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1
에드워드 크레이그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드워드 크레이그는 이 책에서 철학을 직접적으로 정의하는 대신 철학의 기본 주제들을 풀어 설명한다. 그는 철학의 주제를 크게 세 가지 물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나는 누구인가?”로 정리한다. 이 책이 다른 철학 입문서와 다른 점은, 이런 주제에 접근할 때 철학 원전을 해설하여 철학자의 사유를 독자들이 맛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철학이란 무엇이며, 대학교 철학과에서는 무엇을 배울까? 비록 나는 전문적으로 철학을 배운 사람은 아니지만, 철학에 관해 아는 것은 철학자의 수만큼 철학의 정의도 다양하다는 것이다. 또한 철학이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배우는지도 답하기 쉬운 질문은 아니다. 하지만 동서양 변함없이 꾸준히 철학의 주제가 되는 것이 있다. 저자는 이 주제들에 집중하여 독자들에게 철학을 소개하고, 철학으로 안내한다. 저자는 우리 모두가 이미 철학자라고 주장한다. 왜 그런가?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질문들을 어느 정도 숙고하며 살기 때문이다.

 

저자가 제시한 철학의 3가지 근본 주제는 각각 윤리학, 인식론, 그리고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의 영역이다. 더 풀어서 말하자면, 윤리학은 어떻게 살아야 올바르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그리고 인식론은 우리가 뭔가를 안다고 할 때 우리의 앎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다룬다. 마지막 질문은 라는 존재, 더 나아가 인간이라는 존재란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이 물음은 동물과 같은 비인간 존재나 신에 대한 사유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시대가 아무리 지나도 변하지 않는 물음들이다.

 

저자는 1장에서 철학에 대한 일반론을 전개하고, 2~4장에서는 철학 고전을 촘촘히 읽어나가면서 각 주제를 세부적으로 살핀다. 저자가 참조하는 책은 플라톤의 <크리톤>, 흄의 <기적에 관하여>, <밀린다팡하>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 바로 이 점인데, 나이젤 워버턴 등의 다른 철학 입문서에서는 이 책처럼 철학 원전을 풍부하게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7흥미로운 저작들에서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헤겔의 <역사철학강의> 서론,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 등을 소개한다. 이 장들을 읽으며 철학 원전을 통해 철학의 주제에 사유하는 법을 배울 수 있고, 무엇보다 앞으로의 더 깊은 공부를 위한 읽기의 본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와 역자가 제시한 더 읽을거리도 요긴하다.

 

이 책에 따른다면, 철학이 무엇이냐고 할 때 윤리학, 인식론, 존재론의 근본 물음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철학이 이런 주제들에 답하려는 학문이라고는 하나, 유념해야 할 점은 철학은 정답을 내놓지 않으며, 답을 얻을 수 있는 사유 과정에 조언한다는 것이다. 철학적 주장이 아니라 사유를 배운다는 점에서 우리가 이 책과 철학 서적을 통해 정말 배울 것은 철학함일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21-09-15 1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교유서가 민우님 덕에 알게되었고 굉장히 신뢰합니다.
접근법이 좋네요 ㅎㅎ 저도 철학과에서 뭐 배우는지 궁금해서요

김민우 2021-09-15 16:37   좋아요 2 | URL
네 조금 난삽해 보일 수도 있지만 되게 괜찮은 철학 입문서였습니다 ㅎㅎ
 
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리아스>에는 아킬레우스의 선택이라는 것이 있다. 아킬레우스가 다시 전장에 나가 단명하는 대신 영웅으로서의 명예를 얻을 것인지, 아니면 전장에 나가지 않고 얇고 긴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살 것인지, 이 양자택일을 아킬레우스의 선택이라고 부른다.

 

오뒷세우스의 선택이란 것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말을 쓸 수 있다면 제5권에서의 오뒷세우스의 결단에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뒷세우스는 모든 동료를 잃고 자기 혼자만 겨우 살아남아 요정 칼륍소의 동굴로 표류하게 된다. 칼륍소는 오뒷세우스에게 거부하기 힘든 달콤한 제안을 건넨다.

