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깨어 있는 숲속의 공주 - 혹은 옛날 옛날 열한 옛날에
리베카 솔닛 지음, 아서 래컴 그림,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3년 6월
평점 :
어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태어난 아이에게 저주를 거는 일은 치사하다. 영문도 모른 채 자라다 결국 저주를 못 피하고 오랜 잠에 빠져드는 벌을 고스란히 받는 아이는 무슨 죄란 말인가. 눈을 뜨니 처음 보는 남자의 키스로 잠에서 깼다니, 그 다음은 선택도 반론도 없이 결혼. 그건 또 무슨 황당한 삶인가.
재미없는 상당히 무시무시한 동화 대신 새로운 이야기들이 아이들의 책장과 침대 머리맡과 꿈속을 채우길 바란다. 리베카 솔닛이 전해주는 이야기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태어나서 영문 모르고 자다 깨워져 결혼하는 누구라도 더 이상 없어야 하고 보고 싶지도 않다.
근래에 심청전을 모티브로 한 소설의 주인공이 심청이가 아닌 이야기를 읽었는데, 고전 문학의 주인공 자리가 이동하는 것은 무척 즐겁고 흥미로운 구성이다. 자매가 있다니 힘이 된다. 왕권이 축소되고 의미가 바뀐 것도, 완전한 타인이 우연히 방문한 것이 아니라, 일하는 소년이 등장하는 것도 좋다.
모래나 그림자 애니메이션처럼, 실루엣이 등장하는 일러스트가 멋지다. 상상력이 폭발하듯 세부사항을 떠올리게 한다. 살색이니 살구색이니, 금발에 파란 눈이니 정치적 올바름이니, 이런 고민에 움찔하지 않고 감상할 수 있어서, 적어도 어른 독자의 마음은 편안하다.
인간이 점령해버린 현실 지구와 달리, 이야기 숲에는 인간 아닌 존재들이 가득해서 반갑고 뭉클하다. 현실에서 들을 수 없는 꽃과 동물과 소위 상상과 신화의 존재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기분이 먹먹하다. 아이들의 삶을 휘두르는 어른들보다, 세 명의 주인공들이 서로 돕고 해쳐나가는 풍경이 아름답다.
아이들이 글을 막 배우던 시절이 생각나서 기분이 간질간질하다. 밤마다 두근거림으로 새 이야기를 기다리던 표정이 그립다.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소리 내어 읽기가 늘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우리의 잠도 꿈도 쓸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