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일의 라틴어 인생 문장 - 삶의 고비마다 나를 일으킨 단 한 줄의 희망
한동일 지음 / 이야기장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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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글씨 편지부터 모든 문장을 따라 적고 싶어지는 책, 기분이 흐리고 어두운 날의 금빛 위로. Ad astra per aspera. 고난을 넘어 별을 향해.


 

Vivere est semper secum quaerere qui suus locus in universo sit.

평생 내가 설 자리를 고민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출간된 한동일 교수/저자의 책은 모두 만나 보았다. 유럽에서는 초등학생부터 배우는 라틴어지만, 한국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라틴어를 덕분에 함께 얘기할 친구들이 생겼다. 라틴어가 다른 언어보다 더 어렵지는 않다. 불합리한 구덩이 속에 빠져 시난고난 살다 보니 정답과 규칙이 있는 것보다 쉬운 것도 없다.


 

음성 언어가 아닌 언어로 배워서일까, 라틴어 문장은 언제나 문자 언어였다. 그것도 좋았다. 소란하고 요란한 대개의 시간에서 조용하게 피난처를 찾은 듯 따라 적은 시간은 얼마나 귀한 지. 심장이 지잉 울리는 글귀 하나 품는 일은 얼마나 든든한지.

 

Aegrimonia de esse st modo essendi.

존재와 존재 방식에 대한 고민

 

: 인간의 진보란, 역사의 전진이란 저는 있음있는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과 대안을 마련해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할 때, 있는 것을 온전히 인정하고 제자리에서 살아가게 할 때, 인간은 보다 인간다워지는 것일 테니까요. (...) 있는 것은 논외, 별종, 변태 취급하고,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무화시킬 때 인간다움은 퇴보합니다. 수많은 소수와 경계를 더는 아무렇지 않게 지우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수많은 소수와 경계들을 우리는 더 호명해야만 합니다. (...) 보편의 울타리에서 밀려난 수많은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 불완전을 메꿔가며 새로운 보편의 개념을 만들어내는 일이 곧 역사의 진보일 것입니다.

 

128개를 읽고, 그 중 몇 문장을 거듭 읽고, 그 중 몇 문장을 따라 적어보았다. 어떤 순간은 문장보다 저자의 단상을 더 오래 보았다. 오늘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좀 더 무기력한 날이었다. 가만히 책에 눈을 두다 보니 손도 팔도 몸도 움직였다.



 

덕분에 짜증도 화도 막말도 욕설도 아닌 방식으로, 더 지치지 않고 향초처럼 조용히 천천히 오늘을 이어 살았다. 꺼지지 않는 불처럼 사시는 듯한 이연실 편집자님과 깊은 물 같은 저자의 만남이 차분하고 아름다운 금빛 향연 같다. 푸르륵 책갈피를 넘기면 깊은 숲처럼 뭉근한 향기가 난다.

 

오늘 같은 날 오늘 같은 나도 일으켜 줬으니, 누구에게 선물해도 좋을 감사한 책이다. 연말 선물 목록에 책만 올리고 있는데, 이 책도 잘 모셔둬야지.

 

친구들에게는 이 구절을,

 

Elige tibi quid diligas.

그대가 사랑해야 할 것을 선택하십시오.”

 

: 그러기 위해 우리는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공부에 이르기 위해서는 혼자 견디는 태도인 고독, ‘솔리투도Solitudo’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십 대로 사는 아이들에겐 이 구절을 손편지 대신 넣어야겠다.

 

Invenire societatem futuram.

미래 사회를 상상하다.”

