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로 간 한국전쟁 -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
박찬승 지음 / 돌베개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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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한국 현대 정치의 출발조건을 형성하였다.

 

한국전쟁이 출발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전쟁이 한국 사회 정치에 결정적 계기들을 남겨놓은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계기들이란 분단체제의 고착화, 국시로서의 반공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 파행적 헌정, 강력한 권위주의적 국가의 탄생, 그리고 미국과의 예속적 관계 등이다.

 

당장 멀리 갈 것 없이 현대 한국 정치에서 가장 파장이 크고 영향력 있는 프로파간다가 '친일파''빨갱이' 논쟁이라는 점, 그리고 얼마 전 김일성 자서전 출간을 둘러싼 논쟁을 상기해보자.

 

공산주의권의 침략이라는 전쟁의 형태가 심은 공산권에 대한 공포, 1950년 이전 체제형성기 때부터 존재했던 남한과 북한간의 이데올로기적 대립(구체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vs. 공산주의, 여기서 우리는 민주주의와 반공의 결합이라는 역사적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 체제 내 적대 세력 혹은 아웃사이더들을 모조리 배제했던 부()의 통합(negative intergration)의 완결. 이러한 세 측면에서 한국전쟁이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상흔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거시적 차원에서 한국전쟁의 영향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라면, 저자 박찬승은 미시적 차원에서 한국전쟁을 분석한다. 이 책은 다양한 마을의 사례를 채록하여 마을간에 대립과 갈등, 학살 양상을 집중분석하였다. 한국전쟁은 전자사보다도 후방에서의 민간인 희생자 규모가 훨씬 더 컸다. 이는 미군 국군 북한군의 전시 학살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마을과 마을 사이의 집단적 학살이 잦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전쟁 이전 각 마을 공동체가 안고 있던 불만과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전쟁이 발발하자 학살이라는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형태로 불만이 폭발했다고 주장한다. 그 문제들이란 단순히 지주-소작인이라는 계급적 갈등만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며 또 복잡했다.

 

계급 갈등에 더해 기독교도와 사회주의자 간의 이데올로기/종교적 갈등, 평민 동성마을과 양반 동성마을 사이의 신분제적 갈등, 보복으로서의 학살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쌓인 원한과 울분이 전쟁이라는 가치 전도의 상황을 맞아 상호 학살로 이어졌다. 그것은 전선에서의 전투와 또 다른 의미에서의 '내전'이었다.

 

여기에 국가가 개입함으로써 학살은 더욱 극단적인 양상으로 번졌다. 민간인 학살의 불씨가 된 것은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었다. 그리고 인민군 치하에서 인민재판에 의한 처형이 시작되면서 민간인의 학살 개입이 시작되었다. 인민군 철수 시에 빚어진 대량 학살은 북쪽의 국가권력이 지시한 것으로, 여기에는 민간인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그리고 다시 국군과 경찰이 들어오면서 이번에는 남쪽 국가권력의 묵인하에 민간인들이 개입된 학살이 진행되었다. 이처럼 민간인들의 대량 학살에는 구체적인 지시든 아니면 묵인이든 국가권력의 개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 북조선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은 마을 공동체가 품고 있던 갈등의 틈을 잘 비집고 들어가 이를 이용했다. 인민군이 머슴과 같이 마을의 하층민과 소외 계층을 동원해 인민재판을 실시했다는 사실은 국가 어떻게 미시적 갈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이다. 그 결과, 전쟁을 거치며 마을 공동체는 더더욱 체제 속으로 편입되어 갔으며, 이러한 국가 권력의 미시적 침투가 미친 거시적 영향은 앞에서 얘기한 대로이다.

 

한국전쟁이라는 "난폭한 교사"(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브루스 커밍스가 지적한 것처럼, 한반도에 산적한 문제 중 그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심화시키는 역할만 했다.

