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흥 -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탐색한 초기 기독교 성장의 요인
로드니 스타크 지음, 손현선 옮김, 이현수 감수 / 좋은씨앗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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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초기 기독교의 성장을 사회학적으로 탐구하였다. 이 책에서 탐구하는 주제는, 기독교 개종 과정에서 인적 네트워크의 역할, 초기 기독교의 계급적 기반, 헬라파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기독교 개종,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고대 지중해 세계와 달리 혁명적으로 높았다는 점, 혼란스러운 도시에서 기독교의 메시지가 사회적으로 미친 영향력, 순교, 기독교의 배타성과 조직성 등이다. 이 모든 과정을 검토한 저자는 기독교 성공에는 교리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결론 짓는다. “기독교 성공의 핵심 요소는 교인들이 무엇을 믿었는가?’였다.”

 

저자에 따르면,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는 1~4세기 그레코-로만 문화권에서 매우 혁명적이었고, 당시 사회의 문제점에 적절한 해답을 제공해주었다.

 

기독교 교리의 독특성과 혁명성은 바로 고도로 사회적인윤리강령을 종교와 결부시켰다는 데 있다. 몇 가지 사례를 추려보자


기독교의 사랑과 선행의 가치관은 로마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역병 때 큰 위력을 발휘했다사랑의 행위야말로 신의 뜻이며,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구제의 의무를 실천하며 살았다. 레위기 1918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를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으로까지 규정한 바 있다. 151년과 265년의 절망적인 전염병 상황에서 이와 같은 기독교인의 선행과 가치관은 더욱 두드러졌다.

 

하지만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발상은 다른 종교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고, 매우 낯선 발상이었다. “로마인은 구제에 대해 무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구제는 신을 섬기는 일과 무관했던 것이다.” 유피테르는 윤리적 의무를 지시하거나 요구한 적이 없다. 로마 종교의 사제나 신도는 신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신에게 무관심하거나 의례를 어긴 것만 염두에 둘 뿐 윤리적 의무는 종교적 관심사가 아니었다. (우리는 여기서 <신국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 종교의 비윤리성을 비판했던 것을 상기할 수 있다.)

 

이는 율리아누스의 국가적 구제 기구 설립 시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로마의 황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인의 구제 활동을 견제할 만한 구제 기구를 설립하고자 했으나, 그의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의 구제 사업은 나는 내 형제를 지키는 자다’, ‘남에게 대접받기를 바라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되다와 같은 기독교의 가르침의 씨앗이 결실을 맺은 결과다. 그러나 4세기 율리아누스의 시대에 와서 기독교의 거대한 구제 사업을 따라잡으려니 이미 너무 때늦었던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가치관과 교리는 재앙의 상황에서 기독교인의 훌륭한 대처로 이어졌고, 그 결과는 기독교인의 윌등히 높은 생존률이었다. 이것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는, 기독교인의 구호 활동으로 이교도 개종자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개종 없이도 기독교인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윤리적 강령은 로마의 잔인한 문화에도 새로운 도덕 관념을 제공했다. “기독교인은 잔인성과 쇼 관람 둘 다 정죄했다. ‘너희는 살인하지 말지니라고 터툴리안은 독자들을 일깨웠다. 그리고 경기 관람이 일반화되자 기독교인은 이런 경기를 관람해서는 안 된다고 금했다. 더 중요한 점은 기독교인이 이교도가 관습적으로 가볍게 행하는 잔인성과는 전적으로 양립 불가한 도덕적 비전을 효과적으로 선포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기독교는 로마 도시에서의 계급 간 격차/인종 분열을 완화하고 혼란스러운 도시에 미래 지향적 가치와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제시했다. 당대 로마 도시는 높은 인구 밀집도와 비위생성으로 인해 질병의 온상이었으며, 도시의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지역에서의 신착자가 지속적으로 유입되어 사회적으로 불안정하였다. 무엇보다 자연재해도 빈번히 일어나는 상황이었는데, 다른 종교나 철학의 가르침은 적절한 위로의 메시지를 주지 못하였다. 기독교는 더 우월하게 이러한 사태에 대응하고 이들 도시의 삶을 재활성화했다. 이렇게 볼 때, “선교사들이 가져온 것은 단순한 도시 운동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그레코-로만 도시의 삶을 더 잘 견뎌낼 수 있게 하는 새로운 문화였다.”

 

저자는 사회학적 이론과 분석 틀을 이용하여 역사적 맥락과 신학적 교리의 맥락을 적절하게 잘 조화시킨다. 이 책을 통하여 초기 기독교사에 관심 있는 이는 저자의 방법론과 주장 면에서 신선한 지적인 자극을 받을 수 있고, 자신의 신앙을 시대적 올바름과 조화시키려는 기독교인이라면 긍정적인 도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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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독서계획
클리프턴 패디먼.존 S. 메이저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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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정의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확실한 것은 고전이라 불리는 책은 평생을 함께 가는 책이라는 것이다. 고전을 읽는 것은 며칠이나 몇 달이 아니라 몇 년 계획을 세우고 천천히 읽어내려가는 것이다. 저자의 말을 인용해보자.

