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낙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5
존 밀턴 지음, 조신권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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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밀턴, 조신권 옮김, 복낙원, 문학동네, 2010 (11), 2020 (21)

 

존 밀턴의 복낙원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실낙원의 속편격으로 지어진 서사시이다. 실낙원은 주로 창세기 1~3, 천지창조와 인류의 타락 기사에 근거하여 한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상실된 행복의 동산을 노래했으나(복낙원1~2)”, 복낙원은 복음서(특히 마태복음 41~11절을 볼 것)에 기술된 광야에서의 사탄의 유혹 이야기에 기반하여 잃어버렸던 낙원이 어떻게 회복되었는지를 노래한다.

 

실낙원에서 밀턴은 인내와 순종의 덕목을 갖춘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영웅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했다. 복낙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탄의 대결을 통해서 밀턴이 제시했던 영웅상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실낙원을 읽었다면, 복낙원까지 순차적으로 읽어야 한다.

 

복낙원에서의 예수와 사탄의 대결은 무엇이 진정한 메시아이며, 메시아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다.

 

대결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사실 이 작품의 장면은 대부분 예수와 사탄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대화도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예수를 점점 자신의 내면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는 앞서 본 것처럼, 이 작품이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자기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탄의 유혹과 예수의 거부는 외부적 사건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자아 발견과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 인식이라는 내면적 구조를 갖는다. 사탄과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둘은 더 내면적이고 추상적인 부분까지 들어가게 되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자각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 핵심적인 부분이 바로 예수가 광야에 간 이유이다. 그는 애초에 왜 광야에 갔을까? 밀턴은, 예수는 메시아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다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어떻게 하면 인류의 구주로서의 그 위대한 과업을

가장 잘 착수할 수 있으며, 이제 성숙한

그의 거룩한 직책을 어떤 방법으로

우선 나타낼 수 있을 것인가를 마음속으로 깊이

심사숙고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령과 그의 깊은

생각에 이끌려 홀로 걸어 나갔다, 보다 고독과

더불어 깊이 사귀고자.” (1, 183~191)

 

어떻게 하면 인류의 구주로서의 그 위대한 과업을 가장 잘 착수할 수 있을 것인가.’

성숙한 자신의 거룩한 직책을 어떤 방법으로 우선 나타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이 작품에서 밀턴이 그리는 예수의 고민이며, 사탄과의 논쟁의 주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복음서에서는 그 의미가 살짝 모호한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유혹을, 밀턴은 자선에 대한 유혹으로 해석한다. 여기서는 돌이 아니라 빵이 되게 해달라고 나온다. , 메시아로서 예수가 할 일은 다른 무엇도 아닌, 약자들에게 자선을 베풀라는 것이다. 가난한 농부로 변장한 사탄은 이렇게 말한다.

 

(...) “그러나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단단한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그러면 가련한 우리가 좀처럼 맛볼 수 없는

음식으로 그대 자신과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오.” (1, 342~345)

 

하지만 예수는 즉각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그의 말 끝나자, 하나님의 아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빵 속에 그런

힘이 있다고 생각하오? (그대를 보기와는 다른

사람으로 인정하기에 말이지만) 사람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리라고 쓰여 있지 않소.” (...) (1, 346~351)

 

이 대화만 봐도 눈치챌 수 있듯이, 사탄은 다른 메시아상을 제시함으로써 예수를 유혹한다.

 

사탄은 처음에는 자선가로서의 메시아상을 제시했다. 이 외에도 정치적 메시아, 즉 어떤 왕국의 왕이나 탁월한 정치적 지도자, 사회운동가·혁명가로서의 메시아 상들을 언급한다. 하지만 예수는 그 어떤 것도 수용하지 않는다. 그의 태도는 단호하다.

 

허영된 사람들이 당찮게 바라듯이, 나도

영화를 구하랴? 내 찾는 영광은 나의 것 아니라,

날 보내시고 지켜보시는 그분의 것이로다.” (3, 105~107)

 

가장 잘 참는 자가 가장 큰 일 할 수 있고,

먼저 잘 복종하는 자가 또한 큰일 하나니

영원무궁한 찬양 받기 전의 마땅한 시련이로다.

그런데 나 언제 그 영원한 왕국을 시작하든

그대 무슨 상관이며, 그대는

어찌하여 이다지도 보채고 궁금해하는가?

그대 모르는가, 나의 출세 곧 그대의 몰락이요,

나의 승진은 그대의 파멸인 것을?” (3, 195~202)

 

이러한 대화를 통해 밀턴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했다. 그리고 이는 앞서 말한 순종과 인내의 영웅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아니라 황야의 유혹을 작품의 무대로 선택한 것일까? 일반적인 기독교 신자에게는 전자가 예수님의 영웅성의 절정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인식할 것이다. 하지만 밀턴은 예수님의 메시아상과 영웅성을 보여주는 주제로 황야의 유혹을 선택했다.