 

전쟁 중 끔찍한 학살의 기억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다. 서로를 죽이기까지 했던 마을들은, 일부 화해한 마을도 있지만, 현재까지도 어색한 기류가 존재하고, 마을에서 추방당했던 어떤 가족은 조상의 묘가 있음에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하기도 했다. 서슬 퍼렇던 독재 시대에서 북이나 좌익에 협조했던 사람들은 당시의 기억을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 금기시했으며, 현재도 그분들은 당시의 일을 증언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아픈 상처를 다시 들쑤시기도 싫고, 자신의 증언이 후손에게 미칠 악영향이 두려워서이다.

 

전쟁의 기억은 사람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전쟁은 잊고 싶으나 잊을 수 없는, 그렇다고 기억하기도 괴로운 유령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그리고 우리 안에 남아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그 유령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끈질기게 한국 사회와 사람을 괴롭혔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마을 공동체의 상호학살, 전쟁 이전의 갈등들을 학살까지 가게 만든 전쟁이라는 상황, 이를 이용한 국가권력. 이러한 곤혹스러운 과거가 우리를 짓누른다. 하지만 이 기억을 제대로 인식하고, 충분히 성찰할 때, 그 유령의 망령으로부터 벗아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기억해야 할 역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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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가로서 읽어볼만한 일본사 서적을 틈틈이 정리하는 나는 한 가지 불만이 있다. 


바로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 일본에 대한 서적들이 한국에 출판된 일본사 서적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본의 근대란 메이지유신부터 일본국 헌법의 제정으로 제국 일본 체제가 무너진 1947년까지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겠다.


에도 시대, 전국시대, 고대 일본에 대한 서적은 매우 적다. 

사실 한국에 일본근대사 서적이 많은 이유를 추측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근대'는 단순히 하나의 시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근대는 역사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하나의 가치 척도의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근대란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로 여겨지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식민지 경험에 대한 기억까지 합해져, '근대화'에 실패하고 근대적 개혁을 이루지 못한 조선은 '열등'하다는 식의 논리가 깊게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사에서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일본은 애증의 대상이다. 한편으로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폭력적인 지배를 행사한 악의 축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짧은 시간 안에 근대화에 성공하여 강대국으로 성장했다는 일본에 대해 선망의 정서가 공유되고 있다. 이처럼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은 특별하다.


왜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했고, 일본은 성공했을까. 이 문제야말로 일본 근대에 대한 한국의 비상한 관심의 근원이다.



 














이런 점에서 박훈의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는 제목에서부터 한국인의 관심을 끄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저자 박훈 선생은 '근대'를 절대적 가치로 두지 않는다. 그렇지만 생각해볼 문제는 이런 제목의 저변에는 어떠한 배경과 인식이 깔려 있는지다.


일본의 근대는 어떻게 성립되었는가에 대한 관심은, 메이지유신으로 시작하여 근대 일본의 체제와 문화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진다. 이는 구체적으로 번역과 근대 천황제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난다.

















또 다른 관심사는 일본의 침략주의적 행보이다. 야스카와 주노스케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기본적으로 침략주의자로 규정짓고, 그러한 관점에서 후쿠자와를 맹비난하고 일본의 역사관, 나아가 마루야마 마사오 같은 이들도 비판한다. 정일성도 책은 그러한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저작들이다.

대개 이런 책들은 근대 이후 일본의 역사를 '침략'과 '제국주의'로 특징짓는데, 이 역시도 일본을 바라보는 한국의 시선이 투영되었다 할 수 있다. 


참고로 야스카와와 정일성의 책은 추천하지 않는다. 너무 편향적이기도 하며, 너무 '침략'이라는 결론을 강하게 내린 상태에서 책을 썼기에 다양한 논의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리기 때문이다.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러일.청일전쟁>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는 읽을만하다.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일본이 노골적인 침략 행보를 보였기에 그 시작점인 청일전쟁과 경복궁 점령은 정리해볼 역사이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시기부터는 일본 자체보다는 일본의 한국 지배 양상과 총독부의 정책을 다룬 책이 더 많다. 혹은 일본은 어떻게 패망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책.











