 

이 책들을 읽는다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체험이며, 꾸준한 내적 성장의 원천인 까닭이다. 그래서 제목을 평생 독서 계획이라고 붙였다. 이 책들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길동무이다. 한번 당신의 내부에서, 외부에서, 그리고 대인관계에서 꾸준히 작용한다. 우리가 친구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 서두르는 법이 없듯이, 이 책들도 서둘러 읽어서는 안 된다. 이 리스트는 단번에 슥 훑어보는그런 리스트가 아니다. 엄청나게 풍요로운 의미가 담겨 있기에 평생에 걸쳐서 캐내야 하는 광산 같은 것이다.” (10p)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고전을 읽으려는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길잡이이며, 독서 계획 지도서이다.

 

이 책에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셰익스피어의 희곡처럼 유명한 서양 고전뿐만 아니라 <논어><맹자>, 나츠메 소세키와 미시마 유키오 같은 동양 고전도 수록되어 있으며, <바가바드기타> <샤나메> 같은 작품도 소개하고 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서양 위주로 편중되었다고 불평할 수 있으나, 고전이라고 하는 작품은 동서양의 구분을 넘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하기에 큰 흠은 아니다.

 

200자 원고지 11~12매 분량에 저자의 생애, 대표작, 작품의 특징, 간단한 논평, 영향력 등이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 있어 설명이 지나치게 소략하다거나 깊이가 얕다는 느낌은 받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입문서답게 전혀 어렵지 않아 고전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재미있게 술술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난해하기로 소문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그리고 너무나 양이 방대하여 진입장벽이 높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등 어려운 작품들을 어떻게 읽을지 구체적인 지침도 내려준다는 것이다.

 

분량은 역자 후기까지 포함하여 500쪽이 넘어 앉은 자리에서 읽기는 과중하다. 대신 처음에는 통독하고, 다음부터는 손 닿는 대로 틈틈이, 관심 가는 작품이나 작가부터 차분하게 여러 번 읽으면 좋겠다.

 

평생 독서 계획은 독자가 스스로 고전 작품을 읽을 때 저자의 본래 목적을 성취한다. 참고문헌에는 영역본과 함께 역자 이종인 씨가 국역본도 함께 제시했으니, 마음 가는 작품 골라 저자가 일러준 사항을 염두에 두며 직접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처음 보는 이름들이 많다고 절망하지 말자. 어차피 독서란 평생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고전 해설서가 아니다. 독자로 하여금 고전의 세계로 안내하는 책이며, 처음 길을 나서는 이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지도와 방향을 제시해주는 책이다. 양과 질적인 면에서 모두 탁월한 이 책을 통해 평생을 함께할 만한 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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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블룸은 <오셀로>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오셀로>란 작품은 우리들에게 이 선택, 즉 현실의 명확한 인식 위에 기초한 비열한 삶이냐, 아니면 거짓 위에 서 있고 비극으로 끝나는 고결한 삶이냐의 선택을 제시한다.” (<셰익스피어의 정치철학>, 93p.)

 

여기서 현실의 명확한 인식 위에 기초한 비열한 삶은 이아고를 말하고, ‘거짓 위에 서 있고 비극으로 끝나는 고결한 삶은 오셀로와 데스데모나를 지칭한다.

 

블룸의 이러한 평가는 <오셀로>에 대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는 생각을 뒤흔드는 평가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악인 이아고의 계략에 의해 오셀로가 질투심에 불타올라 선량한 부인 데스데모나를 살해하는 이야기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 얘기에서 언뜻 데스데모나는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보이는데, 앨런 블룸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데스데모나와 오셀로의 사랑조차 의심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블룸의 분석과 평가는 <오셀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사항들을 알려준다. 데스데모나는 정말로 아무 죄 없는 비련의 주인공인가? 아니라면 그녀의 비극의 원인은 무엇인가? 데스데모나와 오셀로의 관계는 무엇에 근거했는가? 그리고 극에서 이아고가 수행하는 진정한 역할은 무엇인가?

 

셰익스피어의 비극 속에서 파국은 비극적 주인공의 성격으로부터 직접 유래한다.” 이 원리에 따라서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성격을 드러내는 부분에 집중해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오셀로는 열등감으로 괴로워하는 인물임을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작품의 배경인 베니스에서 흑인에 나이도 많고 심지어 이슬람 지역인 무어 출신이다. 베니스에서 그는 이방인이다. 하지만 의외로 그의 대사에서는 열등감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부분은 없다. 그는 첫 등장부터 과도하게 자기를 과시하며 등장한다.

 

오셀로: 해볼테면 해보라지.

