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형은 제시카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15
존 보인 지음, 정회성 옮김 / 비룡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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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존 보인 작가의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을 영화로 먼저 보고 원작을 읽었다예민한 내용들을 더할 수 없이 섬세하게 차분하게 들려주는 원작의 내용도 감동적이고상상해보던 장면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재탄생 시켜 준 영화 또한 부족함이 없었다철조망이라는 차가운 소재를 사이에 두고 독일 국적과 유태인 소년들이 나누는 대화들이 아련하면서도 아름답다쉽게 잊혀질 작품은 아니지만 그 감동이 조금이라도 더 사라지기 전에 신작 소식을 들어 정말 반갑다.

 

작가의 작품 경향을 짐작해서 이번 주제 또한 예민하면서도 아프고 힘든 내용일 거라 짐작하면서 읽었다여러 캐릭터들을 상징적으로 돋보이게 드러내는 것이라 분노를 유발하는 내용들도 있지만 너무나 따뜻하고 유쾌한 분위기도 함께여서 조마조마한 마음 한편 재밌고 감동적으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청소년과 성인 독자들이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가장 좋을 책이다선입견과 자기 성취 욕구에 강하게 몰입한 성인들의 모습과 사랑과 진심과 이해에 유연한 성장기 아이들이 대비되고 어우러지는 수작이다언제라도 기회가 되면 꼭 여러 세대의 대화를 들어 보고 싶은 주제이다.

 

국회의원을 거쳐 장관이 된 어머니와 보좌관으로 일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동생은 뇌에 조그만 구멍이 있어서 인큐베이터에 머물렀다동생이 태어나길 고대하고 기뻐하던 형은 네 살일 뿐인데도 그 옆을 지키고 싶어 한다문화적 차이일지 개인적 차이일지는 모르겠으나 상상 이상의 건조한 대화 내용에 나는 도입부터 이 부모가 놀랍고 충격적이다.

 

한 간호사가 말했다.

누군가 곁에서 자기를 지키고 있다는 걸 아기가 느낄 수도 있어요아기한테는 좋은 일이죠.”

 

적어도 큰애의 안전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네요.”

엄마가 말했다뒤이어 아빠도 한마디 거들었다.

게다가 오페어에게 야근 수당을 주지 않아도 되고요.”

 

이 형제는 자신의 직업적 성공을 이뤘지만 타인에 대한 애정도 이해도 건조하기 짝이 없는 부모와 살면서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키워간다특히 동생 쪽은 형이 자신을 걱정하다 생긴 흉터를 볼 때마다 자신을 가장 아끼고 사랑해주는 존재가 형이라고 느낀다.

 

제이슨 형이 열네 살이 되었을 무렵엄마는 더는 오페어를 둘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형이 축구 연습을 하지 않는 날에는 나를 학교에서 집으로 데려오면 되고축구 연습을 하는 날에는 끝날 때까지 내가 관중석에서 숙제를 하며 기다리면 된다는 것이었다형은 엄마의 제안에 찬성하면서 오페어와 똑같이 보수를 줄 거냐고 물었다그러자 아빠는 형이 이 집에 살면서 월세도 내지 않고먹는 것도 공짜로 해결하는 데다 축구화와 더러운 운동복으로 집 안을 어지르기까지 하니까 그것으로 보수를 받은 셈 치자고 말했다.

 

형이 축구를 잘 하자 부모는 그 점이 유권자들에게 어필될 것이라고 좋아하고 막상 형이 축구를 취미로만 하고 싶다고 하니 이기적이라는 막말(?)까지 한다읽을수록 참신하게 이기적인 부모라 재밌기도 하다이런 장면이 어린 동생의 시점에서 이야기되는 점이 현실감을 더한다.

 

내가 무언가를 잘한다고 해서 꼭 그 일을 죽을 때까지 하고 싶어 해야 하는 건 아니야그 일 말고 하고 싶은 일이 많을 수도 있다고.”

그날 형이 했던 말은 어린 내게도 무척이나 논리적으로 들렸다.

 

동생에게 형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학교 글짓기 숙제에서 동생이 형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다섯 가지 이유를 적었는데정말 사랑스럽고 재미있다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형은 성정체성과 관련한 큰 변화를 겪는다일차적으로 당사자가 자신을 받아들이고 심정을 다스리고 진짜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일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가득할 것이다그런 미래를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아프고 걱정이 많이 되지만차곡차곡 쌓이고 커나가는 동생의 형에 대한 사랑이 큰 힘과 위안이 되어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이 커진다어쩌면 그런 대단한 존재에 대해 자신이 기대한 것과 다른 모습을 보고 더욱 반발하고 저항하게 될 지도 모르지만그렇게 되면 정말 쓸쓸한 장면을 맞닥뜨리게 될 것 같아 미리 마음이 무거워진다.