일본에 대한 한국의 관심이 몰려 있다 보니,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고대 일본이나 19세기 이전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을 뿐더러, 실제로 서적도 얼마 없다. 특히 한국에서 그렇게 이름이 많이 알려진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오다 노부나가는 각각 전기가 한 종씩 있을 뿐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예 소설 <대망>을 제외하고는 신뢰할 수 있는 책을 볼 수 없다. 심지어 전국시대 전체에 대한 서적은 거의 찾아볼 수도 없어, 그나마 몇 년 전에 이계황 선생 덕분에 지적 공백이 채워질 정도였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더 특이한 현상이 하나 더 있다. 바로 1947년 이후의 일본 현대사를 다룬 책은 근대와 대조적으로 적다는 것이다. 근현대사 통사 책을 제외하고, 몇 권 나열해보자. 근대와 대비하여 현대에 대한 이러한 상대적 무관심은 무엇이 원인인 것일까.








이를 생각해보기 전에, 근대 이전 일본의 역사에 대한 한국의 대략적인 인식부터 봐보려 한다.

19세기 이전, 조선과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통해서 교류를 했다. 흥미로운 그 통신사에 대한 한국의 인식이다.


"지난 3년에 걸쳐 우리는 조선통신사의 행로를 더듬어 가며 뱃길이 머무르던 곳, 발길이 닿았던 곳마다 오롯이 남아 있는 당신들의 긍지와 애국심을 하나씩 수습했다. 그때마다 목이 메어오는 감격을 누를 수가 없었다. 조선통신사가 중첩되는 어려움을 견디며 평화의 터를 다지고 문화의 향기를 흩뿌리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단선적이었을까를 생각하자 숙연해지는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

<조선통신사 옛길을 따라서 3> 표지글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요청으로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 년간 열두 차례 파견되었던 조선의 문화 사절단입니다. (....) 아이들은 조선통신사의 여정을 통해 세계 속 우리나라의 위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자국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와 일본의 역사/문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배우게 됩니다." <조선통신사 - 평화를 전하는 발걸음>


이상의 두 인용문에서 보이는 인식은 시사적이다. 두 책은 조선통신사를 일종의 문화사절단으로 그리고 있는데, 이는 조선이 일본보다 문화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전제가 깔린 인식이다. 


한국이 비록 근대화 이후에는 일본에 밀리고 지배까지 당했지만, 원래는 일본보다 더 강국이었다, 백제와 가야가 일본의 문명을 발달시켜주고, 조선도 문화사절단을 보내 일본을 발달시키려 했다, 그럴 정도로 뒤쳐졌던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한국과 중국을 제치고 유일하게 자체적 근대화에 성공했을까? 이러한 발상이 은연 중에 있는 것은 아닐지..


여담으로,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은, 어디까지나 조선과 한국만의 생각이다. 애초에 어쩌다 한번 가던 통신사로 일본 사회에 변화가 생겼을리가 없다. 같은 시기에 일본은 조선의 문약을 비웃었으며, 조선의 유학에 대해서도 일본이 더 낫다는 미묘한 대결심리를 보여주었다.








중국과 대비한다면, 이러한 경향이 한층 뚜렷하게 보인다. 중국 근대사 관련 서적이 적은 편인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 한국인의 관심사는 중국 고대사 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는 공맹, 노장, 묵자, 한비자 등 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 사상가들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이고, 또 사마천의 <사기>나 나관중 <삼국지> 등의 영향으로 보인다. 우리는 고대 중국의 선각자들에게서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지혜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이들의 책을 읽음으로써 그 지혜를 배우려 한다.
















반대로 일본에 대해서는 그런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당장 일본 사상가 중에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유명한 인물도 (후쿠자와 유키치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없거니와, 근대 일본에 대한 관심도 실용적 수준에서 머물지 그들의 지혜를 배우고자 하겠다는 모습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류는 아니다.









일본 현대사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이런 심리가 아닐까? 한국이 한때는 일본에 뒤쳐지기는 했지만, 원래부터 지금까지 그렇듯이 한국인 일본보다는 더 우월한 국가이다, 그러니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역사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일본에게서 배울 것은 없다.