 

만약 그대가 고향 땅에 닿기 전에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할 운명인지 마음속으로 안다면

날마다 그리는 그대의 아내를 보고 싶은 열망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바로 이곳에 나와 함께 머물며

이 집을 지키고 불사의 몸이 되고 싶어질 거예요.” (5206~210)

 

만약 오뒷세우스가 귀향을 포기하고 칼륍소와 같이 있기를 선택한다면, 그는 어떤 고통도 고난도 더 이상 겪지 않고 불사의 신처럼 될 수 있다. 이러한 신적인 운명과는 대조적으로, 그가 칼륍소의 동굴을 떠나 고향으로 간다면, 그는 또 다시 온갖 역경을 겪어야 한다. 이미 키클롭스, 라이스트뤼고네스족, 키르케, 저승 여행, 세이렌의 유혹, 스퀼라 등을 만나 지칠 대로 지쳤던 그에게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만 참는다면 칼륍소와 함께 머문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삶이다.

 

하지만 오뒷세우스는 칼륍소의 경고와 제안을 듣고서도 자신의 가족과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택한다. 그는 칼륍소의 돌봄을 받으면서도, 칼륍소가 신적 운명을 제안했을 때도 추수할 수 없는 바다를 바라다보곤 했다.” (5158)

 

그가 동굴을 떠나겠다고 한 것은, 불사의 몸도 신적인 운명도 포기하고 인간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사실 칼륍소의 위 대사는 제안이면서 동시에 경고이기도 하다. 귀향을 선택할 경우 그에게 닥칠 험난한 운명에 대한 경고. 바다라는 공간은 불확실함으로 가득 차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불확실하지만, 오뒷세우스의 여정이 순탄치 않을 것만은 확실하다.

 

신화적 차원에서 봤을 때 동굴은 자궁을 의미한다. 동굴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은 오뒷세우스의 상징적 재탄생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영원불멸한 신의 길과 불확실한 인간의 길목에서 그는 인간을 택했고 동굴에서 새롭게 태어나 질적으로 변화하였다. 진정한 인간이 된 것이다. 이 다음부터 나오는 고난은 모두 그의 선택 때문이다. <오뒷세이아> 1권에서 제우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고통은 자신의 행위로 결정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운명까지 감안하여 오뒷세우스는 귀향을 감행한다. 이때 그의 말은 자못 감동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집에 돌아가서 귀향의 날을

보기를 날마다 원하고 바란다오. 설혹 신들 중에

어떤 분이 또다시 포도줏빛 바다 위에서 나를 난파시키더라도

나는 가슴속에 고통을 참는 마음을 갖고 있기에 참을 것이오.

나는 이미 너울과 전쟁터에서 많은 것을 겪었고 많은 고생을 했소.

그러니 이들 고난들에 이번 고난이 추가될 테면 되라지요” (5219~224)

 

그는 많은 것을 겪었고 그는 많은 고생을 했다. 겪었고 했다. 이것은 오뒷세우스라는 개인에게 국한시킬 수 있는 말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오뒷세이아>의 첫 행을 봐보자. 서사시의 첫 행은 전체 시의 주제와 성격을 규정하며 시의 내용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호메로스는 이 서사시를 그 사람의 이야기로 규정하며, ‘그 사람에 대한 규정은 많이도 떠돌아다녔던 임기응변에 능한이다. 호메로스가 오뒷세우스라 하지 않고, ‘그 사람이라고 한 것에 주목해보자. 많이 떠돌았다는 것은 그만큼 무수히 많은 경험을 해보았다는 의미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고통스러운 경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사람이란 당연히 오뒷세우스를 가리키지만, 이를 인간 일반으로 확장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의 삶이란 파도(‘너울’)와 전쟁터처럼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그 고난을, 그 불확실함을 온몸으로 겪고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어떻게 보자면 <오뒷세이아>는 불특정의 그 사람이 특정의 누군가, 여기서는 오뒷세우스가 되어가는 과정을 다룬 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영혼의 자기 정체성을 위한 편력인 것이다. 이 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이 그대들은 인간들 중에 뉘시며 어디서 오셨소? 그대의 도시는 어디며 부모님은 어디 계시오?”이다. 이 말은 그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었을 때,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고향, 자신의 부모,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생각했던 것 같다. 오뒷세우스는 파이아케스족으로부터 이 질문을 받았으며, 그간의 모험담을 얘기한다. 이 모험담에는 그의 험난한 귀향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어떤 고난을 경험했는지 얘기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혔던 것이다. 오뒷세우스에게서 고통은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였다.

 

그런 의미에서 오뒷세우스의 선언은 고통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이며, 오뒷세우스의 모험은 고통이라는 인간의 조건을 겪겠다는 여행이다.