내가 베니스 공국에 해 준 일이 얼만데

그의 불평쯤은 파묻힐걸.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

그걸 자랑하는 게 명예라면,

공표하도록 하지 - 나는 태생과 핏줄이

왕족이다, 그리고 받을 만하다,

다른 장식이 없어도, 내가 얻게 된

이 자랑스러운 행운을. (12)

 

오셀로는 베니스 공국을 위한 자신의 영웅적 헌신과 무어에서의 왕족 혈연을 내세웠다. 이러한 것 때문에 그는 자신이 이 사회에서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며, 자신의 가치를 확신한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이야말로 그가 베니스의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소외감과 열등감을 암시한다.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사랑하게 된 이유를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인정욕구가 강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오셀로: 그녀는 내가 겪어 온 위험들 때문에 나를 사랑했소,

그리고 나는 그녀가 이것들을 측은해하므로 그녀를 사랑했지요.

이것이 내가 사용한 유일한 마법이요. (13)

 

그는 데스데모나가 자신의 위험’, 즉 영웅적 행위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그녀가 자신을 인정하고 있다는 이 느낌이 가장 중요했을 것이다. 너무나 이유가 빤히 보이는 이 사랑은, 오셀로의 대사 속에서 가장 고결한 정신적 사랑으로 치장된다.

 

오셀로: 그녀 말대로 해 주시오.

하늘에 맹세코, 내가 간청을 드리는 것은

내 입맛을 채우거나,

성욕을 달래거나 - 젊은 욕정은

내게 없어졌소 - 적당히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없이 한없이 그녀 마음을 따르고 싶기 때문이오. (13)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그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행위일 뿐이다. 오셀로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사랑이 성립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데스데모나에 대한 오셀로의 우위, 즉 그가 사랑받고 인정받을 만하다는 확신이다.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유력 귀족 가문의 아가씨의 사랑을 받는 것에서 다시금 그는 흡족함을 느낀다. 정확하게 말해 그가 사랑한 것은 데스데모나가 아니라 데스데모나의 사랑이었다.

 

데스데모나를 살펴보자. 그녀는 13장 후반부에 처음으로 등장하지만, 그 전에 아버지 브라반치오의 대사를 통해 그녀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그녀는 한 번도 당돌했던 적이 없는 처녀였으며, ‘영혼이 너무도 고요하고 조용한 얌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베니스의 부유한 가문, 즉 베니스 최상의 것을 거부하고 베니스를 초월하는 어떤 것을 사랑하고자 했다.” (앨런 블룸)

 

오셀로가 들려준 모험담은 그녀의 이런 욕구에 잘 맞아 떨어졌다. 그렇기에 데스데모나는 오셀로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거짓말을 한다.

 

데스데모나: 제가 저 무어 분을 사랑하여 함께 살기를 바란다는 것은,

저의 당돌하고 파격적인 행동이

세상 만방에 널리 고한 바입니다. 제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제 주인의 본성 바로 그것이었죠. (13)

 

데스데모나는 오셀로의 본성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뒤에서는 그분의 심성에서 오셀로라는 형용을 보았기 때문에, 즉 오셀로의 심성과 형용이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거짓말이다. 오셀로의 말에서 보았듯이, 데스데모나는 오셀로의 모험담을 듣고 그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녀가 사랑한 오셀로는 결국 그녀의 마음이 만들어낸 모험담 속 가공의 오셀로였다.

 

그녀의 말은 오셀로가 진단한 그들의 사랑과 어긋나 있다. 오셀로는 그녀가 자신이 겪어온 위험 때문에 사랑한다고 생각하나, 데스데모나는 오셀로의 심성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둘의 관계는 누군가 살짝만 건드려도 바로 무너질 정도로 취약한 토대 위에 서 있었다. 그 토대 자체가 둘의 거짓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사실 둘의 관계가 비정상적이라는 것은, 그 둘 빼고 주변 모든 인물이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던 바였다. 11장에서 오셀로에 대한 이아고의 험담, 데스데모나의 아버지 브라반치오의 분노와 경고가 모두 이를 지적하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이아고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이아고는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인물이다. 그는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고결한 사랑이 허위에 기초해 있으며, 오셀로의 과장된 자기애도 자신의 불안함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 자아임을 간파한다. 이아고는 사람들 속에 숨겨진 궁핍, 즉 그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악마는 아니다. 다만 악마적 통찰을 가졌을 뿐. 그는 이 악마적 통찰력을 가지고 오셀로의 연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그의 질투심을 유발한다. , 이아고는 오셀로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약점을 건드려 악을 현실로 구현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아고는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파악하여 절대로 다른 사람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11장 이아고는 모든 고결하고 숭고한 것들을 비웃듯이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알지, 사랑과 의무감이 아니라, 그렇게 보임으로써 내 개인적인 목적을 따른다는 걸.” 그는 타인에게 보여지는 자신과 실제 자신의 본질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아고는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허위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현실적인 이아고의 눈에는, 오셀로가 얼마나 타인의 평판을 의식하는 의존적인 성향이고 둘의 사랑이 허풍임이 뻔히 보였다. 그래서 이아고는 오셀로 안에 잠재된 열등감을 부채질한다.