우스갯소리 중에 '전 세계에서 일본 무시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다'라는 말도 이런 배경하에서 나온 말로 생각할 수 있겠다. 예전에는 일본을 선진국으로 보기도 했지만, 2010년대, 특히 2019년 이후로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이제 일본은 한국인에게, 한국은 일본처럼 되면 안 된다는 반면교사이자 새로운 군국주의로 나아가려는 도상 위에 있는 과거부터 이어져온 원수이다.


 책이 어떤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 먹고 살려고 책을 만드는 출판 자본은, 책을 팔기 위해 사람들이 관심 가질 법한 책을 만든다.


즉, 일본에 대한 한국의 인식은 출판시장을 보며 대략 감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구체적 분석 없이 편견 가득한 인상론과 책 목록만 보고 한 영양가 없는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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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6-24 14: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본에 관해서 읽어보기 전에 이 페이지를 참고하면 좋겠네요! 상대적으로 일본은 우리 나라에 관해 열심히 연구한다고 들었는데 우린 특정 시기에 치우친 것이 아쉬워요. 그런 것들부터 극복하면 어떨까 싶어요. 🤔

김민우 2021-06-24 21:22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그리고 더 다양한 주제가 나와야 할텐데 말입니다.. 우선 그런 책을 내도 적자 볼 일은 아니라고 출판사를 안심을..(?)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일본의 관심사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한국은 왜 이렇게 일본을 싫어하는가? 이런 식으로요

북다이제스터 2021-06-24 19: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궁금한 사항인데요, 일본은 개항 시점이 아니라 일찍이 1500년대부터 근대화되어 훨씬 앞서 갔다고 하는데요, 맞는지요?

김민우 2021-06-24 22:17   좋아요 2 | URL
정확히 어떤 주장인지 알지 못해서 대답을 드릴 수 없겠지만 일본의 근대, 동아시아 근대에 대한 주장을 몇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동아시아에는 근대가 없다. 이때 근대란 서양식 근대를 가리킵니다. 이런 입장에서는 19세기 서양과의 접촉을 통해서야 근대가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둘째, 동아시아에도 근대가 있었다. 여기서도 근대는 서양식 근대입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마루야마 마사오는 오규 소라이 같은 사상가를 분석 하면서 일본도 서양식 근대의 맹아가 발견된다고 보았습니다. 물론 그의 이런 견해는 그의 제자 와타나베 히로시에 의해서 전면 부정당했습니다. 최근 견해는, 오규 소라이는 근대적 사상가가 아니라 완전 반근대적 사상가라는 것 입니다.

마지막도 동아시아의 근대를 주장하는데, 이때 근대란 서양식 근대를 전혀 참고하지 않은, 동아시아 독자적 근대를 의미합니다. 최근 출판된 <동아시아를 발견하다> 저자 쑹녠선 같은 경우가 이런 경우입니다. 그분은 16세기, 임진전쟁 예수회의 선교 만주 굴기 등으로 근대 라고 부를만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근대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의견이 달라져서 확답은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은 동아시아로 분류되는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특이한 역사적 과정을 거쳤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네덜란드와 교류로 난학 등도 발달하고 서양의 정보와도 단절되지 않았고요. 이런 것이 조선과 비교하자면, 훨씬 나았던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1-06-25 11:02   좋아요 1 | URL
우문에 현답을 주셨습니다. ^^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궁금한 점이 해소 되었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

김민우 2021-06-25 16:31   좋아요 1 | URL
부족한 답변임에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저보다는 더 도움이 될 책을 몇 권 소개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ㅎㅎ

16세기 일본에 대해서는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은
김시덕 일본인 이야기 1 입니다
그리고 쑹녠선의 동아시아를 발견하다도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근세 일본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상업 사회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하야미 아키라의 <근세 일본의 경제발전과 근면혁명>이 좋습니다. (사실 이 책말고는 없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초딩 2021-06-30 0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이지유신에 대해 읽고 싶었는데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책들도요 :-)

