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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살이 되면 Dear 그림책
황인찬 지음, 서수연 그림 / 사계절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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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붙이지 않아도 향기롭다

레몬그라스가 흐리고 무거운 공기를

잘 가르고 내 안에 도착한다

 

헛웃음이 나올 만큼 피곤했는데

가만 옆에 등을 대고 누우니 좋았다

천천히 시를 읽었다


 

................................................................



 

백 살이 되면 좋겠다

 

아침에 눈을 뜨지 않아도 된다면

좋겠다

 

엄마가 불러도

깨지 않고

 

아빠가 흔들어도 깨지 않고

모두 그렇게 떠나고 나면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좋겠다

 

물방울이 풀잎에 구르는 소리

젖은 참새가 몸을 터는 소리

 

이불 속에서 듣다가

나무가 된다면 좋겠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 나무 밑에서 조용히 쉬고 계시면 좋겠다

 

빛을 안고

뿌리를 뻗으며

 

오래 평화롭게 잠들 수 있다면 좋겠다

 

그 잠에서 깨어나면

여전히 한낮이었으면 좋겠다

 

온 가족이 모여 내 침대를 둘러싸고 있으면 좋겠다

부드러운 오후의 빛 속에서

 

잘 쉬었어?

오늘 기분이 어때?

 

내게 물어보면 좋겠다

그럼 나는 웃으면서

 

백 년 동안 쉬어서 아주 기분이 좋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정말 좋겠다

 

- ‘백 살이 되면전문 황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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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가 왔습니다
조피 크라머 지음, 강민경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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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대한 기본 지식도 없이 너무 어린 나이에 처음 접한 <독일인의 사랑>이 떠올랐다. 다른 작품이 안 떠오를 만큼 독일 러브스토리란 드물게 경험하였다. 그래서 더 궁금하고 기대가 컸다.

 

원제 SMS fur dich는 역시나 가감 없는 팩트 전달 독일식(?)’이라 죽도록 피곤한데도 덕분에 크게 웃었다. 2009년 출간이라니 오랜 시간이 지나 중요한 메시지가 내게 도착한 듯 기분 좋은 상상도 더해보았다.

 

SMS에는 한동안은 소통하자는 연락이 대세이더니, 요즘은 공격적인aggressive한 스팸들이 이웃추가와 팔로우로 북적인다. 할 수 있는 것을 다해도 완전한 방어나 근절은 불가능하다.

 

염증厭症(진저리)이 나는 현실이라서, 오류로 인해 이런 메시지를 만나게 되는 작품 속 인물들이 부러웠다. 스팸에 비하자면 낙원이나 천국처럼 로맨틱하고 감동적이다. 행복하게 받고 읽고 답장도 보낼 수 있겠다.

 

원칙, 규칙, 질서, 확인, 문서작업, 무오류 지향을 가장 잘 체화한 이미지의 독일 사회에서, 기발하게도 오류를 계기로 문자가 전달되고 사랑이 봄꽃처럼 다시 피어나는 반란과도 같은 짜릿한 문학이다.

 

뭔가가 바뀌어야 다시 삶의 활기를 느낄 수 있을 텐데라고 스벤은 생각했다.”

 

예측이 불안을 줄일 수 있다는 예언이 넘치는 시절이지만, 예측할 수 없이 방향을 바꾸기도 하는 무엇이 누군가를 살게 하고 설레게 하는 예측 불가가 좋다. 숨 쉬기 좋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 듯하다.

 

누군가가 자신을 무방비로 내보이며 깊은 진심을 보인 것에 대해 무례하지 않게, 이용할 생각 없이, 진지하게 헤아려보는 그런 인간관계...는 어느 시대에도 장소에서도 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아름다운 독문학자 전영애 교수의 다큐를 보다가, 사랑은 그냥 인간이 생각한 최고의 것에다가 붙인 이름이에요. 사랑을 정의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하셔서 심장에서 밀어올린 듯 꽤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내 세대는 영화 접속을 쉽게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영화화된다니 영상의 분위기와 흐름은 어떨지 무척 기대된다. 읽고 나니 피로감이 덜하다.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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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샤라 휠러와 키스했다
케이시 매퀴스턴 지음, 백지선 옮김 / 시공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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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6, 독일에서 케이시 매퀴스턴 책 두 권 전시된 것 보았다고 친구가 알려줬는데 벌써 번역 출간이 되었다. 놀랍고 반갑다. 제목만으로는 상상이 멀리 가기 어려운 독자라서, 지쳐서 순순히(?) 책을 잘 따라 읽을 목요일 만남을 예약해 두었다.

 

추리, 미스터리, 로맨스라 기대 가득. 작가의 메시지는 짐작과 많이 다를 거라는 친구의 힌트와, ‘성격이 나쁘고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즐겨 쓴다는작가의 자기소개에 더 설레며 펼쳤다.

