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묘약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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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악의가 덜한 시선으로 인디언(미대륙 선주민)을 만난 때가 <늑대와 춤을> 영화를 본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엔딩이 너무 슬프고 처연했다. 낯설지 않은 얼굴과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인디언식 이름 짓기가 유행했다.

 

그리고 이 책에서 한층 더 복잡하게 얽힌 그들의 가족사를 만났다. 왠지 반가웠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풍경일수록 그들의 고단한 현실이 잊혀졌다. 가능한 선입견, 편견, 판단을 유보해보려 하지만 혼자 읽을 때조차 쉽지가 않다.

 

부족한 지식을 조금 보충하기 위해서, 인디언 보호구역과 부족(수우족)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객관이나 보편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그렇게 사고하는 나에 대해 잊지 말고, 윤리나 도덕을 앞서지 않도록 차분하게.

 

옳고 그름은 동전의 양면이 아니라 의미의 명암이었다.”

 

기억해야 사건이 되고 존재할 수가 있다. 그러니 누군가가 잊고 만 부분, 누군가는 잊을 수 없는 부분들이 단일 사건에 대한 양면적 진실이다. 안타깝지만 다른 설명은 거짓이 되고 만다.

 

어쩌면 기억상실은 그에게 과거로부터의 보호이자 과거의 일로부터 그를 용서하는 것이었다. (...) 그의 증손자 킹 주니어는 아직 기억이란 것이 생기지 않아 행복했지만, 할아버지는 기억을 잃어서 행복했다.”

 

문장이 아름답고 번역도 아름답다. 덕분에 등장인물들에 다소 깊이 감정적 개입을 하기도 하고,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랑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기분이 시큰거리기도 했다.



 

나는 정말 사랑 때문에 아팠던가. 기도로 사랑이 돌아오기도 했던가. 몸은 닳아가고, 더위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어지럽고 멀미가 난다. 내 시간은 뒷모습도 보이지 않도록 달아나는데, 변해야 할 것들은 밀어도 꿈쩍하지 않는다.

 

나는 약해졌다. 내 생각들은 가엾게도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고통은 나를 강하게 했지만, 그것이 나를 떠나자 나는 곧 잊기 시작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 내 마음이 경첩에서 떨어져 바람에 흩날리며 나 지신의 고통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낯설지만 부러운 열렬한 감정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사랑이란 시간이 지나면 더 편안해져서, 아파도 많이 아프지 않고 좋아도 그렇게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은 반들반들 닳아 늙으면 잘 알아채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는 사랑이 쪼그라들다 죽는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제 나는 채찍처럼 분연히 일어서는 사랑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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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로 가는 길 - 선진국 한국의 다음은 약속의 땅인가
조귀동 지음 / 생각의힘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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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중요한 주제지만 지금 더 절박한 문제를 제기하는 책이다. 양극화, 불평등, 저출생, 고령화, 지방소멸... 뭐든 정치가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다. 인간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가 그러하다. 제발 정치적이라 싫어요, 나빠요하는 지나치게 순진무지한 생각과 발언은 그만 두자. 정치는 인간의 생존 조건이다.

 

갈등 해결방식으로서의 정치를 복원하고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 고민해야할 많은 것들을 한 권에 담았다. 반갑고 고맙고 유용한 책이다. 읽을수록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사회가 아니라 필요한 뭐든 다 바꾸어야 하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힘을 얻는다.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사회가 봉착한 풍경과 퇴보한 미래가 끔찍하고 참담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지금의 불편과 손해가 비교할 수 없이 더 낫다. 물론 악순환을 낳은 기제, 이미 만성화된 위기에 대해 솔직하고 통렬하게 이해/수용하는 것이 먼저다.

 

정치에 포퓰리즘이 득세 중이면, 유권자로서 표의 힘이 아직 있는 거라고 낙관하기로 했다. 문제는 방해가 되고 유해하기까지한 언론 환경에서도 어떻게 여론/공론을 만들고 속지 않는가이다. 제대로 된 의사결정 훈련을 다시 해야 한다.

 

포퓰리즘 정치의 핵심은 독일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가 말한 적과 친구의 구별이며, 이를 통한 집합 정체성의 창조다. 포퓰리즘 정치인은 이 만들어진 정체성의 대변자를 자처하지만, 기실 (우리)’피아彼我(저들)’가 누구인지 해석하는 세속적 종교인에 가깝다.”