김민우 2021-07-01 15:22   좋아요 0 | URL
좋은 독서 되시기를 바랍니다 ㅎㅎ 제 마이리스트 <일본사>에 더 정리되어 있으니, 그쪽도 봐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처음에 몇몇 또는 하나의 형태로 숨결이 불어넣어진 생명이 불변의 중력 법칙에 따라 이 행성이 회전하는 동안 여러 가지 힘을 통해 그토록 단순한 시작에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우며 한계가 없는 형태로 전개되어 왔고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는,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장엄함이 깃들고 있다. - P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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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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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이 책은 다종 아카데미에서 제시한 질문에 대해 답하는 형식으로 짜인 논문이다. 다종 아카데미의 질문이란 이렇다.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

 

이 질문은 두 개를 묻고 있다. 첫째, 불평등의 기원, 둘째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 이 글에서는 루소가 각각의 질문에 어떻게 답변하고 있는지를 통해 루소의 논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

루소에 따르면, 다종 아카데미가 내놓은 이 질문은 애초부터 잘못된 질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에 대해 지식이 전무한 상황에서 자연법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자연법을 따르는 자연인이 무엇인지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소는 제1부에서 자연 상태의 인간은 어떠했는지를 논의하는 것부터 논문을 시작한다. 여기서 루소가 이해하는 자연법이란 원래부터 그러한 것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루소에 따르면, 자연 상태의 인간, 즉 어떠한 문명도 이룩하지 않았던 미개인 상태의 인간은 자신의 신체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었고, 건강하여 어떠한 의술이나 약도 필요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무리를 이루지 않은 채 홀로 지냈으며, “자신의 진정한 필요만을 느꼈고, 눈으로 보아 흥미롭다고 여겨지는 것만쳐다보았기에, 자신의 신체적 능력이 자신의 필요나 욕망을 채우지 못한다고 불행해지는 일도 없었다. 그는 자족하는 삶을 살 줄 알았던 것이다. 또한, “타인을 해치고 싶은 마음보다는 타인에게서 입을지 모르는 피해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데 더욱 신경을 쓰고 있었으므로 위험한 분쟁에 휩싸일 우려가 없었다.” 그러므로 자연 상태의 인간은 불행하지 않았고, 어떠한 불평등의 상태에도 놓이지 않았다. 오히려 문명의 진보 속에 살고 있는 인류보다 더 나은 처지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루소가 말하는 자연 상태의 인간이란 역사상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존재이다. 그의 이러한 탐구는 역사적/실증적 탐구라기보다는 전적으로 루소의 추론과 사고실험에 의존한 가상적 탐구이다. 현대 고고학 연구가 증거하고 있는 것은, 선사시대에도 인간들의 파괴적 싸움이나 불평등의 양상은 현대와 마찬가지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원시사회와 문명사회의 전쟁 양상을 비교했을 때, 살상률이나 구성원의 전쟁 참가율은 원시사회 쪽이 더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또한 토지와 가축의 소유권, 인간관계, 물질적 부 등에 의해 원시 수렵채집 사회나 농경사회에서도 불평등이 있었다는 것이 사회인류학이나 고고학계의 견해이다. 요컨대, ‘자연 상태의 인간은 말 그대로 루소의 머릿속에서나 존재하는 가정뿐인 셈이다.

(참조: https://blog.naver.com/felix47/221888780489 )

 

사실상 루소의 논의는 불평등의 진정한 기원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기보다는 불평등의 본성을 해명하는 데 더 집중한 작업이다. 다시 말해, ‘자연 상태의 인간이란 불평등 상태의 인간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를 통해 불평등을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인가?