 

그 이후로도 오뒷세우스는 산전수전 다 겪고 나서야 고향에 도착한다.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가족을 괴롭히고 재산을 축내는 구혼자 무리를 모두 무찌르고 페넬로페와 만나면서, 올 것 같지 않았던 귀향도 드디어 완결된다. 하지만 그의 겪음은 끝나지 않았다. “여보! 우리는 아직 모든 고난의 끝에 도달한 것이 아니오.” (23.247) 이는 다르게 말해 고통은 인간의 조건이기에 인간으로 살아갈 동안에는 고난이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겪음은 끝이 없다.

 

<오뒷세이아>의 모험은 인간의 조건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여정임과 동시에 고난의 여정이었다. 낯선 곳으로 가게 될 때, 또는 불확실한 상황을 마주치게 되었을 때 누구나 그것을 피하고 싶어하지만, 오뒷세우스는 그러지 않았고, 당당히 그 불확실한 여정을 받아들여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오뒷세우스적 인간을 말할 수 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여 겪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막시무스 2021-09-14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디세우스의 선택이란 표현이 너무 좋네요! 오뒷세이아 페이퍼의 끝판왕을 보았습니다! 즐건 하루되십시요!ㅎ

김민우 2021-09-14 13:5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막시무스님도 좋은 하루 되십시오!

그레이스 2021-09-14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경의 야곱과 같은 인물, 머리좋고 용맹하며 정의감도 있으나 약삭빠르고 때로는 비겁해서 동료의 미움을 사기도하고 적을 이롭게 하기도 하고 타인을 수치심에 죽게하기도 하는...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 확장할수 있겠죠?!
그가 그런 기지로 자신의 인생을 잘 헤쳐나갈것 같았지만
안개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섬들과 갑작스럽게 거세게 덥치는 파도들, 그에게 알수없는 분노를 품은 괴물과 요정 그리고 신들은 그의 귀향을 막아서죠!
모든 소망이 사라진것 같을때 너무나도 순식간에 소원의 항구, 고향 이카타에서 잠이 깨는 장면은 ....
참! 인생이란 이런거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럼 그가 변했을까요?
복수의 과정에서 번득이는 기지는 한발자욱만 넘어서면 과거의 오딧세우스의 모습이고, 오히려 음흉해보이기까지 합니다 ㅋ
사람은 인생이란 파도에 휩쓸리고 깎여도 변하기 쉽지 않은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넘 길었네요
저는 여기에다 왜 이렇게 긴 글을 쓰고 있는지...!
김민우님 리마인드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막시무스 2021-09-14 12:17   좋아요 0 | URL
오뒷세이아 관련 최고의 댓글 인증합니다! 여정이 두꺼워서 두렵기도 하지만 다시 이타카까지 항해하고 싶어지네요!ㅎ

그레이스 2021-09-14 12:19   좋아요 1 | URL
다시?
터키에서 이타카로 가는 여행 하셨어요?
와~ 👍

막시무스 2021-09-14 12:20   좋아요 0 | URL
아니구요!ㅋ 다시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이타가가 종점이 아니었나요?ㅋ

그레이스 2021-09-14 12:22   좋아요 1 | URL
ㅎㅎ
두꺼워서 를 못봤네요ㅋㅋ
다시 보실때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실 거예요^^

김민우 2021-09-14 13:57   좋아요 0 | URL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정말 오뒷세이아와 오뒷세우스를 통해서 인간과 삶의 많은 부분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ㅎㅎ 다시 읽으면 또 새로운 부분이 보일 것 같습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희극, 비극, 역사극, 그리고 로맨스 이렇게 4가지로 분류하는데, 그 분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이런 극을 문제극이라고 부른다.

 