 

이는 밀턴이 이 작품에서 사탄을 예수의 타자가 아니라 예수의 내면적 소리로서 제시했기 때문이다. 4편에서 기묘한 대사 한 부분을 봐보자.

 

비켜나거라. 이제 보니 그대는 분명히

저 사악한 존재, 영원히 저주받을 사탄이로다.” (193~194)

 

4편에 가서야 그는 자신을 유혹하는 대상이 사탄임을 눈치챈다. 그전까지 예수는 자신의 대화 상대자가 누구라고 여겼던 것일까? 밀턴은 여기서 예수를 악으로 유혹하던 목소리는 바로 예수 내면의 소리였다고 말하는 것 같다. , 예수는 그동안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밀턴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했으나, “예수의 인간성, 즉 악을 선택할지도 모르는 자유의지의 문제에다 더 역점을 두었다.” 따라서 사탄에 대한 예수의 승리는 자유의지를 통한 내면의 악 정복이라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핵심은 자유의지다. 따라서 복낙원의 예수는, ‘자유의 투사로서 자유의 가치를 중시하였던 밀턴의 가치관에 따라 재해석된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밀턴은 지나치게 자유의지를 강조한다. 이것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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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런 소칼·장 브리크몽, 이희재 옮김, 지적 사기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 한국경제신문, 2016

 



1.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에서 상대주의, 정확히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유전론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박한다. 첫째, 상대주의는 모든 대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하며, 둘째 더 나아가 인간 사이의 어떠한 합리적인 대화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자칭 상대주의자들도 자신의 사상을 온전하게 실천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변한다와 같은 상대주의적 주장 역시 물체를 변한다같은 한 가지 상태에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극단적 유전론자인 크라틸로스는 아무것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입을 꾹 닫고 손가락으로만 대상을 지시하기도 했으나,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조차 특정 대상을 특정 시공간 안에 고정된 무엇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결국 상대주의는 그 자체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플라톤이 상대주의의 문제점으로 대화불가능성명명불가능성을 꼽았다는 것이다. 유전론이 참이라면,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대상은 하나로 머물러 있지 않고 늘 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무엇으로 규정될 수 없다. ‘흰 것을 희다고 말할 수 없고, 홍길동과는 다른 이유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사태의 무규정성은 필연적으로 사물의 구분불가능성과 명명불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대상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수많은 개별자를 구분하고, 이를 통해서야 인간은 사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명과 구분이 무너지게 되면, 사유는 ‘~인 것‘~이지 않은 것조차 인지할 수 없게 되며, 심지어 그렇다그렇지 않다가 똑같이 참인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이 경우에도, ‘거짓이 똑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유는 마비되고, 합리적인 토론은 고사하고 대화도 불가능하다.

 

이렇게 볼 때, 플라톤의 거의 모든 대화편의 논의가 ‘OO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무엇물음이라는 사실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합리적인 탐구와 토론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모델로서, 여기에는 몇 가지 규칙이 존재한다. 먼저, 어떤 사태의 정의를 규정할 때, 그 사태의 사례나 현상이 아니라 어떤 것이 그 자체에 있어서 전체로서 규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대화 참여자가 미리 동의한 전제들로부터 논의의 참과 거짓을 판단한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까지)의 문답법은 논의의 공리(公理)로서 모순율을 전제한다. 모순율이란 어떤 것은 같은 시점에 있어서 동시에 ‘A’이면서 ‘~A’일 수 없다는 것이다. 모순율은 인간 사유의 근거가 된다. 플라톤은 이러한 모순율을 전제함으로써 논의가 상대주의로 빠지는 것을 방지하며 의미 있는 탐구가 수행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봤을 때,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인간 척도 명제나,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유전론은 모두 합리적 탐구를 위한 공리(公理)로서의 모순율을 무력화시켜 인간의 사유를 무용지물로 만든다. 따라서 합리적 대화나 개념 규정이 이루어질 수 없는 소피스트적 논변은 말장난이나 궤변일 뿐이다. 그들의 논변 속에서는 A~A가 될 수도 있고, 아예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아무리 화려한 언변으로 치장해도 말많은 벙어리일 수밖에 없다.

 

소피스트처럼 심오해 보여도, 조금만 파고들어가면 바로 아무런 내용이 없을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의 빈약함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어려운 용어나 복잡한 논변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이를 '지적 사기' 혹은 '지적 남용'으로 볼 수 있다. 결국 플라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의미 있는 토론이나 대화를 위해서는 개념이나 문장을 명확하게 써서 자신의 주장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하며, 이것이 없으면 뭔가 심오해 보이는 말이라도 궤변이라는 것이다.