 

샤라 휠러와 키스했다, 가 아니라 샤라 휠러가 키스를 했네. 동의 없는 갑작스런 키스는 폭력과 범죄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라서 살짝 당황했다. 더구나 키스 후에 잠적했다. 일단 고구마 먹은 기분이지만 계속 읽어본다.

 

? 한두 명에게 갑작스런 키스를 한 것이 아니네. 남자친구가 있네. 왜 이러는 것일까. 사건이 흥미로우려면 잠적한 샤라를 찾아나서는, 그 대답을 원하는 인물이 필요하다. 완벽한 잠적을 원한 건 아닌 샤라는 단서를 많이 남겼다. 청소년 독자라면 단서 찾기와 추리도 재미있을 듯하다.

 

십대인데 이렇게 자신을 철저하게 숨기고 살아야하는 삶의 조건들이 안타깝다. 소설도 현실도 비슷한 것이 아프다. 어른이 되어도 자신의 모습 그대로 솔직하게 살기가 어렵다고 설명해야 하는 어른의 처지도 서글프다.


 

조직과 공동체는 개인을 보호하고 양육할 책임을 진다고 믿고 싶은 나는, 기대한 역할이 아닌 상황을 마주하는 것도 괴롭다. 특히 학교... 어린 사람들에게 대한 애정과 교육철학과 가치를 믿고 지키는 의지가 없다고 어째서 교육계에 종사할까, 하는 순진한 분노를 느껴본다.

 

어째서 인간은 성장하면 이토록 위선적인 존재가 되고 마는 걸까. 인간의 수명이 짧아 시행착오를 통한 경험을 곱씹고 배우고 변화하기 힘들다는 분석도 있지만, 누구도 직접 경험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내게도 강고한 위계와 차별을 이야기로 보니 화가 나면서도 스스로 부끄러웠다. 글이 점점 어두워지는데, 결말에 이르는 느낌은 시원하다. 부담스럽지 않은 무게감과 코믹한 재미를 갖추어 메시지가 더 잘 전달되는 영리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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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룡소 이야기 죽어도 좋아!
이용환 지음 / 지식과감성#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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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만 하려고 했는데 포토 에세이라 자꾸 넘겨보게 되었다. 이미지가 지겨워지면 그만 보게 될까 했는데, 글이 재밌어 끝까지 보았다. 모르는 것 투성이다. 수많은 재미난 것들을 모르고 살다 죽을 거라 생각하니 아쉽다. 문득 또 오래 살고 싶어지네.

 

비룡소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는지 몰랐다. 전래 동화 속 용이나 이무기가 사는 못 같이 들렸는데. 충북 보은 비룡소에서 살았던 저자의 이야기가 내 경험이 아님에도 그리운 느낌이 가득하고 많이 부러웠다.

 

풍성한 책처럼, 자연처럼 저자의 이력도 그렇다. 덕분에 책으로 만나는 알쓸인잡처럼 재밌었다. 저자는 청려장’*을 기대한다는데 나는 그 절반도 못 살고 여기저기 무너져 내리니 어째야할까.

 

* 매년 100세가 된 이에게 102일 노인의 날에 청려장이라는 지팡이를 국가에서 선물한다.


 

고풍스런 지팡이를 사본 적이 없어서 재료가 명아주인 걸 몰랐다. 풀인줄 알았는데 나무 지팡이가 될 만큼 크는 구나, 삶아서 쓰는 구나, 옻칠을 하는 구나, 여러 가지를 배웠다. 명아주 풀 한 포기를 집에 데려오고 싶지만 참자.

 

내가 배운 환경 상식으로는 침엽수보다 활엽수가 유익한데, 예전에 한반도에 살았던 이들은 내 짐작보다 소나무와 삶과 죽음이 밀착되어 있다. 딸이 태어나 심은 오동나무로 장롱해준단 얘기도 아들 태어나 심은 소나무로 관을 해준단 얘기도 처음처럼 다시 읽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목련을 심은 아버지는 왜... 결혼도 하지 말고 죽지도 말란 뜻...? 죽으면서도 나무를 베는 일이 미안하지만, 평생 본 나무 안에 누워 잠드는 것도 참 좋구나. 소나무로 다시 태어날 것도 같고.


 

그리고 갈등葛藤(칡 갈, 등나무 등) 예전에 알았는데 다 잊었네. 라일락이랑 비슷한 등나무꽃, 특이하게 흙맛 나는 칡즙 잘 마시던 젊을 적의 나. 눈에 띠면 좋아라 사마셨다. 정말 흙맛인데 늘 기분이 좋아졌다. 이유는 모르지만.


 

봄이 되면 내가 좋아하는 어느 산책 루트에는 하루살이들이 웅웅 거리기도 한다. 마스크를 하니 코 안으로는 이제 들어오진 않지만, 예전에는 무척 불편한 날들도 있었다.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면 되는 일이라 미워하진 않았다.