 

: 우리의 미래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 저는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냥 좋게 좋게 가자같은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 그것은 그 말을 하는 자의 입장에서의 좋음일 뿐, 상대방이나 전체 사회에는 해악이 되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 그 부조리와 비리는 결국 조직과 사회를 질식시키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을 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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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보고 싶었다 - 내일 더 빛날 당신을 위한 위로, 나태주·다홍 만화시집 웹툰 만화시집 1
나태주 지음, 다홍 그림 / 더블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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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느낌이 아닐 수도 있지만, 회복이나 힐링을 하려면 휴식이 먼저고 필수다. 잘 쉬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공감대가 당연한 시절에는 더구나. 이번 주는 하루가 삼일처럼 힘겨웠다. 몸이 지르는 비명이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

 

다정하고 편안하고 따뜻하고 반가운 나태주 시인의 시들은 기억력이 나빠지는 중에도 한편을 다 외울 수 있을 듯해 든든하고, 시인과 시를 꼭 닮아서 신기한 그림의 만화가와 함께 한 책은 이번 주가 드디어 끝났구나, 하는 안도감을 주었다. 무겁고 아픈 머리를 눕히기 전에 만나기 좋고 그래서 감사하다.


 

그림마다 내가 보고 싶은 이들이 와서 머물다 떠난다. 어떤 이들은 손을 뻗으면 다시 만날 수 있고 어떤 이들은 다시는 만날 수 없다. 다시 만난다 해도 우리가 예전의 그들이 아니니 그 만남은 다시 낯설고 새로운 것일 것이다. 빨리 크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었던 아이들의 옛 모습도 그립게 왔다 간다.


 

오래 볼 수 있었던 날도 있었지만, 바쁘고 지쳐서 잠시라도 혼자이고 싶었던 날도, 서로 마주보는 것보다 함께 쉬고 싶었던 날도 많았다. 매순간 사라지는 그 모든 순간을 아꼈다 한들 멈춤 버튼이 없는 삶은 아무 것도 붙잡지 못한다. 가졌다고 생각한 것들마저, 끝까지 집착한 그 무엇이라도 다 놓고 가게 된다.


 

간단해서 두렵기도 하지만 홀가분한 그 진실처럼, 이 만화시집에는 아무 자극도 포장도 폭력도 없다. 넘기는 한 장마다 안도와 안심이 든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던 두통이 뭉근해지는 기분이다.


 

헛짓을 하며, 나쁜 짓을 하며, 해악을 끼치며 살아갈 시간이 없다. 인간의 수명은 짧아서 서로 다정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온전하게 사랑해준 분들을 떠올린다. 그렇게 남겨 주신 기억들이 덜 못되고 덜 못난 인간으로 살게 여전히 돕는다.

 

한 해가 끝나갈 무렵에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대단치 않더라도 기념하지 않는 선물을 건네고 싶다. 모두 애썼고 다들 생각이 복잡하고 서로가 회한과 두려움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반길 이 책을 기쁘게 목록에 올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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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 제3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단요 지음 / 사계절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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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양 팔레트의 추적 색소처럼 푸른색과 붉은색이 강렬한 띠지의 문구는 위협적인 경고 메시지 같다. 얼마나 더 증명해야 하냐고 파업하던 기후학자들의 눈물에 젖은 얼굴도 떠올랐다.

 

세상은 내가 이해하는 속도보다 더 늦게 변했고, 기대했던 바람보다 더 막연하게 퇴행하기도 했다. 의지로는 전혀 낙관할 수 없어서 이유와 설득이 필요할 때마다 계산을 한다. 무력함과 무기력을 뒤집어썼지만, 뭐라도 하면 미래에 수렴하는 값은 0이 아니니까, 그것만이 희망의 틈새이며 반전의 여지니까.

 

살던 대로 사는 일상을 뒤집어야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또렷이 알면서도, 하루도 유예할 수 없는 일상을 지키느라, 희생 없이 느슨하게 참여하고 후원할 방법만을 고른다. 연대의 여력과 변화의 동력이 서늘하게 식어가고 줄어드는 것에 모멸감도 느끼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삶만은 살지 말자는 쉬운 결심만 거듭한다.

 

실천보다 감정 과잉인 내가 느끼는 절망감이 부끄럽다. 꾸준히 애쓰신 분들, 조금이라도 덜 나쁜 현재를 다 같이 살도록 살아오신 분들이 엄연하니 내가 뱉는 어리광과 불평불만은 무례가 아닐까.