 

이아고는 상황을 연출하여 오셀로의 부사관 캐시오가 데스데모나를 만나는 장면을 일부러 오셀로가 보게 한다.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본 오셀로는 데스데모나의 외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아고에게 집착하며 그의 생각을 말하라고 종용한다. 오셀로 자신의 생각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이아고로 채워넣은 것이다. 처음의 득의양양한 모습은 사라지고 타인 의존적인 찌질이 오셀로만 남았다.

 

이아고는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장군님과 결혼하면서요라고 말한다. 이 말은 브라반치오가 오셀로에게 이미 한 번 했던 말이다. 그 자리에 같이 있던 이아고에 의해서 브라반치오의 암시가 부활하여 오셀로에게 확신을 갖게 한다. 그는 이제 아내의 외도를 잠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자기혐오와 아내에 대한 배신감으로 치를 떤다. 흑인으로서의 정체성, 무어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오셀로의 자기 비하를 더 깊게 하고, 데모데모나에게 속았다는 생각에 분노한다. 처음의 자기 과시는 완전히 무너져 그는 의심의 최저점으로 떨어졌다.


결정적인 계기는 데스데모나가 실수로 떨어트린 손수건이다. 이 손수건은 오셀로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준 선물이었다. 이 손수건을 입수한 이아고는, 캐시오가 그것을 쓰고 있었다고 오셀로에게 얘기한다. 이아고의 말대로 자신이 준 손수건이 사라진 것을 안 오셀로는 질투심의 정념에 사로잡혀 아내에게 거칠고 싸늘한 태도를 보인다. 오셀로의 다음 행보는 이 지점까지 오면 하나밖에 없다. 데스데모나를 죽이는 것.

 

오셀로의 태도가 바뀐 것이 뻔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데스데모나는, 남편은 질투해본 적 없다며 별 문제 없다는 등 전혀 현실감이 없는 소리만 반복해댄다. 자신이 만들어낸 이상적인 가상의 오셀로를 현실의 오셀로에게 투영하여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셀로가 자신을 죽이기 직전까지도 당신에 대해 품은 사랑이 죄죠.”라는 철없는 말만 하여, 자신이 만들어낸 허위의 사랑의 세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겉으로 드러나는 자아가 있고, 내면의 본질적인 자아가 있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자아를 통해서 남들이 이렇게 봐주었으면 하는 식으로 자신을 꾸미기도 한다. 이는 자신의 본질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봐주었으면 하는 가상의 자아를 다시 나에게 투사시켜서 마치 그것이 나의 본질인 것처럼 삼으면, 허위의 세계에서 허우적대다 오셀로처럼 자신의 힘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채 남의 말에 끌려다니거나 데스데모나처럼 죽을 때까지 머릿속이 꽃밭인 채로 살게 된다. 이 지점이 바로 <오셀로>라는 텍스트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지점이다.

 

맨 처음의 앨런 블룸의 인용문을 봐보자. 이아고의 현실적이나 비열한 삶, 그리고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고결하나 거짓된 삶. 어느 쪽도 제대로 된 삶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아고도 파멸한다. 앨런 블룸은 이아고의 아내 에밀리아를 통해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렇게 명확한 안목을 가지고 있는 이야고도 보지 못한 한 가지가 있다. 그는 에밀리아가 진실을 위해 죽을 용의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지 못한다. 오직 진실을 위한 단순하고 꾸밈이 없는 열성의 가능성은 그의 시야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열정을 표현하는 삶은 고결할 뿐만 아니라, 바로 그 본성에 의해 기만으로부터 해방되지 않겠는가?” (<셰익스피어의 정치철학>, 9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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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7-29 23: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는 정말 다양한 해석의 왕국이군요. 오셀로의 해석 흥미진진하네요. ^^

김민우 2021-07-30 11:51   좋아요 0 | URL
다시 읽어도 늘 새로운 것이 고전의 매력이죠 ㅎㅎ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회고적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여, 삶의 모든 국면이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필연적 계기요 은총이었음을 고백하는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서이다.

 

<고백록>은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었으나(in te) 허영과 정욕에 빠져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소외된 상태(extra te)에서 다시 회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in te) 구조를 가지고 있다.

 

2614절은 이 책 전체의 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영혼이 당신을 등질 때에는 외도를 하는 것이고, 당신을 떠나서 순수하고 청정한 것을 찾더라도, 당신께로 돌아가지 않는 한, 결코 찾아내지 못합니다.”

 

이러한 구조를 염두에 둘 때, <고백록> 11장의 유명한 문장이 더욱 명확하게 이해된다. “당신을 향해서(ad te) 저희를 만들어 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을 합니다.”

 

인간의 본래적 삶은 하나님을 향해서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인간 실존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부터도 빗겨난 존재가 된다. 이러한 소외가 인간 실존이 느끼는 불안감의 근본적 원인이다. 따라서 불안과 소외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시 인간의 본래적 삶, 즉 하나님을 향한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회심을 통해서 가능하다.

