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와 포피
로리 프랭클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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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책이다. 논바이너리 일러스트레이션 표지가 반갑고 먹먹하다. 적지 않은 분량의 두께에 나는 행복하고 우리 집 십대들에겐 정성껏 소개해야한다. 이것도 중년인 나의 편견과 선입견일지도. 다 틀리면 가장 좋을. -> 막상 읽기 시작하면 몰입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쉽다.

 


최근에 불필요한 스트레스와 피로감을 주는 요인들을 목록으로 만들었다. 이럴 때면 나는 아날로그 인간이라 느낀다. 적어서 보면 생각이 정리되고 판단이 확실해진다. 아쉽게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도 있지만, 적어도 더 열심히 피해 다닐 수는 있으니까.

 

생사대결을 펼치듯 난무하는 이분법 그 이상의 납작한 구분과 혐오와 폭력의 언행들이 너무 끔찍하다. 문명이라고 우겨온 무언가의 민낯과 종말 같기도 하다. 인구는 늘어나고 세상은 복잡해지고 정보는 많아졌는데, 판단만이 재빨라졌다. 선입견과 게으른 차별주의가 강해졌다. 그러니 다양성을 고려하고 배려를 사유하는 문화가 요원하다.

 

(...)

, 둘 다면 안 될까요?

똑똑한 사람이라면 답을 알 텐데.

모든 게 더 작거나 더 많아야 하고,

시시하기 아니면 어마어마하기, 둘 중의 하나여야 하나요?

, 늘 이것 아니면 저것이어야 하나요?

, 이것과 저것 둘 다면 안 되나요?

(...)


 

세상엔 마법지팡이도 없고 기적도 없다. 그리고 세상엔 마법지팡이가 많고 기적도 많다. 동화처럼 순식간에 모든 상황을 나아지게 하는 종류는 없지만, 법과 제도를 바꾸면 수많은 사람이 안전해지고 행복하도록 도울 수 있다. 어렵지 않은 유니버셜 디자인이, 과도하거나 불필요한 양성주의가 아닌 공간을 마련한 작은 시설도 그럴 수 있다.

 

불가능해 보였지만 바로 거기에 있었다. 클로드/포피는 평생 처음으로 맞는 문을 찾은 것이다. 안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세면대, 변기, 심지어 화장지도 있었다. 평범했다. 아무것도 특별한 것이 없었다. 기적이었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이 마법이고 기적일 수 있다. 종종 우리는 마법지팡이를 갖고도 사용할 줄을 모른다. 물론 사용법을 감추고, 쓰지 못하게 하고, 쓰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 가스라이팅하고, 쓴 사람을 괴롭히는 방해세력이 있다. 그들은 대개 힘이 막강하다.

 

오늘, 내년, 그리고 아이의 앞에 놓인 매우 구불구불한 길에서 만날 사람들의 반응이. (...) 그녀가 앞으로 만날 공포와 무지를 생각하면 두려움에 몸이 굳어버릴 것만 같다. (...) 적어도 소설과 진짜 삶의 부모 노릇의 차이는 소설에서는 위태롭고, 예측 불가능하며, 위기일발의 사건들로 가득 차고 상심과 겨우 모면한 재난으로 가득 차기를 바라지만, 실제 삶에서는 가능한 한 플롯 전환 없이 민둥하기 그지없기를 바란다는 점일 것이다.”


 

작가에 대해 조금 알고 나니 이 책이 초행길의 표지판이나 가이드 같기도 하다. 아이가 트랜스(trans, 성전환)를 경험하는 가족으로서, 자신에게 용기를 주고, 불빛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닿길 바라는 마음으로, 단순한 소원이 이뤄진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은 아닐까.

 

복잡하고 어려운 일도 아니고 차별, 혐오, 편견, 폭력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드는 일도 아니다. 모두가 다른 존재라는 인정, 내 취향만 정상이라고 우기지 않을 정도의 지성, 해를 끼치기보다 사랑을 나누며 사는 평화롭지만 느슨한 연대.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해서 진짜가 아닌 건 아니지. 만들어내는 이야기만큼 강력한 진짜는 없어.”