 

살아간다는 건 경건한 지옥 같아졌다. 비건 지향이나 현실 플렉시테리언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아무리 저항하고 싶어도, 때론 플라스틱 포장지에 싸인 상품을 구매하는 것처럼.



 

1992년부터 확인한 환경위기시계는 2023928분을 기록했다. 정수리 위 원판의 존재는 학문과 운동보다 더 직설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절박함이 만든 문학 설정 같다.

 

생존에 특화된 인간 뇌가 객관성보다 편견과 선입견을 재활용하고, 문명이 다 무엇인가 싶은 폭력이 반복되는 세계에, 제발 신도 귀신도 사필귀정도 지옥도 천국도 다 있었으면 싶다.

 

정의부덕이라는 이분 영역이 사후 천국과 지옥으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인간의 반응이 초조할 정도로 궁금했다. 픽션을 논픽션처럼 반겼다. 생득적 조건과 사회화된 방식, 각자의 우물 밖 세상을 상상하고 만나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데, 그 용기를 밟아 뭉개는 요인은 많고 끈질기다.

 

그럼에도 경계를 넓혀 서로의 삶을 교차시키려는 노력은 어떻게 가능하고 왜 가능해야 하는지, 현실 인간들의 공존의 조건은 무엇인지, 나의 종교이자 도피처인 문학 속에서 늘 찾고 싶다. 읽는 동안의 희망은 간질거리는 기대 같다.

 

과학은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세계의 미스터리를 해결할 수 없고, 인간과 인간이 만든 모든 존재들 - 사물들 - 은 결국 이야기로 존재하기 때문에. ‘망해가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자각이 우리가 만들고 공유해온 이야기의 수명이 끝났다는 것,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인식의 시작일 것이니까.

 

시행착오가 아닌 잔혹한 악의와 거침없는 욕망에 추동되어 개의치 않고 가해하는 이들이 있고, 영원히 그럴 것이고, 우리 안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교육이란 그 악의를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맞춰가는 생존 발명품이지 않았을까.

 

작가는 쉬운 감동과 위안을 경계하듯 반백()의 독자를 화들짝 놀라게 할 반전과 대반전을 설치했다. 한동안 느끼지 못한 온도로 감정적 반응이 일었다. 아이러니하게 반가운 경악이었다.

 

과학/산업혁명 이후에, 인간은 존재하는 방식만으로, 지구 생태계의 순환 최대치를 넘어서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했다. 청색만의 원판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원죄 같아서 조금 서운하고 억울한 심정이 들었지만, ‘더 직설적이지 않으면 안 될 현실의 위기 상황을 떠올리니 다 사라진다.

 

거듭 소환되는 현실을 차라리 옆에 두고 픽션을 논픽션으로 읽었다.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어떤 변화는 가능하지 않겠냐고 반문하게 만드는, 무섭도록 솔직한 이야기였다.

 

2023년이 전환점이자 분기점이라는 이야기에 불안은 더 뜨거워지고 강박은 더 단단해진다. 두렵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사고실험, 자기 객관화, 메타인지 등, 우리는 - 아직 남아 있다면 - 생존과 미래를 걸고 뭐든 시도해볼 마지막 세대일지 모르겠다.

 

종이책을 잡고 주문처럼 기도처럼 제목을 말해본다. 언젠가 위기를 맞은 인류의 세계가 이렇게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기를. 그러니 현재 우리의 수많은 선택과 결단만이 미래를 만든다는 것을 서로 더 절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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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 여행기 을유세계문학전집 129
하인리히 하이네 지음, 황승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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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 본인이 생전에 바라던 일 - 북해연작을 묶은 단행본 출간 - 을 을유세계문학에서 이루었다. 덕분에 이 책 한 권으로 나는 북해로 떠나는 긴 항해에 동참하여, 대서사를 끝까지 즐길 수 있게 된다.

 

소장용으로도 선물용으로도 반가운 귀한 책이다.




 

() 문해력이 낮은 독자라서, 오히려 부담 없이 1부 북해의 시들을 일독하고, 2, 3부의 산문, 여행기를 반갑게 읽었다. 독일에서 유학한 두 친구(독일문학, 독일철학 전공)에게 전해들은 하이네 스토리도 친근함을 유지하며 글을 따라가는데 도움이 되었다.