 

위의 내용을 도식화면 다음과 같다.

 

1) 본래 신 안에 있는 존재(in te)

2) 신으로부터 멀어짐.

3) 회심, 그리고 신을 향해

4) 신 안에 있는 존재(in te)

 

셋째 단계를 통해 넷째 단계, 다시 신 안에 있게 된 존재는 자각적 정신의 여부에 따라 차이가 난다. , 본래 신 안에 있는 존재는, 아직 신의 존재도 신의 사랑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회심을 통해 다시 신앙으로 돌아간 존재는 자기의 의식 속에 신의 존재와 신의 사랑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첫째 ‘in te’에서 둘째 ‘in te’로의 변화는 질적으로 고양된 상태로의 변화이다.

 

10~13권은 신의 사랑을 자각적으로 인식하게 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조적 내면 성찰이 이어지고 있다. <고백록> 서두에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을 합니다라고 한 아우구스티누스는 13권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원한 생명의 안식일에 당신 안에서 쉬게 될 것입니다.” (13.36.51)

 

 

-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우리 인생길의 한중간에서

나는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기에

어두운 숲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ché la diritta via era smarrita.” (지옥 1.1~3)

(출처는 digitaldante.columbia.edu)

 

어두운 숲으로 번역된 말은 ‘selva oscura’이다. 이는 나무가 매우 빽빽하게 있는 숲을 가리킨다. 서구 사상사에서 이 말은 더 나아가서 신의 은총조차 미치지 못한, 완전히 버림받은 상태를 말한다.

 

단테가 이 단어를 썼을 때, 그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나 은총의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절망과 고통을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지냈어야만 하는 자신의 절망스러운 심정을 한 단어로 집약하여 총체적으로 보여준 이미지가 바로 어두운 숲’, ‘selva oscura’인 것이다.

 

시속의 어두운 숲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윽고 자신이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음을 깨닫게 된다. 눈을 들면,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행성의 빛살에 둘러싸인 언덕의 등성이가 보인다. 빛의 언덕은 당연히 어두운 숲과 대비된다. 그런 점에서 빛의 언덕어두운 숲의 절망과 대비되는 희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이미지는 이후 그의 저승 여행을 이끄는 동력이 된다.

 

이를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지옥> 1~3행의 상황은 본래 신 안에 있었다가 신으로부터 소외된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단테의 저승 여행 과정은 회심을 통한 질적인 고양의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안내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한 단테는 천국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가 되고, 그의 여행도 끝이 난다.

 

여기 고귀한 환상에 내 힘은 소진했지만,

한결같이 돌아가는 바퀴처럼 나의

열망과 의욕은 다시 돌고 있었으니,

태양과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 덕택이었다.” (천국, 33.142~145)

“A l’alta fantasia qui mancò possa;

ma già volgeva il mio disio e ’l velle,

sì come rota ch’igualmente è mossa,

l’amor che move il sole e l’altre stelle.”

 

 

- 르네 데카르트 <성찰>

데카르트가 살던 17세기는 일반위기의 시대라고 불린다. 기상이변,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진영 사이의 대규모 살육전 등 복잡하고 혼돈한 시대상황이 그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스티븐 툴민의 <코스모폴리스>의 한 단락을 인용해보겠다. “오늘날에는 1605~1650년의 기간이 안락한 번영의 세월이기는커녕 유럽사에서 가장 불안정했던 시기, 심지어는 광란으로 점철되었던 시기로 간주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우리는 근대과학과 근대철학을 여유와 풍요의 산물로 간주하는 기존의 견해를 따르기보다는 거꾸로 그것들을 동시대의 위기에 대한 반응들로서 취급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이러한 일반위기의 시대에 사상가들은 확실한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데카르트도 확실성의 추구라는 시대적 경향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그는 혼란한 시대에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이며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를 물었던 것이다.

 

<성찰>6개의 성찰로 구성되어 있다. 1성찰에서 그는 감각과 감각의식 등 기존의 의견에서 확실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모두 불확실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데카르트는 그 유명한 악마의 가설까지 주장하여 모든 반박의 여지를 차단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회의를 끝마친 뒤에 불안해한다. 그 어떤 참된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자신이 난국의 암흑 속에서 지내는 것은 아닐까하고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심 속에서 의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설령 유능하고 교활한 기만자가 집요하게 나를 항상 속이고있어도, ‘속는 나가 존재해야 속임수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

 

이로부터 데카르트 인간론의 제1테제를 도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정확히 말해 단지 하나의 사유하는 것(res cogitans), 즉 정신(mens), 영혼(anima), 지성(intellectus) 혹은 이성(ratio)”이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사유하는 나를 자각하는 나의 정신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것이다. 이로써 그의 회의는 종결되고, 이제부터는 자신의 발견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내가 정신의 눈을 나 자신으로 향하면, 나는 불완전한 것이고,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바라는 것임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또한 내가 의존하는 있는 것은 이 더욱 큰 것을 모두 무한정적으로, 또 가능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무한하게 갖고 있으며, 이것이 신임을 이해하게 된다.”