 

내가 형을 찾을 때형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어린 시절 악몽을 꾸고 겁에 질린 나를 자신의 곁에서 자게 해 주고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고 달래 주었다내가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하자 아빠는 나를 병원에 데려갔고결국 난독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그때 매일 밤 내 옆에 앉아서 숙제를 도와준 사람도 제이슨 형이었다나는 책장에 적힌 낱말과 글자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고깊은 좌절감에 빠졌다형은 그런 내게 결코 짜증을 내지 않았다아빠처럼 젠장여기 적힌 글자를 읽어 보라니까!”라며 소리를 지르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형은 늘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야내가 도와줄게항상 네 옆에 있어 줄게우리는 형제고아무것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해.”라고 말했다나 역시 형의 말을 믿었다.

 

나는 맏이라서 이런 형의 모습이 대단해보이고 다소 이상적으로까지 느껴진다물론 이 이유에는 나는 동생에게 이런 정도의 시간과 정성과 인내심을 들인 적이 없어서 이기도 하다동생의 글을 통해 알려진 형의 모습은 개인으로서도 상당히 매력적이고 주관이 뚜렷하다특히나 코로나를 이유로 온라인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진 때라 더 그렇다문득 입학도 학교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내는 아이들 생각에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

 

형이 페이스북트위터인스타그램스냅챗 같은 어떠한 SNS 활동도 하지 않는 이유형은 정작 제대로 체험하지는 않은 채 사진에 그럴싸하게 담는 일에 몰두하고 밤낮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요즘 사람들을 도저히 못 봐주겠다고 했다.

 

형이 열여덟 살이 되면 엄마가 소속된 당이 아닌상대 정당에 투표할 거라고 말했던 일형의 설명대로라면 엄마 쪽 사람들은 하나같이 썩었고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인 이들이었다.

 

이제 이야기는 형이 자신에 대해 자각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늘리고 우울해하고 울기도 하는 내용으로 전개된다내 기분도 마치 동생의 심정에 동조된 것처럼 걱정스럽게 변한다여전히 부모는 눈치도 못 채고 엉뚱한 소리나 한다모든 체력과 시간을 다 바쳐 아이를 양육해야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도움이 필요할 때조차 의논상대로 신뢰받지 못하는 부모의 존재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태평스럽고 무성의한 태도적당히 안전한 울타리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역할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함부로 판단할 내용은 아니지만 저런 성격에 왜 굳이 부모가 되려 했나 싶기도 하다어쩌면 사랑하는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고 진심으로 걱정을 하는 태도의 동생과는 달리 아버지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에서 눈을 돌려 모른척하는 쉬운 길을 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더 이상 감추기만 할 수 없는 때가 오면 어떤 대화를 하게 될까 조마조마하다.

 

그리고 그 날 오후.

 

난 네 형이 아닌 것 같아아니형이 아닌 게 분명해.”

 

형이 아니라 누나 같아…….”

 

이 장면에 이르기 전에는 몹시 긴장했는데 막상 닥치니 후련하다 - 실제로는 37쪽 내용상 아주 초반이다이제 가장 걱정되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형이란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을 동생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점이다.

 

영국의 정치계상류층의 삶에 켜켜이 쌓인 때로는 아무 수치심도 느낄 수 없이 노골적으로 때로는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교묘하고 은밀하게 작동하는 여러 권력 게임 전략들과 그에 동반하는 문화적 편견과 폭력성을 담은 이 책은 337페이지나 되는 분량의 가독성을 높이는데 재미난 역할을 한다영국식 블랙 유머와 특유의 비아냥거림을 싫어하지 않는 독자라면 진지한 큰 주제가 전개되는 과정에서의 이런 소소한 장면들에도 즐거워할 것이다형에게는아니 제시카에게는 매 순간 힘들고 지난했을 시간을 지나 나로서는 참 사랑스러운 결말을 암시하는 내용을 알리고 싶지만 다른 독자의 독서를 망칠 것 같아 힘껏 참아 본다.

 

어쩌면 성애를 소재로 하는 글에는 강박적인 윤리적 편 가르기나 절박한 호소 등이 가득해서 읽기가 힘들어 내키지 않아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현실에서 이미 힘든 이들의 이야기를 더욱 돋보이도록 힘들게 쓴 글은 사실 나 역시 여러 이유로 선뜻 반갑지는 않다저자는 이 책에서 단지 성 소수자’ 문제만을 비추려고 하지는 않는다한 때 퀴어 queer라는 명칭이 널리 통용된 것처럼정상과 비정상일반과 이반이라는 이분법적 질서가 공고한 현실에서 이쪽저쪽이 분명하지 않더라도 스펙트럼의 다양한 위치에 자리한 다른’ 면을 가진 이들과 세상이 이들을 대하는 잔인한 태도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같다똑같은 사람들이 아무도 없음에도 아직도 다른 것이 이상한 것으로 조롱받고 차별받는 현실은 적어도 내게는 참 이상하고 비정상인 세상이다. 