 

 

























2.

뉴욕대학 물리학과 교수인 앨런 소칼은 1996년 포스트모던 사상 저널인 소셜 텍스트 (Social Text)'경계의 침범: 양자중력의 변형해석학을 위하여'라는 논문을 기고했다. 그런데 굉장히 난해해 보였던 이 논문은 사실 여러 포스트모던 사상가의 글을 짜깁기하여 패러디한 것으로, 아무런 논리적 주장도 담지 않은 소칼의 말장난이었다. ‘소칼의 장난(Sokal's Hoax)’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프랑스 현대 철학을 전면적으로 비판했고 소위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얼마나 취약한 학문적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폭로했다. 아주 통렬한 학문적 희롱을 한 것이다. 그 뒤 소칼은 물리학자 장 브리크몽과 협력하여 지적 사기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그 부제처럼,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자연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지를 밝히며, 그들의 지적 남용이 미친 사회적 악영향을 지적한다. 여기서 소칼과 브리크몽이 비판하는 사상가들은 라캉, 줄리아 크리스테바, 뤼스 이리가레이, 브루노 라투르, 장 보드리야르,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폴 비릴리오 등이다. 모두 이름만 들어도 아는 포스트모던 철학계의 거장들이다. 이들에 대한 이 책의 비판은 매우 신랄하다. 이 책은 고작해야 통속적인 수준에서만 알고 있는 복잡한 주제에 대해서 심오한 통찰을 제공하는 척하는 일부 유명한 지식인들의 허세를 사정없이 공격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는 하나의 정합적 정의를 내리기가 불가능하지만, 여기서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특징으로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합리주의 전통을 거의 노골적으로 부정한다는 것, 경험적 검증과는 동떨어진 이론적 담론이라는 것, 과학을 수많은 이야기신화또는 사회적 구성물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는 인식론적·문화적 상대주의를 꼽는다. 이 글에서도 이런 특징을 갖는 넓은 사상 체계를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을 쓰겠다.

 

 

3.

저자들은 책 서문에서 남용의 특징들을 지적한다.

첫째, 정확한 의미나 맥락도 모르면서 장황하게 용어를 늘어놓는 것. 여기에는 맥락에서 동떨어진 용어 사용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자연과학의 개념을 쓰면서 최소한의 개념적 근거도 밝히지 않는 것. , 개념 규정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용어를 막 쓴다는 것이다.

셋째, 무의미한 구절과 문장으로 장난을 치는 것.

 

이러한 남용에도 차이가 있다. 과학이라는 맥락에서 미묘하고 특수한 의미를 가지는 용어를 정치학이나 사회학 등 다른 영역에 섣부르게 적용하려는 시도가 있다. 이는 오류이지만 덮어놓고 매도할 과오는 아니다.

 

그러나 의미가 전혀 담겨 있지 않은 과학적 단어들로 가득 찬 무수히 많은 텍스트들은 얘기가 다르다. 이 책은 라캉, 들뢰즈와 가타리 등의 텍스트에서 과학 개념을 오남용한 부분들을 상당히 많이 그리고 길게(최대 2~3페이지 정도) 인용하는데, 이들의 글을 처음 읽는 나는 정독은커녕 눈으로 한 번 훑어보기도 어지러울 정도로 글을 읽는 데 어려웠다. 그러나 기껏 다 읽으면, 바로 저자가 대체로 한 두 문단 정도로 반박해버리니, 허탈했었다. 아무리 길고 장황하게 쓰더라도, 기본을 갖추지 못한 글은 아주 간단하게 논파당한다.

 

저자는 학문의 발전에 있어서 기본적이면서도 필수적인 지적 합리성과 지적 정직성의 규범을 지키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에서 분석의 대상이 되는 일군의 사상가들의 철학 전체는 아닐지라도 일부분, 혹은 핵심적인 부분에 있어서 비합리성과 지적인 비정직성이 발견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식으로 과학 개념을 오남용하고, 지적인 비정직성을 보였는가? 12장 에필로그에서 소칼과 브리크몽은 진정한 학제 간 연구가 이루어지기 위한 몇 가지 고언을 적었는데, 이 고언들을 반대로 풀이하면 정확히 이 책에서 분석하고 있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문제점이 된다. 그중 몇 개를 옮겨 적겠다.

 

(1) 자기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똑바로 알고나 하라.

(2) 난해하다고 해서 반드시 심오한 것은 아니다.

(3) 과학은 텍스트가 아니다. 즉 과학 이론이나 개념은 일상적 뜻과는 미묘하지만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며 이론과 실험의 복잡한 거미줄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기에 이를 과학 외 영역에 적용하려면 그만큼 신중해져야 한다.