 

관념은 더 상위의 관념에서 유래하는바, ‘의 관념은 불완전하고 유한한 인간에게서는 유래할 수 없다. ‘의 관념의 원인은 신이다. 그러므로 유한한 인간이 완전하고 선한 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신이 실존함을 증거한다. 신의 관념 속에 완전성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악령의 속임수는 불가능하다. 사기와 기만은 결함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은 한마디로 말해 자신의 유한함을 철저히 자각한 바로 그때 신의 존재를 알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이 신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유사하다.

 

그뿐만 아니다. 그 체계적 완성도가 <고백록>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기는 하지만, <성찰>의 구조 자체도 <고백록>의 구조와 매우 유사하다. 처음에 데카르트는 외부 세계에 대해 그 어떤 확실한 것을 찾지 못해 난국의 어둠속에 있었다. 대상 세계는 의심스러운 것이기에 그는 대상 세계를 보장해주는 기제로서의 신에게로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신에 도달함으로써 대상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불안감은 없다.

 

3성찰을 마무리하면서 외부 세계를 보장해주는 신을 발견한 그의 벅차오르는 감정을 봐보자. “나는 여기서 잠시 머물러 이 완전한 신을 명상하고 그의 속성을 음미하며, 황홀감에 눈을 먼 정신이 그 힘이 닿는 데까지 이 비할 수 없는 장대한 빛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찬양하며 숭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장엄한 신의 명상 속에 내세의 더할 나위 없는 지복이 있음을 우리가 신앙을 통해 믿듯이, 이와는 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런 성찰을 통해 현세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을 누리고 있음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어둠은 사라지고 장대한 빛의 아름다움이 남았다. 의 이미지 자체도 다분히 아우구스티누스적이다.

 

<고백록> 8권 회심의 장면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구절의 끝에 이르자 순간적으로 마치 확신의 빛이 저의 마음에 부어지듯 의혹의 모든 어둠이 흩어져버렸습니다.”


 

 

-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을 자기 회피, 소외, 그리고 타락함으로 규정한다. 그가 무엇을 문제 삼는지 봐보자.

 

현존재는 원초적인 현사실적 삶의 경향, 즉 자기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경향과, 세상에 동화되면서 자기 자신을 떠나는 경향으로 인해 끊임없이 좌절을 경험한다. 하이데거는 현사실적 삶이 세계에 동화되는 과정에서 점점 더 자신에게서 낯설게 되는 한 퇴락에의 경향은 [자기 자신에게서] 낯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인간 실존의 불안과 소외는 자기 자신을 떠나는 경향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서구의 형이상학과 데카르트의 유산인 근대 인식론에 대한 거부와 비판에서도 볼 수 있다. “형이상학은 세계--존재인 인간을 앞서 규정함으로써, ‘실존혹은 현사실적 삶의 영역에서 고유한 원초적 경험이 갖는 가능성을 제거한다. 그 영역은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우리의 가장 고유한’, 즉 우리의 가장 본래적인 혹은 본연의 영역을 의미한다.”

 

세상과 동화되어 자신의 본래적 영역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발생한 인간 실존의 소외는, 따라서 다시 원초적 현사실적 삶의 경향을 회복해야 한다. 그가 현상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현상학만이 경험의 바탕을 근원적 직접성 속에서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근원적 본래성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소외되고 불안해하는 인간이 다시 본래의 영역으로 돌아가 이를 극복한다는 하이데거의 사유 구조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유사해 보인다. 물론 하이데거는 기독교의 종교적 내용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기독교 사상의 현상학적 측면과 의의에 관심을 가졌지만, 20대 중반의 하이데거는 가톨릭과 결별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키르케고르 등의 개신교 문헌을 탐독했다. 하이데거와 아우구스티누스의 관련성을 주장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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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생태환경사
김동진 지음 / 푸른역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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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에서 새로운 연구가 나오는 경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새로운 사료가 발견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생각이 나오는 것이다. 이 말을 곰곰이 곱씹으면, 우리는 역사학 연구에서 역사가가 수행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 역사가는 사료를 비판적으로 연구하면서 객관적 사실을 규명하는 한편, 동시에 이러한 실증적 차원을 넘어 역사적 맥락의 재구성을 통해 그러한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하고 밝혀내는 것이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E.H.카가 규정한 역사의 핵심(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로서의 역사)이 된다.