 

관심이 적어서 알아볼 생각은 못했는데, 수질 오염에 민감한 생물종이라고 하니, 하루살이가 사는 곳은 그래도 살만한 곳이다. 지자체나 정부에서 하루살이를 퇴치혹은 제거하기 위해 화학약품을 사용하는 줄 몰랐다.

 

불필요할 뿐 아니라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약품 만들고 거래하면서 수익 계산서는 남겠지만, 그렇게 꼼꼼하게 이익만 찾아서 공기도 물도 흙도 식재료도 다 엉망으로 유해하다. 재밌고 느긋한 구경 끝에 우울하네.


 

자연의 천변만화처럼 다채로웠다. 백두산을 경험하고 기록하신 일 년의 경험은 무척 부럽고 덕분에 산림치유학이란 분야도 알게 되어 내 노후 계획 후보로도 넣어둔다. 고마운 하루 마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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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힘은 어떻게 뇌를 망가뜨리는가 - 최신 신경과학이 밝히는 괴롭힘의 상처를 치유하는 법
제니퍼 프레이저 지음, 정지호 옮김 / 심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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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조작에 능하고 기억력은 신뢰할만하지 않다는 점을 배우게 되어 참 다행이다. 덕분에 문제나 갈등을 마주할 때 내 기억을 먼저 살펴보긴 하지만, 무조건 방어하고 반박하지는 않을 심정적 여유가 오히려 생겼다.

 

괴롭힘은 특정 범죄나 행위 같지만, 인간 사회에 흔하게 일어나고, 의도하지 않고 무심코 저지른 가해 행위 전반을 포함하는 말이다. ‘관계속에서 발생하는 강도 여부를 불문하는 공격도 괴롭힘이고 뇌에 상처를 낸다.

 

반성과 치유를 동시에 혹은 번갈아가며 읽는 책이다. 그야말로 사는 일은 죄짓는 일이라는 종교적인 생각이 들 지경. 크고 작은 경쟁 상황들에 아주 오래 자주 참여했으니 얼마나 서로를 상처 입히고 입었을까.

 

- 상대가 불편해하는 반응에 대해 농담이라고 얼버무리거나 웃어넘기는 것

-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이야기하는 상대에게 반응하지 않는 것

- 단체 대화 시 한 사람을 무시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취급하는 것

 

똑같지는 않아도, 사정 설명을 막 하고 싶은 경우도 있지만, 비슷한 상황 비슷한 반응은 한 적이 있다. 물론 반대로 사실무근인 소문의 주인공이 된 적도 있고,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공격당하고 피해 입은 적도 있겠지만.

 

논문과 유사한 분위기의 충실한 이 책은 증거를 제시해서 생각을 바꾸고자 한다. 우리 뇌가 신체적이고 성적인 학대 만 아니라, 정신적 학대로도 심각하게 상처 입을 수 있다는 여러 연구 결과를 만나 볼 수 있다. 귀중한 자료다.

 

무엇보다 고마운 일은 저자가 뇌의 회복 가능성을 확신하고 확언한다는 점이다. 나의 회복이 안심이라면 내가 상처 입힌 이들의 회복은 죄책감의 상쇄이다. 상처 입은 내 뇌도, 살면서 알고도 모르고도 상처 입힌 다른 이들의 뇌도 꼭 부디 제발 회복되기를. 그리고 가능한 반복을 피해보기를.

 

현재 또는 과거의 가해자 또는 피해자의 뇌에는 (당연히) 가소성이 있다. 입은 상처를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단 치유되려면 우선 그 상처를 인정하고, 우리 뇌를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 특정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왜 암을 치료하는 데는 엄청난 관심을 보이고 밤낮 가리지 않고 연구하여 가시적인 결과를 얻으면서, 뇌에 생긴 이상이나 질환에 관해서는 그만큼 투자하거나 공개하지 않는 건지 답하기 껄끄러운 질문을 해보는 것이다.”

 



이 책을 쓰고 싶었던, 실제로 써나간 저자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누구나 가해자, 누구나 피해자란 기본 전제가 있지만, 알고도 의도적으로 명백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위해를 가하는 범죄 가해자들이 있다.

 

안타깝고 화가 나게도 그럴 경우, 가해자를 이해하고 변호하고 감형하고 혹은 선처를 제공하는 사회시스템도 있다. 피해를 입고 상처가 깊은 상태로 범죄를 증명하고 피해자다우라는 외압에 시달리고 2차 가해를 당하고 부정당하는 피해자를 생각해보면 의식적으로 숨을 위어야할만큼 답답해진다.

 

이 책의 표지를 본 분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적나라하고도 단단한 무기가 되어 줄 이 책을 많은 분들과 함께 읽고 배우고 얘기하고 고민하고 퍼트리고 바꾸면 좋겠다.

 

잊지도 못하는 뇌에 가하는 폭력을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경건한 수행처럼 불가피하더라도 가능한 괴롭힘을 줄여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간절하게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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