물론 그렇다고 저자가 다른 것도 무조건 받아들이고 사랑하자란 복음을 전도하는 것은 아니다아무도 아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수긍할 수도 없다하지만 다른 것만을 이유로 아무런 불법행위도 피해도 끼치지 않은 이들에게 상처를 줄 권리도 누구에게도 없다우리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수긍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하며 살아간다그러니 그저 남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 정도는 원래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저자는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젊은 트랜스젠더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한다세상은 사회는 참 냉정했지만 이들은 놀랄 만큼 용감하게 살아간다고 한다부디 열심히 고민하고 성장하는 청소년들과 적대보다는 평화로운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맘에 드는 성인 독자들이 많이 읽고 함께 대화를 나누는 기회가 있기를 다시 한 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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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빌리아 이발사의 모자 - 개정판
이재호 지음 / CPN(씨피엔)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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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빌리아 아저씨를 아주 우연한 기회에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순전히 형의 모자로 기인한 사건 때문이다.

 

세빌리아그놈은 크레이지야미친놈이란 뜻이야아니 그놈은 미쳤어그놈이 또 내 모자를 빼앗아갔어.”

 

그만해아멀쩡한 사람한테 왜 미친놈이라고 해네 눈으로 정확하게 본 것만 말해!”

 

세빌리아 아저씨그는 과연 누구이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갔는가?

 

아저씨는 무슨 그림을 그리고 싶었을까?

 

1998년도에 처음 출간되었다가 2020년 개정판으로 출간된 책이라는데 그 소식은 모르고 처음 읽어 보았다어른 동화라는 부제가 있는 것이 생경하고 신기했는데실제 내용을 살펴보면 둑자인 어른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상기할 수 있도록 짜인 구성이다연령과 성장 환경에 따라 이 책의 내용들을 자신의 추억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이색적인 제목만큼 색다르게 느낄 이들도 있을 것이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분량이 다르면서도 쭉 이어지는 시간 배열을 가지고 있고어떤 에피소드는 자체로 흥미로운 단편으로 여겨질 수 있을 만큼 생생하고 극적이다저자는 출간 당시 현실 감각이 부족한 작품이라는 비판을 받았다고 하는데나로서는 동의하기가 어렵다에세이라고 해도 동화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현실성과 재미난 이야기 짜임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나로서는 동감하거나 함께 추억할 소재들이 그리 많지 않지만동화라고 생각했을 때 그 부분이 꼭 아쉬울 것도 없다워낙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공간의 이동도 잦은 한국에서 살아와서 오히려 그 점이 잊히고 구전되는 옛 이야기를 오랜만에 듣는 것처럼 느껴진다.

 

문장 간의 연결이 단단하면서도 빠르고 상세하게 뒷받침되는 묘사도 흥미롭고 무척이나 솔직하게 아무 것도 치장하는 것 없이 드러나는 인물들 덕분에 자주 웃었다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살다 어느 순간 마음을 울리는 깨달음과 감동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점도 마음에 든다.

 

저자는 이런 시절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토록 실감나게 기억하고 집필하게 되었을까 어린 시절 조부모님들의 대하소설 같던 이야기들을 녹취할 생각도 못하고 잘 기억하지도 못한 것이 몹시 아쉬운 나는 읽는 순간 수간 자주 부러웠다.

 

재밌고 그리운 감정이 피어났던 시간에 대해 저자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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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들의 세상
혜영.Kim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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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널리 날아

언덕을 높이 올라

세상을 멀리 뛰어

바람에 깊이 새겨

인생을 달리 살아


 

눈 먼 과학은 위험하다는 담론이 거세던 시절이라 전공을 제외한 교양과목을 철학과 전공으로 채우고 대학원에서 과학철학을 전공했다. 1차서적을 읽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 뇌기능이 정지할 것 같은 순간까지 철학서를 읽었지만 철학 에세이,라고 분류된 책을 읽어본 기억이 없다철학이 없는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마는 유난히 무력하고 우울했던 날 이 철학 에세이를 펼쳤다원래 철학 에세이는 이렇게 귀엽고 친절한 것인지 아이들과 함께 읽기에도 좋은 내용들이다오랜 세월 교육자로 사신 무척 진지한 프로필을 가진 분이 저자인데 분위기는 알콩달콩 다정다감하다.

 

행복한 삶의 철학 에세이라는 설명이 있는 책을 매 시간이 힘겹고 마음이 허허롭다 못해 탁 손을 놓고 싶기도 하고 공공연히 펼쳐진 허들에 진저리나는 날에 만나다니이번에도 어떻게든 넘기고 견디라고 하는 세찬 위안을 받는 것만 같아 그 이율배반에 웃음이 난다일단 식사를 챙겨야 뭘 하든 기운이 날 것이라고 눈물과 함께라도 삼키라는 그런 음식을 받은 것도 같다.