루소는 불평등을 두 종류로 나눈다. 첫째, “나이·건강·체력의 차이와 정신이나 영혼의 자질 차이등 자연적인 것에 의해 정해지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다. 둘째, 특권자들에 의해 성립되어 일종의 약속에 좌우되고, 사람들의 동의로 정해지거나 적어도 용납되는 도덕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다. 그는 자연적 불평등으로 인한 차이가 사회적으로 제도화되고 고착화되어 차별로 이어지면서 불평등이 자리 잡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루소는 신체적 불평등은 문제시하지 않는다. 이는 자연적 인간에게서도 발견된다. 문제는 정치적·도덕적 불평등, 혹은 신체적 불평등이 후자의 불평등으로 이행하게 된 과정이다. 그에 따르면, 신체적 불평등과 정치적·도덕적 불평등은 그 자체로는 특별한 관계는 없다. 그렇다면, 불평등의 기원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습관의 산물이거나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채택하는 여러 가지 생활 양식의 산물이라고 루소는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루소가 정치적·도덕적 불평등에 내린 정의를 자세히 봐보자. 그것의 주요 요소는 약속’, ‘동의’, 그리고 용납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약속과 동의가 생긴 것이야말로, 이미 자연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증거이다. 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권이다. 더 부유한 사람, 더 존경을 받는 사람, 더 권력을 가진 특권자들에 의해 인간 사이의 불평등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자연이 법에 굴복했다.

 

루소는 이 과정이 세 단계에 걸쳐서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불평등의 진행을 따라가 보면, 법과 소유권의 설정이 제1단계이고 행정 권력의 제도화가 제2단계이며 합법적인 권력에서 독단적인 권력으로 변화하는 것이 제3단계임을 알 수 있다.”

 

 

- 불평등의 진행

고립된 개인으로서 존재하던 자연 상태의 인간은 어느 순간 상호간의 약속과 그로 인한 이득을 깨닫게 되었다.” , 그는 이제 무리를 지어 생활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 상태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도덕이 도입되기 시작했으니, 개인의 신체적 우월함, 루소의 표현을 따르면 신체적 불평등이 더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이상한 도덕이 생겨난 것이다. “노래를 가장 잘 부르고 춤을 가장 잘 추는 사람, 얼굴이 잘생기거나 힘이 센 사람, 재주가 가장 뛰어나거나 언변이 가장 좋은 사람은 존경을 받았다. 이것이 불평등을 향한, 그리고 동시에 악덕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우월함을 대중적으로 확인받고자 하는 명예욕이 생김과 동시에 사회를 이루게 된 인간이 혼자서 두 사람 몫의 양식을 차지하는 것이 유리함을 알아차리게 되자마자, 평등은 사라지고 소유가 도입되고 노동이 필요하게 되었다.” 힘이 센 놈은 더 많이 가질 수 있다. 재간이나 재주가 많은 이도 노동에 비해 더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부와 소유의 차이가 생겼다. 농업과 야금술 등 기술의 진보는 인류의 불평등과 인간 소외를 심화시켰다. 기술이 발달하여 생산성이 높아지자 토지를 소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간극은 더 벌어지고 마침내 부유한 자는 남을 지배하게 되었다. 사회와 법률은 이러한 소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구히 고정시키고 교활한 횡령을 당연한 권리로 확립시켜 그 후 온 인류를 몇몇 야심가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과 예속과 비참에 복종시켰다. 결과적으로 자연적 불평등이 차별로 이어지면서, 제도는 왜곡되고, 누군가는 독점적으로 안락을 유지하나, 절대다수는 생존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펼쳐지게 되었다.

 

최초의 사회적 불평등에서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발생하고, 이후에 강자와 약자의 상태가 발생했다면, 정치상의 불평등이 극단적으로 흐르게 된 결과가 전제군주제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한 명의 우월한 이가 지배자로 군림하여, 그와 다른 이들 사이에는 주인-노예의 상태가 성립된다. 주인의 의지에 대한 복종 외에는 그 어떤 법률이나 정념도 사라져버린 이러한 사회는 두 번째 자연 상태로, “이것이 바로 불평등의 마지막 도달점이며, 우리가 순환을 마감하면서 이르게 되는 출발점이자 종점이다.”

