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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동맹이라는 역설 - 새로 읽는 한미관계사
김준형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평점 :
작년인가 회자되던 ‘한국인은 국난극복이 취미다’라는 말은 농담도 가짜뉴스도 코로나 방역에 한정된 것만도 아닌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게 된 것은 한국인들이 특이하게도 그런 취미를 즐겨서가 아니라 뭐라 형언할 수 없이 지독한 지정학적 위치가 중차대한 요인이다.
대륙을 건너오기도 했을 터이고 대양을 건너오기도 했을 최초의 한반도 정착민들은 초기에는 바로 그 지형 덕분에 수많은 부족들이 명멸하는 중에도 비교적 안전하게 자신들만의 영역에서 생활문화유적을 남길 수 있을 만큼 적당히 구분되어 살 수 있었으나, 이동수단이 발전하고 국가 형태를 이루면서 주변 거대 공룡들로부터 끝없는 침략을 당하게 된다.
1,000번이 넘는 부침 속에서도 독립국가로서 언어, 정치, 문화, 사회 체제를 유지한 것은 한 편으로는 기적에 다름 아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를 이어가며 견뎌낸 경험이 유전자에 명시되었을 처절한 고난을 겪었다는 뜻이다. 불편(?)하게도 과거의 공룡들은 현실의 강대국이라는 이름으로 - 러시아, 중국, 일본 - 주변에 포진해있다.
유기적이고 복잡한 요인이 작용했지만, 어쨌든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의 본질이 우호적이지 않은 현실의 반영인 듯, 무척 먼 곳의 이웃과 ‘동맹同盟’ 관계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이 길다. 동맹이라 해서 온전히 평등한 파트너십이라고 믿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고 사실 또한 아니다. 계약 주체들 간의 관계만으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 현실의 약속은 존재한 적이 없다. 이는 다자간 외교의 모습일지라도 체계가 잘 잡힌 프로세스라기보다는 각국의 이익 관계에 따라 정신을 차리기 어렵게 시시각각 급변하는 혼돈의 벽과 더 닮아 있을 것이다.
한미관계는 내용을 다 알아도 볼 때마다 어처구니없는 불평등한 사기계약,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공식적인 관계가 시작되었다. 막장처럼 비유하자면 불리한 조건들만 가득한 사기결혼을 했는데 배우자가 배신까지 한 관계랄까. 시작은 그러했다. 힘세면 다 그럴 수 있는 야만과 혼돈의 시절이다. 여기서 퀴즈! 배신은 단 한번이었을까요? 둘 사이에 폭력이나 위협 등 강제성의 흔적은 없었을까요?
아마도 1/10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영원한 동맹이라는 역설>의 가치들 중 하나는 근현대만이 아니라 미국이 “강화도 공격!”이라고 외친 순간부터 대한민국 공화국의 정권별 관계 변화까지, 다양한 관점들은 물론이고 깊이 있는 역사적 이해와 분석을 통해, 미국이라는 존재가 한반도에 끼친 영향을 큰 판에서 볼 수 있게 들려주는 점이다.
동네에서 제일 힘이 센 친구라서 든든하기도 하지만 그 친구 모르게는 맘대로 화장실도 다녀오지 못하는 불편함이 공존하는, 우방이자 가스라이팅 가해자인 듯, 그 이상의 다양한 모습을 지닌, 한반도 지정학 못지않게 복잡하게 얽힌 운명의 상대이다. 즉 끊임없이 살벌한 외교 게임을 벌여야 하는 대상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한반도를 꼭 집어서 눈도 한번 안 떼고 일일이 지시를 내릴 만큼 큰 관심을 일관되게 차별적으로 보여줬다는 말은 아니다. 오래 전 영국에서 친구들과 산책하다 웃긴 엽서들을 구경했는데, 문구 중 하나가 미국인의 세계 이해법이라는 것이었다. We,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he rest of the world.
웃겼지만 웃기기만 한 것은 또 아니라 마침 학교에 초청 받아 오신 미국인 교수 두 분께 물어보았다. 물론, 스몰토크처럼, 가볍게, 재미난 답변을 기대한다는 표정으로. 그런데, 두 분이 슬프고 난처하고 등등의 복잡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자신들은 정말 그렇게 학교교육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야말로 예상 못한 충격! 서늘한 파장이 피부 위로 지나갔다.
이 책에서 정리된 내용을 읽다 보면 미국이 전 세계를 내려다보며 자국에 유리한 입장을 키워나간 일련의 과정이 보인다. 그 시행들에게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거나 동맹으로서의 신의를 지킨다거나 하는 절대 굽히지 않는다, 사수한다는 원칙은 없고 자국 이익을 최우선한다는 대원칙, 제1원칙만이 눈에 띈다. 그걸 비난하려는 건 아니고 할 수 있지만 주변국들을 살피고 세계 평화를 위해 진정한 수호자로서의 역할이었다면 아름다울 수 있었겠다, 그런 순진무지한 생각을 해본다.
복잡하고 앙금이 없는 것도 아닌 여전히 불편하기도 한 관계이지만 한미관계는 굳건히 유지될 것이다. 군사동맹은 미국과 수출입동맹은 중국과의 비중이 더 높은 대한민국으로서는 분쟁이 없어도 늘 분쟁지역인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한 여전한 줄타기를 이어가야한다. 더 이상 누구도 누구의 편을 무조건 적으로 들기 어려운 시대이며, 미국은 역사적으로 누구보다 더 단호하고 냉정하게 자신들의 실익을 위한 결정만을 반복해왔다. 설혹 그것이 타국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군사쿠데타를 지원하는 일일지라도, 설혹 그것이 무관한 수많은 양민의 목숨을 대가로 요구할지라도.
오늘도 일본 스가 총리와 대중국전을 선포하는 당만 바뀐 미국대통령의 모습과 발언을 잠시 듣고 보았다. 트럼프가 아이언맨처럼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는 영웅이 되고자 했다면 바이든은 ‘동맹’을 이유로 중국전에 임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국난극복을 취미처럼 해치웠지만 외교전에 돌입하는 일은 갈수록 복잡하고 힘겨워질 것이 뻔하다. 부디 우리도 쓸 수 있는 카드를 모두 다 영민하게 다 쓸 수 있기를, 이번엔 이용당하지 말고 생존과 번영을 위한 외교전에서 대한민국이 미국을 우리 카드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위에서 건방지게 1/10이라 했지만 1/100쯤 되는 일독이다. 이 책이야말로 독서모임을 통해 함께 읽고 배워야할 충실한 텍스트이다. 아쉬운 것들이 줄지 않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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