<베니스의 상인>은 희극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문제극까지는 아니더라도 <십이야><한여름 밤의 꿈>과 비교하면 비극성도 띤다는 것이 눈에 띈다. 여러 커플의 결혼과 변장과 오해 등이 있으면 희극의 요소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베니스의 상인>은 포샤-바사니오와 그라치아노-네리사가 결혼하고, 안토니오 재판 때 포샤와 네리사가 남장을 하고 법정에 개입하니 이 극을 희극이라고 하는 데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극의 중심에 샤일록을 놓게 되면 이 극은 셰익스피어의 다른 비극과 비교해도 될 정도로 비극성이 발견된다. 샤일록은 <베니스의 상인>에서 딱 다섯 장면에서만 등장하지만, 그 존재감은 안토니오나 포샤보다도 연극 전체를 압도하고 지배한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모든 희극에서 단 둘뿐인 베니스의 이방인 캐릭터다. (다른 한 명은 오셀로이다. 또 다른 이방인 캐릭터 오셀로의 배경도 베니스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샤일록의 이국성(foreignness)이야말로 그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샤일록 자신의 불행한 운명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초등학생 때 국어 교과서에서 편집된 <베니스의 상인>을 읽었을 때는 샤일록은 단지 무고한 안토니오의 살을 취하려는 악당이고, 포샤는 지혜로 그를 구해준 선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원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극은 선인과 악인이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2004년에 개봉한 마이클 레드포드 감독의 영화 <베니스의 상인>은 샤일록에 포커스를 맞추어 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열렬한 셰익스피어 작품의 애호가이자 전설적 배우인 알 파치노가 샤일록을 연기했다. 샤일록의 입체적인 성격과 면모가 알 파치노의 명연기와 만나, 샤일록의 감정에 더 공감하며 볼 수 있었다.

 

영화는 17세기 베니스의 반유대적 정서를 설명하며 시작한다. 기독교도가 절대 다수인 곳에서 유대인은 멸시와 무시의 대상이었다. 베니스에서 유대인들은 따로 격리된 구역에 살아야만 했으며, 그 구역에서 벗어날 때는 자신이 유대인임을 드러내는 표식(모자 등)을 지녀야만 했다. 별다른 이유 없이 베니스인은 유대인에게 침을 뱉었다. 그런 차별과 모멸을 견디며 샤일록은 살아왔다.

 

유대인을 무시하고 경멸한 베니스인들, 특히 안토니오에 대해 샤일록은 깊은 원한과 적대감을 직간접적으로 보인다. “저자가 거룩한 우리 민족을 증오하고, 또 욕까지 퍼붓는다구, 상인들 대부분이 모이는 거기가 어디라고 욕을 퍼붓나 나한테, 내 거래에, 그리고 내 정당한 이익에 저자는 이자라고 하더라만. 저주받을지어다, 우리 종족, 내가 저자를 용서한다면 말이지.” (13, 번역은 김정환 역)

 

그리고 이 대사는 꼭 영상으로 봤으면 하는 장면이다. 31장에서 샤일록의 울분에 찬 대사이다. 알 파치노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이 대사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안토니오의 살을] 낚싯밥으로 쓰겠소. 다른 아무 먹이도 되지 않으면 내 복수심 더러 먹으라면 되죠. 그는 날 모욕했소, 그리고 50만 이상 손해를 보게 했다구. 내 손해를 비웃고 내 이익을 조롱하고, 내 민족을 경멸하고 내 거래를 방해하고, 내 친구들 우정을 식게 만들고, 내 적들 증오를 뜨겁게 달궜어, 그런데 그 이유가 뭐냐? - 내가 유태인이라는 거지. 유태인은 눈이 없소? 유태인은 손이 없소, 내장이, 체형이, 감각이, 애정이, 열정이 없소? 기독교인과 마찬가지로, 같은 음식 먹고 같은 무기에 부상당하고, 같은 겨울에 춥게 지내고 같은 여름에 덥게 지내는 거 아니오? 당신네가 우릴 찌르면 우린 피가 안 난답디까?” (31)

 

안토니오가 바사니오를 위해 3천 더컷을 빌리려 하자 샤일록은 그에게 한 가지 계약 조건을 덧붙인다. 그것이 그 유명한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하면 1파운드의 살을 잘라 낸다는 것이다. 샤일록은 차용증을 작성하여 이 계약을 정식으로 체결한다. 베니스의 이방인으로서 그는 일종의 복수를 기행한 것이다. 그런데 이 복수의 방법이란 것이, 자객을 보내서 안토니오를 암살하는 것이 아니라 베니스의 법률에 의거하여 법적인 효력을 갖춘 계약서를 통해 그를 죽이는 것이다.

 

샤일록의 행위 동기는 안토니오에게서, 그리고 베니스에서 그동안 받았던 모욕에 대한 복수인데, 그 방법은 베니스의 법인 셈이다. 4막 재판 장면에서 안토니오의 대사를 보면 이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사실 1파운드의 살을 담보로 하는 계약이란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무효이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샤일록은 합법적 절차를 통해 베니스의 법으로써 베니스인을 죽이고자 했다는 것이다.