 

제 이목은 지금 유럽에서 자유와 평등의 토대를 다지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몇몇 다른 동시대인들*에게 온통 쏠려 있습니다. * 생시몽주의자들을 암시함

 

1831620, 파리에서

하인리히 하이네

 

사회를 비판하고 혁명에 관심을 두다 추방당한 시인, 타국에서 죽을 때까지 창작활동을 한 시인에게 냉담하기란 불가능하다. 체력이 넘치고 곧 유학을 가기 전이라, 괴테**의 여행기가 즐겁고 궁금하기만 했던 20대가 아니라, 간신히 매일을 살아가는 지금 만나게 되어 여행기도 시도 더 감사하다.

 

** 하이네가 3부에서 괴테의 <선택적 친화력Die Wahlverwandtschaften>의 멋짐을 언급한다. 을유세계문학전집으로 6월에 읽었다. 반가웠다.

 

현재 다수 출간되는 여행기들과도 전혀 다르고, 괴테의 여행기와도 다르다. 여행을 하는 하이네 자신의 사유와 사상을 뜨겁게 펼치는 문장들이 가득하다. ‘여행은 사진과 추억보다, 익숙한 일상을 떠나 낯섦 속에서 를 마주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더 반갑고 흥미로웠다.

 

삶의 모든 공유하는 관계들이 기억 속에없는 파편적인 내 관계도와, “정신적을 가면을 쓴 채로 외롭게 살아가며 오해를 거듭하는 하이네의 우리가 닮아서 모두 애틋했다.

 

혁명 전 시인이 관찰한 지배와 억압과 거짓에 근거한 행복을 엮은 거미줄도, “질식감과 비참함을 느낀이들의 시도를 무산시키는 간교한 이들도, 어리석은 대중의 몽환적인 행복과 정신적 예속도 지나간 시대의 풍경 같지가 않아 서글펐다.

 

부정하지 않는 괴테에 대한 관심과 상당 분량의 수다, 북해 연안 곳곳의 많은 미신과 전설도 시공간의 경계를 흐리는 여행을 잠시 체험하듯 즐거웠다. 바다도 하이네도 사랑하게 될 것 같았다.

 

내 영혼을 사랑하듯 나는 바다를 사랑한다.”

 

[이념 - 로그랑의 책]은 새롭고 난해했다. 기이할 정도로 낯설었다. 계속 읽는 일이 옆 자리에 앉은 남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일 같았다. 화자에 대해서도 이야기의 배경에 대해서도 정말 알지는 못한 채로.


 

랄랄라 -” 가 등장하고 이야기가 끝나자, 나는 이유도 모른 채 크게 웃었다. 각자의 현실도 현상으로 묶인 현실도, 실은 기이하고 때론 의문이 가득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니 이상할 것이 없다.

 

1부 북해의 시로 돌아가서 [정화]를 다시 읽었다. 미친 꿈과 위선 위로/ 바람이 불고/ 배가 내달리고/ 해방된 영혼이 환호한다. 아쉽게도 지금, 여기의 삶은 하찮고 무기력은 짙고 무력함은 거대하다. 해방은 도착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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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말고 모모
로진느 마이올로 지음, 변유선 옮김 / 사계절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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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진 작가님 관련 소식을 따라 읽으며 내내 응원했다. 기여한 바가 없음에도 덩달아 즐겁고 기뻤다. 희망을 가득 담아 써주신 추천사를 거듭 읽고 이 책이 무척 만나보고 싶어졌다.

 

우리, 두 엄마가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하지만 너를 태어나게 하기 위해선 씨앗 하나가 필요했고, 마음씨 좋은 한 아저씨가 우리에게 그 씨앗을 주었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말해주었다. 사랑, 호의, 익명성이 모두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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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에서 시민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고, 입법과 행정을 하려면 국가 통계가 필요하다 한국에서는 현재(2023) 성소수자 통계라곤 아무 것도 없다. 성별 체크에 남성, 여성 외에는 체크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동성 간 혼인도 현행법상 수리될 수 없다. 그런데 혼인신고를 하는 이들이 있다. ‘불수리 처리되었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다. 그렇게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없는 존재, 받아들일 수 없다는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행동이다. 이 기록이 쌓이면 최초의 유일한 국가 통계가 생기게 된다.

