대문학 핀시리즈는 작가의 작품과 예술가의 작품을 접목해서 한층 더 아름답게 두 작품 모두를 소개하는 기획이다전체적인 책 디자인무게감표지의 예술작품내지의 글이 모두 감탄과 경이를 부른다서른세 번째인 이 작품은 타이틀title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표지 제목<Untitled>소설의 제목<내가 되는 꿈>과 더할 수 없이 친밀한 동행을 한다참 멋지다.



최진영 작가의 2019년 출간작 <이제야 언니에게>를 읽고 그칠 수 없는 화를 뿜다울음을 울다 심신이 탈진한 경험이 있다작가가 그리 의도한 작품은 전혀 아니지만 자그마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처럼 새 책을 펼치기가 무서웠다<내가 되는 꿈>은 필요한 만큼 예리하고 섬세하고 아프지만나는 2019년의 내가 아니라서그때보다 좀 더 내가 되어 온 나라서명치가 조이는 견딜만한 통증만 느끼면서 모두 읽을 수 있었다다음 생의 우주를 치밀하게 준비 중이다라고 여전히 자신을 소개하셔서 무척 기쁘다다음 생에도 최진영 작가와 같은 시공간을 나누는’ 우주에 태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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