 

책이 있다는 것은 어느 때는 그 자체로 시간을 완전히 채워주는 기분이다예전에 가능한 많은 것을 배우려 했고 나아갈 방향을 찾으려 했지만이제는 아무 것도 알려 주지 않아도 괜찮다이 책은 그렇게 잔잔하게 묵직한 내 시간을 조금씩 밀어내며 등을 토닥인다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여름다운 무더운 날에 시원하고 요란스럽게 비가 내린다.

 

저자는 인생에서 희망점이 최종적으로 자기 존재에 대한 행복함이면결코 아쉽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독서로 충만함을 느낀다면 바람직한 길로 들어서게 된다고 하지만이는 역시 자신이 그것을 절실히 원하고 마음속을 그런 소망으로 가득 채워야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나는 사는 일이 즐겁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낙천가도 아니고 세상을 밝고 희망적으로 보는 낙관론자도 아니다.

 

다행히 자의반 타의반으로 더 이상 부질없는 분투와 불필요한 패배감으로부터는 자신을 분리시켰지만문제는 내가 사는 일에 이보다 더 의미 있고 중대한 것을 찾기가 지난하고 지친다는 점이다한 때의 유행 문구처럼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내가 아무 것도 안 해도 삶을 유지하려면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반드시 해야 하니 그 또한 이율배반.

 

저자는 다정한 말투로 목적을 가지고 마음의 길을 계속 걸어라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그러다 만난 오늘 마음의 새 길에 행복의 씨앗을 잘 심고 내일 피어난 새싹을 보고 그러다 그 길 위에서 목적을 이루게 된다는 희망을 늘 간직하라고 속삭인다.

 

콩들의 세상에서 콩다운 행복이란 무엇일까함께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누구나 다른 인생을 살아간다같은 기준으로 보여도 누구나 다른 빛깔의 의미를 담아낸다그러니 모든 콩의 행복 또한 저마다의 독특한 모습으로 펼쳐진다.

 

그나마 매일 잊지 않는 것은 좋은 사람들이 세상에 아주 많다는 것이다그들 덕분에 엉망진창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도 망하지 않는다저자 역시 좋은 콩들이 세상에 아주 많다는 것을 안다고 한다그리고 이 콩들은 행복하기까지 하다고 한다저자의 말처럼 나도 늘 세상에 아주 많은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으로 위로와 힘을 자주 얻었다.

 

아는 것은 기대하는 것의 또 다른 모습이다.

세상이 있고 시간이 있고 삶이 있고 존재가 있다.

존재를 삶을 위해 시간을 다하고 세상의 일부로 성장한다.



커피콩 모카

 

세상에 태어난 자신의 목적을 알기 위한 끊임없는 도야는 결국 생명을 진심으로 대하는 과정에서 결실을 이룬다오롯이 자신의 존재를 평화롭게 세우는 내면의 꽃밭을 가꾸는 일은 관계성이 낳은 수많은 미션에서 얻어지는 특정의 동기부여에서 비롯된다얼마만큼 깨닫고얼마만큼 자라나고얼마만큼 일어서고얼마만큼 날아오를지는 결단을 통해서이다그러려면 꿈이 미지의 세계와 조우하는 오랜 시간의 벅차 모험도 견뎌야 한다.

 

하늘을 이렇게 아름드리 만나는 시간은 모카에게 매우 중요한 삶의 시가이다무엇을 어떻게 얼마만큼 다짐하면서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깃털처럼 가벼운 자유의 한때이다그저 하늘빛을 듬뿍 마음속에 담아가는 초연한 시간이다담담함보다 높고벅참보다 낮은알맞은 리듬의 조화로움이 마음을 적셔주는 올된 시간이니 이 자체로도 고마울 따름이다.

 

완두콩 투리

 

하나를 알면 열을 펼치니 나무랄 데가 없다신념으로 의로움을 다하는 듬직한 콩이다무엇보다 원칙적인 관계의 발전을 따르니어떤 일이든 수행하는 기준이 늘 명확하다중략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항상 기준을 잡고 생활한다는 것이다투리 자신이 정한 기준을 달리 넘어서는 사례는 없다.

 

땅콩 살구

 

진심을 제대로 건네는 마음씨에 더하여 배려하고 베푸는 솜씨까지 겸비한 벗이다쌓은 우정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 관계에 가치를 다하는 존재인가 하는 점이다살구의 삶에서 말과 행동은 이런 가치 있는 기준에 귀감이 된다무엇이든 주기보다 어떻게 주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가늠할 줄 알면서 행동하니 바탕이 지혜롭다.