 

다시 말해, 역사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자의 역할은 단순히 기록된 역사를 읽고 사료의 내용을 정리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 고고학의 예시를 든다면, 새로운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당장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른 유물이나 다른 부족의 문화를 연구하여 그 용도나 사용방식 등이 규명되었을 때에야 그것은 의미 있는 고고학 연구의 재료로 사용될 수 있다. 역사학에서 사료도 고고학의 유물과 같다. 가령 정조의 <홍재전서>에 이런 내용이 있다. “근래에 개간한 화전이 푸르던 산을 온통 덮었다.” 아무 정보도 없이 이 구절 하나만으로, 혹은 정조가 이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홍재전서>에서 어떤 컨텍스트 하에서 정조가 이 말을 했는지, 그 말을 한 배경은 무엇인지, 이 구절과 비교할 만한 다른 사료가 존재할 때 비로소 이 구절은 유의미한 정보로 가공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맥락이 부여됨으로써 사료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역사가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시점을 확정하여 역사적 맥락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 속에서 사료와 역사적 사건을 위치시킴으로써 그 의미를 평가할 수 있다. 역사가가 어떤 맥락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한 사료와 사건은 전혀 다르게 평가되고 서술된다(쉬운 예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명칭에 대한 논쟁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언어로써 표현하면 내러티브적 서술 방식이 채택되며, 이는 곧 역사 서술은 발단과 결말을 가진 플롯을 통해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탁월한 역사책이란, 그저 사실을 나열하거나 밝힌 책이 아니며 설득력 있는 역사적 내러티브를 만들고 제시한 책일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내용을 전제하고 이 책을 살펴보자.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생태환경이라는 관점에서 조선 시대를 바라보았다. 저자가 생태환경적 관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공유된 역사 전통 중 대다수는 15~19세기에 새롭게 창조된 기억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기억이 생태환경을 구성하는 여러 요인의 변화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필요한 자원의 대부분을 주변 자연환경에서 얻어야 했던 사람들이 창조한 문화는 생태환경에 크게 의존하기 마련이었다.” 한반도 생태환경의 제반 특성과 변화 양상은 20세기 이전 한반도 주민의 삶을 강력히 규정하였던 중요한 요소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주목한 생태환경은 야생동물과 가축 같은 거시생태, 농지 개간, 산림과 범람원(이 책에서는 범람원 대신 무너미라는 순화된 용어를 사용), 미생물과 같은 미시생태이다. 저자는 아직 생태환경을 통해 역사를 이해하려는 연구는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자신의 연구의 새로움과 필요성을 역설한다. 따라서 이 책의 우선적 목표는 생태환경사적 방법론을 한국사에 접목한 성과를 소개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우리는 저자의 목표대로 읽는 것보다 저자가 어떠한 새로운 시각과 맥락을 서술하는지, 구체적으로 한반도의 생태와 조선 시대 사람의 활동이 어떻게 상호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저자가 이러한 새로운 역사적 관점에 걸맞은 새로운 역사상을 제시했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저자가 말하는 생태환경사란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놀랍게도 저자가 직접적으로 생태환경사 연구의 정의를 언급한 부분이 없어, 프롤로그에서 관련 부분을 모두 찾아서 요약해야 하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 생태환경사란 인간과 자연환경의 관련성을 깊이 연구하는 것으로, “자연과학 분야에서 성취된 생명 현상에 대한 이해 심화와 연구방법론의 진전을 역사학 연구에 접목하려는 시도이다. 생태환경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넘어 인간과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를 맺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비인간 생명체의 관계와 그러한 관계 맺음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적 조건에 대한 탐구역시도 생태환경사의 주제에 포함된다. 이를 볼 때, 저자는 인간에 의한 환경파괴를 의식하면서 인간과 자연환경의 균형관계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서로 관련된 내용이 많은 1~3부부터 요약해보자. 저자에 따르면, 한반도의 생태환경은 15~19세기 들어 획기적으로 변했다. 이 시기는 한국사에서 조선 시대에 해당한다. 조선 시대 들어 산림이나 야생동물의 생태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조선의 국가 운영 이념 때문이었다.

 

조선은 산림천택의 이익을 백성과 함께 누린다산림천택 여민공지(山林川澤與民共之)’의 이념을 택했다. 또한 식량을 가장 많이 생산할 수 있도록 중농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일부 국가적으로 봉금(封禁)된 지역을 제외하고는, 백성과 일반 사족이 산지와 범람원 지역으로 들어가 농지를 개간하여 살기 시작했다. 국가도 이 흐름에 합세해 천방(川防)을 설치하여 논의 면적을 늘렸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은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개와 닭이 서로 호응하여 우짖고’, ‘밥 짓는 연기가 서로 이어지는경관으로 바뀌었다.”

 

이와 같은 활동은 야생 생태계에 큰 영향을 초래했다. 호랑이와 표범과 소의 사례를 통해 그 변화 양상을 관찰해보자. 숲과 범람원을 개간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야생동물과 맞서야 했음을 의미했다. 특히 범람원 지역은 평탄하고 기름진 곳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야생동물이 서식했다. 조선 정부는 이러한 야생동물의 위협에 대응하여 “‘착호갑사(捉虎甲士)’라는 전문 군사를 양성하여 운영하였다. 지방에서도 자체적으로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군사를 두었다. 사냥의 성과를 확인하고 강제하기 위해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을 바치게 했다. 농지의 확대와 전문 사냥 군사의 활동으로 활동 영역이 점점 축소된 호랑이와 표범은 17세기 이후에는 극적으로 개체 수가 줄어 20세기 결국 멸절되었다. 5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수가 줄었던 범과 표범과는 달리 농사에 꼭 필요했던 소의 개체 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매일 500여 마리가 도살된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할 때, 조선 후기에 소는 대략 100만 마리 이상 사육되고 있었으며, 이는 조선 초기와 비교할 때 30~40배 이상 늘어났다.