 

포괄적 차별 금지법제정은 2026년 정부 답변으로 미뤄졌다. 지난해 자해나 자살 시도로 응급실에 내원한 환자 중 절반은 10대와 20대였다. 예산과 인원삭감 이외에 뭘하는지 모를 정부 덕분에, 2023년 한국사회의 여성은 하루에 한 명꼴로 살해당하거나 살해당할 위협에 처해있다.

 

평등해야 자유롭고 자유로워야 평등하다 - 유엔 자유권위원회 최종견해-

 

빨리 사멸되길 바라는 단어라서 쓰기도 지겹다. ‘정상가족이라는 신화, 환상, 억지. 그런 표준디자인 같은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어진 가족보다 함께 만드는 가족 이야기에 동의하지만, 자신의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의 일이 되면 태도도 판단도 달라지는 경우가 아직 많다.

 

우연히 법사회학자 이렌 테리가 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다. ‘사적인 행동 또한 언제나 사회적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욕구는 사회가 규정한 가능성에 따라 피어난다.’ 나는 이 말에 100% 공감한다.”

 

가족 문제는 많은문제이지만, 성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성역할에서 진화를 거부하는 한국사회의 출생률은 차라리 같이 죽자 - 소멸 - 으로 도착지를 바꾼 듯 보인다. 철학, 도덕, 가치로 다루지 않더라도 현실적으로 영리하게 우선순위를 정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 글쎄...

 

인간의 수 - 인구수 - 가 마냥 느는 것이 다 좋은 일이라고는 못하겠지만, 1인당 사용 에너지 격차가 큰 것을 보면, 여전히 문제는 인간 사회의 분배 부정의와 낭비가 크다. 그러니 서로 사랑하고 아이도 사랑하며 살아가려는 이들을 막을 정당한 이유란 없다. 더구나 남녀로 이루어진 양육자가 자녀를 가장 잘 키운다는 어떤 근거도 없다.


 

이성 커플은 여성이 출산하면 남성이 합법 양육자의 자격을 얻지만, (동성)여성 커플은 한 여성이 출산하면 다른 여성은 허가받은 제삼자로서 여러 제한을 받고, ‘자기 자식을 입양하는 절차를 받아야 법적 양육자가 될 수 있다.


 

내가 속한 현실과 로진느와 나탈리의 현실을 계속 생각하고 오가며 읽을 수 있어서 다양한 질문과 생각을 남겨준 책이다. 첫째를 출산하는 일이 너무 고되어서 둘째까지 임신할 줄은 몰라서, 내 선입견이 민망해서 크게 웃었다.

 

프랑스에서 PACS*1999년에 도입되었다. 24년 밖에 늦지 않았다. 차별금지법, 생활동반자법, 동성부부 재생산권, 비혼 여성 재생산권, 그리고 포괄적 인권 보장을 차근차근 다 마련하면 된다. ‘빨리빨리문화가 이번엔 든든하다.

 

* 시민연대계약(프랑스어: pacte civil de solidarité, PACS, 영어: civil solidarity pact) 또는 공동생활약정은 프랑스에서 시행 중인 두 이성 또는 동성 성인간의 시민 결합 제도

 

2007년부터 2020년까지, 동성부부 당사자로서의 모든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주어 감사하고 존경한다. 비슷한 입장인 사람들과 지난한 변화에 막막한 이들에게, 이 책의 존재는 상상을 현실로, 미래를 현재로 살게 해주는 주소와 같을 것이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소수자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권리에 대해 소리쳐 반대한다. 이 권리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빼앗는 것도, 그들에게 무엇을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 미래의 엄마가 될 이 여성들이 사회에 가져올 위험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를 헐뜯는 이들은 대체 무엇이 두려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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