 

메주콩 세모

 

세모는 무엇이든 본질을 파악하는 기질을 씨눈에 빵빵하게 담고 자라난다중략세모는 삶에서 가장 잘 하고 싶은 것이 여유를 누리는 것이며어린 마음의 배꼽으로 돌아가 여유롭게 만수무강하는 것이다중략세모가 여유를 갈구하는 것은 일에 전념하는 삶이 녹록하지 않아서다충실하게 일해도 마무리 기점이 없이 다음 일로 이어지는일이 일을 낳는 희한한 삶이다이것은 근본적으로 일을 사랑하여 일에 맹렬한 마음가짐을 세운 탓이다.

 

이티콩 퍼플

 

둥근 빵처럼 생긴 커다란 목성에서 찾아온 멋진 친구이다목성에서 이룬 명예와 지위를 내려놓고안락함 대신에 결코 해내지 못할 무게의 만만찮은 도전을 택한 콩이다중략퍼플이 지구를 찾아온 이유는 오직 하나이다미지의 세계에 존재하는 새로운 희망의 빛을 수신하여 직접 마음을 다하여 보고 싶은 세계를 확인하려던 진실한 뜻이 있다.

 

책을 다 읽고 사진을 찍어 보니 솜콩 레오레오의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다.

신기한 일이다.

분명히 존재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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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시툰 : 용기 있게, 가볍게 마음 시툰
김성라 지음, 박성우 시 선정 / 창비교육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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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고 말해주는 시들이 필요한 저녁, 354쪽이라는 얇지 않은 책을 펴들었다. 

그런데 웹툰 1편을 읽으니 20쪽이 지나간다. 

한 시간도 안 되서 남아 있는 분량이 얇아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저녁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 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선택의  가능성                   비스와봐  쉼보르스카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류를 사랑하는 나 자신보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나자신을 더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오래된 줄무늬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릉 안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것을 더 좋아한다.

  사랑과 관련하여 매일매일을  기념하는 것보다는

  비정기적인  기념일을 챙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에게 아무것도 섣불리 약속하지않는

  도덕군자들을 더 좋아한다.

  지나치게  쉽게 믿는 것보다 영리한 선량함을  더 좋아한다.

  민간인들의 영토를 더 좋아한다.

  정복하는 나라보다 정복 당한 나라를 더 좋아한다.

  의심을  가지는 것을 더  좋아한다.

  정리된 지옥보다 혼돈의 지옥을 더 좋아한다.

  신문의 제 1면보다 그림형제의 동화를  더 좋아한다.

  잎이 없는 꽃보다 꽃이 없는 잎을 더 좋아한다.

  품종이 우수한 개보다 길들지 않는 똥개를 더 좋아한다.

  내눈이 짙은 색이므로 밝은 색 눈동자를 더 좋아한다.

  책상서랍들을 더 좋아한다.

  여기에 열거하지않은 많은 것들을 

  마찬가지로 여기에 열거하지않은 다른 많은 것들보다  더 좋아한다.

  숫자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은 

  자유로운 제로(0) 를 더 좋좋아한다.

  기나긴 별들의 시간보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시간들을 더 좋아한다.

  불운을  떨치기위해 나무를 두드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얼마나 남앗는지, 언제인지  물어보지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존재, 그자체가 당위성을  지니고 잇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시를 찾아 웹툰을 훌훌 넘기다 앞으로 다시 돌아와 그림 한 칸씩 천천히 들여다본다.

박성우 시인인 300편이 넘는 시들을 읽고 골라 담았다고 하는데 

실리지 않은 시들이 읽고 싶어 마음이 괜시리 초조해진다.


문득 외워서 적어볼 수 있는 시가 있을까 생각하다, 

허수경 시인의 절창이 그리워 시집을 들춰봤다가, 

그의 수필에 머무른다.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불안하다. 이런 날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불안한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빨래를 할수도 없고 집안 청소를 할 수도 없고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보기나 하는 일마저 할 수가 없다. 마음속에서 뭉게뭉게 나오는 불안 구름 좀 봐, 왜 불안하지? 107