 

다양한 사회모델과 한국사회의 시행착오의 역사, 세계사와 국내에 미친 영향, 한국사회의 이중 구조, 경제 구조와 사회복지 구조, 가부장제 사회, 포풀리즘 정치 등 현재의 만성고착에 이른 원인을 상세 설명한다. 요약으론 부족하고 책을 통해 찬찬히 읽으니 선명해진다.

 

분석과 진단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정치적 부족주의에 대한 지적과 현재 무능 정부, 상위 중산층 정당이 된 최대 다수당인 민주당, 정치 복원을 위한 대중정당에 대한 이해와 유권자들의 유형과 행태에 대한 자료와 해석도 유용하다.

 

“2017년 폐허가 되다시피 한 보수정당이 5년 만에 재집권할 수 있었던 건 민주당이 스스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정치적 무능력 속에서 보수는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내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대안을 찾지 못했다. 외연을 확장하거나 새로운 가치를 제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남은 건 익숙한 습관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그럴 듯하게 보였던 절차적 민주주의와, 선진국이라는 명명의 달콤함 아래, 삶을 휘두르고 망치는 불안정한 정치적 토대와 사회적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는 귀한 기회다. 상위 중산층이든, 보수주의자든, 직업 정치인 아닌 누구라도, 삶과 세상에 진지한 모두가 함께 읽고 대화를 많이 나눌 기회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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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지에서 생긴 일
마거릿 케네디 지음, 박경희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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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노트를 꺼내어 인물들을 정리/기록하였습니다. 24명인데, 이름과 특징을 간단 메모하며 읽는 것이 좋을 듯해서. 그렇다고 이야기가 너무 복잡하거나 무겁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끊임없이 모두 의심해야 하는 피로감도 없습니다.

 

단지 호텔이라서 다양한 이들이 모여 왁자하고 떠들썩하고 소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원제인 The feast를 생각하게 하는 섬세한 구성이 멋집니다. 왜 필요했을까요, 그 축제는. 무엇을 위한 설정 혹은 기획이었을까요.

 

기후가 온화하고 맑고 콘월에서, 독특한 억양의 영어로 시낭송을 좋아하는 볼이 발그레한 요정 같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오후가 되면 얼굴만 아는 사람이 스콘을 사주는 넉넉한 곳에서, 서스펜스 가득한 이야기를 상상하며 읽으니 현실과의 괴리가 즐겁습니다. 1947년으로 타입슬립한 착각도 종종 듭니다.

 

사건의 결론은 처음부터 알고 시작하는 자신만만하고 멋진 스토리텔링입니다. 단서들도 클래식하게 일기, 편지, 대화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인간은 존재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는 걸까요.

 

에너지 저장고가 작고 소비효율이 낮은 저로서는 무척 부담스러운 강렬한 욕망들과 뜨거운 감정들에 폭염 속 호흡처럼 어지럽기도 합니다. 재난은 공평한 사고일까요. 구원은 무엇일까요. 있다면 받을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 걸까요. 인간이 저지르는 죄란 무엇일까요. 속죄는 어떻게 해야 가능한 걸까요.

 

몰입이 흩어지지 않았음에도 예상보다 읽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어떤 문장들은 1947년에서 2023년으로 순식간에 건너 와서 현실을 지적하는 듯하고, 평범한 일상의 미묘한 균열들은 가볍지 않았습니다. 이미 품고 있던 감정들이 새로운 환경과 상호 작용이라는 자극을 받아 결정적인 역할로 변하는 역학이 아찔합니다.

 

"못된 사람은 몇 명뿐이지만,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가고도 남아요."

 

그래서 누가? 그래서 어떻게? 하며 계속 읽게 됩니다. 아무래도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는 요인을, 그 정체를 알고 싶으니까요. 그나저나 책을 덮고 나니, 올여름 휴가는 어떻게 보내야할지. 이 작은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살짝 두려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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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가족
한요셉 지음, 박지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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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컵과 그레이스가 혼란스럽고 괴로운 만큼 독자 역시 안타까운 심정으로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다. 간지러움과 폭식 구토가 멈추기를 바라면서. 인간이 살만한 조건이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게도 된다. 이민과 정체성이란 거듭 소환되는 주제에 대해서도.

 

다른 한편 핵가족은 시공간을 확장해나간다. 38선이 그어지던, 남북으로 갈라지던 그때, 영원한 이별일 줄 몰랐던 이들에게로. 아무리 들어도 정말로 셀 수는 없는 수백만 명이 한국전쟁에서 사망했다. 시신조차 돌아오지 못한, 생사를 모르는 이들이 있다.