(4) 자연과학을 흉내 내지 말라.

(5) 권위에 기대는 논증을 조심하라.

(6) 모호하면 언제든 발뺌할 수 있다.

 

, 라캉, 보드리야르, 들뢰즈 등은, 자기가 쓰는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들이 박학할지언정 전문 용어를 정확한 개념으로 쓸 정도의 지식은 없었다. 자연과학을 흉내 내면서도 과학적 개념들을 어떤 맥락적 고려도 없이 자의적으로 의미를 규정하고, 혹은 아예 정의 자체를 내리지도 않으면서 논의를 전개한다.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이의 엄밀한 검증에 너무도 초보적이고 빈약한 이들의 텍스트들은, 아무런 의미도 담고 있지 않으면서 그 모호함과 난해함 덕분에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다. 그럼에도 그들의 알맹이 없는 난해함은 그들의 명성과 함께 심오함으로 인식된다.

 

가령, 라캉은 위상학에 관심을 쏟았는데, 그는 수학의 이론을 자신의 정신분석학에 연결하는 작업을 수행하면서도, 일단 수학 이론과 개념을 잘못 내리는 오류를 벌인 것을 넘어, 그 연결 자체도 자의적이거니와, “그 연결을 정당화하는 개념 장치나 경험적 자료를 털끝만큼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칼과 브리크몽은 라캉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라캉의 글은 시간이 흐를수록 문법을 무시하고 단어들을 끼워 맞추는 장난을 일삼으면서 수수께끼의 도가 점점 심해졌다. 이것은 상당수의 종교 텍스트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라캉을 따르는 제자들은 그 텍스트를 우러러 받들면서 주해를 달았다.”

 

빈약한 주장을 그럴싸하게 만들기 위해서 과학 용어를 동반하는 학자가 라캉만은 아니다. 이리가레이는 유체역학에서 발생하는 물리학적, 수학적 문제들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담론은 애매모호한 유추에만 의존하는데, 게다가 그 유추라는 것도 실재하는 유체의 이론과 이미 정신분석학에서 유추로 쓰이는 유체의 이론을 마구 섞어놓았다.”

 

보드리야르는 카오스같은 과학 용어 본연의 의미와 맥락을 완전히 무시한 채 남용하는데, “게다가 과학 용어 자체도 엉성한 비과학 용어와 함께 섞여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보드리야르의 철학을 덮고 있는 번지르르한 말의 베니어판을 걷어냈을 때 거기에 과연 무엇이 남아 있을지 우리는 자묵 의심스럽다.” 문예비평에 자주 인용되는 들뢰즈와 가타리 역시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과학적 전문어를 남발한다.

 

그런데 이들의 지적으로 태만한 학문적 태도가 진짜 문제되는 것은, 자신들은 과학 용어를 남용하면서 정작 과학은 수없이 많은 신화이야기또는 사회적 구성물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 상대주의다. , 이러한 과격한 상대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엉뚱하게 과학철학의 주제를 이용하는 촌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인 불성실함과 상대주의를 큰 특징으로 가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은 필연적으로 반지성주의라는 사회적 악폐를 불러들인다는 것이 저자들의 판단이다. 또한 사회적 악영향으로는 무지몽매함을 떠받드는 문화적 혼동”, “정치적 좌파의 약화를 들고 있다.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게 글을 쓰고, 본인도 잘못 알고 있는 전문적 개념을 남발하면, 당연히 지식 공동체 학문적 발전에 해악을 끼치고, 반지성주의를 조장한다. 또한, 상대주의적 태도는 불평등이나 인종차별, 성차별 같은 사회에 실재하는 악의 문제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게 한다. 정치적 좌파는 주류 담론을 명확히 분석하고 탈신비화할 줄 알아야 한다.

 

 

4.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플라톤이 주는 교훈과 크게 다르지 않다(물론 맥락은 다르지만).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처럼 자의적으로 용어를 남발하면, 어떻게 합리적인 토론이 가능해지며 학문의 발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비합리성과 지적 비정직성의 풍조가 만연하면, 논의의 자리는 그저 의 향연이 될 뿐이다. 플라톤은 이를 적극적으로 막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개념은 적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쓰자(내가 대학교 수업에서 가장 많이 지적당했던 것도 이 부분이었다). 그리고 이해하기 어렵고 전문용어를 잔뜩 쓴 글이라고 무조건 심오한 주장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이 상당히 강한 어조로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을 비판했지만, 소칼과 브리크몽이 포스트모던 사상의 긍정적 부분까지 부정하는 것이다. 다만, 그 악영향이 너무 클 뿐이다. 여기서 거론된 사상가들과 그들의 텍스트가 그럼에도 여전히 읽을 가치가 있는지 아닌지는 순전히 이 책을 읽고 난 뒤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적어도 나는 부정적인 쪽이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들의 책은 읽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되고 지식계는 당연히 치열한 논쟁이 이어졌다. 알라딘 리뷰에서도 이 책에 대해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부정적인 의견 대다수는 이 책의 주장을 꼼꼼히 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저자들이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에게 내린 평가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지적으로 부정직하고 비합리적인 태도에 대한 경고는 새겨들을 만하다. 한 공동체 전체에 그런 경향이 생겨나면, 사회는 반지성주의로 흐르고 흐리멍덩한 개념 때문에 학문 연구도 발전할 수 없다는 지적도 수긍할 만하다.