 

이런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용기를 내야 하는 현실이 갑갑하지만, 그래서 그 용기가 빛난다. 독자로서 나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믿는 이야기가 현실이 될 것이라고도 믿는다. This Is How It Always 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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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5-26 2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야기의 힘을 믿습니다^^
잘 읽고 공감하고 갑니다.

poiesis 2023-06-02 20:06   좋아요 0 | URL
덕분에 좀 더 단단하게 계속 믿을 수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편안하고 무탈하고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드립백 케냐 야라 AA TOP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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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끊었다 다시 주문한 커피... 몹시 기대된다. 향미가 좋았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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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되어 살아낼게 - 세월호 생존학생, 청년이 되어 쓰는 다짐
유가영 지음 / 다른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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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얇다정성스럽게 싸맨 고운 선물 보자기 같은 책이다그래도 묵직한 책이다생존 당사자의 증언으로 태어난 책이다다짐을 적은 책이다유가족 중 한 분이 돌아가신 소식을 들은 날이라 더 귀한 책이다.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보아도 가장 안타까운 순간은 같다일초라도 빨리 구조가 시작되었다면배 밖으로 다들 나오기 시작했다면그러니 유가영 저자의 친구처럼 다들 같이 나가자!”고 했다면... 가만히 있으라는 말 따위 무시했다면... 그런 말 따위 애초에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나오기 전에 잠시뒤에 남겨진 친구들의 얼굴을 돌아봤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쿡쿡 아리는 듯합니다친구들은 저를 어떤 얼굴로 보고 있었을까요.”


 

목소리만 큰 이들이 뭐가 지겨워서 지겹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화가 난다나이만 어른이라 부끄럽고 미안하고 화가 난다도움을 못 줄망정상처를 깊게 하고덧나게 한 온통 부끄러운 행태들이 당사자가 아닌 내게도 아직 역하다.

 

학교 수업을 다시 듣게 되었지만 사실 누구도 집중하지 못했습니다이상하리만치 잠을 자는 친구가 있는 반면어떻게든 공부를 해보려고 지나치게 애쓰는 친구도 있었습니다저는 평소와 같이 행동하는 듯했지만 사실은 어디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했습니다.”


 

갖가지 망발에생존자와 유가족이 바란 적 없는 특례법에잇따른 비난에여전한 보도 경쟁을 일삼은 언론에... 그 폭력적인 각축장에서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기자들을 피해 다른 곳에 내려 준해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고 택시비를 받지 않은 기사분이 계셨다.

 

그리고 오래 치료와 치유와 상담을 이어가신 의사가 계셨다그 경험이 도움이 되어 저자도 비영리 단체 운디드 힐러를 만들었다좋은 일이고 응원만 하고 싶은 이야기인데단어만 떠올려도 눈물이 나던 여러 해가 지나고 이젠 울지는 않는구나 했는데다시 목이 아파온다.

 

아마 그 사고가 없었다면 평생 만날 일이 없었을 지도 모르죠그럼에도 저는 이 사람들을 만난 게 제 인생에 다시없을 행운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사고로 많은 걸 잃었지만 또 얻은 것도 있을 테니 이 또한 그중 하나라고요.”


 

깊은 상처를 입은 생존자로서 차분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타인과의 연결과 연대를 고려해서 원하는 일을 만들어나가며제대로 독립하는 성장의 풍경이 눈부시다결국 생존자 유가영은 스스로를 다시 한 번 더 구조했다덕분에 내내 어둡고 내내 아프지만은 않았다.

 

무엇을 한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요그래서 저는 최선을 다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처참했던 그때의 사고와 그 후의 지난했던 상황들을 기억해 내는 게 순간순간 버겁기도 했지만 노력했어요.”

 

손쉬운 도움만 건네는 어른이지만당신이 쓴 글을 읽는 것으로 함께 합니다필요 없다고 할 때까지 기억하고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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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26
에밀리 디킨슨 지음, 조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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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들을 만나면 세상에서 가장 관대한 선물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가장 호사스러운 체험을 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평생을 연구한 자료를 담은 한 권의 책도, 삶의 농밀한 것들을 아름다운 언어로 전하는 시집도 그러하다.

 

생전에 출간된 일곱 편의 시가 모두 편집되었다는 정보에 놀랍고 안타까웠다. 단 한 장뿐인 사진에서 그는 영원히 열여섯의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나, 응시하는 시선은 오랜 눈 맞춤을 통해 스스로를 불멸의 존재로 남길 것만 같다.

 

이상할 정도로 과격한 언어들로도 소개되는 그의 존재와 삶이 많이 궁금했다. 은둔과 격리라는 평가는 오히려 진심보다 형식이, 태도로서의 사회성이 미덕이고 과대평가된 문화 때문이 아닐까. 그의 시는 외부 세계를 모르지도 피하지도 않는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작은 방에서 렌즈 두 개로 우주를 다 보았던 것처럼, 시인도 노란 집 자신의 2층 방에서, 커튼이 열린 틈으로도 전쟁의 화마가 사라진 세상의 아름다움과 삶의 풍경을 다 만났을 지도 모른다.


 

2세기 전 살았던 시인의 삶이 비밀의 화원처럼 펼쳐진 곳으로, 변신의 마법을 부린 듯 간결하고 아름다운 번역어를 통해 입장할 수 있었고, 원하는 만큼 오래 머물 수도 있었다. 고요하고 낯설고 매혹적이었다. 어떤 단어들은 진하고 뜨겁게 피어난 불꽃같았다.