 

전쟁의 흔적이 재빠르게 지워진 시기에 태어난 나는 그 전쟁이 얼마나 가까웠는지, 회복은커녕 상처조차 제대로 치료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주 나중에야 조금 이해했다. 어떻게 다들 태연히 살고 계신 건지, 이렇게 잊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살아도 되는 것인지, 나도 잠시 어지러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책을 읽는 도중, 주한미군이 판문점에서 월북했다는 현실감 없는 소식을 들었다. 소설 속 제이컵의 월북이 가족과 지인들에게 어떤 혼란을 야기했는지를 읽으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일의 동기가 해결하지 못한, 다독이지 못한 오랜 아픔이라 더욱 그랬다.

 

이산가족이라는 익숙한 명명 아래, 수많은 이들이 실제로 무엇을 느끼며 어떻게 살아왔을지. 가족을 두고 혼자만 낯선 곳에 남은 이들은 새로 만든 가족 덕분에 살아갔을까, 헤어진 이들을 만날 염원으로 견뎠을까. 결국 얼굴도 생사도 확인 못하고 영원히 이별한다는 것 어떤 심정일까.



 

정의로운 전쟁 따위는 없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은 억울할 따름이다. 제이컵네 가족은 이주민이지만, 하와이에는 선주민이 있었고, 강제로 편입되고 전쟁터로 파괴되었고, 억울하게 잃은 것들이 많다. 한반도도 그렇다. 38선이 생겨난 시절의 군인들이 아직 이 땅에 거주하고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보다 더 고성능 폭탄들은 여전히 인류가 관리할 수 없는 재난의 원인이다. 최악의 디스토피아처럼 지구의 바다는 핵오염수로 수십, 수백 년간 망가질 지도 모른다. 도쿄전력이란 일본 기업이 4조를 아끼기 위해 제 것도 아닌 바다에 방류하겠다고 무도한 짓을 벌인다.

 

작위적인 폭력의 흔적들은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부조리가 적은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을까.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 외국에 사는 한국인들의 일상은 어떻게 문화우월주의나 인종차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비난과 선량한 차별은 너무 쉽고, 특혜를 인지하는 것은 늘 어렵다. 이 책은, 이주민으로 살아가며 차별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위로가 될 것이고, 어느 곳에서든 선주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주민의 입장을 경험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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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는 숲속의 공주 - 혹은 옛날 옛날 열한 옛날에
리베카 솔닛 지음, 아서 래컴 그림,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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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태어난 아이에게 저주를 거는 일은 치사하다. 영문도 모른 채 자라다 결국 저주를 못 피하고 오랜 잠에 빠져드는 벌을 고스란히 받는 아이는 무슨 죄란 말인가. 눈을 뜨니 처음 보는 남자의 키스로 잠에서 깼다니, 그 다음은 선택도 반론도 없이 결혼. 그건 또 무슨 황당한 삶인가.

 

재미없는 상당히 무시무시한 동화 대신 새로운 이야기들이 아이들의 책장과 침대 머리맡과 꿈속을 채우길 바란다. 리베카 솔닛이 전해주는 이야기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태어나서 영문 모르고 자다 깨워져 결혼하는 누구라도 더 이상 없어야 하고 보고 싶지도 않다.

 

근래에 심청전을 모티브로 한 소설의 주인공이 심청이가 아닌 이야기를 읽었는데, 고전 문학의 주인공 자리가 이동하는 것은 무척 즐겁고 흥미로운 구성이다. 자매가 있다니 힘이 된다. 왕권이 축소되고 의미가 바뀐 것도, 완전한 타인이 우연히 방문한 것이 아니라, 일하는 소년이 등장하는 것도 좋다.

 

모래나 그림자 애니메이션처럼, 실루엣이 등장하는 일러스트가 멋지다. 상상력이 폭발하듯 세부사항을 떠올리게 한다. 살색이니 살구색이니, 금발에 파란 눈이니 정치적 올바름이니, 이런 고민에 움찔하지 않고 감상할 수 있어서, 적어도 어른 독자의 마음은 편안하다.


 

인간이 점령해버린 현실 지구와 달리, 이야기 숲에는 인간 아닌 존재들이 가득해서 반갑고 뭉클하다. 현실에서 들을 수 없는 꽃과 동물과 소위 상상과 신화의 존재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기분이 먹먹하다. 아이들의 삶을 휘두르는 어른들보다, 세 명의 주인공들이 서로 돕고 해쳐나가는 풍경이 아름답다.

 

아이들이 글을 막 배우던 시절이 생각나서 기분이 간질간질하다. 밤마다 두근거림으로 새 이야기를 기다리던 표정이 그립다.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소리 내어 읽기가 늘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우리의 잠도 꿈도 쓸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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