 

과학이라는 이름만 빌려 자신의 주장을 펼치려는 지식 사기꾼들은 지금도 있을 수 있고, 언젠가 또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사기꾼들에게 대응할 수 있는 무기와 도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한 번 읽어볼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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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가방 2021-06-26 1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일단 리뷰도 정말 잘 쓰시는데요 ㅋ

김민우 2021-06-26 18:1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 그치만 아직 노란가방 님과 비교하면 한참 부족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인용문이 많아서 허들이 다소 높지만, 읽어볼 책인 것 같아요!

noomy 2021-07-05 16: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이 책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과 출신의 자부심(?)으로 과학을 까는 상대주의자,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자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통쾌하면서 희열감까지 느꼈죠^^; <지적 사기>에서도 언급된 내용이지만 철학은 그 대상이 인간이며 가치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면, 과학은 그 대상이 자연이고 사실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각자의 이야기만 하면 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어쨌든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직도 유효한 것 같습니다. 인문학에서 과학적 개념이나 용어를 무분별하게 오용 및 남용하는 태도는 분명 경계해야 될 것입니다. 하지만 소위 과학전쟁이라 불리던 시대 과학 상대주의를 대변하던 과학 철학자(과학 지식사회학)들의 문제 제기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번 느끼지만 늘 흥미진진한 주제로 글을 재미있게 잘 쓰시는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김민우 2021-07-05 22: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
이 책을 아주 인상 깊게 읽으셨군요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개념을 제대로 알고 쓰자는 겸손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려면 해야 할 공부의 양이 더 늘어난다는 것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ㅋㅋ 공부는 하면 할수록 더 공부할 범위와 분야가 늘어난다는 이 신비
 
마을로 간 한국전쟁 -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
박찬승 지음 / 돌베개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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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한국 현대 정치의 출발조건을 형성하였다.

 

한국전쟁이 출발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전쟁이 한국 사회 정치에 결정적 계기들을 남겨놓은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계기들이란 분단체제의 고착화, 국시로서의 반공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 파행적 헌정, 강력한 권위주의적 국가의 탄생, 그리고 미국과의 예속적 관계 등이다.

 

당장 멀리 갈 것 없이 현대 한국 정치에서 가장 파장이 크고 영향력 있는 프로파간다가 '친일파''빨갱이' 논쟁이라는 점, 그리고 얼마 전 김일성 자서전 출간을 둘러싼 논쟁을 상기해보자.

 

공산주의권의 침략이라는 전쟁의 형태가 심은 공산권에 대한 공포, 1950년 이전 체제형성기 때부터 존재했던 남한과 북한간의 이데올로기적 대립(구체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vs. 공산주의, 여기서 우리는 민주주의와 반공의 결합이라는 역사적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 체제 내 적대 세력 혹은 아웃사이더들을 모조리 배제했던 부()의 통합(negative intergration)의 완결. 이러한 세 측면에서 한국전쟁이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상흔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거시적 차원에서 한국전쟁의 영향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라면, 저자 박찬승은 미시적 차원에서 한국전쟁을 분석한다. 이 책은 다양한 마을의 사례를 채록하여 마을간에 대립과 갈등, 학살 양상을 집중분석하였다. 한국전쟁은 전자사보다도 후방에서의 민간인 희생자 규모가 훨씬 더 컸다. 이는 미군 국군 북한군의 전시 학살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마을과 마을 사이의 집단적 학살이 잦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전쟁 이전 각 마을 공동체가 안고 있던 불만과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전쟁이 발발하자 학살이라는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형태로 불만이 폭발했다고 주장한다. 그 문제들이란 단순히 지주-소작인이라는 계급적 갈등만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며 또 복잡했다.

 

계급 갈등에 더해 기독교도와 사회주의자 간의 이데올로기/종교적 갈등, 평민 동성마을과 양반 동성마을 사이의 신분제적 갈등, 보복으로서의 학살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쌓인 원한과 울분이 전쟁이라는 가치 전도의 상황을 맞아 상호 학살로 이어졌다. 그것은 전선에서의 전투와 또 다른 의미에서의 '내전'이었다.