 

제가 그에게 요구하는 살덩이 1파운드는 비싸게 산 것이라고요. 그건 내 거예요. 난 그걸 갖겠다는 겁니다. 그걸 가로막는다면, 당신네들 법이란 거 개판이오. 베니스 칙령도 아무 쓸모 없소.” (41)

 

샤일록은 끝까지 베니스 법에 기대어서 자신의 잔혹한 복수의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했다. 비천한 신분의 샤일록은 법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보였다. 베니스에서 아무런 권리도 누릴 수 없었던 그가 유일하게 요구한 권리는 법의 공평무사함이었다. 그리고 안토니오와 재판을 담당하는 공작도 샤일록의 주장에 자비를 간청하거나 도덕적 비난만 했을 뿐 누구도 법의 공정성에 입각한 샤일록의 주장을 반박하지 못했다. 안토니오의 대사를 봐보자.

 

안토니오: 합법적인 수단으로는 아무래도 저를 그의 앙심 영역에서 빼낼 수가 없으므로, 저는 맞세울 수밖에 없어요, 저의 인내를 그의 분노에” (41)

 

하지만 샤일록의 계획은 남자로 변장한 포샤에 의해 꺾이고 만다. 포샤는 처음에는 샤일록의 편을 들어주는 듯했으나, 살을 잘라 낼 때 절대 피 한 방울도 흘리면(계약은 어디까지나 ’ 1파운드이므로) 샤일록은 베니스의 법에 따라 사형에 처하며 그의 재산은 베니스 공국의 국고로 몰수된다고 선고한다.

 

그게 법이오?” (41)

 

이 어처구니없는 판결 뒤집기에 샤일록이 뱉은 외마디 한마디이다. 베니스 법의 공정성에 호소하던 샤일록의 계획은 바로 그 법률에 의해 좌절되었다.

 

포샤는 계속해서 선언한다. 이방인 샤일록은 베니스인 안토니오의 목숨을 해하려 했으므로, 그의 재산 중 절반은 안토니오에게, 나머지 절반은 베니스로 몰수되었다. 한순간에 거지꼴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포샤는 그가 완고하게 법의 집행만을 원했다는 것을 이유로, 샤일록이 뒤늦게나마 바사니오가 가져온 6천 더컷을 가져가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손해는 손해대로 보고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었다.

 

안토니오는 여기에 두 가지 조건을 더 단다. 하나는 샤일록이 죽으면, 샤일록이 그토록 증오하던 기독교도와 도피 결혼한 샤일록의 딸에게, 양도된 샤일록의 재산 반을 상속하겠다는 것, 그리고 둘째로 샤일록이 기독교도로 개종하는 것. 이리하여 샤일록은 복수의 기회도, 재산도, 딸도, 평생의 종교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간신히 목숨만 겨우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알 파치노의 절륜한 연기는 이때의 샤일록이 느꼈을 비참함과 허망함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포샤의 최종 판결 직전까지 그렇게 당당하던 샤일록은 양도증명서에 서명할 기력조차 남지 않은 노인이 되었다. 재판장을 나가는 그의 힘없는 뒷모습은 왠지 모를 동정심을 유발한다.

 

그는 분명 딸과 하인에게조차 무자비하고 잔인했으며, 포악하며 목적을 위해 수를 가리지 않고 매우 탐욕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게 동정을 갖게 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유태인은 눈이 없소?”라며 인간의 평등함을 강력하게 역설했던 그의 울분 가득한 주장. 그리고 샤일록의 파멸 과정과 원인이다.

 

4막의 재판은 안토니오와 그 친구들에게는 승리이지만, 샤일록에게는 파멸이었다. 그는 이 재판을 겪음으로써 상징적으로 죽었다. 그런데 이 재판 자체가 석연찮다. 포샤는 본래 법률과 아무 관련도 없는 인물로, 그녀에게는 판결을 내릴 자격이 없다. 변장하고 신분까지 속인 그녀가 재판을 좌지우지한 것부터, 이 재판은 일종의 사기극인 것이다. 결국 그가 믿었던 법의 공명정대함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의 복수는 그가 베니스의 이방인이었던 한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이게 법이오?”라는 샤일록의 말은 어느 말보다 비극적이다.

 

원작을 보든, 영화를 보든, 재판이 끝난 뒤 포샤-바사니오 커플의 행복한 후일담은, 샤일록의 초라한 뒷모습에 가려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한쪽의 승리와 다른 한쪽의 파멸이 교차되어 불편한 조화만이 남는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1-09-08 0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김민우 님!