 

농업 확대의 또 다른 영향력은 지리 환경의 변화이다. 조선 초기에는 주인 없는 황무지 등을 개간하여 농지 면적을 확대하였다. 그와 동시에 관개면적을 늘리는 정책에도 집중했는데, 여러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이 바로 천방, 즉 보를 쌓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가와 지방 단위 수령을 비롯하여 사족과 일반 백성도 천방을 건설하여 논과 밭을 늘려나갔다. 그러나 천방 개간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17세기 무렵에는 천변에서 개간할 수 있는 땅이 고갈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변화는 화전 개발에 불을 당겼다.” 양란 혼란 속에서 화전을 통한 산림 지역 개간은 새로운 가업 경영의 기반이 되었고, 화전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결국 19세기에는 화전으로 개간된 토지와 일반 평지의 땅과 다를 바 없다는 기록까지 등장했다.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두고, 앞에서 인용한 <홍재전서>의 기록을 다시 봐보자. 이는 화전으로 인해 황폐해진 산림 환경을 한탄해 하는 구절로 해석할 수 있다. 평지와 화전의 면적이 비슷하다는 말까지 나올 만큼 화전의 문제가 심각했다면, “화전이 늘어나고 숲이 줄어드는 만큼 종 다양성이 줄었다는 결론도 도출할 수 있다. “산림이 씻겨 내려가면서 새와 짐승들이 몸을 숨길 곳이 없어졌고, 강원도에서 많이 나던 인삼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았다.” 화전은 그 자체로 심각한 산림 파괴 문제였다.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이 책 1~3부는 어느 정도 신선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나름의 관점도 없지는 않은 듯하여 각 챕터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옴니버스식이라 구성이 다소 느슨한 것은 단점이다. 이는 목차를 봐도 알 수 있는 것인데, 저자가 체계적인 서술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그런지 유사한 내용이 여러 장에서 반복적으로 나오기도 하고, 서로 연결된 내용이 아예 다른 챕터에서 서술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도 아니라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모호하고, 저자의 서술이 그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될 가능성만 커졌을 뿐이다.

 

4미시생태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다소 잡다한 정보를 지루하게 나열하고 있다. 4부는 누룩, 김치 같은 발효 식품, 전염병 등 지엽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이들 주제를 하나로 꿰어 통일된 서사로 만들어주는 역사관이나 역사상은 부재한다. 4부에 포함된 1~3장은 각각의 내용들이 지나치게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래서일까? 된장이나 고추장 등이 과연 역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또 다른 역사상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4부의 내용은 그저 흥미로운 옛이야기로 전락하고 만다. 차라리 제4부는 일종의 부록이나 자료집처럼 이용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조선 시대의 환경과 인간의 상호 영향은 나름 잘 설명하여 한국사 연구 성과와 최근 발굴된 각종 자료를 생태환경사라는 연구 방법론으로 재결집하여 한국 생태환경사의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목표는 이루었을지 모르나, 이를 통해 새로운 역사상이나 또 다른 역사적 내러티브를 제시하는 데는 실패했다. 생태환경사라는 또 다른 역사를 추구하는 분야를 소개하면서, 정작 또 다른 역사가 없는 것이다. 단적으로 프롤로그에서도 관련된 내용을 볼 수 없다. 저자는 생태환경사 연구는 근대 과학이 확립한 방법론으로서 분석주의, 이분법, 기계론적 세계관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지향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생태환경사는 역사학을 더욱 역사학답게만든다느니,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한다느니, “새로운 역사 이해와 인간의 삶을 더욱 풍부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느니 하는 기능적 설명은 많지만, 이들 모두를 총괄하는 생태환경사의 테제는 보기 어렵다. 이러한 사실부터 저자가 체계적 저술을 염두에 두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역사학자는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니라 체계적 학자여야 한다.

 

이 책은 사서는 읽을 만한 책이다. 이 책을 사서 읽는 것은 우선 여러 정보를 정확하게 얻는다는 만족감을 줄 수 있다. 또한, 이후 저자가 더 발전된 저서를 출간하기를 기대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저자의 새로운 저서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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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북사랑 2021-07-23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김민우님 서재에 들르면, 제가 평소 스쳐 지나가도 몰랐을 좋은 책들이 새로 올라오네요^^

김민우 2021-07-23 13:5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 제 관심사가 역사 분야라 역사 책에 더 관심이 가네요