실은 나도 할말이 많다. 이렇게가 아니라 저렇게 살고 싶었다' 라든지, 그때 내 잘못이 아니라 네 잘못이었다' 라든지 하는 것들, 내가 내 얼굴을 사납게 노려본다. 그래, 좀더 잘하고 살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꼭 그렇게 잘살아야 되겠니? 내가 나에게 말을 건다. 무엇 때문에 사납게 주름 잡힌 상판을 들고 그렇게 잘살아야 하겠니? 이치를 따져가며, 잘잘못을 물어가며......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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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아틀리에 - 과학과 예술, 두 시선의 다양한 관계 맺기
김상욱.유지원 지음 / 민음사 / 2020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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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다섯 개로 평가하려니 마음이 아파 이렇게 별무리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집중력의 정도와 반드시 비례하지도 않고 들인 시간에 결과적으로 비례하지도 않는 것이 생각의 영역이라는 점은 나처럼 기껏 평범 언저리를 도는 사유능력을 가진 이들이 맞닥뜨리는 한계를 규정한다고민하고 탐구한 사유 과정을 통해 좋은 생각이 나오고 그 생각에서 좋은 글이 나오는 지라…… 일찌감치 한계에 봉착한 나는 경계를 자력으로 넓히지는 못하고노력의 양도 사유의 깊이도 기술의 능력도 에베레스트 높이만큼 다른 재능 넘치는 저자들의 작품을 읽는 것으로 증강현실과 같은 경험치를 쌓아가며 산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들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대상들알아도 생각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방법들에 대해 충실하고도 재미난 방식으로 알려 주는 책들종종 나는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인류가 발명한 가장 정교한 절도 기술이 아닌가 한다어떤 책들은 하나의 주제어에 대해 인류가 이제껏 해왔던 생각들을 모조리 정리해서 알려 준다정말 19,000원을 내고 이 모든 정보를 소유하는 행위가 정당한 것인가 싶다.

 

재능 있는 노예(talented slave, 재능이 뛰어난 이는 그 재능으로 인해 노예와 같은 강도로 재능을 활용하는 업무 지옥에 빠질 가능성이 높고 사회는 그로 인한 이득을 위해 그런 노동을 연구 열정 또는 다른 긍정적 이름으로 부추긴다)란 표현이 떠오르면서 재능부족인 존재로서의 안도감과 재능 있는 저자들을 계속 착취하고 생각을 훔치는 일에 영원히 가담하고 싶다는 못된 생각이 슬며시 든다.

 

<뉴턴의 아틀리에>는 (내게는)그런 훔치고 싶은 대표적인 책들 중 하나이다그런데 책이란 지적산물은 구입한다고 읽어 본다고 제대로 몽땅 훔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문제이다문득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을 (  )% 정도 이해했습니다.’라고 통계 자료를 만들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틈만 나면 미술관을 찾는 과학자와 물리학회까지 참석하며 과학에 열정을 보이는 디자이너가 만났다이들이 고민하는 내용들은 관찰과 사색수학적 사고와 창작의 세계,라고 소개되는데재밌는 점이 목차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키워드를 놓고 생각을 주고받는다 ― 소통한다 ― 는 점이다 이야기소통유머편지자연스러움죽음감각보다가치두 문명언어이름평균스케일검정소리재료도구인공지능상전이복잡함이렇게 26.



그러면 이들은 왜 소통하려 할까’ 흥미롭게도 유지원 디자이너는 물리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전반에 대한 상당한 기초지식을 가진 것이 분명한 듯 소통하는 힘이 생명력이라는 주장을 생물학세포학의 관점을 들어 논거 한다김상욱 교수가 발언한 부분이 아니야하고 다시 확인하며 읽었다내 경험이야 일천하긴 하지만 이런 재밌고 유쾌한 디자이너는 처음이다.

 

하지만 세포들도 인간들도네트워크를 이루어 서로 의존해야 생존을 유지한다.

아무리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우리는 늘 외부와 어떤 경로로든 소통을 하고 있다.

이것이 개체성과 양립하는 사회성이다.

세포막으로 경계가 나뉜 세포들은 서로 어떻게 소통을 할까?

세포막에는 여러 종류의 막단백질이 있어,

이들이 세포의 외부와 내부를 소통시키기도 하고세포들끼리 소통시키는 역할도 한다.

세포막은 개체의 경계를 가르면서도서로 소통하고 연결하며 생명을 유지하도록 한다중략.

소통이란 생명 그 자체이고때로 개체의 목숨을 초월해서 관철되기도 한다.

뉴턴의 아틀리에』 역시 막단백질 같은 역할로 여겨졌으면 한다.

여러 분야들의 세포막 같은 경계를 넘나드는 소통의 통로처럼 여겨지기를 바라면서,

경계 밖 외부 신호를 감지해서 받아들이고 이를 다시 관계 맺고자 하는 의지로 내보내면서,

오늘도 이 글을 쓴다.

 

그리고 표지부터 등장해서 더 없이 반갑고 기쁜경애하는 김초엽 작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의 문장들이 이 아틀리에를 더욱 안온하고도 들뜨게 한다.

 

과학은 거대한 우주 속 미약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하고,

예술은 그 미약한 우리의 작은 마음을 우주로 확장한다.

우리는 한낱 우주먼지이지만 동시에 온 우주이기도 하다.

그러니 한 사람을사물을현상을 단 하나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그것에 숨겨진 무한한 세계를 발견할 수 없다.

뉴턴의 아틀리에를 읽는 동안 나는 마치 작고 많은 세계들을 발굴하는 예술가의 공방에 초청받은 것 같았다.

이 책은 하나의 현상을 단일하게 파악하는 대신 여러 관점을 통해 겹겹이 쌓인 결을 찾아보자고 말을 건네 온다.