 

나는 때론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그의 시 속에서 방문해 보기도 하고, 작고 가벼운 시집과 함께 내 세계로 산책을 나갔다. 두 세계 모두에서 꽃이 피고, 물이 흐르고 , 나무가 푸르고, 숲이 존재했다. 그의 몽상은 나의 관찰보다 정확하고 아름다웠다.


 

그의 펜촉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벌과 나비를 반가이 맞았고, 신기하게도 자꾸만 행운의 네 잎 클로버가 눈에 띄었다. 봄이라기엔 두려운 세찬 빗소리도 시가 떠올라 놀라지 않았고, 오래 접은 베이킹도 시인이 빵을 굽던 시간을 생각하며 오븐을 데워보았다.

 

그가 생을 마친 55세가 내 나이에서 멀지 않다. 1800여편의 시에는 그가 경험한 - 직접 경험이든 문학적 상상이든 - 세상이 담겨있을 것이다. 실체화된 시어들이 만든 세상일 것이다. 선집에서도 새소리가 들리고, 벌레들이 울고, 꽃들이 피고, 잎들이 날아다닌다.

 


내가 살면서 경험한 것들 중 언어로 바꿔 기록할 것이 몇 개나 될까. 문득 그런 생각... 50대의 에밀리 디킨슨을 상상해 보았다. 생의 마지막까지 그가 기록하고 싶었던 세계의 조각들... 번역된 시집이란 문학전공자가 아닌 독자가 누릴 수 있는 사치와 호사의 절정 같구나.

 

남북 전쟁의 화마 속에서, 수명을 가진 인간의 몸속에서, 1800년대의 여성 속에서. 그리하여 의식을 펜으로 조각한. 재능보다 뜨거운 애정이 가득했던, 세상의 시들로 몸을 덥히며 산. 자신의 사망 증명서 직업란에 이라고 적은 시인이 있었다. 모든 순간이 환희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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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투어리즘 인문 여행서 - 역사와 함께 길을 걷다
원선희 지음 / 지식과감성#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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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하다는 것을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 상처가 낫지 않았다는 것, 갈들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 아직 다 해결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부정적인 것이 아닌 진짜 역사와 현실의 민낯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크투어리즘의 대표인 저자가 여러 여행을 떠난 이유와 여행에서 발견한 무엇을 전해줄지 궁금했다. 내가 바라던 근절도 시작도 없는 현실이지만,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을 제외한 선택의 폭이 여행에서도 늘어나길 바라며 읽었다.

 

날짜는 기억나지 않아도 울돌목의 바닷물을 한참 바라본 시간이 기억난다. 안전하고 평화롭게 보낸 그 시간은 많은 이들이 다치고 죽어가며 지켜낸 미래였다. 책의 시작이 죽기로 한 바다여서 삶이 눈부시다. 명랑으로 우수영초등학교로 간다.


 

잊지 못할 장면 중 하나, 비구 법정 네 글자만 몸 위에 올리고 불길로 재로 화하신 법정 스님. 어느 한 구절의 말씀을 만나도 좋다. 종종 희화화되고 오용되는 가르침에 속이 상하긴 하지만, 그런 것도 별 신경 안 쓰실 지도.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만나는 어떤 사연들에는 잠시 멈춤을 하게 된다. 공적인 영역보다 사적인 영역의 중요성이 비교할 바 없이 크고, 사적 관계를 넘어 자아를 깊이 들여다보는 현대 사회에서, 자식을 도울 수 있을 기회를 사사로이 쓸 수 없다고 거절한 이야기는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합리성이나 상식을 근거로 예전 조상들이 매번 판단했다면 나는 독립국가에서 전쟁을 겪지 않고 비교적 안전하게 지금껏 살아올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흉내를 낼 수는 없는 일이니 죄송할 따름이다.


 

먼 역사의 현장만을 다니고 언급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바로 얼마 전 참사의 현장들도 책에 담겼다.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일까. 내가 태어나기 전이든 후든, 현장에 있었든 뒤늦게 배웠든, 각자가 정의한 시대 구분이 다를 수는 있지만, 자신의 세대의 책임이 다하지 않은 역사를 반드시 기억해야한다고 믿는다.

 


제주 4.3을 다룬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에서도 상당히 상세하게 다뤄진다. 모든 기록이 참담하다. 국가 권력이 저지른 폭력이라고 공식적으로 사과한 역사가 있어서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길 바란다. 아직도 찾지 못한 분들이 언젠가는 기다리는 이들에게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 보면 살게 된다).”

 

이제 조금 덜 낯선 제주말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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