 

여기에 국가가 개입함으로써 학살은 더욱 극단적인 양상으로 번졌다. 민간인 학살의 불씨가 된 것은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었다. 그리고 인민군 치하에서 인민재판에 의한 처형이 시작되면서 민간인의 학살 개입이 시작되었다. 인민군 철수 시에 빚어진 대량 학살은 북쪽의 국가권력이 지시한 것으로, 여기에는 민간인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그리고 다시 국군과 경찰이 들어오면서 이번에는 남쪽 국가권력의 묵인하에 민간인들이 개입된 학살이 진행되었다. 이처럼 민간인들의 대량 학살에는 구체적인 지시든 아니면 묵인이든 국가권력의 개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 북조선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은 마을 공동체가 품고 있던 갈등의 틈을 잘 비집고 들어가 이를 이용했다. 인민군이 머슴과 같이 마을의 하층민과 소외 계층을 동원해 인민재판을 실시했다는 사실은 국가 어떻게 미시적 갈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이다. 그 결과, 전쟁을 거치며 마을 공동체는 더더욱 체제 속으로 편입되어 갔으며, 이러한 국가 권력의 미시적 침투가 미친 거시적 영향은 앞에서 얘기한 대로이다.

 

한국전쟁이라는 "난폭한 교사"(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브루스 커밍스가 지적한 것처럼, 한반도에 산적한 문제 중 그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심화시키는 역할만 했다.

 

전쟁 중 끔찍한 학살의 기억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다. 서로를 죽이기까지 했던 마을들은, 일부 화해한 마을도 있지만, 현재까지도 어색한 기류가 존재하고, 마을에서 추방당했던 어떤 가족은 조상의 묘가 있음에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하기도 했다. 서슬 퍼렇던 독재 시대에서 북이나 좌익에 협조했던 사람들은 당시의 기억을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 금기시했으며, 현재도 그분들은 당시의 일을 증언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아픈 상처를 다시 들쑤시기도 싫고, 자신의 증언이 후손에게 미칠 악영향이 두려워서이다.

 

전쟁의 기억은 사람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전쟁은 잊고 싶으나 잊을 수 없는, 그렇다고 기억하기도 괴로운 유령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그리고 우리 안에 남아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그 유령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끈질기게 한국 사회와 사람을 괴롭혔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마을 공동체의 상호학살, 전쟁 이전의 갈등들을 학살까지 가게 만든 전쟁이라는 상황, 이를 이용한 국가권력. 이러한 곤혹스러운 과거가 우리를 짓누른다. 하지만 이 기억을 제대로 인식하고, 충분히 성찰할 때, 그 유령의 망령으로부터 벗아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기억해야 할 역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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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가로서 읽어볼만한 일본사 서적을 틈틈이 정리하는 나는 한 가지 불만이 있다. 


바로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 일본에 대한 서적들이 한국에 출판된 일본사 서적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본의 근대란 메이지유신부터 일본국 헌법의 제정으로 제국 일본 체제가 무너진 1947년까지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겠다.


에도 시대, 전국시대, 고대 일본에 대한 서적은 매우 적다. 

사실 한국에 일본근대사 서적이 많은 이유를 추측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근대'는 단순히 하나의 시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근대는 역사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하나의 가치 척도의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근대란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로 여겨지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식민지 경험에 대한 기억까지 합해져, '근대화'에 실패하고 근대적 개혁을 이루지 못한 조선은 '열등'하다는 식의 논리가 깊게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사에서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일본은 애증의 대상이다. 한편으로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폭력적인 지배를 행사한 악의 축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짧은 시간 안에 근대화에 성공하여 강대국으로 성장했다는 일본에 대해 선망의 정서가 공유되고 있다. 이처럼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은 특별하다.


왜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했고, 일본은 성공했을까. 이 문제야말로 일본 근대에 대한 한국의 비상한 관심의 근원이다.



 














이런 점에서 박훈의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는 제목에서부터 한국인의 관심을 끄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저자 박훈 선생은 '근대'를 절대적 가치로 두지 않는다. 그렇지만 생각해볼 문제는 이런 제목의 저변에는 어떠한 배경과 인식이 깔려 있는지다.


일본의 근대는 어떻게 성립되었는가에 대한 관심은, 메이지유신으로 시작하여 근대 일본의 체제와 문화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진다. 이는 구체적으로 번역과 근대 천황제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난다.

















또 다른 관심사는 일본의 침략주의적 행보이다. 야스카와 주노스케는 후쿠자와 유키치를 기본적으로 침략주의자로 규정짓고, 그러한 관점에서 후쿠자와를 맹비난하고 일본의 역사관, 나아가 마루야마 마사오 같은 이들도 비판한다. 정일성도 책은 그러한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저작들이다.