과학과 예술은 서로를 경유해 새로운 의미를 찾아낸다.

과학자는 우주에서 시를 발견하고 디자이너는 글자의 아름다움에 관한 법칙을 쓴다.

다른 영역에서 출발한 선이 무수히 교차하는 지점들이 펼쳐진다.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고 동시에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존재이므로,

결코 감각할 수 없는 입자를 증명하는 일과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풍경을 캔버스 위에 물성화하는 일은 결국 어디선가 만나게 된다.

그와 같은 교차와 확장의 순간들을당신도 분명히 뉴턴의 아틀리에에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하지만 생명은 영원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해진 코로나 바이러스를 포함해서 자가 복제가 가능한 존재는 처음 모습 그대로 영생을 누리고인간처럼 유성생식을 선택한 생명은 생식세포 단 하나만을 남긴 채 다른 모든 세포가 사멸하지만어쨌든 유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에 죽음이란 사건은 존재한 적이 없다최초의 생명체가 가졌던 생명 정보는 지금도 우리 몸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거듭해서 환원하다보면 우리는 하나의 생명체에서 거듭해서 분해결합진화분화를 통해 갈라진 존재들이다무시무시하지만 이쯤 되면 나와 남의 경계도 없어진다예를 들어 30,000년 전에 사라진 생명체들의 구성 원소들이 뒤섞여서 오늘날의 나와 내 친구혹은 가장 혐오하는 존재로 재결합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우리가 가지는 상대에 대한 감정은 모두 자기애일 수도 자기혐오일 수도 있겠다어쨌든 너무 환원적 사고에 몰입하면 분별력이 사라지니사실은 알아두되 상상의 경계는 적당히 건전하게 두는 것도 (내게는필요할 듯.

 

인간의 뇌가 세상을 이야기로 인식하다 보니

세상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특성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은 언어를 창조하고

언어는 추상적인 의미마저 만들어내고

결국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종이 된 것은 아닐까?

 

이름이 존재를 보장하지 못한다

더구나 이름은 자의적이다

하지만 이름은 존재에 의미를 준다

동양에서 형상은 문자가 되고 문자는 의미가 된다

하나하나의 이름 없는 의미들이 모인 군상이 어우러져 조화로운 춤이 될 때

그 춤은 또다시 하나의 형상이 되고 문자가 되고 의미가 된다

이렇게 우리는 이름을 쟁취한다.

 

흔히 우리는 암기식 교육의 단점들을 소리 높여 지적하고 창의적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나는 그런 주장들이 전하는 분위기에 불만이 있었다암기 위주의 교육이 잘못이라고?! 교육이 암기 위주가 된 것은 이해해야할 내용을 암기시키고 암기할 수밖에 없게 만든 여타의 모든 사회적 행정적 편의주의 때문이다암기()없이 할 수 있는 교육 같은 건 없다.

 

예를 들어 가장 기초적인 교육에 필요한 문자를 읽히는 방법은 반복 암기 밖에 없다나처럼 암기 능력이 떨어져 힘들어 하던 한 단원에 공식 하나만 이해하면 되는 수학이나 물리학과 달리 외워할 정보들이 빼곡한 과목들은 얼마나 오랜 노고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 이조차 어떤 단계의 학문이든 암기력이 뒷받침될수록 사고가 더 자유로워진다는 점을 완전히 인정한다사전이나 원저를 찾아보면 된다고안타깝고 슬프게도 그 속도로는 생각 속에서 여러 정보들을 이리저리 굴려서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내고 발견해내는 가치 있는 연구는 불가능하다.

 

아무튼 혁신도 늘 전통 위에서독창설도 질서 위에서 가능하니창의력은 그렇게 이뤄진 혁신과 그렇게 변주된 독창성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때낯선 언어들과 다른 분야들이 소통하고 연결될 때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유럽에서 초현실주의의 비현실적 꿈이 그려지던 시기물리에서는 양자역학이 탄생했다.

양자역학은 원자의 세계가 상식과 직관을 넘어 비현실적 꿈같다고 말해 준다.

양자역학과 초현실주의가 1920년대 중반 유럽이라는 동일한 시공간에서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현대미술의 늪에 빠지게 된 것이다김상욱

 

중력 원칙에 따라 작품을 완성하는 예술가와 그것을 자연스럽다(natural, 당연當然하다) :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예 존재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고 해석하는 과학자양자역학의 관측’ 개념으로 설명되는 르네 마그리트와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들열역학 제1법칙에서 보이는 생명력의 예술적 패턴을 읽는 타이포그래퍼사실 이미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었지만 인간이 이제야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지만그래도 여전히 신기하고 재미난 것만은 사실이다존재하는 현실을 시대와 시대정신에 맞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대한민국에서 공사 영역의 구분 없이 조 단위의 자본이 투입되어 그토록 원하는 창의력이다.