 

이상의 불평등의 기원을 추적한 루소가 다종 아카데미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최종적으로 결론 내린다. “불평등은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인간 능력의 발달과 정신의 진보에 따라 성장하고 강화되며 소유권과 법률의 제정에 따라 안정되고 합법화된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실정법에 따라서만 인정되는 도덕적 불평등은 그것이 신체적 불평등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경우에는 언제나 자연법에 위배된다는 결론도 나오게 된다.···자연법을 어떻게 규정하든, 어린애가 노인에게 명령하고 바보가 현명한 사람을 이끌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마저 갖추지 못하는 판국인데 한줌의 사람들에게는 사치품이 넘쳐난다는 것은 명백히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렇다면, 자연 상태로의 회귀가 불평등에 대한 최종 해결책일까? 그렇지 않다. 우선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도 그런 얘기는 언급된 적 없다. 무엇보다 루소 자신이 자연 상태로의 회귀가 불가능함을 잘 알았다. “인간의 본성은 결코 후퇴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소는 장 자크를 심판한다>).

 

다시 루소의 언급을 잘 봐보자. 루소에 따르면, 인간이 사회를 이루면서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도덕 규범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것은 지식이든, 물리적 힘이든, 특기나 재력이든 무언가 우월한 사람이 존경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노력을 통해 존경을 받았다. ‘지위가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지위 기반 사회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루소가 불평등을 구분하며, 문제시했던 특권에 의한 정치적·도덕적 불평등이다. , 루소는 사회가 특권적 지위를 독점하는 소수에 의해 운영되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사회를 운영하는 원리를 전혀 다르게 만들어야만 한다고 보았다. 사회를 기반하는 원리는 무엇이어야 하며,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 이것이 <사회계약론>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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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념과 이해관계 - 자본주의의 승리 이전에 등장한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논변들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노정태 옮김 / 후마니타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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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서양 지성사를 관통했던 초기 자본주의 옹호론의 역사를 복원해냈다.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기껏해야 도덕적으로 관용된 이런 행동에서 어떻게 벤저민 프랭클린의 의미에서의 소명이 형성되었던 것일까?”라고 물었듯이, 중세까지만 해도 가치척도에서 낮은 위치에 있었던 돈벌이는 어떻게 벤저민 프랭클린에 이르러서는 소명으로까지 인식되었던 것일까. 이는 그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다른 이데올로기에 대해 승리한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 이야기는 훨씬 복잡했고, 에둘러 갔다.”

 

서양 지성사에서 인간의 파괴적 정념을 막기 위해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제시되었다. 첫째, 국가나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에 의존하여 강제력과 억압에 호소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이 이러한 방법을 제시했다. 또 다른 해법은, 정념을 제어하여 그 정념들이 복리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게 한다는 발상이다. 버나드 맨더빌에 의해 상세하게 전개된 이와 같은 발상은, 18세기 헤르더와 19세기 헤겔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헤겔의 이성의 간지개념이 표현하고자 한 것도, 인간은 자신의 정념을 추구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세계-역사적인 어떤 고차원적 목적에 봉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해법은 서로 다른 정념을 구별하여 서로 싸우게 하거나, 무해한 정념을 통해 다른 정념을 길들이는 방식이었다. 이것이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소재이기도 하며, 프랜시스 베이컨과 스피노자에게서 비롯된 이 아이디어는 두 세기를 풍미했지만 지금은 잊혀진 한 이상이다.

 