대개 이런 책들은 근대 이후 일본의 역사를 '침략'과 '제국주의'로 특징짓는데, 이 역시도 일본을 바라보는 한국의 시선이 투영되었다 할 수 있다. 


참고로 야스카와와 정일성의 책은 추천하지 않는다. 너무 편향적이기도 하며, 너무 '침략'이라는 결론을 강하게 내린 상태에서 책을 썼기에 다양한 논의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리기 때문이다.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러일.청일전쟁>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는 읽을만하다.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일본이 노골적인 침략 행보를 보였기에 그 시작점인 청일전쟁과 경복궁 점령은 정리해볼 역사이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시기부터는 일본 자체보다는 일본의 한국 지배 양상과 총독부의 정책을 다룬 책이 더 많다. 혹은 일본은 어떻게 패망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책.











































일본에 대한 한국의 관심이 몰려 있다 보니,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고대 일본이나 19세기 이전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을 뿐더러, 실제로 서적도 얼마 없다. 특히 한국에서 그렇게 이름이 많이 알려진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오다 노부나가는 각각 전기가 한 종씩 있을 뿐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예 소설 <대망>을 제외하고는 신뢰할 수 있는 책을 볼 수 없다. 심지어 전국시대 전체에 대한 서적은 거의 찾아볼 수도 없어, 그나마 몇 년 전에 이계황 선생 덕분에 지적 공백이 채워질 정도였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더 특이한 현상이 하나 더 있다. 바로 1947년 이후의 일본 현대사를 다룬 책은 근대와 대조적으로 적다는 것이다. 근현대사 통사 책을 제외하고, 몇 권 나열해보자. 근대와 대비하여 현대에 대한 이러한 상대적 무관심은 무엇이 원인인 것일까.








이를 생각해보기 전에, 근대 이전 일본의 역사에 대한 한국의 대략적인 인식부터 봐보려 한다.

19세기 이전, 조선과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통해서 교류를 했다. 흥미로운 그 통신사에 대한 한국의 인식이다.


"지난 3년에 걸쳐 우리는 조선통신사의 행로를 더듬어 가며 뱃길이 머무르던 곳, 발길이 닿았던 곳마다 오롯이 남아 있는 당신들의 긍지와 애국심을 하나씩 수습했다. 그때마다 목이 메어오는 감격을 누를 수가 없었다. 조선통신사가 중첩되는 어려움을 견디며 평화의 터를 다지고 문화의 향기를 흩뿌리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단선적이었을까를 생각하자 숙연해지는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

<조선통신사 옛길을 따라서 3> 표지글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요청으로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 년간 열두 차례 파견되었던 조선의 문화 사절단입니다. (....) 아이들은 조선통신사의 여정을 통해 세계 속 우리나라의 위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자국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와 일본의 역사/문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배우게 됩니다." <조선통신사 - 평화를 전하는 발걸음>


이상의 두 인용문에서 보이는 인식은 시사적이다. 두 책은 조선통신사를 일종의 문화사절단으로 그리고 있는데, 이는 조선이 일본보다 문화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전제가 깔린 인식이다. 


한국이 비록 근대화 이후에는 일본에 밀리고 지배까지 당했지만, 원래는 일본보다 더 강국이었다, 백제와 가야가 일본의 문명을 발달시켜주고, 조선도 문화사절단을 보내 일본을 발달시키려 했다, 그럴 정도로 뒤쳐졌던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한국과 중국을 제치고 유일하게 자체적 근대화에 성공했을까? 이러한 발상이 은연 중에 있는 것은 아닐지..


여담으로,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은, 어디까지나 조선과 한국만의 생각이다. 애초에 어쩌다 한번 가던 통신사로 일본 사회에 변화가 생겼을리가 없다. 같은 시기에 일본은 조선의 문약을 비웃었으며, 조선의 유학에 대해서도 일본이 더 낫다는 미묘한 대결심리를 보여주었다.








중국과 대비한다면, 이러한 경향이 한층 뚜렷하게 보인다. 중국 근대사 관련 서적이 적은 편인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 한국인의 관심사는 중국 고대사 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는 공맹, 노장, 묵자, 한비자 등 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 사상가들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이고, 또 사마천의 <사기>나 나관중 <삼국지> 등의 영향으로 보인다. 우리는 고대 중국의 선각자들에게서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지혜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이들의 책을 읽음으로써 그 지혜를 배우려 한다.
















반대로 일본에 대해서는 그런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당장 일본 사상가 중에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유명한 인물도 (후쿠자와 유키치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없거니와, 근대 일본에 대한 관심도 실용적 수준에서 머물지 그들의 지혜를 배우고자 하겠다는 모습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류는 아니다.