 

낯선 언어는 서로 다른 것들 간의 뜻밖의 연결을 만들어 낸다

이 연결을 자유자재로 적절히 구사하는 능력이 곧 창의력이다.

 

과학과 예술은 통시적으로 보아 새로운 사실과 변화에 가장 민감할뿐더러 포용하고 활용하는 저항도 적은 분야이다그리고 바로 그런 점이 과학과 예술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하다그림 하나 글 한쪽에 오래 머무는 시간이 좋고그냥 책 한권을 다 필사해도 시간이 아깝지 않을 듯하다끝없이 길어지고 집중력만 떨어뜨리는 본인의 사설을 거두고 원저의 내용만 모으는 편이 더 좋을 듯하다.

 

르네상스가 끝나 갈 무렵보는 것의 혁명이 과학을 강타한다

1609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20배율 망원경을 제작했다.

 

보이는 대로 그려야 한다는 새로운 규칙은 19세기 인상주의에 이르러 완성의 경지에 도달한다

이렇게 혁명은 자세히 볼 수 있게 된 것에서 시작되었다.

 

보이는 것을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변화하고 완성되기도 한 과학과 예술이 둘을 배우고 활용한 인류에게 뜻밖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배양되었다의도든 우연이든 재밌고 신기하다이 능력으로 인류는 이제껏 현상을 분석하고 감춰진 진실을 밝히고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견뎌왔다인류를 절망과 멸절로 향하지 않도록 한 힘의 하나로 작용해왔다고 나는 믿는다.

 

현대물리학은 인간의 감각을 뛰어넘어 보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이면 길이가 짧아지고 시간이 느리게 간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물론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속도에 도달할 수 없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극미(極微)의 세상을 다루는 양자역학에서는,

하나의 물체가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할 수 있고 보는 행위가 대상의 상태에 영향을 준다.

이런 세상에서는 우리의 경험이나 언어가 무용지물이 된다.

이제 우리는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김상욱

 

마음의 과학은 이제야 양적 근거의 데이터를 조심스럽게 확보하며 인간의 마음을 과학의 방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과학이 아직 답을 내리지 못한 곳에서생생히 살아서 꿈틀대는 우리의 마음은 방치되어야 할까답이 보이지 않는 그곳으로시인과 음악가들은 결연히 걸어갔다섣불리 희망을 노래하거나 처방을 내리지 않은 채그들은 인간의 마음이 겪는 고통의 심연을 따라갔다.

 

유머 감각이란 어떤 일에 몰두하다가도여유를 갖고 주위를 넓게 둘러보며 균형을 잡는 힘

 

우리가 배우고 생각하는 이유는 직각의 정적인 안정감과 구의 동적인 율동감 사이에서 균형의 기쁨을 찾기 위해서.

 

무한의 반복을 멈추고 유한에 머무는 순간 그 유한의 크기는 부분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점은 물체가 아니라 과정이다

점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인식의 구속과 오류로부터 자유를 탐색하고,

왜곡되었을지 모를 구태의연한 시선에 대해 보다 나은 방식을 제안하려는 질문을 던진다.

이런 질문들은 개인의 자립감과 자존감을 높이고,

결국 공동체를 각성하게 하며 치유하는 사회적인 효과를 가진다.

인간이 세상과 더 잘 지내고자 하는 도정인 것이다유지원

 

정규분포에서 평균은 집단을 대표한다

평균이 집단을 대표하지 못하고 부의 분포가 지나게 치우치면그 사회는 불안정해진다

그 해답은 평균즉 집단지성을 이용해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완벽한 검정에서는 무엇을 보게 될까?

밴타블랙을 바라보면 안으로 빨려드는 느낌이 난다.

그것은 우주일 수도 있고 블랙홀일 수도 있고 지금 내가 빠져 허우적거리는 진창 같은 인생일 수도 있다중략.

사실 진창은 빠져나올 수 있다.

검정은 끊임없이 흑체복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김상욱

 

언어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왜 수학과 예술이 존재하는지 설명해 준다

우주는 인간의 언어와 이해 방식이 아니라 수학과 물리학의 방식으로 기술된다

간은 수학과 언어로 기술할 수 없는 것을 예술로 표현한다

그래서 예술은 언어로 분명하게 정의할 수 없고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분석할 수도 없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둠을 기억하는 것이다

보지 않고도 하는 것이다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세밀화가는 보지 않아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아니보기 전에 대상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한다

보는 것이 대상을 만들어 낸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보는 것이다

우리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세상이 존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방이 180개쯤 있는 고아한 성에 초대되어 8개쯤 방문을 열고 잠시 둘러 본 기분이다발자국 자리들만 어지럽고 길어지기만 하는 글이라 그만 마치려한다.

 

그러니까 이 책의 4.44444...% 정도를 이해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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