김민우 2021-09-08 09:5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다락방님 좋은 하루 되세요

초란공 2021-09-08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오랜 차별의 역사와 세계의 금융과 정계에서 세상을 게임판으로 만드는데 주축이 되고 있는 모순적인 유대인의 위치를 떠올려봅니다~^^

김민우 2021-09-08 10:01   좋아요 1 | URL
이제는 유대인의 위치가 많이 달라졌죠.
초란공님, 좋은하루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1-09-08 1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민우님과 비슷한 느낌을 받은것 같아요. 어릴 때 읽었을때와 최근에 다시 읽었을때의 샤일록에 대해서~~
그 느낌을 어찌 이리 조목조목 잘 설명해 주셨는지 감탄하게 됩니다.
명쾌하고도 깊이 있는 해석, 감사합니다^^

김민우 2021-09-08 19:4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 ㅎㅎ 부족한 글 좋게 봐주셔서.
어제 본 좋은 영화 (<베니스의 상인>) 한편이 좋은 자극을 준 덕분인 것 같습니다 ㅎㅎ
 
랍비 예수와 함께 성경 읽기 - 예수님의 방식으로 다시 읽는 성경 랍비 예수 2
로이스 티어베르그 지음, 손현선 옮김 / 국제제자훈련원(DMI.디엠출판유통)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경은 기본적으로 21세기 대한민국과 매우 이질적인 시대와 공간에 사는 독자들을 상정하며 쓰인 책이며, 그들에게 익숙한 비유와 형식을 갖추었다. 근원적 역사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원 청중과 현대의 우리 사이에 놓인 문화적, 시대적, 역사적 간극을 메우고 그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적 관점에서, 즉 성경의 텍스트가 놓인 역사적 배경과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

 

성경을 히브리적 관점에서 읽기 위해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가? 먼저는 성경이라는 텍스트가 속한 시대와 국면이다. 이것은 정경 형성사나 고대 이스라엘과 중동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도 의미하겠으나, 히브리인의 성경 읽기 방식도 역사적 배경에 들어간다. “구약이 저술된 시대는 구술 중심의 사회였고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반복법을 쓰며 후대의 사건을 선대의 사건에 비추어 묘사함으로써 상호 연결점을 강조했다.” 후대의 사건을 선대의 사건에 비추어 해석하는 회고적 관점의 읽기는 구약을 신약의 예표로 보며 미래만 들여다보는 해석과는 상이하다. 랍비들은 방대한 배경지식을 토대로 패턴과 선례를 끄집어내어 구약 안에서일어난 후대의 사건과 선대의 사건이 어떻게 반복되고 공명하는지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를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役事)와 섭리가 어떻게 임할지 고민했던 것이다.

 

또한 히브리인은 공동체적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였다. 성경의 메시지는 대부분 개인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있을 전체 공동체를 향해 설파되었다. 구약의 율법, 이스라엘의 절기, 안식일 등은 집단주의적 문화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이 말은 곧 오늘날의 개인주의적 문화에서 기독교인이 성경을 읽고 적용할 때는, 그것이 오직 나에게만 내리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 다음으로, 히브리어 자체의 성격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히브리어는 약 8천 개 정도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로 인해 히브리어는 하나의 단어가 맥락에 따라서 매우 다층적인 의미로 쓰인다. 본문에 제시된 히브리어 단어 예시들과 함께, 부록에 포함된 성경 공부에 유익한 히브리 단어 30를 익히면, 이 책을 덮고 성경을 읽을 때 요긴할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어에는 추상어가 별로 없다. 그렇기에 히브리어 저술은 추상적 명제 논증 대신 구체적인 비유와 예시가 많이 등장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두 일상의 경험에 뿌리를 박은 비유를 통해서 제시되었다. “예수님은 구체적이고 회화적인 메타포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논점을 입증하시는 아주 히브리적인 방식으로 정교한 신학을 하셨다.” 성경에서 헬라식 연역적·추상적 논증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런 특징은 신약에서도 크게 변하지 않아 추상어 사용에 익숙했을 바울의 서신에서도 종종 히브리어의 깊고 풍성한 색감이 묻어나오며 저자의 본토 억양이 드러난다.”