17~18세기는 대내외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질서가 배치되었던 시대였다. 구체적으로 말해 군주의 변덕과 자의적인 통치, 그리고 모험적인 대외 정책등으로 사회가 무너질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공유되었다. 그런 시대정신 속에서 가장 매력적인 대안으로 비춰졌던 것이 바로 정념과 이해관계의 대립이었다. 이해관계란, “사람들이 열망하는 것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되, 그런 열망이 추구되는 방법에 대한 숙고와 계산의 요소를 의미했다.” 바로 이 계산분별력이 당시 학자들이 주목한 요소였다. , 무질서한 통치로 인한 사회의 붕괴를 막으려는 시도 속에서 인간의 탐욕 추구, 다시 말해 이해관계는 분별력과 효율성의 계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추구할 만했으며, 이것이 다른 정념을 저지하는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정념의 조련사로서 이해관계가 가장 칭송받았던 부분은, 인간의 행위에 방향성을 부여하여 정념을 따르는 인간의 행위를 항상적이고 예측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성조차 정념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데 반해, 이해관계가 가져다준 이러한 항상성과 예측가능성은 당시의 지성계를 흥분시켰고, 이것이 초기 자본주의 옹호론의 핵심이었다. 가장 변덕스러운 정념인 탐욕은 이제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작용”(데이비드 흄)한다는 그 보편성 때문에 칭송받게 된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추구한다면, 정의상 이해관계는 거짓말을 하거나 자신을 속이지 않을 것이니, 그 속담의 말뜻 그대로 그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잘 추구해 갈 것이다또한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도 이익을 주는데, 왜냐하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은 마치 전적으로 덕을 갖춘 사람처럼, 완전히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방침에 따라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 때문에 흄은 획득에 대한 사랑으로 쾌락에 대한 사랑으로 억누르는 것을 옹호했다.

 

인간의 사적 이익 추구가 긍정적인 것으로 변신했기에, 따라서 이윤 추구 행위도 긍정되었다. 이것이 온화한 상업론이다.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했던 말은 온화한 상업에 대한 선구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온화한 풍속이 있는 어느 곳에서나 상업이 있다는 것, 그리고 상업이 있는 어느 곳에서나 온화한 풍속이 있다는 것은 거의 일반적인 규칙이다.” 몽테스키외는 이런 식으로 상업의 확장이 인간의 거친 정념을 제어하여 군주의 자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근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이해관계가 인간의 거친 정념을 온화하게 하듯이, 상업행위는 군주의 거친 통치를 부드럽게 해줄 것이다. 정념(탐욕)으로서 정념(권력욕)을 대항한다는 견제의 원리가 이렇게 관철된 것이다. 이러한 대항하는 정념의 원리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헌법에 중요한 지적 토대가 되었으며, 삼권분립에 중요한 지적 토대를 쌓았다.

 

그러나 정념으로서 정념을 대체한다는 이상은 애덤 스미스에 의해 완전히 종결된다. 비록 애덤 스미스 역시 개인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활동을 경제학적으로 강력히 정당화했지만, 그는 경제발전이나 상업을 통해 정치제도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경제와 정치는 독립적이었다. 스미스가 미친 더욱 강력한 영향은, 인간의 모든 정념을 “‘재산의 증식에 대한 욕구로 정리하면서 더 이상 정념과 정념이 대항한다거나 정념으로서 정념을 길들인다는 생각을 무력화했다는 것이다. 그가 <국부론>에서 정념과 이해관계가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인류의 평균적인 사람들의 행태까지 고려했던 스미스로서는 정념과 이익이 대립적이기보다는 동의어 관계로 보였던 것이다. 이로써 이해관계와 탐욕으로 다른 파괴적 정념을 다스리려는 시도는 종말을 맞이하고, “스미스 이후 학술적이고 정책적인 논쟁은 주로 사회의 구성원 각자 자신의 복지를 추구하도록 내버려 둘 때 일반의 복지가 가장 잘 달성된다는 스미스의 전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그리고 한 시대의 이상은 곧바로 이해가 안 될 정도는 아니지만,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는 논변으로 잊혀지게 되었다.

 

이들의 생각이 위험할 정도로 순진한 낙관론이라는 것을 삼척동자라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 자본주의 옹호론을 현대에도 볼 수 있다. 가령 케인스는 18세기 이전의 논변을 거의 동일하게 되풀이하고 있다. “돈벌이와 사적인 부의 소유 기회가 존재하는 것이 인간의 위험한 성향을 비교적 무해한 방면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이론>) 또한 슘페터 역시 자본주의의 핵심을 합리성과 위험회피성으로 보았다. 하지만 19세기에 사적 이익 추구가 극한에 다다랐을 때의 온화하지 않았던 사회상과 온화한 상업이 한창 논의되던 때조차 노예무역이 절정에 달했던 자본주의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과연 정념과 이해관계의 대립은 정말 실현가능한 대안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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