일본 현대사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이런 심리가 아닐까? 한국이 한때는 일본에 뒤쳐지기는 했지만, 원래부터 지금까지 그렇듯이 한국인 일본보다는 더 우월한 국가이다, 그러니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역사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일본에게서 배울 것은 없다.


우스갯소리 중에 '전 세계에서 일본 무시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다'라는 말도 이런 배경하에서 나온 말로 생각할 수 있겠다. 예전에는 일본을 선진국으로 보기도 했지만, 2010년대, 특히 2019년 이후로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이제 일본은 한국인에게, 한국은 일본처럼 되면 안 된다는 반면교사이자 새로운 군국주의로 나아가려는 도상 위에 있는 과거부터 이어져온 원수이다.


 책이 어떤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 먹고 살려고 책을 만드는 출판 자본은, 책을 팔기 위해 사람들이 관심 가질 법한 책을 만든다.


즉, 일본에 대한 한국의 인식은 출판시장을 보며 대략 감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구체적 분석 없이 편견 가득한 인상론과 책 목록만 보고 한 영양가 없는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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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6-24 14: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본에 관해서 읽어보기 전에 이 페이지를 참고하면 좋겠네요! 상대적으로 일본은 우리 나라에 관해 열심히 연구한다고 들었는데 우린 특정 시기에 치우친 것이 아쉬워요. 그런 것들부터 극복하면 어떨까 싶어요. 🤔

김민우 2021-06-24 21:22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그리고 더 다양한 주제가 나와야 할텐데 말입니다.. 우선 그런 책을 내도 적자 볼 일은 아니라고 출판사를 안심을..(?)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일본의 관심사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한국은 왜 이렇게 일본을 싫어하는가? 이런 식으로요

북다이제스터 2021-06-24 19: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궁금한 사항인데요, 일본은 개항 시점이 아니라 일찍이 1500년대부터 근대화되어 훨씬 앞서 갔다고 하는데요, 맞는지요?

김민우 2021-06-24 22:17   좋아요 2 | URL
정확히 어떤 주장인지 알지 못해서 대답을 드릴 수 없겠지만 일본의 근대, 동아시아 근대에 대한 주장을 몇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동아시아에는 근대가 없다. 이때 근대란 서양식 근대를 가리킵니다. 이런 입장에서는 19세기 서양과의 접촉을 통해서야 근대가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둘째, 동아시아에도 근대가 있었다. 여기서도 근대는 서양식 근대입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마루야마 마사오는 오규 소라이 같은 사상가를 분석 하면서 일본도 서양식 근대의 맹아가 발견된다고 보았습니다. 물론 그의 이런 견해는 그의 제자 와타나베 히로시에 의해서 전면 부정당했습니다. 최근 견해는, 오규 소라이는 근대적 사상가가 아니라 완전 반근대적 사상가라는 것 입니다.

마지막도 동아시아의 근대를 주장하는데, 이때 근대란 서양식 근대를 전혀 참고하지 않은, 동아시아 독자적 근대를 의미합니다. 최근 출판된 <동아시아를 발견하다> 저자 쑹녠선 같은 경우가 이런 경우입니다. 그분은 16세기, 임진전쟁 예수회의 선교 만주 굴기 등으로 근대 라고 부를만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근대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의견이 달라져서 확답은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은 동아시아로 분류되는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특이한 역사적 과정을 거쳤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네덜란드와 교류로 난학 등도 발달하고 서양의 정보와도 단절되지 않았고요. 이런 것이 조선과 비교하자면, 훨씬 나았던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1-06-25 11:02   좋아요 1 | URL
우문에 현답을 주셨습니다. ^^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궁금한 점이 해소 되었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

김민우 2021-06-25 16:31   좋아요 1 | URL
부족한 답변임에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저보다는 더 도움이 될 책을 몇 권 소개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ㅎㅎ

16세기 일본에 대해서는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은
김시덕 일본인 이야기 1 입니다
그리고 쑹녠선의 동아시아를 발견하다도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근세 일본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상업 사회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하야미 아키라의 <근세 일본의 경제발전과 근면혁명>이 좋습니다. (사실 이 책말고는 없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초딩 2021-06-30 0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이지유신에 대해 읽고 싶었는데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책들도요 :-)

김민우 2021-07-01 15:22   좋아요 0 | URL
좋은 독서 되시기를 바랍니다 ㅎㅎ 제 마이리스트 <일본사>에 더 정리되어 있으니, 그쪽도 봐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처음에 몇몇 또는 하나의 형태로 숨결이 불어넣어진 생명이 불변의 중력 법칙에 따라 이 행성이 회전하는 동안 여러 가지 힘을 통해 그토록 단순한 시작에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우며 한계가 없는 형태로 전개되어 왔고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는,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장엄함이 깃들고 있다. - P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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