 

우리와 매우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 생산된 텍스트를 정확하게 읽기 위해서는 여러 준비가 필요한데, 그것이 성경처럼 시간적 시대적으로도 차이가 크면 준비 과정이 더욱 지난해진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을 거쳐도 우리가 히브리인처럼 성경을 읽기란 영원히 불가능한 과제이다. 하지만 적어도 대강의 밑그림 정도는 그릴 수 있겠다. 최소한 시대착오적 해석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본문은 그러한 읽기를 연습하는 데 요긴하고, 본문 읽기가 끝나면 책 말미에 수록된 더 깊이 읽기를 위한 묵상 질문도 밑그림 그리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마 전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전 세트를 구매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무슨 책인지도 모른 채 수능 끝나고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봤는데,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정말 너무 좋은 책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서양예술사 기본 서적이니, 가급적이면 전부 읽고 정리해보려 한다.


현재 1권 제3장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읽고 있다. 

이 장에 그리스 비극을 설명한 부분이 있는데, 

개략적인 설명이더라도 그리스 비극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설명인 것 같다. '비극'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비극이야말로 아테네 민주제의 특색을 가장 선명하게 나타내는 예술이다. 아테네 민주제의 사회구조가 내포하는 갖가지 모순을 이만큼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표현한 예술장르는 없을 것이다. 비극은 그 외적 형식 즉 일반대중을 위해 공연되었다는 점에서는 민주적이지만, 그 내용 즉 소재가 된 영웅전설과 영웅적 비극적 생활감정이라는 점에서는 귀족적이었다."


즉, 민주제 시대 고대 그리스는 사실 정치/문화적으로 귀족적 관습과 파토스에 더 익숙했다. 

그러면 비극이 상연되던 극장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하우저에 따르면, 극장은 선전기관이었다.


"축제 극장은 도시국가가 가진 가장 효과적인 선전시설이었다. 따라서 도시국가가 그 운영을 시인들 마음대로 하도록 맡겨놓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비극시인들은 실상 국가의 녹을 먹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작품을 제공하는 사람들이었다....비극은 경향문학이었고, 또 그외의 것으로 평가받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당대의 현실정치를 다루었고 항상 귀족국가 대 시민국가의 관계라는 당시의 가장 절박한 문제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문제만을 주제로 삼았다."


현대와 고대 그리스의 정치관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은, 고대 그리스인은 정치와 실생활의 구분이 없었다는 것이다(정치와 정치학이 독립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마키아벨리 이후이다). 그러므로 "실생활이나 정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연극이라는 관념은 당시의 예술관으로 보면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스 비극은 가장 좁은 의미의 '정치극'이었다."


다시 말해 그리스 비극은 정치적 질문들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전제로 하고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봐보자.



안티고네: :

오오, 내 친아우인 사랑하는 이스메네야,

오이디푸스에게서 비롯된 수많은 재앙 가운데

제우스께서 우리 생전에 이루시지 않은 것을

너는 한 가지라도 알고 있니? 고통과 재앙,

치욕과 불명예 가운데 내가 너와 나의 불행에서

보지 못한 것은 한 가지도 없으니 말이다.

하거늘 방금 또 장군님께서 도시의 모든

백성들에게 무슨 포고를 내리셨다는 거니?

알고 있니? 아니면 너는 적들이 받아야 할 재앙이

우리 친구들을 위협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니? (<안티고네>, 1~10행)


안티고네는 처음부터 '적'과 '우리'를 구분하면서 대사를 시작한다. 

적은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인가? 

적과 우리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이며,

적과 친구의 구도는 어떤 원리에 의해서 어떻게 연결되는가?

31~32행 안티고네의 대사에서 이를 파악할 수 있다.


안티고네:

크레온 님이 우리 두 오라버니 중 한 분은 후히 장사지내되

한 분은 장사지내지 못하게 하셨단다. (31~32행)


안티고네:

그분이 이리로 오신다는데, 이 일을 그분은

가볍게 여기시지 않고, 조금이라도 그 명령을

어기는 자는 시민들이 돌로 쳐서 죽이게 하셨대.

네 처지가 이러하니, 이제 곧 보여주게 되겠지.

네가 네 가문에 걸맞은지, 걸맞지 않은지를. (34~38행)


갈등의 원인은 안티고네의 두 오라버니, 폴뤼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의 시신 매장이다. 에테오클레스는 법과 규범에 따라 장사되지만, 장군(archon) 크레온의 명령에 따라 폴뤼네이케스는 장사도 지내지 못하고 애도조차 지내지 못한다. 폴뤼네이케스 장사 금지령에 대한 안티고네의 반박 근거는 혈연, 즉 가족윤리에 있다. 법과 같은 규범은 안티고네의 입각점이 아니다.


안티고네와 대립각은 세우는 크레온은 국가주의자, 규범주의자이다. 그의 첫대사를 봐보자.


크레온:

한데 그분의 아들들이 서로 치고받는 가운데

서로 형제의 피로 물든 채 죽고 죽이는

이중의 운명에 의해 한날한시에 죽은 까닭에,

이제는 내가 고인들의 가장 가까운 인척으로서

왕좌와 모든 권한을 갖게 되었소이다.

한데 통치와 입법으로 검증받기 전에

한 인간의 성격과 심성과 판단력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170~177행)


크레온:

(...) 그리고 누구든 조국보다 친구를

소중히 여기는 자 역시 나는 경멸하오.


크레온은 통치와 입법으로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내면과 심성도 통치와 입법으로 검증할 수 있고, 규범으로서 다스릴 수 없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생각을 더 확장하면 크레온은 국가에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국가주의적 사고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여기 두 가지 가치관이 대립하고 있다.

하나는 크레온으로 대표되는, 외부 세계의 궁극적 실체로서 국가와 규범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국가와 인간이 만든 규범 이전에 혈연으로서 맺어진 원초적 관계와 감정(친밀감 등)을 중시하는 안티고네의 입장이 있다.

국가주의/규범주의 윤리와 가족주의 윤리가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이다.

두 입장의 대립은 결국 올바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크레온:

(안티고네에게) 너는 긴말 말고 짤막하게 말해보아라.

너는 그러지 말라는 포고령이 내려졌음을 알고 있었느냐?

안티고네: 알고 있었어요. 공지사항인데 어찌 모를리 있겠어요?

크레온: 그런데도 너는 감히 포고령을 어겼단 말이더냐?

안티고네: 내게 그런 포고령을 내린 것은 제우스가 아니었으며,

 하계의 신들과 함께 사는 정의의 여신께서도

 사람들 사이에 그런 법을 세우시지 않았으니까요.

 나 또한 한낱 인간에 불과한 그대의 포고령이

 신들의 변함없는 불문율들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그 불문율들은 어제오늘에 생긴 게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고,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446~456행)


올바름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은 결코 화해될 수 없음을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이 대화만 봐도 알 수 있다. 필멸의 인간이 만든 명문화된 규범(크레온). 불멸의 신이 만든 불문율(안티고네).

아마 이 연극을 실제로 봤을 당시의 관객들은 두 입장 중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혹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자체가 당대에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이슈를 다루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개인은 국가의 법과 정치 지도자의 명령을 어디까지 복종할 것인가? 국가의 권한은 어디까지 정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크레온은 오만방자하게(hybris) 장군으로서 자신에게 허락된 권한의 범위를 넘으려 했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자신의 아들 하이몬과 아내 에우리디케가 자살한 것이다.


결국 무엇이 올바른가? 그리고 국가 논리의 균열 지점은 어디인가? <안티고네>가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주제로 참고가 될 수 있는 책들을 몇 권 정리해본다..

마사 누스바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헨리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카를 슈미트, <정치적인 것의 개념>

카를 슈미트, <파르티잔>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1-09-03 09: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옆에 꽂아 놓고 틈틈히 참고하는 책이예요
구판과 개정판이 섞여서 5권^^
시대마다 요구되어지는 올바름이 다르죠.
페이퍼 넘 잘 쓰세요

김민우 2021-09-03 11:59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구판과 신판이 다 있으시군요 ㅋㅋ

막시무스 2021-09-03 11: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의 이 책에 관한 리뷰가 계속 이어지길 응원합니다!ㅎ 구판으로 2권까지 봤다가 신판이 나와서 1권을 다시 구입했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대기중이네요!ㅠ.ㅠ

인간의 법 VS 신의 법 사이에서 갈등에 관한 안티고네를 보면서 당시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어떤 느낌이 었을지 궁금해 집니다. 즐거운 불금되십시요!

김민우 2021-09-03 12:02   좋아요 3 | URL
앗 더 열심히 읽겠습니다 ㅋㅋ 아마 지배층은 크레온 응원하고 피지배층은 안티고네 쪽에 더 공감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ㅋㅋ

초란공 2021-09-03 11: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리뷰 기다리겠습니다~ ^^

김민우 2021-09-03 12:02   좋아요 3 | URL
시간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읽고 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